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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성당이나 본당이 통폐합되는 것을 영어로 ‘머지(Merger)’라고 합니다. 코네티컷 교구도 많은 본당이 통폐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오클랜드 교구도 그런 과정에서 한인 공동체가 자리를 옮겨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민 공동체는 사제가 있을 때는 미사와 성사를 중심으로 활기를 얻지만, 사제가 없으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두 달에 한 번 엘파소 한인 공동체를 방문합니다. 그곳에는 한국인 사제가 없습니다. 교우들은 주일에는 영어 미사에 참례하고, 매주 화요일에는 사제관에 모여 기도 모임을 합니다. 대부분은 70세가 훌쩍 넘으신 어르신들이지만, 젊은 두 가정도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고백성사, 강의, 미사를 하였고, 5월에는 고백성사와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비록 작은 공동체이지만, 저는 그곳에서 따뜻한 신앙의 마음을 봅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오고,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고, 미사에 참례한 모든 분이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교우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전국의 공소를 다니며 고백성사와 미사를 봉헌하셨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신앙은 큰 건물이나 많은 숫자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는 정성, 공동체를 지키려는 사랑이 있을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엘파소 방문 중에 한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에게는 딸이 세 명 있습니다. 큰딸은 4년 전에 보스턴 대학에 입학했고, 이제 곧 졸업한다고 합니다. 둘째 딸은 이번에 휴스턴의 라이스 대학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막내딸은 4년 후에 뉴욕의 NYU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자녀들이 좋은 길을 걸어가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족이 매일 저녁 함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엘파소 방문 때도 세 딸이 함께했고, 두 딸은 미사 복사를 했습니다. 형제님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사는 가정의 자녀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성실하게 공부하면 미국에서는 장학금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의 두 딸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비게이션을 생각했습니다.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면 자동차는 길을 찾아갑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도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줍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목적지를 하느님께 두면, 때로는 흔들리고 돌아가더라도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은 ‘신앙’이라는 목적지를 분명히 정했기에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그리고 토양입니다. 씨를 중요하게 보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말할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어려움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씨앗이 있습니다. 토양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은 환경을 말할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서 자란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환경은 분명히 한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토양이 있어도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 뿌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마음에 믿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사제는 교우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교우들은 서로에게 위로와 사랑의 씨앗을 뿌립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도 씨앗입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도 씨앗입니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는 씨앗이 됩니다. 따뜻한 격려는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나 상처 주는 말, 판단하는 말, 험담하는 말도 씨앗이 됩니다. 그것은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공동체를 갈라놓고, 신앙의 싹을 말라 버리게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좋은 씨앗을 뿌리기보다 분노와 이기심의 씨앗을 뿌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도 좋은 밭이 되어야 합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들어도 곧 잊어버립니다. 돌밭 같은 마음은 잠시 기뻐하지만, 시련이 오면 쉽게 포기합니다. 가시덤불 같은 마음은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좋은 땅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인내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완성된 땅이 아닙니다. 농부의 수고로 만들어지는 땅입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기도의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미사의 은총으로 물을 주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과 배려로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교만과 욕심의 돌을 골라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잡초를 뽑아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가 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길에도 고난은 있습니다. 엘파소 공동체처럼 사제가 없어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매일 함께 기도하며 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져도 기도 모임을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척박한 땅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내린 좋은 땅입니다. 세상은 숫자와 규모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밭을 보십니다. 세상은 조건과 환경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결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본당에서,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좋은 말을 뿌리고, 사랑을 뿌리고, 용서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싹을 틔우시고, 꽃을 피우시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2026년 07월 12일 일요일 [녹] 연중 제15주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8,18-23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23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그 씨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미사와 기도로써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밭이 길바닥이나 돌밭, 또는 가시덤불과 같다면 말씀의 씨는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사그라들고 맙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혀 말씀을 깊이 새기지 못하거나 환난과 박해 앞에 흔들릴 때 우리는 복음의 증거자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뿌려지는 씨는 그 자체로 ‘좋은 씨’입니다. 이 씨가 제 생명력을 마음껏 드러내게 하려면 먼저 우리의 땅을 잘 일구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의 씨를 잘 키워 내어 저마다 삶에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창조주 하느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귀로 듣고 그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눈으로 확인하며 몸소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아직 이 신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기쁨을 전하는 일입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풍성하게 수확하지는 못하더라도 씨가 지닌 생명의 가능성을 믿어야만 다시 밭을 갈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고 씨의 생명력을 믿으며 오늘도 다시 호미를 듭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의심의 돌덩어리와 불신의 가시덤불을 걷어 내고, 말씀의 씨가 우리 삶에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날마다 정성껏 노력해야 합니다. 그 씨를 끝까지 믿고 돌보며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어느 건축가가 지인의 배려로 박물관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장고에는 아직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은 많은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둘러보다가 낯설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체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필이라 할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되지 않고 이 수장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친일파이자 매국노라 불리는 이완용이 쓴 글이라 전시 불가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물 흐르듯 쓰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매우 능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잘 쓰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충분히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그 죄가 너무 커서 모든 노력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위대한 일을 많이 남겼어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죄인의 삶을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떨까요? 세상 안에서 남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실 땅을 먼저 갈고 씨를 뿌리는 우리의 농사 방법과 달리, 이스라엘 지역의 농사는 씨를 먼저 흩뿌린 뒤에 땅을 갈아엎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에 나오듯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까지 씨앗이 날아가도록 놔두는 농부는 없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낭비이고, 따라서 실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온 세상에 말씀의 씨앗을 던지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관대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먼저 길가는 수많은 발길에 짓밟혀 단단하게 굳어버린 길입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나 세상의 논리로 굳어버려 말씀이 한치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겉으로는 흙이 있어 보이나, 그 밑에는 단단한 돌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동요나 위로를 구할 때는 기쁘게 말씀을 받지만,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할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뿌리가 없어 이내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은 흙도 깊고 뿌리도 내렸지만, 주변의 가시덤불이 햇빛과 양분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더 커서 영적 질식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마지막은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자기 삶의 실존적 결단으로 깨닫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수확량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비옥한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굳어버린 길가 같은 내 마음, 얕은 돌밭 같은 내 결심, 걱정과 욕심으로 가득 찬 가시덤불 같은 내 영혼에도 끊임없이,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혹시 자기조차 포기한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정작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안에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모습이 모두 있습니다. 어제는 돌밭이었어도 오늘 쟁기질을 열심히 하고 돌을 골라내면 충분히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8)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뿌린 씨의 4~5배 정도 거두면 평년작이고, 7~10배 정도 거두면 대풍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백 배, 예순 배의 수치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풍요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씨앗의 4분의 3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4분의 1의 씨앗이 모든 실패와 낭비를 덮고도 남을 승리를 거둔다는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길이 험난하고 세상의 유혹이 가득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첫댓글 ●내 눈을 감겨주십시오 /릴케
내 눈을 감겨주십시오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십시오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을 지라도
나는 당신곁에 갈 수 있습니다.
입이 없을 지라도
나는 당신에게 애원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