<빔비사라 왕과 위제희 부인>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곳은 부다가야Buddha Gaya라는 곳입니다.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최초의 설법지 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라와 함께 부다가야는 불교의 4대 성지로 불립니다. 붓다는 35세 때 부다가야에서 깨달아 5비구와 야사를 거느리고, 다음해 바로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Rajagriha(왕사성)로 향합니다. 라자그리하는 부다가야에서 300km 이상을 걸어야 할 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라자그리하에 가야 할 목적이 분명하였음을 말합니다. 라자그리하는 대국大國인 마가다의 수도로, 당시로서는 매우 번창한 인도 중·서북부의 중심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자그리하는 바라문들은 물론 후에 붓다께서 외도外道라고 비판한 수많은 사상가와 수행자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마가다의 왕인 빔비사라Bimbisara는 붓다와 같은 바라문에 대응하는 신흥 자유수행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기원전 543년경~491년경에 재위한 것으로 전해지는 실존인물인데, 이 사실을 기준으로 붓다의 생존연대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붓다와 빔비사라는 나이 차이가 10년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흔히 이보다 200~300년 후에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 붓다의 사리를 불탑에 봉안하여 인도 대륙에 전파하고, 인도 대륙 밖인 스리랑카에 불법을 처음 전한 아소카 왕이 현재의 불교를 있게 한 공적이 가장 크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설명을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정통 바라문과 바라문교를 따르지 않는, 새로운 출가 수행자들의 사상적 대결 구도가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바라문교 를 따르는 수행자는 바라문婆羅門(brahman)으로, 그 외의 독자적인 출가 수행자를 사문沙門(?rama?a)이라고 부르며 바라문과 사문을 엄격히 구별하였습니다. 붓다는 당연히 사문에 속하는 수행자였고, 자이나교(Jainism)의 창시자인 마하비라Mahavira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습니다. 바라문에 대항하는 이 위대한 두 인물은 활약 시기와 사상이 너무나 흡사해, 막스 베버Max Weber 같은 훌륭한 사상가도 붓다와 마하비라를 같은 인물로 착각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정치적·사상적 배경이 붓다가 라자그리하로 향할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낯선 곳인 라자그리하에 도착한 붓다는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판다라 산으로 향했는데, 판다라 산은 라자그리하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산 중 하나입니다. 빔비사라 왕과 붓다의 만남은 이렇게 판다라 산에서, 빔비사라 왕이 붓다의 처소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의문이 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붓다를 만나자 바로 왕족임을 알아챘고, 더욱 군대를 주겠다는 제안까지 합니다.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통치권’을 뜻하는 특수한 조직입니다. 빔비사라 왕은 후에 병합시키긴 하였지만, 당당히 코살라 국의 시민이라고 밝힌 범상한 인물인 고타마 붓다의 마음을 떠본 것입니다. 말하자면 잠재적으로 적장敵將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먼저 자기편으로 만들자는 속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가 진정한 수행자임을 확인한 후 가장 강력한 붓다의 후견인이 됩니다. 실제로 빔비사라 왕은 첫 번째 아내를 경쟁국인 코살라의 왕족을 택해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에 대해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이나교의 교주를 비롯한 쟁쟁한 젊은 사문들이 급증할 때에, 붓다를 이해하고 섬기고 법을 청해 들으며 후에 죽림정사라는 사원을 마련해 붓다께 기증한 사실은, 그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았고 덕분에 붓다는 연고도 없는 생소한 곳에서, 사상적 승리자로 당당히 출발할 수 있는 여건이 빔비사라 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바로 라자그리하로 향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붓다의 모험은 빔비사라 왕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완전한 성공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빔비사라 왕은 개인적으로 아주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Aj?ta?atru(阿?世) 가 반역을 일으켜 부왕인 빔비사라 왕을 왕국의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일설에는 붓다의 사촌인 데바닷다가 아자타샤트루 모반에 동참해 붓다를 살해하고, 교단을 장악하려 했다가 아자타샤트루는 성공하고 데바닷다는 실패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저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자타샤트루는 부왕을 아사餓死시키려고 식사도 제공하지 않고, 왕비인 위제희韋提希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감옥의 빔비사라 왕을 방문하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합니다. 아마 자신의 손으로 부왕을 죽였다는 소문의 확산이나 비난을 면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현명한 위제희 부인은 온몸에 우유와 꿀을 바르고 감옥을 방문해 빔비사라 왕은 상당 기간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타지마할도 구구절절한 왕과 왕비의 사랑을 담고 있지만, 이 빔비사라 왕과 왕비의 사랑은 영혼까지 함께하는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위제희 부인의 헌신도 결국은 발각이 되어 빔비사라 왕은 아사餓死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이때가 붓다께서 열반하시기 8년 전이라니, 빔비사라 왕은 늙어서 아주 모진 인생으로 삶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아자타샤트루도 붓다께 귀의하여 불교를 잘 보호하였다하니, 붓다의 위신력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합니다. 대승경전에 수없이 등장하는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 붓다가 처음 만난 최고의 권력자인 빔비사라 왕과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 그리고 위제희 부인은 이러한 기막힌 인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붓다와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공양도 자주 받으셨고요. 그런데 그의 아들인 아자타샤트루(아사세)는 왕권을 잡기 위해 친부모를 처참히 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붓다께서는 부모를 죽인 대역죄를 지은 아자타샤트루 왕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던 것으로 경전에서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후대에는 빔비사라와 아자타샤트루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전생의 인과’를 아예 경전 속에서 합리화시켜 줍니다.
부친 살해의 과보를 거론하며 붓다께서 아사세를 멀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불행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붓다의 심중이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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