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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하까 1,1-8
복 음 : 루카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비가 오는 날 우연히 돌 위에 있는 달팽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달팽이를 보면서 책에서 읽은 달팽이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글쎄 달팽이는 후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옆으로 갈 수도 없고 오로지 전진만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달팽이가 유일하게 하는 것은 그냥 앞으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그냥 멈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생각하면 정말 별것 아닌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보니, 자기 집 하나 짊어지고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잘 멈추기를 반복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실상 많은 것을 하면서도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우리에게도 달팽이와 같은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이라는 집을 짊어지고 주님 뜻에 맞게 묵묵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반대편에 있는 악(惡)을 피하기 위해 악 앞에서 과감하게 멈출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세상 것을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주님 것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의 기준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결국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지요.
자신의 생일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내어준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맹세를 지키려고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당황하게 됩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악(惡) 앞에서 과감하게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안에서 비치는 자기 모습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악(惡)을 행하는데 거침이 없었고, 그 결과는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살게 됩니다.
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못된 영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달팽이처럼, 우리 역시 단순해야 합니다.
특히 악(惡) 앞에서 과감하게 멈추고, 선(善)을 향해서만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어리석은 짓을 삼가는 것이 지혜의 입문이다(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자유를 누려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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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 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 자리에 관계 없이 평가가 높아감
4)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 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 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 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 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 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 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 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받고자 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가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평화신문 지면에서 수녀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꽃 피우지 않는 나무’입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12년간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까? 라는 전화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나무를 좋아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10년이 넘도록 꽃 한 번 피우지 않는 나무를 누가 좋아하느냐며
장모가 준 것이라서 버릴 수 없어 억지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상담원은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당신이라면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상담원은 잠시 후
’지금부터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나무한테서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세요.
그다음에 그렇게 멋진 나무가 당신 정원에 있어서 기쁘다고 이야기해 보세요.
그러면 꽃이 필 것입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상담원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혹시 몇 달 전 꽃 피우지 않는 나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던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이 시킨 대로 했더니 글쎄 그 나무에 거짓말처럼 꽃이 가득 피었지멉니까?
너무도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랍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 산다면 신앙의 꽃은 피지 않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왜 우리가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는가?
왜 우리의 성전은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처참하게 파괴되었는가?
왜 우리의 신앙은 아름답게 꽃 피우지 못했는가?’를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심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눈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면서 꽃을 피웠습니다.
페르시아 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주변에도 사랑받지 못해서 시들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2년 전에 아마존에서 구입한 차고의 천막이, 바람에, 햇빛에 여기저기 찢어졌습니다.
새로 천막을 사서 덮어 주었더니 산뜻하고 아름다운 차고가 되었습니다.
싱크대의 수도꼭지가 나사가 풀려서인지 덜렁거렸습니다.
새 수도꼭지를 사서 달았더니 물이 시원하게 나왔습니다.
지하에 있는 배수관이 막혀서 물이 넘쳤습니다. 2년 전에 고쳤는데 다시 막혔습니다.
배관공을 불러서 다시 뚫었습니다. 물은 막힘없이 흘렀습니다.
차고도, 수도꼭지도, 배수관도 저의 사랑을 받지 못하니 낡고, 덜렁거리고, 막힌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손을 쓰니 다시 꽃이 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비슷합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건강하던 몸도 시들고 맙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면 가슴에 화가 들어와 살게 됩니다.
세상이 우울하고, 짜증 납니다. 그러면 건강은 시들게 마련입니다.
음주와 흡연을 지나치게 하고, 폭식을 하면 당연히 몸은 시들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면 몸은 곧 긍정의 꽃이 피게 됩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를 하면 몸은 다시금 활력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아름다운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한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 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주님!
소문으로만 듣던 당신을 봅니다.
깨지고 부서진 아픈 이들, 작고 가련한 이들, 무능하고 힘없는 이들에게서 당신을 봅니다.
어쩔 수 없어 힘없이 쫓겨 제 곁에 몰려와 있는 이들, 이들이 바로 당신입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제 곁에 와 계시고, 제 안에 숨어계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헤로데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께 대한 소문은 꽤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참된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하여야 한다.
내가 신앙을 가지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 신앙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존재 자체로 기쁨과 희망, 위로와 은총의 표지이신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헤로데가 몹시 당황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묵상해 봅니다.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헤로데가 당황해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선하고 통쾌한 말씀 선포를 통해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도 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군중 가운데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사람조차 다시 삶으로 되돌이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한 가지 한 가지가 모두 백성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건네셨던 좋은 일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도 모자랄 터인데, 왜 헤로데는 몹시 당황해 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최근 자신의 생일 잔칫날,
자신의 얼굴을 살리려다가 발생한 세례자 요한 참수 사건이 떠올라 당황해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는데, 그가 곧 예수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당황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비록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로마 식민지 체제하에서 쥐꼬리만 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 뭐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백성들의 안위나 복지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위태위태한 자리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
알량한 권위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입을 챙기며,
그렇게 비참한 군주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권위도 없고, 품위도 없으며, 자신이 대체 뭘 해야 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저 거들먹거리고 폼만 잡고 살아가는 폭망한 천박한 지도자서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엉뚱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죽어나는 것은 백성이라는 것을
헤로데 역시 온 천하에 잘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죽고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가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되는데 전혀 하지 못하는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으니,
헤로데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을 생각지도 못한 봉사의 왕, 섬김의 왕으로서 신선하고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니, 몹시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존재 자체로 선인들에게는 기쁨과 희망, 위로와 은총의 표지입니다.
반대로 악인들에게는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의 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앞에, 그리고 그분이 매일 건네시는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몹시 당황해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뻐하고 환호하고 있습니까?
설레는 가슴으로 그분 말씀에 행복해하고 있습니까?
헤로데의 호기심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을 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의 공생활 開始를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둔 시점에 두었다.(마태 4,12; 마르 1,14)
그 후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는 반응과 함께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마태 14,1-12; 마르 6,14-29)
여기서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斷言하고 있다.
그러나 루카는 전승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삭제하고,
헤로데의 호기심을 덧붙여 그가 예수를 만나 보려 하는 의도를 지적하고 있다.
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은 당시 누구에게나 있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바로 곁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당시 팔레스티나의 최고 권력가인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던것이다.
헤로데는 아직 예수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수 많은 소문들이 그의 귓전에 몰려왔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두고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아니면 옛 예언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헤로데가 있어서 예수는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보도되는 배경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관련성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카는 이 관련성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헤로데와 예수를 관련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예수를 정말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어차피 법정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루카 23,6-12)
그러나 그는 예수를 진정 알려고 하기보다는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한 번 보고 싶어 했을 뿐이다.(루카 23,8)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예수를 경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아인 동시에 종교적인 메시아여야 한다.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부분이 헤로데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헤로데 자리는 위태로워지게 될 것임으로
그는 자연히 불안에 싸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결국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당황한 헤로데 대왕이,
겉으로는 자신도 경배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몽땅 죽여버릴 음모를 품지 않았는가 말이다.(마태 2,3.8.16)
헤로데 대왕은 그 음모를 실행에 옮겼고,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또한 겉으로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결국은 예수의 사형선고에 적극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빌라도와의 반목을 깨고 친분을 다지게 된다.(루카 23,6-11)
누구든지 예수를 대면하려는 자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헤로데 대왕도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도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려 했기에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그분께 다가서느냐에 따라 그분 또한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오실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오틸리아 수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은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났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구약시대 예언자의 대명사, 엘리야로 생각하기도 하고
옛 예언자 중 한 분으로 보기도 했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보통’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죽었던 이가 다시 살아났으니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신들의 비참한 삶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죠.
그러나 여기에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함정이 있어요!
아무도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거죠.
물론 어떤 이들은 메시아라고 생각했더라도
헤로데 왕과 로마 권력 때문에
차마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But 대부분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에 놀라기는 했지만,
메시아라고 확신할 수 없었어요.
왜냐??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나 차이가 컸기 때문이죠.
저도 때로는 (자주^^;;) 답을 정해놓고 상황을 바라볼 때가 있어요.
‘◦◦하니까 저렇지’, ‘분명 xx가 했을거야’ ...
내 생각에 빠지거나, 쉽게 판단을 내리는 행동이
나의 시선을 왜곡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람도, 상황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기억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
받은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는 날이 되시기를 빕니다.
[출처] 루카 9,7-9 연중 제25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