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은 가고 없어도 그 적 바라볼 땐 하늘이었어 시리디 시린 파아란 하늘 그러다가 바라본 건 무지개였지 하늘 수놓을 일곱 빛 무지개 아, 이제 바라보노라니 깃발뿐이야 황진(黃塵)에 찌든 개선장군 깃발 다가갈수록 꿈은 작아지는 것 그런 줄 알았으면 꿈에나 살 걸. / 졸 시 ‘성황당에서’ 전문 내 고향 서낭당 고개 돌무덤에 돌 하나 올려놓고 떠나온 뒤 여러 해 만에 다시 그 돌무덤을 찾는다. 고향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나서 자란 곳이 고향이라면 거기엔 어머니가 있거나 있었음을 떠올린다. 나서 자란 곳이 고향이라 한다면 거기엔 푸른 들판과 그를 가로지르는 시냇물,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있는 산하가 있음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우린 어머니의 젖과 산천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며 자랐다. 그러기에 고향은 탄생과 실존의 근원이라 하겠다. 우리에게 고향은 무엇인가? 고고성(呱呱聲)을 울리며 어머니의 자궁을 이탈할 때 우리는 고향을 맞음과 동시에 이미 떠나감이 예감되어 있다. 고향은 떠나감을 내포한다. 신체적 탯줄을 끊어버림은 이탈이기 때문이다. 타향에서 보는 것이 고향이며 멀리 떨어져 그리워함의 대상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붙잡아둠의 의미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 신체적 탯줄은 끊었으되 정신적 탯줄은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탯줄은 우리를 고향에 붙잡아두거나 머리나마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향이나 어머니는 우주 인력의 근원이며 구심력과 원심력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는 물체 질량의 제곱에 비례하고 물체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고자 함은 욕망의 크기에 비례하고 고향에 되돌아가고자 함은 귀소본능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하겠다. 고향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고향을 시발점과 종점으로 하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떠나감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돌아옴의 길이다. 하나는 가지 않은 길이요 개척의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미 가본 길이요 뉘우침의 길이다. 하나는 슈베르트의 군대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옛 서라벌의 회소곡(會蘇曲)이 내려 깔리는 길이다. 하나는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의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길이다. 고향은 단거리 경주의 출발선이고 마라톤의 회귀점이며 개선과 회한의 보따리를 풀어놓는 곳이기도 하다. 나에게 고향은 무엇인가? 서낭당 고개 돌무덤에 돌 하나 올려놓고 떠나온 지 여러 해 이제 그 돌무덤에 돌아와 서성인다. 빈 하늘을 바라보다 돌 하나 더 얹어볼 뿐이다. 고향은 내게 넌지시 말한다. 두 어깨 내리누르고 있는 저고리 벗어 팔에 걸쳐 보라 한다. 단단히 매여 있는 넥타이도 느슨히 풀어 보라 한다. 와이셔츠 사이로 스미는 서늘한 바람이 나를 반기고 서녘 하늘의 저녁놀은 발그레 웃어준다. 아, 나의 고향은 여기 이렇게 역력하구나.(어느 가을의 단상) 다시 고향마을에 가만히 들려본다. 옛날 같으면 여기쯤 다다를 때면 산마루 넘어 학교 운동장에선 뻐꾹 왈츠소리도 들렸건만 빈 들에 쌓아놓은 시래기 더미 위에 까마귀 떼만 두리번거리는구나. 까막까막 까악 까악 고시 패스해 사회정의를 실현하리라던 내 친구 의구. 그래서 이름조차 義求라 지었다던 친구. 이제 환갑 칠순 다 지나 몰골이 흉흉한 채 시궁창에 뒹굴던 이야기나 꺼내며 손사래를 친다. 의구 병태. 한몫 크게 잡아 고향에 아스팔트길을 내리라던 내 친구 병태. 그래서 이름조차 秉太라 지었다던 친구. 이젠 속까지 다 긁어내고 病胎가 되어 다 갖다 바치고 뜯긴 이야기나 꺼내며 양미간을 찌푸린다. 의구 병태. 그럴 줄 알았으면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살걸 그랬다는 내 친구,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어디 한둘뿐이랴. 그래도 물장사하던 제 어미 치맛자락 붙잡고 자란 내 친구 봉이. 이젠 산전수전 다 겪고 어딘지에 호프집을 차렸다는데 한강 물 팔아먹는 김선달 흉내만 아니 낸다면 나 이제라도 거기에나 마지막 투자를 해 호프(Hope)를 팔아먹고 사 먹고 하련만 그게 어디쯤이련지 아는 이 누구던가. 까막까막 까악 까악 다시 찾아본 고향마을엔 정적만 감돌뿐 서낭당 가는 길도 막혀버리고 그 아래 옹달샘도 파헤쳐져 수렁이 되어버렸으니 고향하늘 한번 서울하늘 한번 올려다보며 되뇐다. 카르페 디엠! 옛날은 가고 없어도 오늘을 노래하자.
내게 고향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직 고향집 뒷뜰에 어릴 적 나만의 비밀기지가 남아 있는 곳. 고향은 고향을 떠난 자에게만 있다. 한없이 커버린 마을 어귀 팽나무, 너무 늙어 원줄기에는 이제 저승꽃이 피었다. 그곳을 떠나 버스에 몸을 실어 군입대를 했고, 이역만리 월남에서 고향 그리는 편지를 매일 썼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ㆍ
고향에 가고파도 그 고향이 아닙니다ㆍ
그렇지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온데 간데 없으니까요.
이젠 앉은자리에서 잘살아야겠어요.
내게 고향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직 고향집 뒷뜰에 어릴 적 나만의 비밀기지가
남아 있는 곳. 고향은 고향을 떠난 자에게만 있다.
한없이 커버린 마을 어귀 팽나무, 너무 늙어 원줄기에는
이제 저승꽃이 피었다. 그곳을 떠나 버스에 몸을 실어
군입대를 했고, 이역만리 월남에서 고향
그리는 편지를 매일 썼다.
고향은 누구나 마음속 향수를 느끼는 단어지요.
글선물 감사합니다
~단결~!
고향은 고향을 떠난 자에게만 있다~
명언록에 올려야겠네요.
군에야 저도 다녀왔지만 월남전에 참여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세월 지난 자리 그 자리가 아무리 풍성히 꾸며졌어도 돌아 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은 모습이 되어 가 본들 가슴엔 쓸쓸함만 가득하지요
그래도 추억만은 남아 엷은 미소도 지어보는 거니까요~
변변치 못한 글에 너무 멋진 글을 쓰셨네요.
"고향은 탄생과 실존의 근원"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과거 친구들의 꿈과 현재를 말씀하시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그럴 줄 알았으면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살걸 그랬다"는 지난 삶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 - 오늘을 즐겨라"
과거와 현재의 회한을 뛰어넘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까지...
선배님의 유려한 글을 읽으며 그 사고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고향과 과거의 삶, 그리고 오늘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본글보다 댓글이 더 아름답습니다.ㅎ
대도시 고층병원에서 태어나 그 도시에서 한 구역이 고향이다라고 상상같은 단어적으로의 고향을 가지고 있는 세대의 한 사람. 글의 느낌도 그 만큼 적기만합니다.
그게 근원적인 차이겠네요.
신세대가 기성세대에게 그런다지요.
기성세대는 황토방에서 태어났지만
자기들은 삼층 침대에서 태어난 귀한 몸이라고.
고향이나 어머니는 우주 인력의 근원이며 구심력과 원심력의 시발점이기도 하다는 석촌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까르페 디엠은 제 카톡의 글귀입니다. ^^~
네에 그렇군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