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트럼프가 주는 도발 면죄부
조의준 기자
입력 2020.05.11. 03:15

조의준 워싱턴 특파원
지난 4일(현지 시각)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에선 폭탄을 실은 탈레반 차량이 아프간 정부군과 친(親)정부 성향 민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이 폭발로 민병대원 10명과 정부군 1명이 숨졌다. 탈레반은 다음 날 도로에 폭탄을 설치해 경찰 3명을 폭사시켰고 6일엔 장을 보던 경찰을 사살했다. 7일에도 고위 경찰관의 차량을 폭탄으로 터뜨려 3명을 죽였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렇게 5월 1일부터 7일까지 아프간 전역에서 탈레반이 죽인 군경과 민간인이 최소 45명에 달한다.
이것이 전 세계 언론이 '역사적 합의'라고 했던 지난 2월 미국·탈레반 평화협정 체결 이후의 상황이다. 미국은 지난 18년간의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프간 정부의 반대에도 평화협정을 밀어붙였다. 탈레반은 미국과 동맹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미국은 그 대가로 국제 동맹군을 14개월 안에 모두 철군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성명을 내고 "우리(미군) 병력을 집으로 데려오는 데 강력한 경로"라며 "새로운 아프간의 항구적 평화를 향한 중요한 걸음"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미군 철군의 명분을 만들어주면 아프간 내부 상황엔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식 평화협정은 탈레반에 '도발 면죄부'가 됐다. NYT 집계에 따르면 평화협정 후 3월 한 달 탈레반이 죽인 군경과 민간인은 최소 344명이고, 4월엔 411명이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평화협정 체결 후 탈레반이 아프간 정부군에 하루 평균 55건의 공격을 하고 있고, 일부 지역에선 사상자가 2배 이상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그런데도 트럼프 행정부가 침묵하자, 엘리엇 엥겔 미 하원외교위원장(민주)과 마이클 매콜 하원외교위 공화당 간사가 지난 8일 공동성명을 내고 "용납할 수 없는 (평화협정) 위반"이라고 나서기도 했다.
트럼프가 도발 면죄부를 준 나라가 한 곳 더 있다.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두 차례 미·북 정상회담 후 단거리 미사일 도발을 수십 차례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실험이 아니면 괜찮다'는 뜻을 수차례 밝혔다. 이달 초에는 우리군 초소에 기관총을 4발 쐈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우발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북이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어떻게 될까. 북한은 탈레반과 비교할 수 없는 무력과 조직, 사이버전 역량을 갖추고 있다. 북한은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온갖 여론 선동과 무력시위를 통해 대한민국을 극심한 갈등에 빠지게 만들어 자멸의 길로 유도하려 할 것이다. 미·아프간 평화협정 이후 상황은 미·북 평화협상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보여준다. 섣부른 평화협정이나 북한의 선의를 믿는 공동선언은 지옥의 초대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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