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 2007 가을호
유심시조백일장
장원작 - 십 원짜리 동전, 거울
이노
저, 앙감질하며 사라지는 동전 속에는 세월도 비껴 앉은 훌륭한 탑이 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비춰보던 큰 거울
생전에 흙 일구다 돌아간 내 어머니 용돈을 다 쓰고 왔다며 종아리 후려치던
빈방을 홀로 누워서 그 말씀 되새긴다.
가을날 몸에서 떨 군 느티나무 잎처럼 아들의 주머니 속을 오롯이 파고드는
발걸음 옮길 때마다 가슴 치는 그 소리
연어가 회귀하여 바위틈에 산란하듯 오래된 장롱 밑에서 휘적거리는 바람
숨어든 동전 탑 속에 사리 하나 슬겠다.
차상 - 벼루에 새긴 대숲
이우식
결 고운 나이테의 여린 왼 가슴인 듯
대숲이 일렁이는 벼루 한 모퉁이
정갈한 잎새 사이로 바람을 품고 있다
벽을 마주 대하면 벽이 무너지고
어둠이 다가오면 어둠을 깨치는 힘
혼자서 무릎을 꿇는 푸른 뜻글자 하나
문신(文身)의 아픔마다 꽃을 피워 올리고
고뇌의 순간마다 온 몸 향(香)을 사르며
혹한의 계절 속으로 누군가 오고 있다
돌 위에 문득 떠오른 청동 거울처럼
스스로 주고받는 침묵의 물음과 답
불면의 장좌불와가 마침내 이르는 곳
지친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내리는
두 손을 한데 모은 맑은 죽비 소리
지그시 눈을 감아도 어떤 길이 보인다.
이우식 / 1955년 생. 강원도 평창군청 공무원.
장원 수상소감
소 등에 앉아 소를 찾는다니?
이노
1955년 충북 옥천군 사양리 출생. 2006년 계간 시인세계 시 당선.
2007년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현재 대전에서 (주)삼양감속기 대리점 운영.
더위에 얼음물 같은 소식이다. 기쁨에 겨워 아스팔트길을 소나기처럼 달리고도 모자라 인근 산을 올랐다. 고향 능선이 되신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난다.
오르고 내리고 맺고 풀고 그 위에 사유(思惟)를 얹어 읊조리는 시조에 빠져 있었다.
산중(山中)에 소를 풀어놓고 국어책만 읽었었다. 그게 만해 한용운 시 〈님의 침묵〉이다.
알듯 모를 듯 의미를 찾다보면 소는 제멋대로 남의 콩밭을 넘보곤 했다. 암소를 살찌우는 것은 억센 풀이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소를 몰고 세상에 와서 고삐를 놓치고 살다 이제 다시 고삐를 잡는다. 소는 보이지 않고, 잡풀만 우거져 있다.
며칠 전 대전 한밭수목원에서 고구마꽃을 만났다.(행운이라 믿었다.)
고구마 줄기에 핀 고구마꽃 어둠 뚫고 달려온 그 꽃에게는 한 종지의 물과 부채 바람이 그리울 것이다. 문득, 먼 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 쇠풀에게 감로(甘露)와 바람을 건넨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묵묵히 지켜봐준 가족들, 중앙시조백일장 심사위원님들 김종학 시우께 성심으로 감사드린다. 파이팅! 정치인들이 앞 다퉈 민족시를 짓는 그날까지…….
유심시조 백일장 심사평
참신한 사유의 깊이와 세련미
심사위원: 이근배 시인/ 백이운 시인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이노 씨의 〈십 원짜리 동전, 거울〉 외 2편, 이우식 씨의 〈벼루에 새긴 대숲〉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이노 씨의 작품 〈십 원짜리 동전, 거울〉을 장원으로 뽑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다른 작품 〈철거지역 느티나무〉 〈물에도 목소리가 있다〉에서도 볼 수 있듯 오랜 기간 연마한 내공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재와 주제의 참신성은 물론, 신인으로서 4수, 5수 호흡이 긴 작품을 능숙한 솜씨로 처리해 내고 있어 믿음이 갔다.
‘연어가 회귀하여 바위틈에 산란하듯 오래 된 장롱 밑에서 휘적거리는 바람/숨어든 동전 탑 속에 사리 하나 슬겠다(〈십 원짜리 동전 , 거울〉 넷째 수)는 일상의 삶을 명상적 삶으로 이끈 사유의 깊이와 세련미가 보인다.
다만, 시조 3장의 배열을 초장·중장을 한 행으로 처리하여 종장과 함께 2행 배열한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다.
이우식 씨의 〈벼루에 새긴 대숲〉은 힘이 있는 작품이다. 시조가 갖춰야 할 품격과 전통미를 이 작품은 유려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벽을 마주 대하면 벽이 무너지고/어둠이 다가오면 어둠을 깨치는 힘/혼자서 무릎을 꿇는 푸른 뜻 글자 하나’(둘째 수)는 힘 있고 아름답다.
그러나 다소 의욕이 앞서다 보니 셋째 수에서 ‘문신의 아픔’ ‘고뇌의 순간’ ‘혹한의 계절’ 같은 구절이 연거푸 등장하는, 감정의 과잉이 보였다.
시조가 무엇인지 알고 쓰는 신인의 탄생이 반갑다.
시조에 정진해 온 날들에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나만의 시조쓰기’로 대성하길 빈다. ■
첫댓글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우리 동문중에도 시인이 있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