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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즈카 8,20-23
복 음 : 루카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승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여기 바위가 하나 있다. 이 탑은 꼭대기까지 10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는 이 바위를 탑 꼭대기까지 날라야 한다.”
제자는 바위를 끌어안고 힘겹게 탑 입구까지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탑으로 올라가는 문이 너무 좁고, 그에 비해 바위는 너무 큰 것입니다.
아무리 바위를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문을 통과시킬 방법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게 불가능한 과제를 주셨습니다.”
이 말에 스승은 망치를 가져오더니 바위를 깨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쉽게 문을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바위가 네 마음이다. 마음이 깨져야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우리 마음이 깨져야 할 순간은 언제일까요?
어쩌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제자는 바위가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스승이 보여준 것처럼 분명히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깨야만 했습니다.
고정관념으로는 주님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기에,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중에,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문제는 그곳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유다인들은 과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을 그리짐산에서 지냈지요.
따라서 전례적인 차이를 들어서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면서
야고보와 요한이 분개합니다.
자기 스승에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불을 불러 내려서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꾸짖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과감하게 깨고 주님의 뜻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플라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받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야단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3,17).
예수님께서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카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르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합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하다 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기도합니다. 기도는 삶의 활력소이고 품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지난 8월 16일에 왔습니다.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미국 사회에서 지내려면 SSN(사회보장 번호)를 받아야 합니다.
운전면허증을 취득해야 합니다. 은행 계좌를 개설해야 합니다.
신부님은 사회보장 번호와 은행 계좌는 만들었다고 합니다.
뉴욕은 한국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기에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을 보니 4년 전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와 다른 점은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직원들이 도와주었습니다.
뉴욕의 시스템도 몰랐지만 스스로 해 본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와 있던 신부님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신부님도 많은 사제들을 만날 것입니다.
가깝게는 본당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동북부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미주 한인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교구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제들을 만나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부님과 함께 지내는 본당 공동체가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와 기쁨과 슬픔도 같이 나눌 것입니다.
그렇게 추억이 쌓이면 타향도 고향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지냈습니다.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Homo'는 그 어원이 땅을 뜻한다고 합니다.
땅은 아래에 있고, 땅은 모든 것을 받아 줍니다. 그래서 땅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도 겸손의 표징입니다.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도 겸손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한문으로 사람을 뜻하는 ’人間‘은 서로 의지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말하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시작을 전하는 ’단군신화‘는 ’弘益人間‘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이웃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말 사람의 어원은 ’살다와 앎‘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는 의미를 아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이웃의 마음을 아는 존재입니다.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 사람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사람‘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잠시의 삶을 마친 후에는 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을 누리며 영원한 삶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야 할 때를 알았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갈 뜻을 굳히셨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주셨고,
갇힌 이들을 풀어 주셨고,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 사람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 ‘낙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 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것은 그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영광임을 암시해 줍니다.
또한, 이는 이미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치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이 배척을 받았듯이,
‘예루살렘 상경기’도 배척 받음으로 시작 되며,
결국 예루살렘에서도 종교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 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 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모두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 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경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으로서 예수님의 전교활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루카는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한 시점을 근거로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의 막을 내리고,
예루살렘 상경기(루카 9,51-19,28)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예루살렘을 향한 새로운 여정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9,44) 직후에 시작된 것은
사람의 아들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필히 죽어야 하며,
이곳에서 필히 부활해야 함을 암시한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에 이르기 전까지 펼쳐질 예수님의 새로운 선교여행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분량으로 볼 때 루카 복음의 1/3을 차지한다.
여행지의 목적지는 분명 예루살렘이지만, 이 여행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지도를 놓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경로를 설정한다면,
당연히 갈릴래아 호수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직선경로,
즉 갈릴래아 → 티베리아 → 사마리아 → 세겜(그리짐산 근처) →
베델 → 라마 → 예루살렘의 경로를 택할 것이다.
예수님의 일행도 같은 노선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선발대를 먼저 사마리아 지방으로 보내어 묵을 곳을 찾게 하신다.(52절)
그런데 의외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53절)
사마리아 지방이 어떤 곳인가?
솔로몬의 통치 말기, 기원전 933년경에 히브리의 단일민족국가는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수도: 사마리아)과 남족의 유다왕국(수도: 예루살렘)으로 쪼개진다.(1열왕 12,19)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패망한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히브리족의 정통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곧 야훼신앙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혼혈족이 되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짐산에 새 성전을 세워 혼합종교를 신봉하였다.
따라서 정통성을 고수하는 유다인과 변질된 사마리아인 사이가 좋을리 없다.
서로 냉대하고 적대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의 일행을 거부한 처사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했던가?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냉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늘에 청을 드려 불을 내리게 하여 저들을 불살라 버리자는 것이다.(54절)
이 대목은 구약의 엘리야가 북쪽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신을 섬긴 것 때문에
오십인 대장과 오십인 부대를 두 번씩이나 불살라 죽인 사건을 떠올려 준다.(2열왕 1,10-12)
제베대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그들에게 붙여진 “보아네르게스(천둥 또는 폭풍의 아들들)”라는 별명답게
다혈질적이고 강한 질투심과 명예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성격답게 이왕 가는 길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결판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두 차례의 수난과 죽음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성공적인 상경과 예루살렘에서의 영광과 왕관이 번득이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이 두 제자의 야박한 마음과 잘못된 생각을 꾸짖으신다.(55절)
이 꾸짖음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경로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다.(56절)
실제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바로 관통하지 않고,
당시 데카폴리스 지방과 사마리아 일부 지방, 베레아 지방을 두루 지나(17,11)
예리고를 거쳐(19,1)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어떤 경로를 택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길을 가느냐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박 마리 안젤로 수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오늘 복음 말씀을 시작하는 이 구절을 읽고서는,
수난과 죽음이 보이는 예루살렘으로 스스로 가시려
마음을 굳히신 예수님의 마음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심하고 떠난 여행길에서
사마리아인들의 완고한 냉대를 겪는 주님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주님의 이 결심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한, 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벌어진 일조차도
피하고 싶은 저는
주님의 길에 함께하기보다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에 가까움을 봅니다.
저도 주님처럼 마음을 굳혀야 함을 느낍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에 제 십자가를 지고 동행해야 함을......
먼 훗날, 제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루카22,28)
라는 말은 꼭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출처] 루카 9,51-56 연중 제26주간 화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