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서울 출생. 호는 구보(丘甫 또는 仇甫). 193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의 한 사람으로 1930년 '수염'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광수에게 사사하였다. 1933년 이후 이태준, 이효석, 이무영 등의 예술파적 작가들과 함께 九人會의 주요 멤버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일찍이 언어에 대한 자각을 보여 작품의 형식과 기교 등에 의식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광고 전단 등의 대담한 삽입, 콤마 사용에 의한 장문의 시도, 중간 제목의 강조, 한자의 남용 등 독특한 문체를 낳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프로 문학과 같은 이데올로기 성향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또한 이효서과 같은 예술 지상주의에도 기울지 않은 채, 작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서울 서민층의 식민지 치하에서의 변모 양상을 객관적인 서술 방식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의 작품 유형은 시정(市井)에 흐르는 여러 가지 소시민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세태 소설류('천변 풍경', '성탄제' 등), 심리주의적인 수법으로 당대의 무기력한 인텔리의 생태를 그리고 있는 작품류,('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전말' 등), 신문이나 잡지의 흥미 위주로 한 통속류(광복 후의 애국 소설류 '약산의 의열단' 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천변 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행인', '골목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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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몽보(夢甫) ·구보(丘甫) ·구보(仇甫) ·구보(九甫) ·박태원(泊太苑). 서울 출생. 경성제일고보,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시 《누님》이 당선되었으나, 소설로서의 등단은 1930년 《신생(新生)》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1일》 《천변풍경(川邊風景)》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풍속소설의 측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발표한 《우맹(愚氓)》 《골목 안》 《성탄제》 등에도 비슷한 경향을 잘 드러내었다. 8 ·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작가의식의 전환을 꾀한 바 있고, 6 ·25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李泰俊) ·안회남(安懷南)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서술된 작품 외에 단편소설 《사흘 굶은 보름달》 《애욕》 《5월의 훈풍》, 장편소설 《태평성대》 《군상(群像)》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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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몽보(夢甫), 구보(丘甫, 仇甫, 九甫), 박태원(泊太苑). 1909년 1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중퇴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현대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가작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시를 썼으나, 1929년 <<동아일보>>에 소설 <해하(垓下)의 일야(一夜)>을 발표한 이후 단편 <적멸(寂滅)>, <수염>, <꿈> 등을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에 주력하였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예술파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단편 <춘보>, 장편 <임진왜란>, <군상> 등을 발표하였다. 6.25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李泰俊) 안회남(安懷南)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았느냐>,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하였다. 1986년 7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태원의 초기 소설은 문체, 기법, 주제 등에 있어서 모더니즘 소설의 여러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소설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과 같은 작품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세태소설의 측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다. 작품의 이데올로기보다는 문장 그 자체의 예술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소설적 기법을 시도하는 한편, 인물의 내면 의식 묘사를 중시하는 등 강한 실험 정신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품 경향으로 인해 박태원은 이상(李箱)과 함께 193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작가로 꼽힌다. 이 모더니즘적인 실험 정신은 <천변풍경>을 전후로 변모하여, 1930년대 말경부터는 도시의 세태와 자신의 체험을 서술한 작품과 역사 소설을 주로 발표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의 도시 세태를 세밀하게 묘사한 장편 <천변풍경>은 리얼리즘의 확대와 관련된 논쟁을 야기한 바 있다.
1909년 1월 6일 서울 수중박골(지금의 수송동)에서 아버지 밀양 박씨 용환 씨와 남양 홍씨 사이에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남. 등 한쪽에 커다란 검은 점이 있어 어릴 때 흑성이라 불리다가 열 살 때 태원으로 개명함.
1919년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 입학.
1923년 보통학교 제4학년 수료 후, 입학시험을 보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입학. <<동명>>제33호의 소년칼럼란에 <입학>이란 작문이 뽑힘.
1926년 의사인 숙부 박용남과 고모 박용일의 소개로 춘원 이광수에게 지도를 받게 됨. 제일고보 재학중이던 당시에 <<조선문단>>, <<동아일보>>, <<신민>>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
1928년 아버지 사망. 소설 <최후의 모욕>을 씀.
1929년 경성제일고보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법정대학 예과에 입학. 12월에 필명 泊太苑으로 <<신생>>에 시 <외로움>을 발표하는 한편 <<동아일보>>에 소설 <해하의 일야> 등을 연재하기 시작.
1930년 동경법정대학 예과 2학년 중퇴 후 귀국하여 <<신생>>10월호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여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함과 동시에 몽보라는 필명으로 수필 등을 꾸준히 발표.
1933년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상,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친목단체인 '구인회'에 가담하여 활동. <반년간>(<<동아일보>>), <낙조>(<<매일신보>>), <옆집 색시>(<<신가정>>), <피로>(<<여명>>), <오월의 훈풍>(<<조선문학>>) 등 많은 작품을 발표.
1934년 10월 27일 보통학교 교원인 김정애 씨와 결혼. <딱한 사람들>(<<중앙>>),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조선중앙일보>>), <애욕>(<<조선일보>>) 등을 연재.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청춘송>을 연재. <<개벽>>에 <길은 어둡고>를 발표.
1936년 <<조광>>에 <천변 풍경>을 연재하는 한편 <방란장 주인>(<<시와소설>>), <비량>(<<중앙>>), <진통>(<<여성>>), <보고>(<<여성>>) 등 많은 소설을 발표.
1940년 서울 돈암동에 집터를 마련, 새로 집을 짓고 솔가하여 이사. <<문장>>에 장편소설 <애경>을 연재.
1941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여인성장>을 연재하는 한편, 번역소설 <신역 삼국지>를 <<신시대>>에 연재함. <투도>를 <<조광>>에, <채가>를 <<문장>>에 발표.
1942년 <<조광>>에서 중국소설 <수호전>을 3년에 걸쳐 연재. 장편소설집 <<여인성장>>(매일신보사)을 출간.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피선. <<조선주보>>에 장편 <약탈자> 연재.
1947년 장편소설 <<홍길동전>> 출간.
1948년 성북동으로 이사. <<이순신 장군>>, 단편집 <<성탄제>>를 을유문화사에서 출간.
1949년 장편소설 <<금은탑>>} 출간. <<조선일보>>에 <갑오농민전쟁>의 모태가 되는 <군상>을 발표(6. 15∼1950. 2. 2)하다가 도중 하차.
1950년 6·25전쟁중 월북.
1953년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국립고전예술극장 전속작가로 조운과 함께 <<조선창극집>>을 출간.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해 작품활동 금지됨.
1960년 작가로 복귀.
1963년 '혁명적 대창작 그루빠'의 통제 아래, <갑오농민전쟁>의 전편에 해당하며 함평·익산민란 등을 다룬 대하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를 집필.
1965년 망막염으로 실명.
1975년 고혈압으로 전신불수의 불운이 겹침.
1977년 완전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을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1986년 완성.
1986년 북한 <<조선문학>>7월호에 작가가 고혈압에 시달리다 7월 10일 오후 사망했다고 발표됨.
<대표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朴泰遠)의 단편 소설집. 1938년 12월 7일 문장사(文章社)에서 간행되었다. <성탄제(聖誕祭)>, <옆집색씨>, <오월의 훈풍>, <사흘 굶은 봄ㅅ달>, <피로>, <딱한 사람들>, <전말>, <거리>, <길은 어둡고>, <비량(悲凉)>, <진통>, <방란장주인(芳蘭莊主人)>,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 모두 13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대표작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중편소설로서 일제 치하에서 살아가는 당대 문학인의 무기력한 의식에 비친 일상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이 작품이 연재될 때 이상(李箱)이 하융이란 필명으로 삽화를 그렸던 점도 유명하다. 이 소설은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가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기도 하고, 다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시찰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이상분일증(理想奔逸症), 언어도착증, 과대망상증, 지리멸렬증 등, 문득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하나의 환자임을 깨닫고 웃으며,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을 향한다. 이 소설은 1930년대 문학인의 정신구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당시 문학인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표를 제공하고 있다. 또 <성탄제>, <비량> 등의 초기 단편들에서 인물의 심리를 면밀하게 탐구하던 것과, 장편 <천변풍경(川邊風景)>에서 나타나는 철저한 관찰적 방법과의 혼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편이라는 점에서 박태원의 작품 변모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천변풍경>
1936년 <<조광>>에 3회 연재한 중편과 이듬해 같은 잡지에 9회 연재한 중편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면서 개작하여 엮은 박태원(朴泰遠)의 장편소설. 1938년 12월 30일 박문서관에서 간행되었다. 화가 정현웅이 장정을 맡았다. 연재 당시부터 최재서, 임화, 김남천 등의 비평가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아 리얼리즘과 관련된 논쟁을 야기한 바 있으며, 박태원의 창작 기법과 소설 미학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천변풍경>은 약 1년 동안 서울 청계천변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지는 서민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모두 50절로 나뉘어져 있는 이 작품에는 약 7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돈과 생활의 안정이 주는 세속적인 행복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중산충의 인물들, 가난은 숙명이며 돈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서민층의 인물들, 봉건적 인습과 남성의 억압적 지배에 의해 피해 받는 여인들, 세상의 진실과 허위를 발견하며 성장해 가는 아이들 등 다양한 인물의 생활상이 파노라마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묘사의 과정에서 서술자는 주관적 개입을 제한하고 객관적인 표상만을 제시한다. 묘사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술 태도로 인해 이 작품은 발표 당시에 "리얼리즘의 확대"라는 호평과 "파노라마적인 트리비얼리즘에 불과한 세태소설"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이 작품은 또한 도시 서민들의 세태를 총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독특한 구성을 취하여, 청계천변이라는 공간에서 사계절의 순환을 따라 전개되는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인물이나 사건의 총체성보다는 공간의 총체성을 확보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성탄제>
1937년 12월 <<여성>>에 발표된 박태원의 단편소설. 박태원이 1930년대 후반에 발표했던 일련의 세태소설 중 한 편으로 분류되곤 한다. 이 단편은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가난한 가계를 돕기 위해 카페 여급으로 일해야 했던 두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의 중심에 놓여있는 빈곤이라는 소재는 식민지 시대 소설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카페 여급이라는 작중 인물도 박태원의 다른 소설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다. 오히려 이 작품의 독특함은 서술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의 도입부는, 언니인 영이가 '너도 별 수 없었던 모양이로구나'라며 동생 순이를 비웃는 장면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어 작자는 순이와 영이의 입장에 교대로 서서, 여급생활을 둘러싼 두 자매의 갈등을 보여준다. 순이는 천한 일을 하는 언니가 남보기 창피해서 원망스럽고, 영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또 순이의 학업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는데도 불구하고 동생으로부터 받는 모멸이 못마땅하다. 서술자의 개입은 가능한한 억제된 채, 청자가 내포된 대화와 독백의 기법을 통해 두 자매의 이같은 갈등이 선명하게 제시된다. 소설은 언니를 창피스럽게 여기고 비난하던 순이가 영이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는 아이러니로 결말지어진다. 하지만, 집안으로 남자를 끌어 들여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동생을 보며 '너도 별수 없었던 모양이로구나'라고 비웃던 영이가 이내 서글픔에 눈물짓는 데서 이 아이러니는 비극성을 갖게 된다. 이 비극성의 근원은 물론 가난이다. 갈등관계에 있던 두 자매에게 아이러니칼하게도 같은 운명을 지워 주고, 그들 부모로 하여금 건넌방에서 벌어지는 딸들의 매춘행위에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은, 윤리의식보다도 앞설 수밖에 없는 생존의 논리인 것이다.
<갑오농민전쟁>
1977년에 제1부, 1980년에 제2부가 발표되었고, 작가 사후인 1986년에 제3부가 출간된 박태원의 3부작 역사소설. 신병(身病)으로 인해 후반부의 상당 부분은 구술(口述)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에 발표된 역사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이기영의 <두만강>과 함께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에 토대를 둔 이 작품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그 혁명적 성격 및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제1부는 1892년부터 1893년 겨울까지 전라도 고부군 양교리를 배경으로 하여 고부민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행해진 지배계층의 폭정과 민중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그리고 있으며, 제2부는 1894년 1월부터 세 달 동안 고부민란이 농민전쟁으로 확대되기까지 전개되는 농민들의 투쟁을 서술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농민 세력의 해체와 영웅적 인물 전봉준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오수동, 오상민 부자(父子) 등 농민 계층의 전형적인 인물의 설정, 풍부하고 세밀한 묘사 등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몇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무력투쟁의 옹호, 인물의 영웅성, 편향된 역사 의식 등의 소설적 한계 또한 노출하고 있다. 이것은 <갑오농민전쟁>이 혁명적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라 할 것이다.
1936년 10월 31일부터 11월 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최재서의 평론. 원제목은 <`천변풍경(川邊風景)'과 `날개'에 관하야-리얼리즘의 확대(擴大)와 심화(深化)>이다.
이 글은 서울 청계천 주변 서민들의 세태인정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박태원의 중편소설<천변풍경>(<<조광>>, 1936.8-10)과 고도로 지식화한 소피스트의 주관세계를 그려낸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조광>>, 1936.9)를 각각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라고 평가한 작품론이다. 최재서는 이 글에서 앞의 두 작품이 그 취재 대상에 있어서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관찰의 각도와 묘사의 수법에 있어서 공통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그들은 될 수 있는대로 주관을 떠나서 대상을 보려고 하였으며, 그 결과 박태원은 객관적 태도로서 객관을 보았고 이상은 객관적 태도로서 주관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예술의 리얼리티는 외부세계 혹은 내부세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나 객관적 태도로 진실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예술에서의 리얼리티 문제를 세계관이나 대상의 차원은 제외한 채 객관적인 관찰태도와 정확한 표현의 차원에 한정시킨 그는 <천변풍경>에서 선명하고 다각적인 도회묘사의 성과를, 그리고 <날개>에서 현대인의 분열된 의식에 대한 내면묘사의 성과를 각각 높이 평가하면서 "<천변풍경>이 우리 문학의 리얼리즘을 일보(一步) 확대한 데 비하여 <날개>는 그것을 일보 심화하였다"고 규정하였다. 작가의 객관적인 관찰태도와 묘사의 정확성을 리얼리즘의 요체로 간주하는 최재서의 이러한 리얼리즘 논의는 당시 백철, 임화, 김문집 등의 비평가들에 의해 리얼리즘 문학이 갖는 인식기능을 간과한 그릇된 견해로서 시대와 현실상황에 대한 아무런 진지한 의식과 고려도 없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강상희,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내면성 연구, 서울대 박사 논문, , 1998
박태원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경험하는 권태는 다소 피상적이다. 그것은 피로의 증세로 나타나기도 하고, 낭만적인 심리 상태인 우울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체의 목표에 무관심한 주인공이 "인생의 피로"라는 주도 동기(leitmotive) 아래 일상적 현실의 여러 현상들을 관조하고 있는 [피로]는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권태의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은 일상적 현실에 놓여 있으나, 이 일상적 현실이 "황혼"이라는 은유를 통해 피로의 징후로 파악됨으로써 주인공의 적극적인 동화를 차단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인공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개별적 현상들의 감각적이고 낯선 특성들이다. 가령 "동정에 여우털을 단 외투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 순사는 어인 까닭인지 시퍼런 코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십오 년 평생에 시퍼런 코를 흘리는 순사를 그에게서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구절처럼 사소한 현상에서 뜻밖의 놀라운 의미를 찾게 된다. 권태란 개별적인 것의 감각성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일반성 속에 용해되는 상태에 대한 심리적 반응일 터인데, [피로]의 주인공은 개별적인 것의 감각성을 재발견함으로써 권태를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발견의 방법을 통한 권태 극복의 시도는 그것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 내지 못할 때 다시 권태의 끝없는 순환으로 귀착하게 된다. 이처럼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권태는 일상적 현실의 피상성에 대한 부정이며, 목표를 상실한 자가 누릴 수 있는 개별자 체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에서도 "인생에 피로한" 주인공과 그의 친구는 일상적 현실에서 유폐되어 개별적인 현상의 한정된 영역에서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권태는 상대적인 것으로서 일상의 위력과 매혹을 받아들이는 순간 무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천변 풍경]의 예리한 관찰자인 소년 재봉이가 "그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에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일상적 현실이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흥미의 원천이 될 때 권태는 소멸한다. 이 흥미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가 부러워해 마지 않는, "명랑성"으로 가득찬 일상적 삶의 수용을 촉진한다. 박태원의 소설 주인공의 내면 의식의 강렬도가 약화되는 것은 권태의 피상성, 상대성과 관련이 있다. 내면성의 세계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전면 수용에 이르는 박태원 소설의 이행 과정은 권태의 심리적 범주가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상적 현실의 전면 수용이 권태 소멸의 궁극적 방법이라면,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박태원 소설의 주인공은 두 가지의 매개항을 만난다. 일상적 현실 이탈의 상상력인 낭만적 사랑과 교환 가치의 화신인 돈이 바로 그것으로서, 이 두 가지는 내면성과 외적 현실의 중간 지점에 있는 매개물이다. 이 매개에 대한 특정한 반응이 주인공을 절대적인 내면성으로 이끌 수도, 외적 현실을 승인하는 생활인의 세계로 이끌 수도 있다. 박태원의 소설은 이 가운데 후자에로의 경사를 보여 준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낭만적 사랑이 현실적인 가정의 형태로 인식될 때 구보의 내면은 동화의 욕망으로 기울게 되고, 못 이룬 낭만적 사랑의 회상이 구보를 자극할 때 구보의 내면에는 일상적 현실 이탈의 욕망이 강화된다. 하루 내내 경성 거리를 배회하는 구보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매개항을 중심으로 하여 내면성과 일상적 가치의 두 축을 왕복한다. 구보에 의해 회상되는 여러 가지 낭만적 사랑의 이미지와 東京의 여인에 관한 상상은 반복에 의해 유지되는 일상적 시간의 유동을 부추긴다. 그러할 때 일상적 시간은 정지되고, 현실은 구보의 내면에서 재구성된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이, 구보가 "생활"의 중요한 요건으로 생각한 현실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구보의 의식은 일상적 가치의 수용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중략>
모더니스트들은 권태의 궁극적인 해결 방법 가운데 하나를 미적 유희에서 찾는다. 미적 유희란 외적 현실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 낸 권태 넘어서기의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권태의 심리와 일상적 현실 사이에서 긴장을 조성하는 낭만적 사랑, 명랑성, 독서 등에 비해 미적 유희는 현실을 자의적 변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층 과격한 권태 파기의 방법이 된다. 이 미적 유희는 우선 자기 자신을 심미적인 상태로 변화시키려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박태원의 [수염]에서 그 단초를 볼 수 있다. 실직 지식인인 주인공이 수염을 기르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 이 소설은 사소한 일상사를 미적 차원으로 치환하여 놀라움의 원천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련의 행동을 보여 준다.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댄디즘 드러내기라 할 수 있는 이 미적 유희를 통해 박태원은 권태로운 현실의 반대 편에 자기 충족적인 자아의 상을 놓는다. [옆집 색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도 이러한 형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면성의 독립을 보증하는 행위의 일종이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이상의 보헤미안적인 삶과 소설 역시 넓게 보면 댄디즘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면의 독립성과 탁월함일 뿐 일상적 현실의 가치 체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들의 댄디즘은 단순히 고립된 주관성의 미적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일상인의 세계관에 대한 항의이자 평균적 삶을 파괴하는 마지막 영웅주의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정신적 우월성의 체현을 통해, 자본과 교환 가치가 주인이 되어 버린 근대적 현실에 대해 '형식으로서의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들의 시선은 목적 없는 심미적 시선으로 화하며, 미를 자기 자신 속에서 찾으려는 충동은 이제 보다 적극적인 유희 충동으로 전화된다.<중략>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는 유머를 수반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박태원 소설의 유머는 대개의 경우 '어떤 관념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다른 어조로 바뀌면서' 산출된다. 초기 단편인 [수염], [사흘 굶은 봄ㅅ달], [오월의 훈풍] 등을 보면 의식적으로 서술 대상이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과장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희극적인 정조를 산출하고 있다. "그 決心을 하기 전에 나는 우선 수염이 나의 얼굴에 주는 영향을 美學的 見地에서 考察하여 보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수염 하나로 하여 四面楚歌 속에서 초패왕의 끝없는 슬픔을 맛보았던 것이다." 류의 문장이 그 예에 속한다. 문어체에 적합한 단어 특히 한자어를 서술이나 대화에 빈번하게 사용하여 과장과 의뭉스러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런 경우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전후한 모더니즘 소설에 두드러진 경향이다. 이상의 소설에서 한자어가 관념을 은유적 표현하는 데 기여하는 데 반해, 박태원의 소설에서는 그것이 유머를 낳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누이], [전말] 등의 소설이 이러한 문장 유희만으로 조성된 소설이다. 문장을 통한 유희는 박태원 특유의 '장거리 문장'으로 극단화된다. [방랑장 주인]처럼 단 한 개의 문장으로 소설을 쓰겠다는 발상은 박태원의 소설 장르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진정성의 양식, 진정한 가치 추구의 양식 등의 관점보다는 언어 유희의 장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인식론적 문제들과도 관련된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명랑성"을 부러워하는 구보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생활인의 정조인 명랑성에 대한 욕망은 박태원의 소설 세계 전반에 관철되고 있는 욕망이다. 모더니즘 소설의 다소 부박한 유희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전면 수용으로 이행하게 되는 동력은 처음부터 그의 소설과 문장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이행은 내면성의 추구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승인으로 나아간 과정과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 충동은 유항림 소설의 환멸의 유희와 대칭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 중간 지점에 전도된 진정성의 원천인 이상의 루소적 유희가 있는 것이다.
#. 천정환, 박태원 소설의 서사기법에 관한 연구, 서울대 석사 논문, , 1997
박태원 서사 기법의 물적 토대라 부를만한 문장 쓰기는 어조와 감각을 살린 어휘의 선택보다 구성적 성질을 고양하는 데에 정향된 것이다. 이를 박태원과 동시대의 작가이면서 그와 다층적인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이태준의 문장관과 비교해보려 한다. 이태준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한 완성자로 일컬어지며, 1930년대 단편소설 미학의 성격과 수위를 가늠할 잣대로 평가받는 작가이다. 그러므로 30년대 순수문학의 경계에 포함된 이태준의 문장 쓰기와 문장관을 박태원의 그것과 대비해 보는 것은, 박태원의 독자적인 자리를 더 분명히 해 주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준 또한 '"文章道"(문체)를 하나의 이념적 지표로 설정하고 문체적 확립을 집요하게 추구하던 작가'로서, 박태원과 동일하게 "문예감상은 구경 문장의 감상"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태준의 문장관은 규범성과, 본원적 의미의 근대적 산문 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태준은 [소설 독본], [글 짓는 법 A B C] 등의 작법론을 거쳐 {문장강화}를 펴낸다. {문장강화}는 그 존재 자체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성질을 갖는다. 문장 쓰기와 문체가 정신을 운반하는 매체라면, 이를 제도화하고 규범화하려는 것이 "講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규범에 대해 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문장 쓰기와 관련된 제반의 방법, 즉 '퇴고의 이론과 실제', '제재, 서두, 결사'를 쓰는 법 등과 아울러 일기·서한·감상문·서정문·추도문·式辭에 이르는 구체적 文種 쓰기의 技術的 내용까지 확보하려 한다는 데에서 그의 이데올로기적 기획이 완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장강화}의 이데올로기는 문장 쓰기의 과거적 규범과 정립되어야 할 미래적 정신을 말함으로써 그 실내용을 확보한다. {문장강화}는 고전 소설의 수사법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전소설의 문장이 典故에만 의거함으로써 비개성적이며 상투적인 성격을 가지며, 이로써 고전소설이 진정한 문학으로 대우받지 못하게 되는 근거로서의 "산문적 진실성"의 결핍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근거로 이광수에 의해 성립된 언문일치 문장을 찬양하면서, 이태준은 "새로 있을 문장 작법"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글짓기가 아닌, 말짓기"의 정신으로, "글을 죽이더라도" 말에 입각해 말을 살려, 최단 거리에서 감정을 살려 놓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개인 본위의 문장 작법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요건은 문장 쓰기는 기성의 틀을 갱신하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문장강화}의 이념적 지향성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표리의 관계에 놓이는 것은 주지하듯 국어에 대한 이태준의 물신적 존중의 정신과 언문일치에 대한 양가적 태도이다. 이태준의 한글에 대한 존중의 정신은 유명한 해방공간의 논쟁에서 드러나 있다. 이태준은 언문일치가 민중적인 문장 정신으로 "어떠한 미래의 문장이든지 그 토대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도, 언문일치는 실용정신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므로, "矯矯不群"해야 하는 예술가의 문장일 수는 없다하여 이를 포폄한다. 이것이 그의 의고주의와 관련될 때 "책보다는 冊"이라는 유명한 이태준의 명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태준의 태도가 실제 소설 창작에서 이태준 소설 문장을 수사학적 차원에 정향된 것으로 만든다. 즉 이태준 소설 문장의 장처는, 감각적인 어휘의 선택과 적절하고 감각적인 비유법에 의한 참신한 감각성에 집중될 수 있다. 이러한 문장 쓰기가 산출하는 서사 기법은, 소설 창작에서 인물화의 탁월함이나, 묘사(showing : 장면화)에 집중한 단편 소설 미학을 구축하게 한다. 이태준이 소설의 묘사에 집중하는 것은 그가 구래의 소설 양식의 서사 방법을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소설의 근대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과 관계가 깊다. 이태준에게 묘사란 "산문적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태준의 소설이 "사소설적, 심경소설적 소설의 전형을 창출함으로써", "자연주의 문학의 순수한 졸업"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서사 방법이 30년대 문학에서 단편소설 미학의 근대적 양상의 한 항목을 획득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근대적 소설 미학을 사고하는 방법과 소설 속의 실천 양상에서 이태준은 박태원과 구별될 수 있는데, 이 논문에서 주목하여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위의 "새로 있을 문장 작법"의 첫번째, 즉 감성 위주의 문장 기술에 대한 천착과, 문장에 대한 규범적 태도이다.
박태원의 [表現.描寫.技巧]는 1933년에 처음 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는 컴마 쓰기의 자신의 원칙을 확보하기 위한 우회인데, 이러한 언급을 통하여 학교 문법적 규범에 관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규범성과 탈 규범성의 긴장관계 하에서 문학의 언어가 선택된다고 할 때, 박태원은 [表現.描寫.技巧]의 첫대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규범적 문장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 소설 쓰기에서는 그 긴장관계를 반규범성 쪽에서 파괴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2, 3장의 예에서 보았듯이 박태원의 개별 문장은 터무니없이 길고, 자의적인 문장 부호 사용과 문장 사이의 연결 구조를 가진 것이었다. 또한 문장 내에서의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중복적이거나 모호하며, 필수적인 보조적 문법 장치(전달동사 등)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필요한 경우 박태원은 일본어나 일본어를 음차한 구문을 쓰기도 하고, 문장이 아닌 것(광고문구나 편지 겉봉)으로 문장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탈 규범적 성격 때문에 문장의 일반적 전달력은 매우 약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박태원의 소설 문장은 그 자체로 어떤 문장 쓰기의 모범과 같은 것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논급한 바대로, 이태준은 자신의 문장 자체로 민족어 문장 쓰기의 새로운 규범을 창출하려 한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본질적인 차이가 문장의 감성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고전소설과 신소설의 문장법을 거부하면서, 이태준은 자신의 산문적 합리성에 대한 지향을 "어조, 말"에 초점을 둔 감성의 차원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태준이 말하는 '감성'이란 곧 낭만주의적 의미를 가진 것이거나 즉자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이태준이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를 수용하고, 또 '감정은 사상이전의 사상'이라 주장하는 데에서 드러나는 바, 감성은 산문적 합리성에 매개된 차원의 것이다. 박태원 또한 강한 합리적 정신을 문장 쓰기의 정신적 토대로 삼고 있다. 이로써 앞에서 논의하던, 박태원 서사 기법의 정신적 배경 문제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박태원의 문장은 합리적 정신을 구성주의적 차원으로 가져다 놓고 있다. 예의 평문에서 박태원은 정확한 표현을 위한 단어와 어조의 구별을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것이 2차적인 중요성밖에는 가지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선택된 어구를 어떠케 효과적으로 배열하여, 가장 함축있는 문장을 이룰 수 잇나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소설 창작에서 묘사에 의한 인물화나 잘 짜여진 플롯을 만드는 기법보다는, 통합적 성격을 갖는 구성적 문장을 통해 사물적 현실과 시간성을 압축하는 기법을 만드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리와 사건 등 대상의 일체를 포착해내기 위해 기획된 박태원의 문장 쓰기 방법이 결국 일반적인 서사의 방법을 위협하게 됨으로써, 합리적 정신이 그 대립물로 전화하게 되는 상태를 야기한 태도를 명명하여 즉물성(Sachlichkeit)으로 부를 수 있다. 즉물성은 사물적 대상 세계에 대해, 이념과 정신의 작용을 배제하여 주관적 가감없이 다가감으로써, 사물적 현실 자체에 미메시스하려는 태도를 일컫는다. 환언하면, 도구화된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의 언어를 모색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우회의 방법을 통해서만 물신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태원 소설의 서사 기법에서 즉물성은 우선 크게는, "장거리 문장"의 통합적 성격 구현을 통하여 합리적 인식에 의해 구축된 일반적 서사 구조와 시간성을 해체하려는 태도에서 검출된다. 이는 당대의 규범적 산문에 대한 도전으로 표현된다. 더불어 문장을 전체 소설의 세포조직으로 세밀히 조직하는 구성적 태도도 이에 관련된다. 앞의 예들에서 쉼표에 의한 문장 내 요소들의 분할은, 다분히 의식적인 원칙을 가진 채 더 큰 서사 단위와 전체의 요소로 기능하게끔 되어 있었다. 구성의 원리가 창작에서 작동하고 있음은, 작품을 이성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다른 물건처럼 제작된 것으로 사고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구성의 원리로 작품을 만들려는 것은 재료들을, 이성과 정신의 엄격한 공정을 거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히려 감각적 계기에 충실한 태도인 즉물성에 이른다.
통합성이 비대해진 문장외에도, 태도로서의 즉물성이 작품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띠는 몇가지 양상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텍스트 표면의 가시성에 대한 천착으로 드러나는데 바로 절 제목 달기의 방법과, 문학에 이질적인 대상을 소설 속에 수용하여, 일반적인 소설 언어와 그것이 등가를 갖게끔 배치한 방법이다. 그리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서사 구조를 이루는 주요 동력인 연상이 대부분 사물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라든지, {천변풍경}의 서술 방법이 기술 합리성(영화)을 소설 속에 수용함으로써 이에 접근한다든가, 유리창과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천변의 풍경을 말한다는지 하는 것도, "사물의 언어"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이러한 기법의 전체가 겨냥하는 것은, 대상이 "작품 그 자체내에서 철저히 형상화됨으로써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과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잠재적으로 일치하도록 하는"상태이다. 따라서 즉물적 태도는 변증법적 의의를 갖는다. 진정한 즉물적 태도는 물신적 합리성에 대한 극복이 직접적인 주관의 회복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한, 반성적 태도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법에 개재한 즉물적 태도가 곧 작품 자체의 즉물성으로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즉물적 기법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내재된 의도와 형상화된 결과는, 즉물적 상태를 훨씬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방란장주인]의 기법이 즉물성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으로서의 그 전체는 즉물적인 것을 넘어서 있다. 작품의 정신(Geist)은 기법으로써만 드러나지만, 기법은 정신화의 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가지고 있는 세계 인식의 방법 자체라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주제적인 측면과 윤리적 감각, 그리고 비록 그 기능이 약화되어 있지만 수경 선생 등의 인물의 면모를 통하여 드러나는 [방란장주인]의 예술가 소설적 모티프들은, 즉물성의 경계를 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설혹 즉물적인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는 예술의 가상성(Schein)을 벗어버릴 수 없고, 주관성을 완전히 벗어던져 그 자체로 즉물적으로 보이는 예술 작품도 즉자(An sich)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의를 갖는 서사 기법을 가능하게 했던 근저에, 무엇보다도 우선 재료로서의 언어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 내재한다. 언어가 단순한 전달의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질 때에, 즉물적인 태도의 기법이 가능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언어의 자동화된 상태"를 지향한다든지, 텍스트 표면 구조에 대해 천착하는 태도는 형식주의에 고유한 특징이다. 즉 예술적 재료와 수단을 그 목적과 혼동하는 물신화된 합리성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형식주의적 예술 인식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에 대한 물신숭배적 태도와, 즉물적 기법은 표리의 관계에 놓인다. 이를 매개하는 것은 "理智"라 명명된 합리성이다. 이 합리성이 언어에 대한 물신숭배적 태도를 가능하게 하고 즉물성에 근접한 기법을 낳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앞서 살핀 바, 즉물적 태도에는 수단적 합리성에 침해된 세계 그 자체에 다시 다가서고자 하는 반성적 태도에 의해 성립된다. 이로 인해 언어에 대한 물신적 태도도 옹호될 가능성을 갖는데, 박태원은 재료로서의 언어가 그 자명성을 잃고 관념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박태원의 소설 기법을 통해 검출되는 그의 언어에 관한 인식은 형식주의적 예술의 자율성에 매개된 것으로, 낭만주의나 리얼리즘적 언어관에 이른바 "순수문학" 공동의 전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과 매우 유사한 문학 행위를 했던 이태준 등과는 큰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 권영민, 박태원 소설과 공간화기법, 소설과 운명의 언어, 현대 소설사, 1992
박태원의 소설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특징은 소설적 주제화의 작업에서 철저하게 이념성이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그가 문단에 등단하면서부터 계급문학운동과 거리를 두고 구인회에 가담하고 있었던 점과 관계가 있다.
그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오월의 훈풍>, <방란장주인>, <반년간> 등 초기 작품들은 모두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 개인의식의 추이를 다양한 서술기법을 통해 포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은 집단적인 계급의식에 얽매이기보다는 개별화된 상태로 나타난다. 당시 계급 문단의 소설들이 대개 집단의식의 소설적 구현을 위해 소영웅적인 인물로 치장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박태원의 소설적 주인공들이 왜소한 일상인의 모습으로 현실의 공간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소설이 당시 계급문단 소설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박태원의 소설에 등장하고 있는 개별화된 인간들은 대개가 도시적 공간을 삶의 무대로 삼고 있다. 소설적 배경 자체가 도회적인 것이 바로 이러한 특징을 말해 준다. 어떤 연구가는 박태원에 이르러서야 우리 소설이 도시적 풍물을 소설적 무대로 구체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도시적 공간이라는 소설적 장치는 박태원의 소설에서 단순한 배경요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도시의 확대와 각종 새로운 직업의 등장, 도시 가정과 인간들의 행태,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팽배현상, 환락과 고통의 변주-이런 모든 것들이 1930년대 도시생활의 변모와 함께 그 다양한 분화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박태원의 소설은 자칫 평범한 일상 이야기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개체화된 인간들의 삶을 통해 도시의 속성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인간관계의 상실, 개인주의적 태도 등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다.
도시적 시정(市井)의 삶에서 박태원이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은 세태와 풍물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질문법도 포함되어 있다. 경향파 소설 이후, 개인과 사회 현실의 총체적인 관계의 파악을 위해 주력해 온 소설적인 특성을 생각할 때, 박태원은 개별적인 국면의 제시를 통해 개체화된 인간의 모습을 투영해 봄으로써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특성은 리얼리즘의 문학을 문제삼는 비평가들에게 성격과 환경, 즉 개인과 사회의 분열로 치닫는 소설의 위기로 인식되기도 하였지만, 삶에 대한 인식의 방법과 태도가 새로운 전환을 드러내는 징후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박태원의 소설을 모더니즘의 미학적 수준과 그 원리에 의해 설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박태원 소설의 특성을 소설사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분화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다양한 소설적 기법은, 그가 1930년대 문단에서 보기 드문 스타일리스트로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 주는 징표가 된다. 그의 소설에서 활용되고 있는 기법은 소설의 형식을 치장하도록 고안된 의장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방법이며, 소설의 장르적 규범을 새로이 정립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심리주의적 소설기법을 박태원이 자신의 소설에서 시험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식의 내면적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방법의 천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와 그 삶의 양상이 현실적인 공간 위에서만 의미 있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식의 흐름 속에서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자리잡는다는 것이 박태원의 인식방법이다.
그가 활용하고 있는 '장면화'의 방법은 소설의 국면을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기보다는 현장성의 극적 표출을 통해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사소한 일상의 일들을 소설에 끌어들이고 있지만, 이것을 이야기화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그의 소설 속에서 하나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지며, 공간적으로 배치된다. 사건의 시간적인 진행이나 인과적인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 상황 자체의 제시에 몰두하는 셈이다.
이같은 박태원의 소설적 기법은 서사성의 원칙에 의거하는 소설의 이야기를 해체하고 있지만, 소설의 세계에서 공간성을 확보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의 언어는 소설의 이야기를 '말해 주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며, 그만큼 상황적 구체성에 집착한다. 대화의 생동감 있는 실현, 묘사의 직접성, 장면의 현재화에 주력하는 그의 언어가 어느 경우 '요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태원의 소설은 궁극적으로 창조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이념성을 배제하고 기법적인 면에서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해석의 새로움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삶을 고정된 이념의 구현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며, 소설이 그같은 기정 사실화된 삶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반대한다.
그의 소설작업은 미지의 삶에 대한 탐구이며, 새로운 삶의 세계에 대한 접근이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운명의 필연성에 얽매이지도 않으며, 주어진 이념에 복종하지도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모두 순간의 의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독자들은 그의 소설 속에서 바로 이러한 인물들을 만나는 것이며, 이들 인물이 스스로 내보이는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삶의 과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 장수익, 박태원 소설 연구, 서울대 석사 논문, , 1991
갑오농민전쟁 제1부는 고부민란이 발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것을 중심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수동-상민과 전창혁-전봉준으로 이어지는 혈통에 의거한 영웅들과 정한순의 활빈당 및 일심계와 동학의 남접, 변산의 적굴로 이어지는 민중적 세력들, 그리고 고부읍의 평범한 민중들이 진령군-서양인의 틈새에 있는 민비 등의 집권층 및 그들이 임명한 봉건관료, 양교리의 봉건지주인 이진사가 차츰 대립하게 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대립의 과정은 아직 고부민란에 초점이 주어져 있기에 서울공간은 작품 내에서 필연성을 획득하지는 못하고, 단지 수동이라는 존재와 전봉준의 서울행이라는 끈으로만 고부와 연결되어 있다.
싸우려면 첫째로 사람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봉준 자기가 말을 많이 했다. 악정 학정에 울고 왜놈과 양국놈의 침노를 근심하는 이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은 모두 목숨걸고 나서 싸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묶어 세우는 것이 우선 급한 문제이다. 그래 오수동은 일심계 를 묶고 정한순은 활빈당을 꾸렸으며 전봉준 자기는 몇 년에 한번씩 자리를 옮겨 앉으며 농민들을 깨우쳐 주고 뜻있는 사람들과 밀접한 연계를 유지해 오지만 이번 보은 모임에 참가하여 동학을 이용하는 것이 절실한 방책이라는 것을 더욱 똑똑히 깨달았다.
위의 인용문은 전봉준이 서울에 도착하여 오수동 정한순과 밀담을 나누는 장면이다. 여기서 동학은 현실변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묶어세우는 현실적인 방편으로 이용될 뿐이다. 민중적 조직이 아직 일심계나 활빈당이라는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그러한 조직적 한계를 동학을 이용하여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또한 위의 인용문은 그동안 작가가 의의를 부여했던 일심계나 활빈당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심계나 활빈당은 현실의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서울공간에서는 거사에 필요한 신식무기를 마련하는 것밖에 실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며, 더욱이 그렇게 마련된 무기조차도 갑오농민전쟁에서는 극히 부분적인 기여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작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일심계나 활빈당에 박태원이 이처럼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논문의 논지에 따른다면, 그것은 우선 서울이 박태원의 소설에서 현실부정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었다는 점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에게 서울은 문학행위의 근본적인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부정적 대상인 현실 질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군상 이 서울로의 상경구조를 취하게 된 것이라든가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에서 수동의 활동과 유기적 관련을 가지지 못하면서도 서울공간이 병치되어 서술되었던 원인이었다. 갑오농민전쟁 역시 고부읍 양교리와 분리된 채 서울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일심계와 활빈당이 있음으로써 서울공간은 고부읍 양교리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갑오농민전쟁 은 이전의 작품들과 궤를 달리 한다.
또한 일심계와 활빈당은 이 소설의 중심이 고부읍 양교리라는 공간에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곧 갑오농민전쟁은 고부나 동학과만 관련되는 부분적인 항쟁이 아니라 전 인민적인 항쟁이라는 것을 서울을 대표하는 일심계나 활빈당이 드러내주는 것이다. 특히 진령군과 서양인(일본인) 사이에 있는 민비로 표상되듯이 양교리의 질서를 결정해주던 서울이 이미 다른 질서(외세와 중첩된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교부읍 양교리의 봉건적 모순성만을 강조해서는 갑오농민전쟁은 전 인민적 항쟁의 성격을 획득할 수 없다. 오로지 서울의 새로운 성격을 강조해야 전 인민적 항쟁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상민이가 이번에는 (복룡에게-인용자) 무슨 이야기를 하여줄까 속으로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복룡이가 물었다.
성, 그러니까 병인양요 , 신미양요 때 우리더러 개국하자고 왔던 양국놈들을 모두 쫓아버리고 끝내 개국은 안했소?
그래 안했단다. (중략)
상민이는 왜놈의 강박에 못이겨 병자년(1876년)에 왜놈들과 맺은 강화도조약 이야기를 복룡이가 들으면 화가 나겠지만 알 것은 알아야 하리라고 생각하여 다시 말을 시작하였다. (중략)
상민이의 말에 복룡이는 얼굴이 시뻘개 가지고,
그러니 무슨 변이 있기 전에 우리가 어서 척왜척양 해서 그놈들을 다 몰아냅시다그려.
이와 같은 과정에 의거하여 고부민란은 점차 전 인민적인 성격을 획득하여 갑오농민전쟁으로 상승한다. 처음 민란이 발생했을 때, 작품의 초점은 이진사라는 봉건적 양반지주의 몰락과정과, 봉건적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이 등장한 민중적인 질서를 서술하는 데 있지만, 점차 그 민중적인 질서는 서울공간에 새로이 조성된 현실과도 모순된다는 것으로 옮아간다.
이 소설의 제2부는 고부민란 및 제1차 갑오농민전쟁의 경과를 서술한 것이다. 조병갑의 봉건적 학정에 대한 농민들의 봉기와, 그로 인하여 생성된 고부읍과 양교리의 새로운 질서가 서술된다. 이후 무장 선운사로 물러나 있던 농민군이 동학의 남접과 연합하는 과정 및 안핵사 이용태의 또다른 학정으로 농민군이 재차 봉기하여 제1차 농민전쟁을 벌이는 것은 역사적 서술과 거의 다르지 않다. 이후 농민군과 관군과 황토현싸움 및 장성싸움을 거쳐 전주로 입성한다.
전주입성장면은 2부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 전주입성장면의 의미는 작품 구조상에서 뿐만 아니라 박태원 개인사적 차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먼저 작품 구조상으로는 이 장면이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의 전주 공북정 공간과 직접 맥이 닿아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익산민란의 주동자인 임치수의 유언대로 농군들이 모두 들구 일어나 전주성으로 달려들어오는 광경 이 실현되는 것이다.
고연 흰 바탕에 보국안민 의 넉 자를, 그리고 역시 흰 바탕에 척왜척양 의 넉 자를 각각 먹글씨로 크게 쓴 두 폭의 기가 떠들어오고 있었다. 그 아래로 장수 셋이 말타고 나란히 들어오는데 가운데 사람은 머리에 백립을 쓰고 몸에 상복을 입고 백마 위에 높이 앉아 손에 삼척 장검을 뽑아들고 있고 (중략) 다시 그 뒤로 한 소년장군이 허리에 환도 차고 부루마 위에 앉아 들어오고 있었다. (중략)
할머니는 부지런히 눈을 씻으며 며느리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세 대장의 뒤를 이어 말탄 사람이 다섯 명 또 들어오고 있었다. 앞선 사람은 할머니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깨에 양총을 멘 구레나룻이 보기 좋은 사람은 내 아들 오수동이었다.
앞장 선 저 사람이 내 아들이요.
할머니가 최서방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중략)
상민이가 저기 옵니다.
상민할머니의 시선을 빌어 관찰되는 이러한 장면은 전주 공북정의 공간에서 잠시 이루어졌던 민중들의 변혁 열망의 가시화와 상통한다. 현실의 많은 갈등요소들이 한 공간으로 집약되는 동시에 극복되는 것이며, 이로써 서울공간으로 대표된 현실은 전체적으로 전복된다. 이처럼 한 장면에 모든 갈등요소의 해결을 집약시켜 그려내는 기법은 역사적 사실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한 채 민중들의 잠재적인 변혁 열망만을 잠시동안 가시화할 수 있었을 뿐인 공북정의 경우와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바탕하면서 변혁의 주체인 민중 세력이 잠재적인 상태가 아니라 실체화되어 나타나, 현실부정을 달성하는 것이다.
또 박태원의 개인사적 측면에서 전주입성장면은 그가 끊임없이 추구해왔던 현실부정을 이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기법에서부터 추구해온 현실부정은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에서 개인적인 현실부정을 넘어선 단계에 닿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갑오농민전쟁 에 이르러서야 그러한 민중적인 차원으로 승화된 현실부정을 완성함으로써 동시에 자신이 추구한 현실부정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박태원은 개인적인 막연한 현실부정의 차원에 있던 초기의 작품 수준을 역사적 사실을 매개로 민중적인 이해와 결부시켜 드러냄으로써 극복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갑오농민전쟁 은 전주입성장면으로 완결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이중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위에서 보았듯이 박태원이 개인적으로 추구했던 현실부정은 이룩되었다는 점에서 완결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개인적인 현실부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역사의 성격 때문에 완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으로 현실부정이 박태원이 추구하던 본래적인 모더니즘적 수준에서는 이루어졌음에도, 현실부정의 과정에서 도입한 역사의 객관적인 흐름에 있어서는 갑오농민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앞에서 보았듯이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에서와는 달리 서울공간이 새로운 현실-외세의 침탈-에 편입되는 점에 기인한다. 곧 전주 공북정과 그에 직결되는 공간인 전주입성은 역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에는 봉건성만을 부정할 수 있었을 뿐이며 서울공간의 새로운 측면은 엄존하는 것이다. 박태원이 이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수동의 서울 잠입, 전봉준의 서울행, 상민이 복룡에게 갑오농민전쟁이 한창일 때 외세에 대해 어슬프게 설파하는 장면 등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결국 갑오농민전쟁을 전인민적인 현실변혁으로 승화시키려는 지향을 가지려는 것임은 이미 검토한 바 있다.
잘 알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미스터 언더우드.
뻥커란 놈은 이렇게 말했다.
이선생은 놈들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그지없는 분노를 느끼었다. (중략)
이제는 미스터 허리어를 만날 필요가 없이 되었소.
이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미국놈들 편을 보았다. 두 놈은 다같이 눈이 둥그래서 이선생을 쳐다보았다. (중략)
정동 골목을 걸어나가는 이선생의 머리에는 <부리타니카> 생각은 벌써 없었다.
위의 인용문은 농민군과 관군의 긴박한 전투장면과 승리 후 전주로 입성하는 장면의 사이에 끼어있는 2부 10장의 일부이다. 2부는 거의 갑오농민전쟁의 경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유독 서울공간의 민중적 측면이 전투의 절정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박태원이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인 측면을 현실부정의 완성 뒤에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3부의 존재는 박태원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안회남, 작가 박태원론, 문장 1, , 1939
붓을 들 때 먼저 어깨가 무겁다. 어떠한 작들은 한번 전반(全般)으로 마음껏 논평한다는 것은 크게 보람있는 일이라고 책임이 붙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드물게 맛보는 문학적 여분(餘奮)이다.
그러나 그 중량과 압력은 결단코 불결한 것이 아니라 도로혀 나의 감정을 한층 맑게 하여주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작가 박태원씨는 나에게 있어서 벳섬이나 숫섬이나 소금성등의 둔중(鈍重)한 짐이 아니라 쨍그렁 소리가 날것 같은 금속성의 것이기 까닭이다.
보기에는 단출하지마는 부피보다 알속이 단단하다 어디까지든지 깨끗하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란 그 처녀 창작집 속에 수록된 여러 단편소설을 일일이 잡고 보더라도 어느 것이나 씻고 걸러내고 해서 반짝반짝 빛나며 쨍그렁 쨍그렁 소리를 내는 금속성의 것이요 광석의 종류이다.
<사흘 굶은 봄달>의 역설적 감각이 그러하고 <거리>의 심리의 착종(錯綜)이 그러하고 <길은 어둡고>의 칼로 끊는 것 같은 정돈이 그러하다.
창작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장편소설 <천변풍경>이 박태원씨로 하여금 양적으로 다작가(多作家)라는 이름은 못들게 할지언정 질적으로 씨의 작가적 성격을 일언(一言)으로 폐지(蔽之)하여 정선품(精選品)이다. 부피로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어깨에 둘러매니 실속으로 중량이 무겁고 그러면서도 말고 깨끗하여 한숨에 십리(十里)라도 내다를 것 같은 정결한 기분이란 말이다. 박태원씨는 현미(玄米)가 아니라 한번 더 수공을 치른 백미(白米)이다.
나의 말을 지나친 과장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박태원씨는 모든 단편소설에 있어서 소설의 기교적으로 실패한 작품은 절대로 없다. 정말 거기에는 하나의 예외도 없다. 언젠가 씨(氏)가 사담(私談)으로 단편소설 <애욕(愛慾)>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물었을 때에도 나는 구보(仇甫)의 작품에서는 소설로서 실패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의 말을 한 일이 있다. 이러한 대답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 같으나 작가 박태원씨에게 있어서는 허튼 수작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애초부터 실패할 세계에다 붓을 대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본전(本錢)에다 무엇을 특별히 플러스하는 일도 없지만 대신 절대로 마이너스도 하지 않는 계산법을 체득한 작가이다.
그러므로 씨가 가리켜 기교파(技巧派)라고 하는 것은 평범한 말이지만 또 의당(宜當)한 말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한 삶의 귀에다 전달할 수 없는 정도의 단순하고 미묘한 것까지도 작가 박태원씨는 그것을 가장 풍부하고 흥미있게 다스려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작품의 인예(引例)로 <전말(顚末)>을 들수 있고 <딱한 사람들>을 들 수 있고 <비량(悲凉)>를 등수 있다.
멀리 띠어 놓고 보아도 그러하지만 가까웁게 하나하나 분석하여 관찰해도 매한가지다. 우선 말에 있어서도 기교 문장에 있어서도 기교 풀롯에 있어서도 기교이다. 여하간 씨의 작가적 전생명이 기교에 얽매어 있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는 이러한 씨의 세계가 결단코 저속한데로 흐르지 않는 그것이다. 우리 문단에서 보통 기교하면 그것을 소설 작법상 어떠한 합리화의 수단으로 이해하지만 내가 말하는 작가 박태원씨의 기교란 이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전자를 문학의 기교라 일컫는 다면 박태원씨의 세계는 정(正)히 기교의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부분적 합리화의 수단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미 기교한 세계이다.
장편소설 <천변풍경>을 별견(瞥見)하더라도 용이(容易)히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작가 같으면 한 작품을 소설화하는 중도에서 기교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쓰고 하기 이전에 어떠한 세계를 자도(自睹)할 때부터 벌써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씨의 기교란 거의 현실과 동체(同體)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박태원씨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소설로서 실패된 것이 없다는 것과 씨는 결단코 실패할 세계에서는 붓을 안댄다는 것과 저속하여지지 않는 다는 모든 비밀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 진정한 기교란 사실 작가의 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눈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믿는 바이며 이같은 박태원씨의 세계는 해(該)작가의 선천적인 예술적 우월성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통속소설들은 우리와 전연 상이한 문학의 종족이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작품 행위에 있어서 내세워 질 것은 오직 기교 하나 뿐이나 그들의 소위 기교라는 것은 때를 따라 임기응변으로 아무데에서나 부려지는 손끝 장난이다. 작가의 마음과 눈과 손 전체가 결합하여 탄생하여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의 문단에 제법 통속소설을 표방하면서 상기한 바의 통속소설 그것의 기교도 가지지 못하며 반대로 순문학을 언명(言明)하면서도 박태원씨의 세계에서 예시한 것과 같은 순문학 그것의 기교도 가지지 못하고 더구나 양자의 판연(判然)한 성질의 구별조차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연(啞然)해 마지않는다. 나는 이러한 속심에 있어서 만도 오늘날까지 이 작가들을 높게 평가해 왔었고 또 앞으로 그러할 것이다.
장편이나 단편이나 소설에 있어서는 반분(半分) 반분식의 사실과 허구의 결합이 가장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한 작품을 놓고 볼 때 그것이 너무 빤히 일상성의 사실에만 충실하여도 우리는 경배부박(輕俳浮薄)함을 조소한다. 아니 어떠한 작품에서도 사실과 허구 이 두가지 분자(分子)를 따로 구별하여 가지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탈이다. 그러하다면 벌써 해(該)작품은 어떤 정도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작품 속에서 사실과 허구를 갈러 대립하기에 가능하도록 조작하는 것이 우리의 소설에 대한 최고의 목표요 이상이 아닌가 한다.
박태원씨의 작품에 소설로 실패한 것이 눈에 띠지 안는다고 말한 첫째의 이유도 차점(此點)에 있다. 씨의 작품세계 안에서는 어느 것이 세상의 객관적 사실이고 어느 것이 작자의 주관적 허구인지 밝히기 어렵다. 언듯보면 전부가 작품의 핵심으로서만 집중된 것 같고 언듯보면 또한 전체가 허구의 초점으로서만 형성된 것만 양이다. 양자의 사이에 남은 폄훼(貶毁) 살만한 문극(門隙)이 결단코 벌어져 있지가 않다. 나의 씨의 작품이 신문 잡지에 발표될 때 마다 꽤 여러 번 시평(時評)을 들었었는데 그때 내가 가장 경복(敬服)하여 마지않는 <사흘 굶은 봄달> 같은 것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씨의 작품으로서는 비교적 낮추어 평가된 <비량>따위에 이르러서도 이상에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결함은 꼬집어 내기가 거의 가능치 못한 것이다. 재언(再言)하거니와 씨의 소설적 기교가 절대로 작품의 꽁무니를 다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전연 선천적이어서 씨의 세계에서는 씨의 작가적 기교가 즉 작품의 현실이 즉 씨의 작가적 기교로 결합하여 있기 까닭에 소설의 사실과 허구가 그토록 완전히 부동(符同)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씨는 결단코 리얼리즘을 내세우는 작가가 아니면서도 <천변풍경>을 위시하여 모든 작품이 리얼리즘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인상을 일반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 작품을 바라보는 문학적 각도는 여러 가지 이다. 작가 박태원씨도 차례(此例) 벗어나지 않고 씨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비난은 이와 딴 방향에 있다. 현재 시의 작가적 태도에 대하여 나로서의 불만을 말하면 무엇보다도 개성의 결핍(缺乏) 그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회남(懷南)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러한 기교적인 세계가 작가 박태원의 개성이 아니냐고 반문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도로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를 갖는다. 왜 그러냐 하면 제 아무리 최선의 기교일지라도 정말은 그것을 박태원씨 혼자 체득하여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그것은 작가가 어떠한 한가지 정신적 태도를 결정한 연후에 그 여분으로 소지하여도 좋을 성질의 것이다. 아니 그러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문학의 세계에 있어서는 작가의 기교는 작가의 개성이 아니어야 한다. 만약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교로서 개성을 대표할 수밖에 없는 작가라면 그것은 명예가 되는 것이 아니요 반대의 불명예 일이요 핵작가는 정신적으로 빈약한 작가라는 데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개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상이라는 문자를 대용(代用)하여도 좋다. 이데올로기라는 어휘를 가지고 따져도 마찬가지이다. 여하간 작가 박태원씨에게는 그것이 많이 개인적인 것이거나 사상의 적극적 태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 제일 유감이다. 그는 퍽도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미약한 것 같다.그것은 체계가 도모지 왜소한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씨는 인생을 관찰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세상을 묘사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방금 신문지상에 연재되고 있는 <우맹(愚氓)>과 <천변풍경>에 있어서도 제일 요망(要望)이 되는 것은 작자의 이데를 표명한 새 성격의 창조가 없다고 하는 세간의 평언(評言)이 이것을 두고 하는 말하는 것일 것이다.
언젠가 한번 씨는 나에게 향하여 자기는 소위 인스피레이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이것은 인스피레이숀이라는 말에 대한 세상의 문학 청년적 기질과 진부(陳腐)한 해설에의 반발적 태도로서 그것을 조소하여 농담으로 한말 같으나 만일 그렇지 않고 기분이라도 이 속에 씨의 진심이 발현되어 있다면 나는 적지 않은 염려가 생긴다. 더욱이 위에 지적한 씨의 지적한 사상적 근거의 박약한 것을 연결하여 생각할 때 한층 더 하다.
작품이상이나 작품이후를 막론하고 작자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감동되는 것은 플롯의 흥미보다는 인간성의 흥미일 것이다. 통속문학자들은 문제가 아니고 항상 진선미의 추구가 염두에 있는 우리 순수문학 작가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언제나 작가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꾸밀려고 하는 감동보다도 느끼는 감동이 커야 할 것이다. 소위 인스피레이숀을 태배(胎胚)하는 인간성의 흥미가 앞서고 그것을 여하(如何)히 효과적으로 전달할가 하는데서 비로소 플롯의 흥미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롯의 흥미인 박태원씨의 기교의 세계가 작품의 중간에서 생겨나지 않고 당초부터 작가의 눈과 마음과 함께 발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씨의 장점이나 그렇다고 문학행동과 작품 창조의 중심을 인간성의 흥미가 아니라 플롯의 흥미에서 상기한다면 씨 뿐만아니라 어느 작가에게 있어서든지 이상의 적극적 태도의 결여를 규시(窺視)하게 하는 단소(短所)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다.
내 역시 박태원의 기교가 백미인 것에는 좋아하나 그러나 씨의 문학의 세계 전반이 그냥 백미이기만 한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양가치(營養價値)에 있어서는 백미가 도로혀 현미에게 뒤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 우리 문단에 있어서 현미라고 하는 물건 속에는 그래도 비타민이라는 것이 있느니라 하는 한가지 조건으로 박태원씨의 그 탁월한 기교까지를 말살(抹殺)하려고 대든 이부 비평가들도 없지 않아 있었으며 나는 그때마다 현미의 비타민도 백미의 기교도 없는 조선문단의 현상(現狀)에서 박태원씨의 기교의 세계이나마 옹호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러한 나의 태도에는 지금에도 별반의 차이가 없다.
위에서 작가의 사상문제를 언급함과 같은 것도 기실은 작가 박태원씨에게 대한 나의 한가지 희구(希求)이지 결단코 씨의 작가적 지위를 멸살(滅殺)하게 되는 재료로 말한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박태원씨뿐만 아니라 우리의 작가들은 누구나 늘 성장하고 있는 과정위에 처하였기 까닭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온갖 비평은 지금에 있어서 한 작가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지 어느 때에나 단정적인 결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비평가 테느가 작가 발작크에게 향하여 강렬한 양분을 응집(凝集)한 옥사(沃士)라는 말을 사용하였거니와 그러한 발자크라도 노력하고 전진하여 자기의 모든 작가적 과정을 밟기까지에는 결단코 테느의 말처럼 강렬한 양분을 응집한 옥사의 작가는 아니었다.
이 이치는 작가 박태원씨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그는 자꾸 노력하고 꾸준히 전진할 것이다. 비약할 것이다. 오늘날 그렇게 기교의 세계에서 모든 주옥같은 단편소설을 생산했다면 인제 미래에는 사상적 체계를 갖추는 문학을 제작할 것이다. 장편소설 <천변풍경>에 적극적 행동을 갖는 주인공이 없다는 논점에서 이것을 본격적 장편소설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이도 있으나 이것은 오히려 박태원씨의 성공을 증명하는 평언이다. 작가 박태원씨는 <천변풍경>의 다음 작품에서 적극적 행동을 갖는 주인공도 만들고 작자의 이데를 표명하는 새로운 성격도 내세우고 하면 문제는 그만이기 때문이다. 실로 성장하여가는 작가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극히 간단한 일이다.
끝으로 사족(蛇足)을 붙이거니와 어떻든지 간에 현재 작가 박태원씨에게 있어서는 기교의 세계가 퍽도 윤택한 대신 사상의 세계는 너무도 수척(瘦瘠)하지 않는가 한다. 다각적인 문학의 어떠한 입장에서 절망하든지 진실로 강렬한 양분을 응집한 옥사이어서 그 위에는 청아(淸雅)한 콧모스 꽃도 피고 거대 임목의 지대로 욱어지는 그러한 작가적 지위에까지 발전하기를 바라며 이만 붓을 놓고 만다.
#. 최재서,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 조선 일보, , 1936.10.31-11.07
<전략>
소설가는 카메라적 기능에 있어서 카메라를 따르지 못할지니 그 반면에 카메라가 가질 수 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소설가는 카메라인 동시에 이 카메라를 조종하는 감독자일 수 있다. 소설가는 카메라적 활동에 있어서 거지반 완전히 개인적 편차를 초월할 수 있으나 그 감독자적 활동에 있어선 주관의 습관성(習慣性)을 떠날수 없고 또 떠날 필요도 없다. 카메라를 어떤 장면으로 향하고 또 어떤 질서를 가지고 하는 것은 결국 개성이 결정할 것이고 또 그 결정이 개성에 의거하였다는 데에 예술의 존엄성과 가치가 있다.
소설가는 이 카메라를 갖고 자신의 심리적 타입에 따라 외부세계로 향할 수도 있고 또 자기 자신의 내면적 세계로 향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 사태는 비교적 단순하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선 대단히 미묘하다. 그것은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관계가 동일인 내에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자기의 생활과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토로하는 신변 소설가라든가 자서전적 시인의 경우이면 별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날개>>의 작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내부에 관찰하는 예술가와 관찰 당하는 인간(생활자로서의)을 어느 정도까지 구별하여 자기 내부의 인간을 예술가의 입장으로부터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병적일지 모르나 인간 예지(叡智)가 아직까지 도달한 최고봉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자의식의 발달-의식의 분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물론 건강한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의식의 분열이 현대인의 스테이다스. 쿼(현상(現狀))이라면 성실한 예술가로서 할일은 그 분열상태를 정직하게 표현할일일 것이다. 마치 외부적 타입의 작가가 카메라를 갖고 외부세계를 촬영하듯이 그는 자기의 카메라로 자기 자신의 내부세계를 촬영하여야 할 것이다. 그 때에 그의 카메라 이에 주관의 막(膜)이 가리워져서는 아무 가치도 없다. 예술재료로서의 생활감정과 그 감정을 취급하는 예술가의 쎈티멘트는 판이한 물건이다. 과학자와 같이 냉엄한 태도를 갖고 자기 자신의 생활 감정을 다룰 줄 모른다면 그는 차라리 그 재료를 버림이 가(可)할 것이다. 이리하여 외부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카메라적 정신을 갖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나 자기의 내면세계를 그리는 데에 그 정신을 갖는 것은 곤란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잔인한 일일 것이다.
<<천변풍경(川邊風景)>>이 우리에게 주는 흥미는 흘러가는 스토리나 혹은 작자 자신의 다채(多綵)한 개성이 주는 흥미는 아니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작자를 의식한다면 그것은 실로 부재의식(不在意識) 뿐이다. 즉 우리가 키네마를 보면서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치 않는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자를 의식치 않는다. 작자의 위치는 이 작품안에 있지 않고 그 밖에 있다. 그는 자기 의사에 응하여 어떤 가작적(假作的) 스토리를 따라가며 인물을 조종치 않고 그 대신 인물이 움직이는대로 그의 카메라를 회전 내지 이동하였다. 물론 그 카메라란 문학적 카메라-소설가의 눈이다. 박씨(樸氏)는 그의 눈렌즈위에 주관의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였다. 그 결과는 우리 문단에서 드물게 보는 선명하고 다각적인 도회묘사(都會描寫)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이면 이 방법에 있어서의 작자의 성공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변풍경>>에 있어서 카메라를 지휘하는 감독적 기능에도 마찬가지 정도로 성공을 보여주지 못하였음을 섭섭히 생각한다. 박씨의 카메라는 그가 행한 곳을 잘 촬영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박씨는 자기의 카메라를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리고 장면연계에 어떠한 의도를 줄까? 이러한 점에 대하여 좀더 생각할 여지는 없었을까? 영화감독의 영화기술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함은 더욱 진리일 것이다. 기술 이상의 그 무엇이란 결국 묘사의 모든 디테일(細部)을 관통하고 있는 통일적 의식-그것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비판일런지도 모르고 또 인생에 대한 윤리관 일런지도 모른다.여하는 독자가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닌후 그 의식에 남겨지는 통일감이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천변풍경>>에 다소의 의혹을 품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의 전체적 구성을 말하기 전에 그 부분부분에 나타난 작자의 수법을 좀더 자세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작자의 카메라는 우선 청계천(淸溪川) 빨래터로 향해진다. 이것은 어멈과 행낭사리류의 문인들이 그들의 왕성한 다변욕(多辯慾)을 발산시키고 부근 일대의 생홀내막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 일종의 사교장이다. 거기서는 아이니 요새 웬 비웃이 빗싸우? 하는 적은 생활의 탄성도 들리고 사회조류에 밀리어 몰락하여가는 신전 주인에 대한 책임없는 비평도 들린다. 가장 서울의 색채가 노후한 이 천변에 여인군(女人群)이 비져내는 생활의 비애와 유모의 리즘은 그들의 아름다운 애사(哀辭)와 함께 흐르고 있다. 작자는 어디인가 단정히 앉어 그들의 동작과 회화를 주밀(週密)히 관찰하였고 또 그것을 아무 편견없이 표현하였다. 대단히 구미(口味)도는 일절이다.
다음 장면은 <이발소>로 이동된다. 빨래터가 여인들의 뉴스 교환소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곳은 남자들의 생활감정의 청산소(淸算所)이다. 이 곳에선 거울에 비치는 노쇠한 얼굴을 보고 51211;은 첩(妾)을 연계하여 민주사(閔主事)가 우울에 빠진다. 작자의 서치라이트는 표면의 행동을 뚫고 들어가서 이 노신사의 컴컴한 내부세계를 비추어 준다. 여기서 작자의 카메라는 활동을 휴(休)하고 그 대신 이발소 청년의 카메라가 회전을 시작한다. 이 소년이야 말로 이 작품의 최대 걸작이다. 이 소년은 이 작품인 동시에 또 관찰자이다. 그는 왕성한 호기심과 아무 편견없는 맑은 눈을 가지고 이발소 창 밖에 유동하는 생활을 모조리 관찰하고 또 소년다운 순진한 마음과 귀여운 유모를 갖고 소년다운 비평을 내린다. 작자 자신을 연상시키는 자미풍부(滋味 富)한 소년이다. 다라서 이 소년의 카메라는 작자 자신의 카메라와 구별할 필요가 없다. 작자는 이후에도 가끔 이 소년의 눈물을 빌어 실재의 단면을 포촉(捕促)하기에 노력하였다.
<<천변풍경>>의 제 1회에 있어 비교적 표현생활을 부감(俯瞰)한데 비하여 제2회에 와선 인간생활에 깊이 들어가 그 감정의 파동을 추구하기에 노력하였다. <시골에서 온 소년>은 도시생활이 갖고 있는 고독과 회의와 절망을 외로운 소년의 생활을 통하여 잘 표현하였다. 이발 소년이 지적이고 적극적인데 비하여 이 소년은 감성적이고 소극적인 일면을 대표하였다. 이것도 역시 작자의 일면을 구상화(具象化)함인가? 차문(借問)한다. 도회생활의 페이소스와 유모는 <불행한 여인>, <경사(慶事)>, <몰락>, <민주사의 우울>등 테마들 조차 음악같이 흘러간다. 작자의 카메라는 전회(前回)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내부 행랑방 민주사의 첩가(妾家) 등으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그 중에도 <경사>의 일절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딕겐스를 연상한다. 제3회에 가서도 전회와 같은 수법을 갖고 부회의원선거(府會議員選擧)에 몰두하는 일군과 우울한 민주사와 돈 없는 사람들의 고독과 비참 가페를 중심으로한 애욕취인(愛慾取引)의 자태(姿態)등을 묘사한다.
이 모든 장면을 통하여 작자는 종시여일(終始如一)하게 카메라적 존재를 견지하였다. 서로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현실에 접근하여야 가며 그 동태를 될 수 있는 데 까지 다각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진다. 즉 이 작품의 세계가 된 천변은 그 자신 일개의 독립한 혹은 밀봉된 세계가 아니냐? 하는 의문이다. 물론 천변과 외부와의 연관은 있다. 실례를 든다면 신전 주인의 몰락이라든가 포목상 주인의 선거운동이라든가 기타 이삼처(二三處)에 있어 외부사회와의 교섭을 암시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암시내지 묘사에 불과한 것이고 작자가 처음일이다. 그 배후에 살아있는 작자 자신의 의식의 문제이다. 작자가 만일에 (일례를 든다면) 꼬올즈위지와 같은 의식과 견해를 갖었다면 그는 전체적 구성에 있어 이 좁다란 세계를 누르고 또 끌고 나가는 커다란 사회의 힘을 우리에게 늦기게 해 주엇을 것이다. <작자후기>에 의하면 이 작품은 그가 계획하고 있는 장편의 일부라 한다. <속천변풍경>에 있어 이 사회적 연관의식이 좀더 긴밀하여야 지기를 나는 바란다.
첫댓글 내가 아는거라곤 소설가구보씨의일일 밖에 없네;; 아,,구보가 박태원 작가의 호 였구나...그래서..ㅡㅡ..;;
컥..이많은걸... 벤자민 님 국문학 전공이세요??''ㅎ
아니요~그냥 검색해서 올렸지요..방란정주인이 제 머리속을 휘집어 놓았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