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3.토.예루살렘의 성 야고보(주의형제순교.62년). 어머니연합회.수동성당. 유낙준주교.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 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4:13).”
I have the strenge to face all conditions by the power that Christ gives me.
주님이 내게 주시는 힘에 의하여 모든 조건을 직면해도 나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의 생각을 전환하여 살길을 찾아봅시다. Change – Chance.
성공회 대전교구에서 믿음을 가지고 저와 함께 하느님을 향하시는 어머니 성도들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지혜가 복으로 부어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
복을 빌어주는 것을 강복이라 하고 우리 교회에서는 강복하는 사람이 사제이고 주교입니다.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24)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25),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민수6:24-26).”
이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강복기도로 이를 받아 주교와 사제가 성도에게 강복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어,
지켜주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호의와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주교가 강복降福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성도들간에는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인 축복祝福이라하여 조금 다릅니다.
주교가 어머니성도들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청하는 내릴 강降의 강복降福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주시는 복이 하늘에서 내려와 어머니들에게 부어지는 참으로 좋은 자리입니다.
결국 강복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아름다운 자리이고 거룩한 신비의 자리가 됩니다.
이 세상에 어디에서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까? 그래서 이 강복의 자리가 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천년이나 된 과거를 되살리는 말씀을 우리 귀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과거를 경청하는 귀는 과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눈은 아직 경험하지 않은 내일을 보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비젼과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우리는 눈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과거를 귀로 듣고 눈은 미래를 보아야 지금 우리의 몸이 균형을 잡게 될 것입니다.
슬픔만 있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아름다움도 있기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 인생의 꽃을 더 무르익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고통이 없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게 되잖아요?
고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더 깊게 만나게 됩니다.
강복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니 고통 역시 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복이 부어지는 강복의 자리에 오셨으니 다른 말로 하느님을 향하는 길이었으니
그 하느님을 향하여 오시는 길이 빛이 났을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교회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가부장제 사회보다도 교회는 그래도 여성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남성들이 주로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을 하시는 여성들이 교회를 이끌어 가셔야 합니다.
지금보다도 더 여성들이 교회의 일을 주도하기를 바랍니다.
참된 행복의 삶을 사는 길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마태5:3-10).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목마른 사람은 사람의 성품에 대한 것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마음가짐에 따라 참된 행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네 가지는 위 네 가지의 결과인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로 박해받는 사람
이 네 가지는 외면적인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로 행복한 사람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소유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옳은 일 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넘쳐서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본성은 약합니다. Human nature was weak(로마8:3).”
약자이니 제구실을 못하니까 제 구실을 할 때를 찾아가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로마8:20).
약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려면 어떤 말을 해 주십니까?
약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려고 사도 바우로와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하느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셔서 우리들의 죄를 씻겨 주셔서 죄와 죽음의 노예적인 삶에서 참 자유의 삶을 주셨기에 생명과 평화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 바우로사도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인 성령을 따라서 영적인 것에 마음을 써 성령의 법대로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늘 악마가 승리하는 삶이 아닙니까? 매번 우리의 영혼이 죽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악마가 내 힘보다도 훨씬 강하지 않습니까?
악마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없기에 우리는 약한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영인 성령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 바우로의 가르침입니다(로마8:9)
세상은 서로를 경쟁적으로 관계하게 하고, 교회는 성령으로 인하여 가족관계강화를 시도해요.
성령은 약자를 배려하고 지원하고 동기부여를 주고 카리스마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기심을 강호하려고 밀쳐내고 배제하고 빼앗아가고 상처를 줍니다.
그렇게 죽이려는 세상에서 가족처럼 대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그것이 성체성혈을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려 할 때 예전에는 궤배를 했습니다.
무릎을 꿇어 절을 하는 것이 궤배로 정중하게 마음을 다해 주님을 모시는 자세입니다.
성체와 성혈을 제 속에 모시려고 모시기 전에 온전한 마음으로 궤배를 하고
성체성혈을 모신 후에는 감사의 궤배를 올립니다.
신도로 이 시간이 제게는 가장 거룩한 시간이고 신비의 시간, 아름다운 시간이라 여깁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인 갈릴래아에서 빌라도총독(26-36년, 이두메,유대,갈릴래아)이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물을 착취해 가기에 이에 저항한 사람들을 학살했고, 이스라엘의 남쪽 예루살렘의 수도관을 지키는 실로암탑이 무너져 18명이 죽은 것이 너희보다 더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있어서 학살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죄를 지었기에 재산과 식구들이 해를 입었다는 욥의 친구들의 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학살이 일어나는 상황인데 그 학살당한 이들이 잘못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학살당할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가 더 중해서 죽었다고? “아니다. 너희가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영루가13:3, 5).”
“아니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공동번역 루가13:3,50.”
죄를 지어서 학살당했다고 판단하는 그것이 죄를 지은 것이니
그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군부독재의 미얀마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죄를 져서입니까?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우리보다 더 죄를 져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의 권위를 세우는 이기심을 이기는 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족관계의 강화의 길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한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자르라고 명하는데 포도원지기가 자신이 잘 돌볼 테니 한해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는 내용입니다(루가13:6-9).
무화과나무는 교목이고 포도나무는 넝쿨나무입니다. 포도원농장은 포도나무가 주로 자라는 곳입니다. 그곳에 다른 나무인 교목인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많은 가지가 나옵니다. 아마도 포도넝쿨이 무화과나무에 올라탔다면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넝쿨로 인하여 무화과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지만 포도농사가 주였기에 무화고나무에 포도넝쿨이 올라타 많은 포도열매를 맺는 것을 즐겼을지도 모릅니다. 포도원지기는 포도농장일에 열중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포도원 농장의 정황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현장을 잘 모르면 자신의 잘못으로 나무를 벨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예수님의 비유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빌라도를 보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할지가 보일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펜데믹을 맞아 인류가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인류 전체가 획일화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각각 다른 생활을 해서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인류인데 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다양성이 무너지면서 하느님의 창조적인 삶이 얼마나 인류에게 복을 주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운명이 사라지고 획일화되면서 우울증이 높아지고 자살자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획일화로 다양성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결과가 비참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하느님께 저항하자 페스트가 퍼진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자 바이러스가 온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아가야지요. 하느님을 만나야지요. 성공회가 그렇게 하느님을 찾아가는데 앞장서시는 어머니연합회가 되기를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