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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4
<작정>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부산성모병원 미사
(INTRO)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만나뵙기가 수월한 곳이 병원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살지만, 정작 내 생명과 내 죽음이 나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드는 곳 또한 병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애쓰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설득시키는 고된 일을 하는 병원에서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병원과 병원의 사람들을 위하여 지향을 준비하도록 합시다.
(강론)
<작정>
왜 나였습니까? 내가 나고 싶어 난 것도 아닌데,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고 마냥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나고 싶지 않은 세상에 나서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겪고, 가고 싶지않는 어느날 나는 가야 합니까? 왜 이런 생명을 살게 하시고, 왜 하필 나였습니까?
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께서 그리하셨을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다만 한 생명 한 생명을 허투루 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생명 하나 내시고 거두시기 위하여 생명의 주인께서는 친히 나 대신 당신이 죽을 정도의 각오로, 나에 대한 사랑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작정하신 결과물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고, 나를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우실 정도로. 나에 대한 단호한 사랑을. <작정>하셨습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입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호세 2,16)
‘그 여자’는 남편을 버리고 불륜과 간음을 저질러 스스로를 더럽히고 부끄럽게 만든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가 모든 애인들에게 버림받고 난 다음 겨우 정신을 차려, ‘이제 첫 남편에게 되돌아가야지. 그 때가 지금보다 더 좋았는데’라고 말하며 돌아온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향한 남편의 대응입니다.
‘우리가 만났던 첫 번째 장소로 돌아가자. 우리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결심을 세웠던 그곳에서 우리 다시 시작하자. 당신은 더 이상 어떤 것도 더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처음 나에게 주었던 그 마음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어떤 것도 묻지 않을 것이고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사랑하자.’
이 정도의 작정입니다. 이 작정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사랑의 강도를 가늠케 합니다. 이 정도의 사랑이라면, 굶주린 이 배불리는 것 일도 아니고, 아픈 이 낫게 하는 것 역시 일도 아니며, 심지어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 마저도 일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역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정도였습니다.
오늘 복음, 죽은 딸을 소생시켰다는 장면에 시선을 뺏기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그 어미에게 ‘무엇을 돌려주셨는지!’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딸과 함께 보내던 일상을 되돌려주신 것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그저 있는 것이 당연했던. 당연해서 귀한 줄 몰랐던.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얼만큼이나 소중한 보물이었는지, 땅을 치고 후회하는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병이 낫고 나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나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요.
별 일 없이, 변고 없이 살고 계십니까? 보물입니다. 모든 기적의 결과를 나는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살지 마시고, 나를 향한 하느님의 단호한 작정에 다시 감사한 마음으로 살기에도 빠듯한 하루였으면 합니다. 아멘.
#3105
<소록도>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부산성모병원 미사
(INTRO)“다시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 어제에 이어 오늘의 독서와 복음 또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집트를 탈출하기 직전의 그 시간으로,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생사마저 내맡긴 채 그저 모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모든 식솔을 추스르며 따라나섰던, 그 탈출길에서의 절박함으로 다시 돌아가자.’ 어느새 뱃속의 기름기가 차기 시작하면서 하느님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아지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로 내 인생을 채우느라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세월들이 발목을 잡습니다. 신앙은 하지만 신뢰는 없고, 기도는 하지만 형식만 채우는 사이, 하느님이 아니라 내 뜻과 계획이 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잠시 침묵하며 내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릴 수 있기를 지향하겠습니다.
(강론)
<소록도>
한 30년 전쯤에 소록도에서 1년 가까이 자원봉사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왔던 수녀님 두 분과 소록도에서 함께 살던, 저에게는 젊은 청춘의 나날들이었지요.
소록도에 가기 전에 나환자에 대한 인상은 동일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얼굴이 허물어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빠집니다. 나환자 가운데 주민등록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 양잿물 한 번은 다 마셔보았고 죽으려고 우물에 숱하게 뛰어들었던 한 사람들, 가족들에게서 버림받고 떠돌고 떠돌다 소록도까지 오게 된 그 인생들이 저는 다 똑같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록도에서 만난 나환자는 모두 같은 나병환자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나병, 한센병의 바이러스는 완치되었으나 아직도 나환자로만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독신사에 배급되는 식사를 드리러 갈 때 방문객들이 가지고 온 바나나 한 묶음을 전해드립니다. 그러면 앞도 안보이는 나환자 할아버지는 손가락도 없는 손으로 바나나 껍질을 뭉크러뜨려 입으로 마구 밀어넣습니다. 저는 그때 본 ‘가난한 자의 탐욕’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천천히 드시라 해도 그 영감님은 독신사에 있는 다른 사람보다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제대로 까지도 않은 바나나를 입가에 잔뜩 묻히셨고 그분의 입술을 닦아드리며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까지도 나병환자로 살고 계시는구나.”
물론 또 다른 이들도 있습니다. 눈 빠지고 코 내려앉고 입술이 허물어진 참 못난 얼굴이지만 언제나 그 얼굴에 웃음 가득한 나환자도 많았습니다. 제가 독신사에 뭐 하나만 갖다드려도 맨날 입에서 “감사하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어르신들도 참 많았습니다. 제가 되려 “뭐가 그리 감사합니까?” 하니, “내가 나병환자라고 부산 총각이 와서 방 청소도 해주고 밥도 차려주고 하는데 감사하지. 내가 나병환자 아니었으면 부산 총각을 만났것나! 감사하요!”
이런 어르신들 대부분이 주로 보면 소록도 성당에서 반주를 하고 전례 봉사를 하고 독서를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록도 성당 반주자가 미카엘 어르신이었는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부인이 성가를 불러주면 그 음을 따라 수십번 연습해서 악보를 외워버립니다. 그리고는 앞도 안보이는 어르신이 미사 때마다 오르간 반주를 하셨습니다.
베드로 할아버지도 그랬습니다. 나병도 서러운데 눈알까지 빠졌다며 상심하던 그때 나환자 2세였던 아이가 소록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능도 모자랐고 부부에게 버림까지 받았던 그 아이를 앞도 안보이는 베드로 할아버지가 거두게 된 것입니다. 십 수년이 지나 그 아이는 청년이 되었고 지능이 모자라 미사 때에도 뭘 해야 할지를 잘 몰랐지만, 미사 시간만 되면 “아버지, 성당 가자!” 하며 등을 내 밉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방 안에서 성당까지 논스톱 코스로 업혀 들어 오십니다. 바보 아들의 등에 업혀 성당에 오는 베드로 할아버지의 얼굴에 활짝 걸린 그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저의 부족한 재주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신이 나서 오십니다. 그리고 바보 아들이 할아버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미사가 끝나면 다시 할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갑니다.
똑같이 나병을 앓고 있지만 똑같은 나병환자는 아닙니다. 누구는 나병은 다 나았지만 아직도 나병환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똑같은 나병을 앓고도 더 이상 나병환자가 아니라, 오히려 천형이라는 나병을 <은총>이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이 나병을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가 달랐을 뿐입니다! 원망하고 비난하고, “다른 사람 다 잘만 사는데 왜 나만 이 모양 이 꼬라지냐!”며 평생의 고통을 저주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대단히 불행하게도,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원하지 않았던 나병을 ‘끌어안습니다!’ 나병으로 불행해졌지만 “이 불행이 나를 더 이상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작정한 것입니다. 나병으로 몸은 망가졌으나, 내 마음 안에 나병균은 어 이상 퍼져가지 않도록, 마음을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불행이 아니라 불편으로 바꾼 것이지요. 불편은 해졌지만 그렇다고 못 살 것도, 못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나만 이러냐!” 악다구니 치던 입으로 이웃들을 위로하기 시작했고, 손가락도 제대로 없는 손에 호미를 묶어 파를 심어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소록도 성당을 세웠고 그 성당에는 더 이상 ‘나환자’가 아니라 소록도 성당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레지오도 하고 성체조배도 하며, 오히려 육지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이들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제 미사를 마치고 나서는 길에 한 자매님이 토로하셨습니다. 짧은 시간 다 말씀을 드릴 수는 없고, 다만, 내가 선택하지도 내가 감당하지도 못하는 고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제가 경험했던 소록도에서의 이야기를 간략하게라도 전해드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 강론을 준비하였습니다.
고통 그 자체를 어떻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짓눌려 계시지만 않기를 요청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처리하는 것만큼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더 큰 문제입니다.
수십 평생을 죽을 때까지 나환자로 살지, 아니면 이제는 나병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살 것인지. 여러분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하시겠습니까? 아멘.
#3106
<새 하늘, 새 땅>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부산성모병원 미사
(INTRO)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저마다의 우선순위에 따라 인생들의 꼴이 달라지는 법이지요. 무엇을 우위에 놓고 살 것인지 정하는 일을,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결정해 나가라고 성경은 지속적으로 제시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그런 눈으로 다시 들어주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조명될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며 병원에서 봉헌하는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미사를 준비하도록 합시다.
(강론)
<새 하늘,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구약은 완전히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등지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 더부살이하던 시절에 씌여졌습니다. 신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에 복속되어 민족만이 남은 유다인들을 향해, 구약의 완성이신 예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이 우선되는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세상의 지배와는 차원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였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갖가지 우상으로 두려움과 욕망의 송곳니를 드러내던 세상을 향해, 구약과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를 통하여 드러난 두려움 없는 사랑의 힘만이 이런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고 완전히 스스로를 내맡길 수 있을 정도의 사랑.
나와 함께 계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 권력의 불의와 협잡에 단호히 맞설 정도의 사랑.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벽도 담도 금도 부수고 넘어, 있는 그대로의 사람 하나 다시 살게 만들어주는 모든 일에 당신의 목숨마저 선선히 던질 수 있는, 그 정도의 사랑만이.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 단언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출세하고 성공하여 남보다 한 칸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처세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살아도 왜 사는지? 이렇게 살다가면 되는 것인지? 세상 오만 가지를 다 걸치고 있으면서도 끝없는 공허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하여 욕망과 술수를 부리면서도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자기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억울해하며 죽어가는 이 미망의 걸음을 중단하려면, 단 한가지가 그 인생 안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랑>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다른 우선순위는 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오직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제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 인생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텅 빈 수레에 불과합니다. 죽으면 삼일도 안가 썩어 없어질 허무에 불과합니다.
사랑한 사람만이 결국 남을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을 선택한 사람만이 결국 이길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하는 사람만이 결국 승리할 것이구요, 희생과 봉사와 나눈 것이 많았던 사람만이 종국에는 부요한 자가 될 것이라는, 사랑에 관한 담대한 약속이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의 정신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라고 제자들은 파견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인류는 새로운 민족, 곧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새로운 인생들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가 바로 사랑만을 우선하는 새로운 민족,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디 가서도 당당하게, 이 한 세상 원없이 사랑하며 살았노라는 그 자랑 하나만 남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부디 나의 우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하늘과 새 땅. 사랑이라는 우선순위만을 내 인생 안에 명확히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3107
<은경축, 그리고 박재범 신부>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부산성모병원 미사
(INTRO)
벨기에 카르디날 메르시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루이 애블리’ 신부가 쓴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하고 계시는지, 숱한 죄와 부덕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역정을 내지 아니하시고 끝내 빌고 또 빌어주시는 분이신지를 설파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꿰뚫는 열쇠입니다. 나의 기도가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빌어주심이 먼저입니다. 잠시 침묵하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하느님께 나의 마음을 열어드리도록 합시다.
(강론)
<은경축. 그리고 박재범 신부>
사제생활 25년을 맞이했습니다. 은경축이네 뭐네 떠들기는 하지만 25년 사제생활을 했다하여 크게 내세울 것도, 축하받을 만큼 대단한 일 한 것 제대로 없는 인생입니다. 괜히 나 때문에 신자 한 명이라도 신앙을 떠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나의 부덕함으로 인해 신자들의 열심을 방해했거나 행여 그들 중 하나라도 믿음이 약해지게 만든 것은 아닌지, 미사 집전에 앞서 제단에 오를 적마다 “저의 죄로 인하여 이 신자들에게 가야 할 하느님의 은총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도록, 모든 겸손을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하게 해주십시오.” 빌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제생활 가운데 10년을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어쩌면 사제로서가 아니라 직장인으로 10년을 산 셈이지요. 수녀님들과 봉헌하는 새벽미사 시간만 저는 사제였습니다. 나머지 모든 시간에 저는 병원을 경영하고, 한 푼이라도 더 깎고 아끼고 모으려는 짓을 무려 10년을 한 것입니다. 하루 스물 네시간이 짧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죄다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 사정은 10년 전과 비교하면 더 나아졌다 말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살림은 늘었는데 내 주머니에 돈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지요.
허탈했습니다. 사제생활 통틀어 가장 노동강도가 높은 곳이 바로 병원이었는데, 새벽 다섯시 반부터 저녁 다섯시 반까지, 하루 12시간을 부산성모병원, 메리놀병원 두 곳을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일을 해도, 맨날 뭐가 안되고, 뭐를 더 달라 그러고,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 월급을 줘도 병원에서 월급 받는 1,500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저에게, “신부님 월급 많이 줘서 고맙습니다.”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맨날이 모자라고 부족하고 불평불만 가득한 얼굴로 노조 협상에서 일어나는 직원들 뒷모습 보며, “이게 도대체 신부가 할 짓인가!” 딱 때려치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도망치지 않았던 거. 딱 그거 하나 잘한 걸로 남습니다. 어짜피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도 아니고, 이 일을 하기 위해 목숨 걸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내가 받은 명이니 이 명이 나에게서 거두어지는 날도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음 날 다시 양복 꺼내 입기를 10년을 한 것입니다.
그때 튼 道가 하나 있는데, 이것입니다. 어짜피 세상사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인 줄 알지만 진짜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듯이 뭔가를 했지만 그 또한 내 것이 아니요, 마치 이것을 안하면 죽을 것만 같아도 그렇습니다. 안 한다고, 못했다고, 못 가졌다고 죽는 것 역시 아니었습니다.
다만, 내가 있어야 할 그때 그 자리, 그것을 감당해야 할 그때 그 시간에 도망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깨친 道입니다. 물론 그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고, 황망하기도 한 일 천지고, 또 돌아서게 되면 모든 것이 허탈하게도 되지만, 괜찮습니다. 어짜피 산다는 게 그런 것 아니었습니까?
병원 떠나고 1년이 지났습니다. 이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내가 뭘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命이 내 안에서 춤을 추던 시간이 나를 관통하여 지나간 것에 불과한 셈이지요.
지난 1년은 어지간히 아파도 병원을 가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병원인 줄 알았는데, 나부터도 병원을 가지 않는 꼴을 보며 깨닫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이렇게 지나갑니다. 이렇게 모든 것 지나가고 오로지 하느님만 결국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명입니다. 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사명,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마태 10,7) 하시던 그 사명.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마태 10,8) 하신 그 사명.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그렇습니다. 애시당초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것인 줄로 착각하며 살 뿐입니다. 그래서 거저 주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아까워했지만, 보십시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어야만 그때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내 인생의 끝에 남을 것입니다. 내가 받은 사명은 이것입니다. “거저 받은 모든 것을 거저 돌려드리는 일에 <선선할 줄> 아는 것!” 그래야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일하실 수 있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내 인생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받은 소임을 수행하다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숨을 거둔 박재범 미카엘 신부를 기억하며, 그 누구보다도 사제다웠던 그의 영혼이 부디 하느님의 뜻을 다 이룬 존명尊命의 존재로, 부디 편안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겠습니다. 아멘.

첫댓글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