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 속의 무상과 적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것이 『열반경』에 나오는 무상과 적멸에 대한 게송입니다.
여기에 대한 설화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전생에 설산(히말라야)에서 보살로 수행을 할 때, 나찰(귀신)이 ‘제행무상 시생멸법’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덟 자는 고민과 의문만 더하는 결론이 없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생의 붓다께서는 나찰에게 나머지 부분을 들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나찰은 이 부탁에 “나는 배고파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다”고 답합니다. 붓다는 나찰에게 내 몸을 먹이로 줄테니 나머지 구절을 들려 달라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거래는 성사되어 전생의 붓다는 나무 위로 올라가 나머지 구절을 듣는 즉시 뛰어내려 나찰에게 몸을 주기로 합니다. 나찰에게 몸을 먹이로 주는 대가로 듣는 말이‘생멸멸이 적멸위락’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구절을 다시 새겨 보겠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는 항상한 것이 없으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이것이 나고 멸하는 이치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나고 멸하는 것마저 소멸해 버리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이것이 적멸의 즐거움이다.
여기서 적멸은 열반과 같다 해도 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로만 보면, 무상=생멸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이 부분이 저로서는 상당히 아쉽습니다.
‘제행무상’을 제법무아·열반적정과 더불어 삼법인三法印의 하나로 설명하는데, 무상無常을 단순히 생멸生滅로 단정해 표현해 내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경전의 구절을 풀어 설명하는데, 이런 아쉬운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 까닭은 경전의 성립 당시보다 후대에 많은 기간에 걸쳐 발전된 이론체계가 경전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당연한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열린 마음’으로 경전을 푸는 스님들이 아주 드물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말로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지 선사는 선어록에, 논사는 경전의 문자에만 100% 충실하지, ‘창의력’이 없기에 그런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의력은 곧 수행의 결과물인데 결국 자신의 독자적인 불교관이 부족한데서 기인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용수와 세친을 거쳐 천태학을 창시한 천태지자 대사나 원효대사의 회통불교, 의상의 법성게 같은 화엄교학 이것이 다 ‘창의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그분들의 말씀이 무조건 다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면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요소인 것입니다.
무상=생멸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생멸이 있다 함은 ‘시간적 제한’이 있다는 말이니 나찰의 게송은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연기적으로 분석하면, 생과 멸 사이에 진행 중인 행行들(12연기의 중간 단계들)과 정신 작용과 같이 생멸의 개념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들 중에도 즉, 시간적 제한에서 벗어난 것들도 ‘무상’에 해당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연-연-연-연-연-과에서, 인을 생으로 보고 과를 멸로 가정할 때 무수한 연緣들도 ‘무상’에서 예외가 없게 하려면, 무상=생멸만 갖고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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