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을 통일해 나가는 칭기스 칸. 영화 <몽골>의 한 장면. |
(3편에 이어 이어집니다. 마지막회)
칭기스 칸은 ‘세계 정복자’라기 보다 ‘세계 징벌자’
-결국 이렇게 1300년 동안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칭기스 칸 선조의 비밀을 푸셨다는 건데, 지하에 있는 칭기스 칸이 이 사실을 알면 무척 기뻐할 것 같습니다.
“아, 네,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단, ‘지하’가 아니라 제가 본 사서에는 그가 ‘하늘로 갔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제 머릿골 속을 전기와 칼날처럼 번개처럼 스쳐가는 어떤 계시와 같은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솔직히 매일 밤 그의 넋이 저한테 찾아와 ‘자기 자신을 찾아 달라’고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혼령이 있다면 동·서방의 학자들이 그의 선조의 이름들을 그 무슨 짐승들의 이름으로 죄다 바꾸어 두고, 또 한편은 위대한 정복자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냉혹한 전쟁광이나, 살인마처럼 그리는 데 대해 넋이라도 만일 있다면 어찌 유감이나 원한이 없었겠습니까.”
전 박사는 “이번에 펴낸 책 1권과 2권에서 칭기스 칸의 행적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의 선조들에 관해서 촛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칭기스 칸의 업적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조금씩은 알고 있지만, 그의 선조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고, 또 그 선조들이 우리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3편의 인터뷰에서 칭기스 칸 선조들 계보를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칭기스 칸 자신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봤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칭기스 칸은 동·서양을 벌벌 떨게 한 ‘무자비한 정복자’로 각인돼 있는데요.
“칭기스 칸의 몽골리아 부족통일이나, 그의 이른바 세계정복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세계 정복자’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세계 징벌자’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비록 수많은 희생과 파괴를 동반한 여러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었지만, 거꾸로 그것을 통해 그는 힘센 부락과 약한 부락, 강한 나라와 약소국, 더 큰 나라와 좀 더 작은 나라들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침략과 억압의 전제적 폭군의 세계를 징벌한 후 약하고 강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족들이, 강대국과 약소국이 좀 더 평화롭고 정상적으로 사는 세계를 추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좀 역설적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칭기스 칸의 어떤 점이 그렇다는 것이죠?
“칭기스 칸은 남의 땅을 침략하여 자기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자기가 통치하는 부족이나 나라를 더 크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무모한 희생을 강요했던 여러 제국주의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독자들 가운데 그에 관한 사서들을 읽은 분들이 있다면, 저와 공감할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치 않았던 징벌전’으로 부족을 통일해 가는 칭기스 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주시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예컨대, 테무진이 칭기스 칸이 되기 전 최초로 전쟁을 통해 정복하는 메르키드 종족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이 종족과의 싸움은 테무진이 최초로 몽골의 여러 다양한 부족을 공격하게 되는 최초의 사건인데, 그 후의 그의 이른바 ‘정복활동’의 3가지 형태 가운데 그 3가지 대부분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전쟁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테무진의 메르키드 종족 공격은 결코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원치 않은 정복을 강요한 사건에 기인했습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 칸의 ‘원치 않은 정복 강요’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테무진은 나이 9살에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의 부족 올코노트 종족을 찾으러 갔다가 뜻밖에 콩그라트 종족의 데이 세첸을 만나 그 딸과 정혼했다. 나중에 테무진이 커서 다시 데려온 부인이 부르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은 어느 날, 메르키드 종족이 300명의 전사를 동원하여 새벽녘에 쳐들어와 그녀와 배다른 형제 벨구데이의 어머니를 납치해 갔다. 바로 이들을 되찾기 위해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칸과 또 다른 몽골 씨족인 자다란 종족 자모카의 힘을 빌려 탈환전쟁을 벌인다.
그다음 타이치오드 종족을 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메르키드 종족을 치고 종친들의 추대를 받아 테무진은 처음으로 자기 종족의 칸, 곧 ‘부족장’이자 오늘날의 종친회장으로 ‘칭기스 칸’의 칭호를 취했다.
그때 이를 시기한 같은 부족의 경쟁자 자모카와 그에 들러붙은 테무진의 족친들인 타이치오드가 싸움을 걸어온다. 그는 텡게르(하늘)의 뜻으로 이를 이긴다. 이후 칭기스 칸은 나중에 ‘몽골리아’라고 부르게 될 그 땅에서 여러 다른 종족들을 통일하게 된다. 결국 칭기스 칸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종족이 먼저 칭기스 칸에게 침공할 때 이를 방어한 전쟁에서 다른 종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 몽골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다음은 칭기스 칸이 타타르 종족을 친 계기는 금나라와 타타르 사이의 전쟁이다. 이때 그는 옹칸과 함께 타타르족을 협공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를 독살했기 때문이다.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부인과 아들을 정혼시킨 뒤 아들을 콩그라트 부족에 데릴사위로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예수게이 바아타르를 타타르 종족이 초청하여 독이 든 음식을 먹여 살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타타르 종족은 테무진 탄생 이전에 타타르 족 그들 자신에게 딸을 주면서 사돈관계를 맺으러 우호의 길을 간 칭기스 칸의 종조부 둘을 오히려 사로잡아 금나라 보내 나무 당나귀에 못 박혀 죽게 했다. 이처럼 피맺힌 한에 차 있던 칭기스 칸에게 그들(타타르 종족)이 자모카와 연합하여 쳐들어온 것이다. 결국 이 전쟁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칭기스 칸의 방어에서 시작한 복수전 내지 징벌전이다.
1206년 오논강 상류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된 칭기스 칸. |
두 번째 칸의 자리에 오른 후 금나라에 복수 결심
다음은 케레이트 종족과의 전쟁. 칭기스 칸은 한 때 자신이 의붓아버지로 모셨고, 친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옹칸과 원하지 않은 전쟁을 벌인다. 이 경우도 칭기스 칸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첫 도전에 실패한 자모카의 꾐에 빠진 옹칸의 아들이 끈질기게 권유하자, 이에 못 이겨 옹칸은 “내 아들(테무진)”을 외치면서 결국은 칭기스 칸에게 선제 공격했다.
칭기스 칸은 이 전쟁을 피하려고 계속 물러나 도망하며 싸움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자기가 예수게이 바아타르 친아버지 대신에 그를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게이 바아타르와 자기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을 여러 번 상기시키면서…. 그러나 케레이트는 진격해 왔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칭기스 칸도 결국은 대적했다. 그 결과 역시 이를 텡게르의 뜻으로 이겼다.
이어지는 나이만의 칭기스 칸에 대한 공격도 칭기스 칸의 방어에서 시작했다. 이 전쟁도 역시 이기고 나이만 왕은 죽고 그 아들은 카라 키타이(‘서료’라고도 하며 오늘날 동투르키스탄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어지는 땅에 있던 야율대석의 망명정권)로 도망친다.
이 싸움이 끝나, 1207년 그는 이제 자기 ‘몽골’ 종족만의 칸이 아니라, 모든 여러 서로 다른 당시 몽골리아 땅 여러 부족 모두의 ‘카안’으로 두 번째로 칭기스 칸의 자리에 오른다.
바로 이때를 이어서 그는 탕구트와 금나라를 친다. 탕구트는 거기로 도망간 메르기트, 나이만 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금나라는 예전에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 곧 커부려(큰 부여=고구려) 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이다. 칭기스 칸은 하늘에 “이 원한을 갚도록 해달라”고 기도한 뒤 후일 복수의 전쟁으로 금나라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대학살을 부른 호라즘 제국의 정벌 계기
전 박사는 “대체로 칭기스 칸을 세계 정복자라고 부르는 긍정적 평판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그를 ‘살인마’로 오해되게 한 계기를 준 대학살을 부른 호라즘 제국의 정벌의 경우를 이제 한번 보자”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경우 칭기스 칸이 호라즘 샤(황제) 무함마드와 그 아들 잘랄 웃딘의 호라즘 제국을 정복한 동기와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이 제국은 당시 이집트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 사이에 있는 광대한 아랍, 이란 및 중앙아시아 영토와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부에 걸치는 땅을 속령으로 거느린 대제국이다.
당시의 3개의 세계, 곧, 샤마니즘과 불교가 어우러진 아시아와 기독교 유럽세계를 잇던 중간지대가 바로 이슬람세계다. 이 때는 무슬림 아랍과 기독교 유럽은 이미 십자군 전쟁도 여러 번 치고 아직도 이를 계속하고 있던 때다. 그곳의 최고 권력자는 오늘날에도 유럽인들이 간간히 농담하듯이 말하는 ‘동방의 눈이 찢어지고, 머리색이 검은’ 칭기스 칸의 몽골사절을 무시했다.
호라즘 샤는 군주다운 예의로 외교사절단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몰살시키고, 그 막대한 물품마저 강도처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칭기스 칸은 이에 분개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 군대는 가는 곳마다, 복속하는 이들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도시들에서는 때로는 수 천명, 때로는 기록에 따르면 수 만명도 학살했다. 이것이 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 바가 컸다.
하지만 이 싸움의 계기와 과정을 보면, 그것은 바로 호라즘 샤와 그 아들 잘랄 웃딘 등의 도발 때문이라는 것이 명백하고, 또한 칭기스 칸의 의도와 의지도 명백했다.
이에 앞서 칭기스 칸은 호라즘 샤의 상인들이 온 것을 계기로 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이 가져온 값비싼 직물, 금은보화에 후한 값을 쳐주고, 그들이 돌아 갈 때 이번에는 자신이 대사들과 대상단, 그리고 자신의 친서를 호라즘 샤에게 보내 우호와 친선, 자유무역을 제안했다. 《집사》에는 칭기스 칸이 호라즘 샤의 상인들을 극진한 우호로 접견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호라즘 샤는 당시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온 상인들과 사신단을 통해 전달한 칭기스 칸의 우호와 친선의 메시지를 묵살하고, 칭기스 칸이 몸소 몽골 각 종족으로부터 선발하라고 시켜 한 조를 지어 보내온 450명의 사신단조차도 모두 몰살하고 그들이 수천리를 넘어 가져온 막대한 재물을 빼앗았다.
호라즘 샤에 대한 ‘신의 징벌전’을 시작한 칭기스 칸
이 소식을 들은 칭기스 칸은 분개하며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지만 오만한 호라즘 샤는 이를 다시 무시했다.
칭기스 칸은 드디어 “텡게르(하늘)”의 이름 아래 이 나라를 징벌하기로 맹세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 결과 벌어진 ‘징벌전’에서 호라즘 제국의 샤 무함마드와 그 아들 잘랄 웃딘은 심지어 이라크, 페르시아, 인도의 델리까지 이리 저리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
몽골군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소탕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몽골군은 이란, 아라비아 반도, 우즈베키스탄과 아제르 바이잔, 인도, 아프가니스탄 등등 도처에서 추적전을 펼치고 이 추격전에 방해하거나 적과 연합하여 대항하는 나라들을 정복한다.
호라즘 샤를 지지한 킵차크인들이 심지어 남러시아 킵착 초원, 헝가리와 러시아로 도망쳐 러시아인들과도 연합하여 대항했다. 칭기스 칸의 아들 주치의 몽골군은 이에 맞서 러시아와 동유럽도 치게 된다. 이 과정을 후세의 사람들은 ‘세계정복’이라고 표현했다. 이 싸움 때 칭기스 칸은 그가 정복한 땅의 백성들과 아미르(왕, 재상 등)들 앞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신의 징벌’이다”고 선언한다.
전 박사는 “이처럼 칭기스 칸의 이른 바 ‘세계 정복전’은 당시의 세계가 가진 전제와 폭군의 행패에 대항한 영구평화를 위한 최후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전 박사의 이야기.
칭기스 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아들과 손자들이 이어간 정복전쟁은 당시 칭기스 칸이 못다 끝낸 이 징벌전쟁의 계속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전쟁을 피하기 위기 전에 사전에 갖가지 외교적 노력을 취하고 전제적 폭군들을 향해 사죄하고 복속할 것을 적어도 러 번 요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칭기스 칸을 얕잡아보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칭기스 칸은 이런 과정이 지나서야 결국 정벌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또 호라즘 샤를 추격하는 이 대장정에서 몽골군은 말발굽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성들과 도시에 우선 먼저 사신을 보낸다. 성주에게 “내게 복속하면 그냥 지나갈 것이요, 저항하면 절멸시키겠다”는 평화와 위협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하면서 살륙을 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관행으로 한다.
그래도 현지의 아미르들과 백성들이 복속하지 않고, 오히려 칭기스 칸의 메시지로 설득하던 그의 사신들을 죽이거나, 그들에게 적대행위를 하곤 했다. 그후에야 몽골군은 화살과 창 끝을 적에게 돌렸다.
이상학 화백의 처인성 전투 기록화. 용인 부근 처인성에서 벌어진 고려-몽골 간 전투 상상도다. |
몽골이 고려와 전쟁을 한 이유
-그가 단순한 제국주의자나, 전쟁을 통해 자기 자신 또는 자기 민족, 나라의 권력을 극대화하려 한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시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또는 현대의 히틀러나 일본천황 등과는 다르다는 말씀이군요. 이들과 달리 칭기스 칸의 세계정복은 일종의 징벌적 성격이 강했다는 말씀이신데, 그렇다면 고려의 경우는 어떤가요.
“이들 서방과 벌인 싸움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심지어 고려와의 전쟁도 몽골입장에서 보면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고려를 침공한 몽골에 반감을 가진 우리들의 감정도 100% 이해하고, 또 모든 전쟁은 불행을 동반한다는 면에서 몽골의 고려 침공을 정당화할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독자들 가운데는 ‘몽골의 고려침략을 정당화하려고 하느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번이라도 몽골 측의 입장이 되어 당시 상황을 한번 살펴봐야 고려 몽골 간의 전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몽골은 고려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는데요.
“말할 것도 없죠. 중요한 점은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당시 다른 나라들과는 처음부터 매우 특이하였고, 달랐다는 겁니다. 칭기스 칸이 펼친 세계 정복전의 길 위에서 제가 아는 한 고려만이 몽골의 ‘형제국’이 되었던 유일한 나라입니다.”
-복속관계가 아니고, ‘형제국’이 되었나요?
“복속관계는 나중에 이야기고, 우선 형제국이 된 계기를 말씀드리면, 칭기스 칸 생전에 거란 왕조의 금산태자 일당이 대요수국을 세우려다 몽골에 쫓겨 도망가는 길에 고려의 강동성(평안남도 강동)으로 처들어가 점거하고는 경기도를 거쳐 충북 제천까지 처들어 아수라장을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추격하던 몽골은 고려에게 지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안 그래도 안마당에 붙은 불과 같은 이 사태에서 고려는 당연히 협조했겠죠. 이후 금산태자 일당 수십만을 이기고 두 나라는 ‘골세(만년)에 이르는 영원한 형제국’이 되기로 맹세합니다. 이는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칭기스 칸의 역사상 ‘형제국’을 논의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예일 것입니다.”
‘형제국’에서 적국으로
-거란을 협공으로 물리친 것을 계기로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씀이신데, 이런 형제국이 왜 전쟁을 하게 되는지요.
“형제국이 된지 8년 후 몽골사신 착고여(着古歟, 저고여라고도 함)가 살해되는데, 우리 국사에서는 몽골이 이 사건을 단순한 침략 명분으로 활용하고 고려를 침공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국사책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원사 외이열전》과 《해동역사 제14권》에 보면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형제국이 되자고 한지 얼마 후 형제관계를 맺은 몽골 장군 찰라(劄刺)를 살해했고, 또 8년도 못 가서 고려는 몽골 사신 착고여를 압록강에서 암살했고, 그 외에도 고려는 이를 책망하러 온 몽골 칙사에게 활을 겨누어 쫓아내려고 하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 등 5번의 도발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순전히 몽골 입장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고려를 정벌할 명분이 있었다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호라즘 샤의 행동이나, 금나라에 대해서는 즉각 행동을 개시한 칭기스 칸 자신은 생전에 고려를 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아들인 어거데이 칸 시절에 이르기까지 고려에게 사신을 보내 몽골측은 여러 차례 사죄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금 말한 그 고려의 5가지 적대행위를 하나 하나 열거 하고는 이를 이유로 들어 고려 정벌을 시작합니다.”
전 박사는 “사료 상에는 송나라나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한대로 몽골도 조공을 요구했다는 기록은 분명 보이지만, 몽골 측이 먼저 고려에 대해 적대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며 “그런데 고려는 칭기스 칸 때 ‘형제국’이 된 뒤 5번이나 연이어 적대행위를 했고, 이것이 결국 전쟁의 빌미가 됐다”고 말했다.
“물론 고려가 몽골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에는 오늘날 우리 국사책이 말하듯이 몽골이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는 등 그 나름대로 고려 측의 고충도 있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몽골은 이미 ‘세계정복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려는 그 몽골의 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몽골의 고려 침략이 정당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섯 가지 고려의 적대행위를 몽골 측에서 본다면 고려 정벌전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를 결국 철저히 몽골 입장에서만 이 전쟁을 보자면 고려 침략은 앞서 다른 나라를 ‘징벌’한 것처럼 악행을 한 적대국에 대한 ‘응징’ 차원이 되는 겁니다.”
MBC 드라마 기황후의 한장면. 기황후는 4명의 고려출신 몽골 제국 황후 중에 한명이다. 몽골 제국에서는 오직 두 씨족 출신의 여인만이 황후가 될 수 있었는데, 고려만 특별히 예외를 인정받았다. |
‘고려공녀’에 대한 오해
-몽골이 고려에 공녀를 요구해서 반발이 심했다면서요.
“몽골이 이른 바 ‘고려공녀’를 요구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약소국의 설움으로 개탄하는데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몽골공녀’가 먼저입니다. 1231년 12월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와서 수도 개성을 함락시켰고, 고려 고종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후 공식적으로 29년의 세월동안 두 나라는 지루한 전쟁과 짧기만 한 강화를 되풀이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241년 4월 두 나라 사이의 강화를 위해 왕의 조카를 왕자라고 속이고 볼모로 몽골로 갔던 영녕공(永寧公) 왕순(王綧)왕순이 몽케칸으로부터 먼저 몽골황녀를 아내로 내려받아 몽골에 눌러앉아 살면서 두 나라간의 화해를 위해 중재합니다. 적어도 몽골측이 먼저 두 나라 군주 가문 사이에 혼인을 제안하고 실행하여 전쟁 중에 사돈국가가 된 것입니다.”
전 박사는 “좀 더 나중에는 고려 원종의 아들이 칭기스칸의 손자 원 세조 쿠빌라이 칸 때인 1271년에 강화를 위해 원나라로 갔다가 쿠빌라이 칸의 부마가 된다”고 말했다.
“<익제난고권 제9상세가(益齋亂稿卷第九上世家)>를 보면 당시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놀라고 기뻐서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만리(萬里)나 떨어진 나라이다. 당(唐) 태종(太宗)이 몸소 쳤지만 따르게 할(服) 수가 없었다. 이제 세자(世子)가 스스로 와서 내게 귀부했다. 이는 하늘의 뜻(天意)이다. 크게 상을 내려라(大加褒奬)’>라고 하고 자신의 딸 황녀 후투룩겔마스(忽都魯揭里迷失)를 시집보낸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그녀에게서 난 외손자 왕장, 곧 충선왕을 무척 총애했다고 합니다.”
-혼인 관계로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 지위가 된 것을 고려공녀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미입니까.
“쿠빌라이 칸은 그로부터 훨씬 뒤 1287년에야 이른 바 고려 여인을 후궁으로 받아들이 위해 처음으로 공녀제도를 만드는데 이를 통해 고려와 몽골은 ‘쌍사돈 국가’가 됩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고려 여자는 44회에 걸쳐 총170명이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이 ‘고려공녀’들을 그 무슨 ‘양공주’이기라도 하는양 묘사합니다.”
전 박사는 “이는 이른 바 ‘고려공녀’의 역할이나 성격을 완전히 잘못 파악한 오류”라며 “그여자들은 사실은 원나라 황제들의 후궁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뽑혀간 여자 중에서 황후만 해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도 기황후 하나가 아니라, 고려 왕황후(王皇后), 다르마시리 김씨 황후 등 3명이나 나왔습니다. 또 사실상의 황후급인 곽비까지 친다면 4명입니다. 그 외 후비와 나아가 북원시대의 후비를 치면 십수 명에 이릅니다.”
‘공녀’가 아니라 황후나 비빈으로 특별히 선별된 고관대작의 여인들
-그러니까 ‘공녀’가 아니라, 황후 후보로 선별되어 간 분들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원말의 도종의가 말했듯이 ‘몽고78종’이라는 말도 있듯이 당시 몽골씨족이 무척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도 오직 콩그라트, 예키라스 두 씨족만이 황제의 후궁과 황후가 될 수 있었는데, 다른 나머지 모든 몽골씨족들을 제치고 고려여인이 방금 말한 두 씨족과 같은 반열에 들어선 겁니다. 말하자면 황제의 자손들을 잇기 위해 고려에서 뽑혀온 고관대작들의 딸들이죠.
그들은 그러므로 ‘공녀’가 아니라 ‘선입고려녀(選入高麗女)’, 곧 ‘원나라 황후 비빈이 되기 위한 후보로 고려에서 뽑아들여 온 특별히 뛰어난 여성’입니다.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고려사 연구 학자들이 몽골의 ‘황후종족 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고려 측에서 여자를 보냈다는 한 가지 측면밖에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양공주 대하듯 잘못된 평가가 나온 것이지요.”
전 박사는 “반대로 고려 왕실이 원 제국의 황실과 통혼하여, ‘훈신(勳臣), 세족(世族) 및 나라를 봉 받은 군주(封國之君)’로 대우 받은 것은 심왕(瀋王) 왕고(王暠)와 고려왕 5명을 포함, 모두 6명이며, 그들과 혼인한 몽골 여인은 기록상 최소한 1명의 황녀, 7명의 공주(왕의 딸, 곧 황제의 손녀), 1명의 평민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이라며 “이런 관계는 몽골제국과 다른 그 어떤 나라와의 관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칭기스 칸의 세계제국이 다른 세계제국과 다른 이유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습니다. 이제 고려의 경우를 떠나, 앞서 말씀하신 ‘세계정복’ 부분을 계속에서 말씀 해주시죠. 조금 전에 칭기스 칸과 그 일가 3대의 ‘세계정복대장정’은 단순한 침공을 통한 ‘세계정복전(征服戰)’이라기 보다 오히려 ‘세계적 규모의 징벌전’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세계제국을 지었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 어떤 인물이 위대하다고만 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세계제국은 그것을 누가 지었던 간에 막대한 인명의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미주 대륙을 보세요. 스페인인들이 그 땅을 발견하고 들어오고, 영국과 유럽의 종교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피신해 간 유럽 이주민들은 지금부터 600년 전에 이미 남북미의 6000만을 몰살시켰다고 남미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인디언 학자들과 미국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만일 당시 인디언들이 몰살당하지 않았다면 그 인디언(아메리카 토착민, 현재 북미 인구의 1% 정도) 인구가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의 전 인구수와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북미인구는 당시 유럽인들이 북미에 도착한 이후 지속적으로 개척전쟁, 고의적 페스트 유포, 인디안 사냥 등으로 몰살당했고, 원주민 인구대신 유럽인들이 그 자리와 수를 채웠다는 이야기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대동아 공영권 등 다른 예는 더 들 필요가 있나요? 가능하면 이런 일이 없어야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바람일 뿐이고 이런 일은 이미 인류역사상 여러 번 벌어졌습니다. 어차피 그 사건들은 불가피했기에 벌어진 것이죠.”
전 박사는 “그렇다면 이제 와서 이 제국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모든 제국전쟁은 ‘나쁘다’라든가, 제국을 지었다는 자체가 ‘위대하다’라는 이분법적인 평가가 아니라, 우리의 물음은 제국을 지으려던 그들이 도대체 무슨 원인, 무슨 계기, 이유로 그 제국을 지으려 했거나, 지었느냐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지을 때 어느 정도의 피해를 통해 지었느냐도 살펴봐야합니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참살과 파괴를 동반해 이루어진 그 제국이 역설적으로 혹은 결과적으로 인류와 세계 역사에 도대체 어떤 공헌을 했느냐 하는 것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려 이웃 나라를 정복했던 역대 ‘세계 정복자’들
-인류 역사에서 세계제국을 세우려 한 경우를 들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간단히만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보면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시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태리의 무솔리니, 일본천황 등등 여러 제국주의자들이 나름대로 그들 시대에 제국을 건설하여 자신들만의 세계질서를 세우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패한 제국은 영국과 프로이센 및 유럽 여러 나라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조금 예외이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 대부분이 자기에게 해도 가한 적이 없는 이웃 나라들을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침략하여 거대한 제국을 세우려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시대에 망했다는 겁니다.”
전 박사는 “이들은 모두 다른 권력자, 다른 부족과 다른 나라를 자신의 정복전으로 희생시키고, 단지 자신의 권력과 자기 나라의 확장에만 관심을 가진 전형적 독제적, 침략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이었다며 “대표적으로 ‘위대한 독일’,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평화적이던 이웃나라를 침략한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경우를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물들과 같은 인간의 공통적 권력욕구가 칭기스 칸에게도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 칭기스 칸에 관한 사서의 기술에 나타난 그는 제가 아는 한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분명히 정당한 이유와 명분이 없거나, 또는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 해를 가한 원한관계가 없는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외교 사신들을 보내 평화적 교류와 협력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아들과 손자 대에 와서의 일이긴 하지만, 유럽군주들에 대한 외교사절단들이 그런 것들이지요. 또 설사 상대가 자신 또는 몽골인에게 해를 가했더라도 사죄하거나 항복했을 경우에는 결코 더 이상 징벌하지 않았다는 특이한 점이 보입니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것이죠.”
호라즘 제국을 정벌하는 칭기스 칸 군대를 그린 인도 모굴제국의 그림. |
-칭기스 칸의 정복전쟁이 다른 인물들의 정복전쟁과 특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흥미롭게도 칭기스 칸이 이끈 전쟁에는 몇 가지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는 칭기스 칸 측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선제공격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기는 것입니다. 메르키드족에게서 부르테 우진을 되찾아오기 위한 탈환전만 제외하고 몽골 여러 부족들의 통일 과정이 그런 것입니다. 칭기스 칸 자신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침공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겨 통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히틀러나 천황 같은 다른 제국주의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정복자’가 되려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복을 기도하는 부족과 소왕국의 침략을 방어한 것이죠.
둘째는 자신의 선조, 몽골부족 또는 자신이나 자신의 외교대표단에 대해 다른 쪽이 가한 해에 대한 징벌전입니다. 그가 먼저 도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발을 받은 결과 징벌을 결심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칭기스 칸 징벌전을 보여주는 가장 현저한 예는 유럽세계와 아시아 사이의 가장 거대했던 이슬람제국 호라즘 제국 징벌 및 정복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징벌전’ 도중에 적군 또는 상대방과 연합하여 대항하거나 그 징벌전을 방해한 측에 대한 전쟁입니다. 킵차크인, 헝가리, 러시아 공국들 등과의 다른 전쟁들이 그러한 유형입니다. 동방에서는 송나라 정벌이 그에 포함됩니다.”
전 박사는 “이 세 가지 유형의 전쟁의 결과가 이른 바 칭기스 칸 일가 3세대의 ‘세계정복전’으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넷째는 좀 더 순수제국주의에 가까운 제 4형태입니다. 이는 칭기스 칸 때가 아니라, 손자 때에 와서 그것도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월남, 참파, 버마 등 인도지나와 자바 등 동남아 정복전입니다. 다른 역사상 제국주의자들이 주로 이 네 번째 전쟁 형태를 위주로 했는데, 칭기스 칸 가계 3대의 경우 이와는 다른 유형의 전쟁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칭기스 칸의 경우 정복전이 아니라, 중세기적 ‘정전(正戰: 바른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러한 정복전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단지 그를 단순히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세계정복’을 이룩했다는 한 가지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다면, 모든 제국의 건설자들도 마찬가지로 칭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단지 막대한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부른 전쟁을 쳤다는 것만 보고 그가 살인마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평가는 거꾸로 금나라나 호라즘 샤와 같은 야만적 행동으로 열국간의 세계평화를 위협한 폭군들이 오히려 좋은 사람이었다고 찬양하는 역설적인 결과가 되지요. 칭기스 칸을 무턱대고 ‘야만적 살인마’니, ‘전쟁광’이니 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대를 이어 번영한 칭기스 칸의 제국
-네, 공감이 가는군요. 오랫동안 서양 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선입견의 영향으로 칭기스 칸을 히틀러 같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정복자나 야만적인 살인마라고 생각해 왔다는 의미군요.
“네, 칭기스 칸을 단순히 인류최대의 대제국을 지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본다면, 그것은 그의 인성과 인격, 그의 시대의 참담한 세계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웅은 한 시대가 낳은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한 행동은상당부분이 자기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기보다는 자기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전쟁을 통해 살육과 문명의 파괴만을 일삼고 자기 자신의 권력만 확장하려 한 제국의 건설가라고 보는 관점은 더더욱 당시 세계의 실정을 모르고 내린 잘못된 관점입니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부족, 국가, 국제, 문명 간에서 끊임없는 폭력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당시 세계의 진면목과 역사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편협한 관점입니다. 그의 징벌전이 나쁘다고 한다면, 거꾸로 그의 징벌전을 유발한 그 제국들의 폭행과 전제, 횡포는 정당했다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제가 방금 조금씩의 예를 들어 설명 드린 바처럼 칭기스 칸이 정복의 길로 나선 원인, 이유, 동기, 그 과정의 적법성을 보아야 하고, 또 그 결과 그가 지은 세계제국이 과연 다른 제국과 달리 후세에 무슨 공헌을 했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 제국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 또는 로마의 시저처럼 또는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전쟁과는, 정당한 전쟁의 계기나 명분도 없이 출발하여 당대에 무너진 다른 제국들과 다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칭기스 칸 연구가인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의 말을 빌리면, 그의 제국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30억 인구를 포괄하는 나라의 영토에 지어진 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년 이상 번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칭기스 칸의 대제국이 조각 조각 나뉘어 붕괴된 후에도 러시아, 터키, 인도, 지나와 페르시아 등에서 그의 후손들은 칸, 황제, 술탄, 왕, 샤,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의 다양한 칭호를 쓰면서 작은 제국과 나라로 700년 이상 존속했다고 평가합니다.
그 외에도 인도에서는 모굴 왕조로 1857년까지 존속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920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제국의 건설을 꿈꾸었던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른 점입니다.”
칭기스 칸은 ‘현대세계의 창출자’
“또 잭 웨더포드는 그의 공로를 말합니다. 당시에 세상은 서로 갈리어져 서로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독교 사회의 유럽세계와 이슬람 세계, 아시아의 샤마니즘과 불교, 유교 세계 등으로 갈려져 있었다고요. 이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 것이 칭기스 칸의 제국입니다. 잭 웨더포드는 그래서 그를 ‘현대세계의 창출자’라고 부르죠.”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잭 웨더포드는는 칭기스 칸이 외교특권을 수립하고, 고문을 철폐했고,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와 역을 만들고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해 뜨는 극동에서 해 지는 서구까지 과학과 예술과 문화와 상품이 교류되도록 평화적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보고 극찬합니다.
인류사회에 대한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공헌을 한 그와 그 가문의 이 이야기는 또 다시 몇 권 분량의 긴 책이 필요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줄이도록 하죠. 다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오늘날 프랑스의 역사학자의 글을 하나 인용할까 합니다.”
아래는 전 박사가 소개한 프랑스 역사학자의 글 인용문이다.
<학살은 잊혀졌고, 대신 칭기스 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의 막대한 파괴 뒤에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칭기스 칸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그는 죽었으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앵빌(Jean de Joinville: 유럽 십자군전쟁 시대의 사가)은 ‘그는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 평가는 외면상으로는 역설적이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 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 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을 당하지 않은 채 [나이 먹은 여인이]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삭(칸의 칙령, 법률: 전박사 설명)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nggis-Qana’를 확립하였다.>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유목 제국사 및 윌리암 마일스(William Miles) 중령 번역의 《투르크의 계보》중)
-지금까지 칭기스칸이 ‘위대한 정복자’, 또는 그 반대의 ‘나쁜 사람’ 이라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분석을 해주셨는데요.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박사님의 노력으로 인해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룬 칭기스 칸의 선조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실제적 진실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만약 칭기스 칸의 혼령이 있다면 그 동안 천추에 맺힌 한이 풀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서야 그의 혼령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그 조상들과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비록 고구려- 발해가 오래전에 망해서 사라진 나라이지만 그 후손인 칭기스 칸은 선조들이 겪은 아픈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칭기스 칸과 함께 또 다른 고구려 -발해의 후손인 우리도 현재 남북분단과 강대국 사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결코 좌절하지 말고 역경을 이겨낸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주몽의 후손인 칭기스 칸이 주는 교훈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로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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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행이 신라인이라는 독자들의 오해에 대한 답변
글 전원철
지난 3회에 걸친 제 인터뷰를 보고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과분하게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우리는 결국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 아니냐”, 혹은 “모든 인류는 결국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등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어떤 분은 저보고 “우리 고대어를 제대로 공부해라” “금시조 대함보가 아니라 김함보이다” 등 비판의 소리를 보낸 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더욱 정확하고 자세한 연구가 나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단, 우리가 아니, 전세계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것과 민족사의 인식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이곳에서 논의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다시 우리를 집어삼키거나, 외적이 우리를 점령해도 우리는 다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자식이므로 상관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이죠. 또한 제 고대어 풀이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소략하게 나오지만, 제 책에 더욱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제가 꼭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금행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책에서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바로 고구려-발해 왕족이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금 시조의 아버지 금행이 바로 고려 왕건, 금태조 아골타, 그리고 칭기스 칸 세 가문의 직계선조로 이들 사이의 잃어버린 핵심 고리이며, 그는 또 청나라 누르하치의 선조임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독자분 중에서 금행을 왕건과 같은 시기의 ‘신라인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라고 확고하게 믿으며, 저의 연구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결코 독자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6년 이후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이 저서나 언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고, 댓글을 단 독자분도 그런 잘못된 정보 외에 다른 정보를 그 동안 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이 문제를 쉽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라인 김행(金幸)’과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 혹은 金幸)’은 동시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은 왕건의 외증조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은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함보’라고 주장합니다. 경순왕은 왕건보다 30여 년 더 나이가 적은 항렬인데 그 아들이면 왕건보다도 거의 두 세대 차이로 아래 도표가 보여주듯이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나이입니다. 또한 어느 기록에도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고 기록된 사서나 족보가 없는데도, 일부 학자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설(마의태자가 금행의 아들인 함보라던가,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는 등)을 퍼뜨려 온 겁니다.
그들은 금 희종 완안 단 시대에 송나라 사람 홍호(洪皓)가 1155년경 지은 《송막기문(松漠記聞)》과 남송 때 1234년경 우문무소(宇文懋昭)가 편찬한 《대금국지(大金國志)》에 ‘여진추장은 신라인’이라고 적어둔 것을 문자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함보가 신라인이고 그렇다면 그 아버지가 《고려사》에 금행으로 되어 있으니, 함보는 신라김씨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같은 사람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대금국지권수 금초흥본말》과 1777년~1778년에 쓰인 《흠정만주원류고》 둘인데, 이 사서들은 “대개 신라 땅(新羅之地)이 고려에 병합되어 들어갔으므로(并入髙麗), 이 때문에 어떤 이는 고려라 하고 어떤 이는 신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다 한 가지 말이다(故或云髙麗或云新羅其實一也)”고 합니다.
함보가 원래 살았던 땅이 원래 발해(-고려) 땅이었다가 당-발해-신라 전쟁으로 빼았겨 신라의 땅이 되었다가, 다시 발해 선왕 때 금행이 빼앗았다가 함보 시절에 또 다시 신라 땅이 될뻔했다가 그 손자 시절에는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또 얼마 안 가 나중에는 송나라에서는 “신라”사람으로 이해된 왕건의 땅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함보의 “지적(地籍)”이 아니라, 그의 “족적(族籍)”을 보아야 하는데, 우리 일부 학자들이 금행과 김행이 한자로 그 이름 하나가 같다는 것과 여러 사서 중에서 두 사서가 “신라인”이라고 하는 한 마디에 깊은 연구도 없이 책을 쓰고 인터넷에 올리고 KBS방송의 역사스페셜 등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대중을 오도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람들이 혼동을 하는 유일한 이유가 단 하나 이름이 같고 한 두 사서가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는 정도로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겁니다.
하지만,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그 이름을 원래 금행(今幸)으로 쓰고 다른 하나로 금행(金幸)으로 써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이름은 당연히 “금행”이고 뒤의 이름도 “(쇠)금행(金幸)”입니다.
발음은 신라의 “김”성이 아니고, 발해의 “대”성의 우리 말인 “큰/큼”을 이두식 한자를 써서 적은 “금(今, 金)”성이죠. 다시 말해 “금(큰)-행(칸)(今幸)”은 그 성씨를 한자로 바꾸면 “대-행(大-幸)”이라는 말이고 이는 후대에 “대칸(大汗)”으로 쓰죠. 그래서 저는 일부러 《고려사》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글자 ‘금(今)’ 자로 쓴 겁니다. ‘안동 권씨 시조 김행’과는 구분하라고 하는 뜻에서요. 그러니까 금행과 신라인 김행(권행)은 동명이인이지 절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우선 두 분이 산 연도가 다릅니다. 금행은 아래 도표에서 보다시피 김행(권행)보다 대략 120년 전의 사람입니다. ‘신라인 김행’이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 된 이유는 김행이 후백제의 견훤의 군대를 안동에서 물리치고 그 지방을 들고 왕건에게 귀부해 왔을 때, 왕권이 그에게 공을 세운 상으로 김행에게 안동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의미에서 ‘권’이라는 성을 하사합니다.
그 ‘권행’과 그보다 4세대전의 ‘금행’을 혼동하는 그 오류를 바루기 위해 저는 제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송(宋) 광종(光宗)소희5년(紹熙五年, 1194년)에 쓰인 《삼조북맹회편》이 함보, 곧 “여진[추장]은 주몽(朱蒙)의 후손이고 말갈(靺鞨) 씨”라고 하고 또 앞서 말한 대로 학자들이 ‘권행’이 여진추장이라고 오인할 수도 있도록 또 다시 “여진추장은 곧 신라인”이라고 말한 그 《대금국지》조차도 그가 “발해에서 갈라진 별족(別族)”이라고 한 것도 제 책에서 인용해 두었습니다.
또 《흠정만주원류고》도 “발해왕(渤海王)이 금나라의 선조이다”고 하는 것을 다시 인용해두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함보의 7세손 아골타가 《금사》에서 양박을 시켜 발해유민들에게 말한 대로 자신이 속한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집안(同一家)”이라고 한 것도 인용해두었습니다.
또 그 외, 그들이 살던 시대가 918년 후의 여진시대가 아니라, 810년대의 발해시대이고, 그들이 살던 곳도 황해도 평산과 함경북도 길주이며, 그들의 직업 또는 직책은 서해(발해)군왕 및 반안군왕이었고, 아들의 수자도 신라인 김행(권행)의 아들 1명과는 달리 금행의 아들 수는 3명이었고, 금행이 살던 시대는 ‘신라인 김행’보다는 적어도 4세대 빠르고,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시대보다는 5세대 전의 훨씬 이른 때라는 등등 8가지 이유를 들어 기존학자의 설이 잘못임을 증명해 두었습니다.
이 가운데 《금사》 하나만 보더라도 금사에는 “금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고 하고 있을 뿐 ‘김-함보’라고 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우리 학자들, 예컨데 김운회 교수 등이 그 정사 《금사》에 그를 ‘김함보’라고 적었다고 잘못된 주장을 했습니다. 《금사세기》에는 ‘김함보’는 절대 없습니다. 또 《금사 고려전》에는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기록했을 분, 함보에 관한 언급을 한 적도 없습니다.
<金史> | <大金國志, 卷一> | <고려사> | <고려사> | 비고 |
금행(今幸, 金幸, <고려사>) | 작제건 아버지(발해시대, ?~*819년?) |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 | 금행=서해용왕 | |
함보=큰바=큰가(函普) | 감복(龕福) (작제건 아내 용녀의 형제/작제건의 처남/ 용건 외삼촌) | 작제건 (발해시대, ?~*849년?) | 용녀(작제건 아내) | 아들(1대) 세대 |
오로(烏魯) | 胡來 (용건 외사촌 형제) |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년 5월)-후삼국시대 | *궁예 세대 | 손자(2대) 세대 |
발해(跋海) 신라인 김행(金幸) 세대 | (왕건 외6촌 형제) 918년 왕건의 고려 성립, 926년 발해 멸망 | 왕건 (고려 태조, 877~943년, 재위: 918~943년) | 궁예 아들 세대 | 증손(3대) 세대 |
수가(綏可) 경순왕(909?~979년) 세대 | (안종 외8촌 형제) “[*발해가 망해] 거란을 섬기다(臣伏契丹)”<삼조북맹회편> -발해가 거란 치하에 들어간 시대 | -왕건의 맏아들인 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세대 -[*셋째 아들] 제3대왕 정종(定宗, 923~949 재위: 945~949) -[넷째 아들] 제4대왕 광종(光宗) [925년(태조 8)∼975년(광종 26)/ 재위 949년∼975년/ 고려 제4대 왕] -안종(安宗, ? ~996년) | 4대 후손 | |
석로(石魯), 아내 고려여인 후비의 아들이 호실답(胡失答) 마의태자 세대 | (현종 외10촌) 북국 여진의 남국 고려에서 취한 아내 | 현종(顯宗, 992~1031년 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년) -안종(安宗, ? ~996년) 아들 세대 | 5대 후손 | |
오고래(烏古乃, ? ~1074, 재위 1021~1074년) | 호래(胡來) (문종 외12촌) | 문종(文宗, 1019~1083년,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년 | 6대 후손 | |
핵리발(劾里鉢, 1039~1092년, 오고래 둘째 아들) 파랄숙(頗剌淑), 영가(盈歌) 형제 | 양할(楊割) (숙종 외14촌)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숙종(肅宗, 1054~1105년,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년) | 7대 후손 | |
아골타(阿骨打) 1068~1123년, 핵리발 둘째 아들) | (예종 외16촌) 楊割生三子:長曰阿骨打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예종(睿宗, 1079~1122년.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년) | 8대 후손 |
*는 추정을 나타냄
위 도표는 그들이 살던 시기를 알기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바로 그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 왕우 때 “형인 금나라 황제가 아우 고려 국왕에게 말 하노니 형제나라가 되자”는 국서를 보내옵니다. 그러므로 아골타는 예종과 같은 시대, 같은 세대인데, 바로 그 예종의 8대 선조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아버지인데, 그는 왕건의 외증조부(3대 조부) 금행과 같은 세대라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다시 말해 아골타의 8대 선조 금행은 예종 왕우의 선조 때 외가쪽 8대 선조 금행입니다. 이 분은 왕건의 3대 선조입니다. 그런데, 신라인 김행은 왕건과 동시대인이고, 김행과 왕건은 또 아골타의 5대 선조인 발해(跋海)와 같은 세대인물입니다. 그런 김행이 왕건의 3대 외조 금행일 수가 있습니까.
또 왕건에게 신라를 들고 귀부해온 경순왕은 왕건의 아들 세대이고, 그 아들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세대입니다. 마의태자는 아골타의 3대조인 석로(石魯)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그 마의태자가 아골타의 8대조인 금행이나, 7대조인 함보가 될 수 있나요?
금행은 금행→키얀(澗)의 아들→키얀(澗)→일하→대야발의 계보속에 있습니다. 제 책에는 자세한 설명과 왕건과 아골타 가계도표까지 첨부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학자들의 설의 진위도 파악하지 않은 독자분들이 이미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같은 내용의 댓글을 반복해서 다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잘못된 지식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고정관념이 될 때 그 파급효과는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 비치된 제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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