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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30일 토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즈카 2,5-9.14-15ㄷ
복 음 : 루카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결혼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젊은이가 종이에 결혼의 장점과 단점을 적었습니다.
결혼의 장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동반자가 생김, 함께 놀 상대로서 강아지보다는 나음,
여성과의 즐거운 수다, 노년에 나를 돌봐줄 자녀가 있음,
아내 덕분에 너무 강박적으로 일하지 않을 수 있다면 건강에 더 좋을 수도 있음,
집을 돌볼 사람 생김.
결혼의 단점도 이렇게 나열했습니다.
지금 사는 도시를 떠나야 할 수도 있음, 내 뜻대로 살 수 없음,
이제 친구들과의 만남을 자유롭게 가질 수 없음,
아내 친척들을 즐겁게 해주느라 시간 낭비가 됨,
아내의 친척들을 방문하느라 시간 낭비를 할 수 있음,
양육 비용의 부담이 있음, 자녀에 대한 걱정과 가족을 책임지는 데 따르는 일반적 걱정도 있음,
저녁에 독서 불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이 되는 직업을 가져야 함.
이 젊은이는 이렇게 나열한 뒤에 과연 결혼했을까요?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결혼의 단점이 이렇게 많은데도 그는 결혼했습니다.
헌신적인 아내와 자녀들까지 그의 일에 총동원되어 함께 위대한 업적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한 찰스 다윈입니다.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그렇게 많았지만,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보았기에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세상의 눈으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뜻인 사랑에 무조건 집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미리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게 되면 두려움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감추어져서 이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알아듣기 힘들고 두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 너머에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내세우면서 섣부르게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 안에서만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됩니다.
오늘의 명언:
얼마나 많이 주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가 중요하다(마더 테레사).
때가 되면 알리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 감탄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고통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교회사가 시작 될 수 있었던 것은 2개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입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성장 그리고 순교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프랑스 파리의 외방 전교회로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블뤼 주교님의 ‘비망기’를 토대로 기록한 달레 신부님의 ‘한국천주교회사’입니다.
달레 신부님은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다블뤼 주교님의 생생한 기록을 토대로 방대한 ‘한국천주교회사’를 기록했습니다.
교회의 시작 당시 조선의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교회의 시작과 성장을 기록이 있었습니다.
혹독한 박해와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기록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달레 신부님의 기록이 있었기에 ‘한국천주교회’는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기록의 있었기에 우리는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달레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신앙의 등불을 밝혔던 선조들을 따라
우리들 역시 신앙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강의 후에 ‘질의응답’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보다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지만
지금 중국과 일본의 교회는 한국보다 신자도 적고, 활동이 미약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교수님은 한국인의 독특한 ‘심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불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호국불교’로 여겼습니다.
국가의 어려움을 불교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했습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건립되었습니다.
신라는 이런 불교의 힘을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힘으로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려고 하였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유교의 ‘성리학’도 비슷합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성리학의 자리를 ‘양명학’이 대신하였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런 성리학은 새로운 사상인 ‘서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서학
곧 천주교회 역시 오랜 박해를 견디면서 성장하였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순교의 역사를 지닌 역동적인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인이 가진 독특한 ‘심성’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독특한 한국인의 심성이 21세기 산업화를 빠르게 이룩한 ‘동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병중에 있는 가족, 믿었던 친구의 배신, 자녀의 방황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되, 하느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꽃이 피는 희망의 길입니다.
배반한 사람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믿음의 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옳은 일에 주리고 굶주린 사람이 행복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속옷까지도 내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씨앗 하나가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겠지만,
썩어서 싹이 나면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기도 하겠지만 끝가지 믿고 참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받아들였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는 열매를 맺었고, 교회가 되었습니다.
순교자 성월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이 오늘 나의 삶으로 되살아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9,45 참조)
이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 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침묵은 우리의 대화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성경 본문에 철저히 복종해야 함을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 동안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주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며,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분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함께 사랑의 자세를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 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신비를 사는 일입니다.
곧 우리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서 만나게 되는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다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 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경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알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께서 쓸쓸히 홀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의 운명 역시 그러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것도 얼마나 끔찍하게 죽을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닥쳐올 운명, 특히 십자가 죽음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날, 당신은 인류 전체의 죄악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실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속죄물로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 조만간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임을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 당신 혼자만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단 몇 명이라도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미래를 파악하고 있었다면,
옆에서 공감해 드리고, 고통을 함께 나눠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수님께서는 도망가신다거나 회피하지 않으시고,
매일 매일 당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 해 나가시면서,
그 넘겨질 날을 향해 담담히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완성될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퍼즐을 점진적으로 맞춰나가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우리도 조만간 사람들의 손이 아니라 하느님 손에 맡겨질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수난과 혹독한 죽음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 손에 맡겨지는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이 없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심하고 우리의 모든 것, 우리 생애 전체, 죽음조차 하느님 아버지 손에 맡길 때,
그분께서 주실 위로와 기쁨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그리워했던 천상 낙원으로 인도할 것이며,
거기서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끝없는 축제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씁쓸하게도 한때 사랑했던 제자의 배반에 의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 그것도 무지막지한 악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프고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슬픈 운명이 그저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하셔야 할 분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셨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닥을 친 다음 다시 한번 위로 올라가십니다.
죽음을 물리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을 통해 원래 계셨던 가장 높은 곳으로 다시 올라가십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 인류에게 손을 뻗으십니다.
영원히 사시면서 영원히 이 세상을 다스리실 운명을 지니신 그분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운명은 파노라믹 운명의 끝판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장 해피엔딩 끝판왕의 운명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요 이정표로 삼고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운명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슬픈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셨기에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운명 역시 슬픈 운명입니다.
그분께서 쓸쓸히 홀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의 운명 역시 그러합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 교리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 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 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카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 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카 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카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 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權謀術數’로 이뤄낸 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바친 ‘감사의 기도’(루카 9,16)로 이루어 낸 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카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카 복음에서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 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 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고도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 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 예고로 수정해 주시고 보충해 주시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명겸 요한 신부
예수님께서는 치유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
곧바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치유 기적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댄다는 것은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돌아가실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묻지도 않습니다.
앞선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그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스승님께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스승님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남 이야기라면,
제자들이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자들은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스승님의 죽음이 두려운 것보다
나의 죽음이 더 두렵기 때문에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는 힘은,
유일하게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생명을 만드신 분이시기에,
죽음을 뛰어넘는 힘도 그분에게서 옵니다.
우리 스스로 죽음을 해결하려고 하면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쳐 두려움만 더 커집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죽음에만 집중하게 되어
생명의 원천이신 분을 옆에 두고도 묻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큰 두려움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
무기력함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 무기력을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