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법화경>
금강경은 붓다께서 설법하신 45년 중 거의 30여 년을 설하신 반야부의 경전에 속해 있습니다. 기원전에 이미 반야부의 경전들이 완성이 되었는데 금강경은 반야심경과 더불어 ‘반야바라밀’을 중심 사상으로 합니다. 금강경은 600권 반야부에 비해 양적으로는 압축된 내용이지만, 깨달음에 대한 불퇴전의 믿음과 수행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설하고 있는 경입니다.
금강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야지혜(절대지)’에 의지해야 하고, 수행 역시 반야지혜를 증득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반복해서 설하고 있습니다. 이 반야지般若智는 세속의 분별과 가치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를 말하는데, 곧 공空의 이치를 여실히 증득한 경지를 말합니다. 금강경은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경전입니다. 붓다께서 제자 수보리Subhuti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금강경은 설법의 방법이 언어적 논리를 넘어, 중생들에게 수행의 동기를 부여해서 스스로 경험적 인식의 완성을 통해 점차로 반야의 절대지에 도달하게 합니다.
반야부의 경전들에는 어떤 신비스러운 내용이나, 영험한 설화를 연상하는 예를 단 한 가지조차도 찾기 어렵습니다.
『금강경』 제15 지경공덕품의 공덕에 관한 내용입니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한낮에 또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때에 또한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백 천 만억 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으로 거슬리지 아니했다면 그 복이 저보다 뛰 어나리라.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남을 위해 해설해 줌이겠느냐.”
무슨 말인가 하면 아무리 많은 몸으로 보시해도, 금강경을 읽고 기쁜 마음을 내고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을 해 준다면, 몸으로 아무리 보시를 하더라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금강경은 말미에 붓다께서는 “불법을 한 마디도 설한 바 없고,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부정을 통해 금강경 자체를 초월적 믿음의 단계로 승화시킵니다. 여기에는 공덕이니, 장엄이니, 복덕이니 하는 신앙성이 들어갈 자리마저도 없어 보입니다. 오직 반야지만을 세우며, 너희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반야지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실체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마 금강경에서 중생들에게 말하는 수행의 마음가짐(어떻게 마음을 머물고, 어떻게 항복받으며 등등)은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마음 중, 가장 붓다의 진심이 담긴 가르침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 입니다. 또한 불교 경전 중 ‘신앙성’이 거의 배제된 경전일 것입니다.
이번에는 금강경, 화엄경과 더불어 대승의 핵심경전인 법화경을 대비해 보겠습니다. 『법화경』 제10 법사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약왕이여, 어디서든지 이 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7보로 탑을 쌓되,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다시 사리를 봉안하지 마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있는 연고이니라.
이 탑에는 마땅히 온갖 꽃과 향과 영락과 비단 일산과 당기와 번기와 풍류와 노래로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해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탑을 보고 예배하고 공양한다면, 이 사람은 벌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진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법화경은 기원 후 300~400백년쯤 완성된 경전입니다. 그런데 같은 대승의 논사들이 같은 붓다의 가르침을 서사敍事했다고 가정하기에는 내용의 격차가 큰 정도를 넘어서, 법화경을 결집한 논사들의 생각이 반야부를 결집한 논사들과는 논지의 출발부터가 크게 달라 보입니다. 반야부의 금강경에서는 ‘모양 있는 것으로서의 공덕’은 전혀 인정을 하지 않고 있음에 비해, 법화경에서는 법화경이 있는 곳에 탑을 쌓고, 7보는 물론 꽃, 향 등 경전에 등장하는 장엄구로 장식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일련의 모양을 꾸미고 장엄하는 과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과정이라는 의도를 넌지시 비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것 말고 어떤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결정적인 법화경식 수행지침이 법화경 안에는 전무합니다. 법화경은 깨달음에 대한 믿음을 주지시키는 반야부의 경들과 달리, 불·보살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에 대한 ‘믿음’ 즉 ‘신앙’을 극대화한 경전인 것입니다. 법화경은 이런 신앙의 극대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겁나는’ 표현도 종종 사용합니다. 제10 법사품 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만일 한 겁 동안에 항상 나쁜 마음을 품고, 성낸 얼굴로 부처님을 훼방하면, 한량없는 큰 죄를 얻으리라. 이 묘법연화경을 읽고 외고 지니는 이를 잠깐만 욕설하여도 그 죄는 저보다 더 크리라.”
젊어서 이 대목을 처음 접했을 때는 참 당황했었습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남을 비방하는 말은 전혀 없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실은 법화경의 어떤 대목들은 불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거의 악담과 협박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의 표현들이 있는데, 그 대목들은 차마 예로 삼기도 민망해 위의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금강경과 법화경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대비시켜 설명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금강경 이후 법화경같이 소위 방편이라는 명목으로 감성적 신앙을 자극해 중생들을 유도하는 방식은 대승불교의 전형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으로 들어와(俗諦) 성숙된 후 점차 깨달음에 대한 절대 믿음(眞諦)으로 인도되는 이들을 현실 불교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말이 방편이지 법화경의 신앙적 믿음이 금강경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금강경 독송을 다라니 주력呪力과 같은 신앙적 속내로 하는 이들이 늘어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자로서 어떤 문을 통해 들어왔건 ‘나는 붓다께서 얻으신 깨달음과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라는 마음을 단 한 차례도 발원해 본 적이 없다면, 이건 전적으로 한국의 승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인 것 입니다. 기복이든 구복이든 이 둘의 구별은 나중에 따져볼 일이고,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불법이란 없는 것이고, 불법이 없으면 불자가 아니니 미래의 불교는 도대체 누구에게 연緣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깨달음의 믿음에서 오는 신심은 불퇴전의 것 이지만, 자신의 이익이라는 조건이 있는 신앙에서 오는 신심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역시 법화경이 아닌 금강경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법화경같이 수 백년에 걸쳐 결집된 경우, 경전의 성립 배경인 정치·사회·경제적 연구를 바탕으로 사상적 해석을 더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이것이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내세운 주장들에 동의는 못하셔도, 적어도 이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느낌만 가지셔도 저로서는 만족합니다.
마침 이 원칙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기사가 있어 정리했습니다.
“해인사 고려대장경의 학문적·문화재적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 온 루이스 랭커스터(80) 미국 버클리대 명예교수가 <2013 대장경세계문화축전 국제학술 심포지엄>의 주제발표를 통해 고려 대장경을 제대로 보존·연구·활용하기 위해서는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정보통신 기술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700년 이상 된 판전과 경판의 보존을 위해서는 목재학·유동학流 動學·화학·곤충학·균학菌學·토양비료학·고고학·건축학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려대장경의 내용 연구를 위해서도 불교학·역사학·문헌학·철학·종교학·언어학·사회학·인류학 등 여러 인문사회과학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그는 ‘이제 까지처럼 몇몇 학자가 협력하는 차원을 넘어서, 풀어야 할 과제를 분명하게 한 뒤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관련 전문가를 모두 끌어 모아 팀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3.9.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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