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한꼭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단락의 주제는 선그라스였습니다. 또한 그 댓구가 되는 도입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머리 속이 하얗고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분명히 토요일에 티브이를 보다가 떠올랐던 것 같은데요.
포기하고 소파에 누워서 티브이를 건성으로 보고 있는데 불현듯 '자기야'란 프로그램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을 쓰려고 했는지는 여전히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불이 반짝!!!
바로바로 팽현숙 여사였습니다.
그날의 주제 는 건망증이었는데 자신이 강의를 나갔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녀는 알뜰 주부에 대한 것, 그리고 재테크에 대한 것을 강의 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미 인기 강사의 반열에 오른 듯 입가에 미소까지 번지면서 말합니다.
그런 어느 날 강의 중간에 한 사람이 불쑥 남편 최양락에 대한 질문을 하더랍니다.
그 순간 으젓하게 강의를 하던 팽여사의 가슴에 필이 딱 꽂히면서
갑자기 그 인간에 대한 감정이 화악 북받쳐 올라오더랍니다.
나머지 시간은 제어를 못한 채 남편에 대한 흉으로 채우고 나니 강의료까지 내고 온 사람들에게
너무나 미안하여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강의를 해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다음은 없겠지요.
이미 시간을 허비한 사람들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요즘 가끔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잘 아시는대로 육하원칙(六何原則)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사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여섯가지 요소를 말하는데 이는 순서대로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what), 어떻게(how), 왜(why)입니다.
영어 단어의 머릿글자를 따서 5W1H라고도 한답니다.
이 내용은 기사문에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꼭 필요한 내용들이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문득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원칙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는가?'를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말씀드려야 합니다.
'제가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라고요.
그런데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물으실 수도 있는 질문이 아닌가 합니다.
'네가 지금 그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라고요.
그런데 뜬금없이 이상하게도 '왜?'가 제일 마지막에 달려있습니다.
팽여사가 그런 흐름에 어긋난 말을 '왜' 했을까요?
아마도 사람들의 행동에는 그 '왜'라는 이유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왜 갱신운동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이남정 목사님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초두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 처음 질문에 대한 답으로 부활 이후 승천 전에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셨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
디베랴 호수가의 7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오실 것을 믿고
자신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많은 혼란과 불안, 생명의 위협도 있었겠지만 베드로는 하루 속히 예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주님을 처음 만나서 따르기 시작했을때의 그 모습으로 밤새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셔서 ‘친구들이여 한마리도 못잡았느냐? 그물을 던져라’에 따르자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되었고 요한이 이내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채고 하는 말 ‘주님이시다’ 에
성질 급한 베드로는 겉옷을 든채 물에 뛰어듭니다.
이 장면은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과 현재 우리의 상황과도 오버랩이 됩니다.
기독교안에 급박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갖고 있던 생각들을 메스를 대어서 드러내어 곪은 상처를 치유하기로
하나님께서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요.
가장 완벽한 교회인 줄 알고 있었던 우리들이 깊이 고민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대로 살지 않으면 언제든 허물고 깨뜨리시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날수록 더욱 성숙해 져야 하나 더욱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요?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람과 흔듬을 주셨을까요?
이런 일이 일어난 일년 후 지금에 나는 무엇이 달라졌나요?
원하는 것이 달라졌나요?
공동체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사람에 대한 원망, 미움으로 예수님으로 부터 냉담,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은가요?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은 답이 아닙니다.
왜 우리를 흔드시는지?
왜 잘못했는지?를
다시 돌이키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배만 바꾸어 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이전의 그 예수님이 더 이상 아닙니다.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 될 보증이었습니다.
배드로에게는 이제 혼란이 사라졌을 것이며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냉담, 회의, 절망, 시험 가운데 있을 것이 아니라
이 부활의 예수님을 찾아가야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깊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참 예수가 누구신지 깊이 공부하고 알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공부하고 예수님이 살아간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 <호세아 6장 3절>
주님은 새벽처럼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죄의 사함을 위해 오신 것이 맞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당시의 종교세력에 저항하여 끝없는 정의와 사랑을 선포하며
세상의 방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의 방식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참인간이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면죄부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믿는 다는 것은 세례와 함께 공적인 삶이 되는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처음 창조 시의 하나님 형상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자리에서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야하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 참 예수님을 바로볼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전진해 가야합니다.
새로운 실험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변화의 시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참 예수, 참 인간을 더 연구하고 공부해야 그럴 때 진정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식탁을 마련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주님의 식탁에서는 중요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세리, 창기, 죄인등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인종, 경제, 남녀, 노소, 종교를 뛰어 넘어 나누는 공동체로
예수님의 식탁에서 새로운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상심했던 베드로를 불러 세번을 회복시켜 주시고 부탁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 것은 종교적만이 아닌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 공동체에서 나와 다른 자들을 먹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피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축복보다 부대낌이 많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살아가시던 방식입니다..
공화국이었던 로마가 왕정국가가 되었을때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름을 황제의 칭호로 사용하며 로마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의 신의 아들은 그 황제였습니다..
그런 곳에 갈릴리의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는데
결국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들에게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공적이 곳입니다.
우리의 건물도, 헌금도, 삶도 공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그 도를 따르는 자들로 주위의 사람들이 칭하였습니다.
그 방식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도 목사도 교회도 아닙니다.
남은 인생을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에 따라 사는 것
예수님 부활 후 예수님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인 그 제자들의 정신대로
거기에 더하여 더욱 승화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순간이라도 그리스도를 옷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장차가 아니라, 예수님 만이 아니라
오늘 이 곳의 우리들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부활의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 찾아야 합니다.
이목사님께서는 기도해 주십니다.
‘세상의 방식에 저항하고 예수님 방식으로 살면서 나를 새롭게 해 주시고 빈잔을 채워 주시옵소서.
높은 사명 ‘내 양을 먹이라’를 감당하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팽여사가 자신의 할 도리를 잊고 자기의 말의 향방을 잃었다는데
저는 갑자기 제 시야에서 사라졌던 선그라스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아들네와 종일 노닌 후에 사라졌기에 아들 차에서 찾아 보라고 하였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날 팽여사의 방송을 보고 나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김에 밑져야 본전으로
차의 콘솔박스를 열어보았습니다.
아차. 거기에 제 선그라스가 점잖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넣은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그 선그라스는 십삼년 전 즈음에 엎그레이드 된 이사를 하면서
그 동네의 멋장이 안경점에서 맞추었던 안경에 실증이 나자 그 테에 색이 있는 렌즈를 낀 것입니다.
요즘 멋장이들의 선그라스에는 비할 것이 못되었지만
옛 추억이 담기고 저의 시력에 맞춘 것이라 며칠간 냉가슴을 앓고 있었던 차였습니다.
아주 잃어 버렸던 것으로 생각했던 그 것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찾았을때의 기쁨이란 얼마나 크던지요.
우리가 왜 이 갱신운동에 몸담고 이 험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어딘가에 두고 못찾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있기는 있었는데 6하원칙중에 무언가 하나를 빠뜨리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조금은 어긋난 그 무엇에 빠져 계시지는 않는지요.
어쩌면 가장 익숙하고 가까운 곳에 그것이 숨기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우리를 흔드시는지?
왜 우리가 잘못된 길에 빠졌었는지? 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보다는 죄의 사함을 받는 평안한 믿음을 되찾고자 하신 것은 아닌지요.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what), 어떻게(how), 왜(why)
우리 공동체가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일상에서, 이 목사님의 설교에서, 우리들의 방향성까지, 를 재미있고 중요하게 짚어주시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어찌 그리 재주가 좋고 진솔한 신앙의 기초를 갖고 계신지 부럽습니다.
성령님이 주신 아이디어가 아닐까요???
@김다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몸치인 제가 춤을 추게 되면 심히 곤란해 집니다 *^^*
권사님의 글 기다렸습니다 편안함과 따뜻함 그리고 예리함까지 갖춘 글을 읽을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저 자신을 다시 추스립니다 정말 장로님의 말씀처럼 어찌 그리 재주가 좋으십니까? 저는 부러움을 넘어 존경심도 가집니다 오늘도 나 자신을 돌아보며 왜?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져보며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샬롬!♥~~저두 마니 기다렸어요~반갑습니다~~^^계속 좋은글 올려주세요~♥
제자로서의 삶이 그저 유행처럼 쉽게 덧붙여지는 미사려구가 아니라
얼마나 치열한 삶을 의미하는지 일깨워주신 설교말씀을
다시 한 번 곱씹게 하여주신 글 감사합니다.
어쩌면 조금은 냉담하고 때로는 냉소적이기까지 식어진 첫 사랑을
이렇게 마냥 그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겠구나....
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추스르고 자신에게 육하원칙의 질문을 던져야겠습니다.
그렇지요? 한번 듣고 마는 설교가 아니라는 생각에 정리를 해 보니 진정 우리들이 나가야 할 방향이 더욱 선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매순간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귀한 글, 설교 되새김, 감사합니다. 현장에서 뭉클하게 들었던 말씀을 다시 찬찬히 읽으니, 하나님의 흔듦과 허무심이 새로운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 길이 정로니 이리로 행하라시는 경고를 듣고 행하도록 도우시는 주님 안에서 더욱 참인간됨으로 살기 원합니다.
글솜씨와 행동하는 믿음, 너무 부럽습니다. 날마다... 계속 올려주시면 합니다.
권사님, 저는 가끔 갱신위의 한계에 대하여 생각하곤 합니다. 여기까지가 갱신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서 드러나는 제자도의 이탈은 크게는 두가지 측면에서 드러납니다. 이 둘은 함께 섞여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가르침의 내용에서의 이탈이고 행위에서의 이탈입니다. 갱신위가 교회의 온전한 제자도를 견인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많이 듭니다. 갱신위가 교회에 파고드는 자유주의 사상에서 복음의 본질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그러한 신학적 소양을 지닌 분이 갱신위에 얼마나 있을까요? 있기는 할까요? 자유주의 사상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합니다.
옥목사님께서는 일찍부터 앞으로 다가올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다원화되어 가는 상대적인 시대에 절대적 진리가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고 이단들이 횡행할때 우리가 그 그릇된 풍조들에 휩쓸릴까 염려되셔서 우리들을 보호하시노라 외부 설교도 잘 안하시고 늘 올바른 길에 서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큰뜻을 알지 못한채 목사님의 보호막 안에서 큰 나무 그늘 아래서 순수함만을 지키며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기복신앙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는 신앙에 머물러 있었기에 잡초와 같은 자생력을 기르지 못한게 아닌가 하는게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옥목사님께서 공부하라고 외치셨지만 우리는 주시는 훌륭한 내용만 받아 먹는데 익숙하여 이남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부활의 예수님에 대한 스스로의 깊은 공부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현재 갱신위는 잠시 머물러있는 중간과정일뿐이 아닐까요? 외부와 내부로 부터의 상처에 마치 의혈 먹은 연필심과 같으나 그 주변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성도들이 있어서 잘 버텨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연필심으로 조심조심 밑그림 정도를 마련하는게 갱신위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교회바로세우기 세미나를 통하여 새 교회의 모델을 연구해 가며 시작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들풀님 같이 신학적으로 그리고 미래를 보실수 있는 분들이 갱신위에 직접오셔서 일을 해주셔야만 됩니다. 저희들 특히 저는 신학적으로나 학문적 조예가 없어 하루속히 이자리를 사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건강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로 인하여 현재가 발목잡혀 있고 미래까지 불확실한 것이 현재 우리들의 위치라는 생각입니다만. 들풀님처럼 진지한 고민에 빠져 어려운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들의 미래엔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라도 100% 장점만을 가진 것이 있겠나요. 제자훈련에 대해 많은 견해들이 오가고 우리 안에서 조차도 성공이냐 아니냐로 이야기를 할때도 있지만 그런 것에 머물지 말고 이제야 말로 옥목사님의 정신을 지키며 한단계 승화하여 온전한 제자도를 이루어 가는데 힘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 일에도 영적인 일에도 정답을 따르기가 어렵지만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