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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장
오악(五岳)을 보고 온 사람은 평범한 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을 보고 온 사람은 오악도 눈에 차지 않는다.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을 두고 한 말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연화봉(蓮華峰)이 오천 척이 넘고 삼천 척이 넘어가는 봉우리만 일흔두 개에 달하는 안휘성 최고의 산 중의 하나이다.
특히 연중 이백 일 이상이나 자욱하니 끼어있는 운해(雲海)는 무릉도원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절경을 이루고,
황산(黃山) 일출(日出) 중원제일(中原第一)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황산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황산의 절경과는 아무 상관없이 열심히 발걸음을 놀리는 한 무리의 인마(人馬)들, 바로 백산 일행이었다.
새로 사 입었던 옷들은 양자강에서의 전투로 이미 넝마가 되었는지 산을 오를 때마다 갈아입던 헌옷을 입지 않고 새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겉치레야 원래 신경도 쓰지 않았던 놈들이라 새옷이든 헌옷이든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표정들이 밝아 보였다.
처음으로 이름 석자가 생긴 것도 있었지만, 웬일로 황산을 오르기 전에 그동안 소중하게 들고 다니던 광천뢰를 백산이 수거해 갔기 때문이다.
저 멀리 구룡폭포(九龍瀑布)가 내려다보이는 널따란 공터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한나절의 강행군에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모사! 앞으로."
거의 이십 척 정도 크기의 바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백산이 모사를 호명했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던 광견조원들이 일제히 백산을 쳐다보았고, 또 무슨 고통을 주려고 자신을 부르나 싶어서인지 불안한 표정의 모사가 어기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제의 약속대로 오늘부터 각자의 이름을 쓰는 시험을 치르겠다. 처음 쓰는 이름이니까 성의껏 써라. 이 바위를 꽉 채워서 영원히 남기도록."
모사의 표정이 풀렸다. 어려운 것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기껏 이름 새기는 것이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름 새기는 것 하나는 자신 있는 모사였다. 그에게 있어서 글씨도 모조품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그려내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모사가 바위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수없이 많은 글들을 모사했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고 모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모사해야 될 것이 자신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간단한 것일진대도 모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단 두 자. 그것을 새기는 것이 왜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인가.
그에게 있어서 모사품은 의미가 아니었다. 하나의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났던 것이다.
"아직 못 외웠냐?"
"아닙니다. 형님, 쓰겠습니다."
다급히 소리친 모사의 오른손이 붉게 물들었다.
마차를 메고 오는 과정과 광천뢰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제는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는지 마음을 먹자 바로 손이 강기에 휩싸인 것이다.
"이얍!"
힘찬 고함 소리와 함께 모사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의 정권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흙을 파내듯이 그렇게 바위가 떨어져 나가고 전서체의 글씨로 글이 새겨지고 있었다.
'전영(全泳)'
모사의 새로운 이름이다.
두 자의 글자를 새기는데 혼신의 힘을 다 했는지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종이 위에 있던 필체를 그대로 흉내 냈지만 이번에는 그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심력(心力)을 다해서 썼던 것이다.
모사가 새겨 놓은 글을 바라본 광견조원들의 입이 벌어졌다.
너무나 잘 썼던 것이다. 수십 년을 노력해도 자신들은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야, 임마! 비석 세우냐? 두 자 밖에 안 되면서 왜 그리 시간이 오래 걸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모조의 달인인 그가 두 자를 새기는 데는 촌각(寸刻)도 안 걸린다는 것을….
"맞다. 저 새끼 뒈지면 저것 잘라다 비석으로 만들어 주자. 아니다, 그냥 이곳에 가지고 와서 저 이름 밑에다 묻어버리지 뭐! 그게 좋겠다. 낄낄낄!"
너무나 잘 새겨진 모사의 이름을 보며 광견조원들이 부러웠던지 한마디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다음 말은 그들의 얼굴색을 하얗게 탈색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모사가 써놓은 글을 잘 보았을 것이다. 앞으로 가는 길에 산이 나오면 그곳에 있는 가장 명당자리에다 이렇게 이름을 새긴다.
만일 모사보다 못한 놈이 있으면 너희들 말대로 그곳에다 묻고 간다. 알았나?"
모사에게 가장 먼저 이름을 쓰게 했던 이유가 드러났다.
낄낄거리던 광견조원들의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자신의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 찔러두었던 이름자가 적힌 종이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자신조차 알아보기 힘든 악필, 글이라는 것이 하루 만에 쓸 수 있는 것이었던가.
다음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찌 되었든지 남들이 알아볼 수는 있도록 해야 한다.
모사를 제외한 광견조 전원이 땅 바닥에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스산한 살기와 함께 혈의 복면인 이십여 명이 일행을 덮쳐왔다.
"뭐야! 이거?"
광견조 일행이 그 자리에서 바로 몸을 굴리며 자신의 도를 뽑아들었다.
"이런 씨펄!"
소살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기습해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굴린 순간 자신의 이름자가 적힌 종이가 반으로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소살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극도로 살심(殺心)이 일었을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누구냐?"
많은 인물들이 일행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살수를 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갈태독과 과거의 원수가 왔다며 농담까지 했지 않았던가.
뇌룡현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곳까지 오면서 특별히 원한 살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더욱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저들의 은밀함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자신의 이목을 피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호에 누가 있어 자신과 갈태독의 눈을 벗어나서 공격을 해온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백산의 외침에 이십여 명의 혈의 복면인은 아무 소리가 없었다. 다만 더욱더 진한 살기를 발산하며 일행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살수(殺手)인가? 아니면 살수 교육을 받았나…."
갈태독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결코 살수는 아닌 것 같았다. 살수라면 일격이 실패했을 경우 다음 기회를 노리지 이렇게 대담하게 공격하지는 않는다.
어느새 인원이 오십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주변에 은신해 있었던지 하나둘씩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혈의인들의 몸놀림이 빨라지며 일행을 향해서 밀려들었다.
특히 백산과 갈태독 그리고 석숭을 향해서 집중적으로 공격을 하는지 세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인원이 붙었다.
"컥!"
최초의 비명소리. 소살우 앞에 있던 복면인 하나가 목뼈가 부러지며 내는 소리였다. 자신을 베어오는 검을 피함과 동시에 복면인에게 접근한 소살우가 목울대를 쥐고는 그대로 꺾어버린 것이다.
"건들지 마! 다 내 거야."
자신의 이름자 적힌 종이가 찢어진데 대한 화풀이인지 환한 미소에 차가운 눈동자의 소살우가 소리를 질렀다.
소살우나 광견조에게는 특별한 보법 같은 것이 없다. 건달들의 싸움에서 배운 발놀림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보법을 만들어 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또 다른 복면인의 검을 어깨 쪽으로 흘리며 뒤늦게 도가 뻗어지고 혈의인의 복부를 관통한 도를 그대로 옆으로 그어버렸다.
폭포 같은 피가 쏟아지며 허리가 반쯤 잘린 복면인이 또 하나 쓰러지고,
위에서 내리치는 검을 막아서 오른쪽으로 돌리며 그 상태 그대로 상대의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베어버린다.
순식간에 세 명의 혈의인을 저승으로 보내버린 소살우가 먹이감을 찾기 위해 미소 띤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악!"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소리였다.
"배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천영이 배를 안고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혈의인에게 손을 쓰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배로부터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며 더 이상 진기가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누님!"
혈의인 한 명의 이마에 사천비(死天匕)를 박아 넣고 있던 백산의 귓전으로 조천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백산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오며 고개를 돌리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조천영을 향해서 혈의인 한 명이 검을 휘둘러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썅…!"
무상신법을 극도로 발휘하여 조천영의 옆으로 이동하며 오른손의 수천비를 발출했다.
캉!
수천비와 혈의인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간발의 차로 목숨은 건졌으나 팔을 베이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컥!"
거의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혈의인이 조천영을 향해서 휘두른 검을 수천비를 이용해서 막고 목을 틀어쥐기까지 거의 순간 동작처럼 이루어졌다.
"감히 네놈이 누님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회수되었던 수천비 세 개가 다시 튀어나오며 혈의인의 이마와 입
그리고 가슴의 세 곳을 그대로 관통하여 뒤쪽으로 튀어나오더니 전방을 향하여 붉은 빛을 뿌리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 개의 비도가 관통한 부위를 따라서 혈의인의 몸을 한바퀴 돌더니 이마와 입 그리고 가슴을 그대로 절단해서 끊어버린 것이다.
뇌룡사(雷龍絲).
천목환(天沐環)과 수천비를 연결하는 뇌룡사가 처음으로 무기로 활용된 것이었다.
"석두! 살우! 형수를 보호해라. 나머지도 전부!"
분노한 백산의 외침에 석두와 광견조원들이 전부 물러나며 조천영의 주위로 원을 그리듯 둘러섰다.
아직도 손에는 가슴 위쪽과 입 아래쪽만 남아있는 혈의인의 목을 틀어쥐고는 백산의 몸이 천천히 혈의인을 향해서 다가가고 있었다.
거의 이십여 명의 복면인이 죽고 이제는 삼십 명 정도가 마차 쪽을 향해서 살기를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걸어가고 있던 백산의 양팔에서 수천비 여섯 자루가 모두 튀어나와 약간 벌리고 있는 백산의 팔과 일직선으로 땅을 향한 채 붉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최대 길이 이장인 수천비가 일 척 정도만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말려야 해요. 제발…."
조천영이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는지 갈태독을 향해서 애원하고 있었다.
살얼음 같은 정신에 엄청난 살인을 하게 되면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말리고 싶은 것이었다.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백산이 분노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막을 수 없다. 저놈들의 검에 치명적인 독이 있었다. 네가 독령곡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핏물로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
갈태독이 말리지 않은 이유였다. 혈의인들의 검에는 '절명독(絶命毒)'이라는 치명적인 독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독령곡에서의 기연이 없었다면 스치기만 해도 녹아 내릴 수 있는 그런 절독(絶毒)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홀몸이 아니라고."
"옛?"
냉추렴과 소운의 경악에 찬 외침소리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조천영 자신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홀몸이 아니라니… 여자가 홀몸이 아닌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질 않는가.
임신!
지금 갈태독이 임신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제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떻게…."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자신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상적인 여자가 된 지 이제 두 달이다.
그러나 최고의 의원인 갈태독의 말이다.
"달거리를 안 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의원이라서 그런지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말일진대도 서슴없이 묻고 있다. 그러나 조천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공을 익힌 후 거의 달거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빙천수라마공의 부작용, 바로 그것 때문에 석녀가 되어가고 있던 그녀였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번 정도. 그것도 작년에는 아예 없었다. 자신의 아이라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언니는 빙천수라마공을 익혔어요. 완성한 지는 두 달밖에 안 되었고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천영을 대신해서 냉추렴이 대답을 했다.
"뭐라고? 지금 빙천수라마공이라고 했느냐?"
고금오천무의 하나라고 해서 놀란 것이 아니다. 빙공 중의 최고인 빙천수라마공을 익히고도 수태를 했다는 것에 더욱 놀란 것이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빙공(氷功)을 익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온몸에 차가운 냉기를 쌓는 작업이다.
따라서 체온이 일반인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아진다. 때문에 수태의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빙공을 익히는 집안에서 자식이 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인 무공을 익혔어도 그 정도인데 빙공 중의 최고라는 빙천수라마공을 익혔다.
십이 성 대성한 지는 두 달밖에 되지 않았고, 도저히 수태의 조건이 성립되질 않는 것이다.
정확하게 진맥을 해보아야 되겠지만 태아도 정상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늘의 축복인가? 아니면….'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다.
"다시는 내공을 일으키지 마라. 명심하거라!"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아직도 이게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조천영은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실감이 나질 않는 것이다. 애라니, 자신의 아기라니! 자꾸만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 서른하나.
과거 설귀후에게 속아서 수없이 많은 관계를 가졌을 때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었다, 정상이었던 몸이었음에 불구하고.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때의 원한을 갚는다며 익힌 빙천수라마공으로 인하여 석녀로 되어가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딱 두 번 밤을 같이 새웠을 뿐인데 임신이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님의 아이를 가졌다면 응당 기뻐해야 되는데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살우, 이야기 들었지? 이쪽으로 모여라 형수님의 시야를 차단해."
석두였다. 그도 갈태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땅히 축복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렇지를 못했다.
자신들의 앞에 있는 아버지가 될 사람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도살(屠殺)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듣기는 들었는지 태교를 위해서는 저런 장면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석두의 말을 들은 광견조원들이 자리를 옮겨서 조천영의 시야를 완전하게 가렸다.
그들이 보고 있는 백산은 인간이 아니었다. 오직 살인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괴물이었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마치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상대에게 천천히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새하얀 백색의 눈동자와 붉디붉은 악마의 힘줄에 연결된 다섯 개의 핏빛 눈동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스각!
또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서 달려드는 혈의인을 향해서 왼손을 휘두르자 가장 먼저 그의 생천비(生天匕)가 허리를 깨끗하게 잘라낸다.
이어서 운천비(雲天匕)가 둥근 혈운(血雲)에 휩싸인 채 그대로 심장을 뚫어버리고,
마지막으로 회오리치는 핏빛 바람을 머금고 있는 풍천비(風天匕)가 머리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또다시 오른손이 휘둘러지고 독천비(毒天匕)에 의해서 혈의인 한 명이 녹아내리며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백산을 바라보는 일행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목격되었다.
다섯 개의 붉은 비도 속에 같이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새하얀 비도,
마치 파멸안의 백색지안(白色之眼)이 발현된 백색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비도가 사방으로 유영하며 허공에 날리는 피를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비비(天秘匕)였다. 열두 개의 비도 중에서 아무런 기운도 포함하지 않고 단순하게 천비비라는 이름으로 불린 비도가 파멸안이 나타남과 함께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전율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백산의 도살보다 피를 흡수하는 비도가 더욱 괴이한 광경으로 일행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르신 저것은…."
'모른 체 하게, 앞으로도 내색하지 말고'
백산의 변화된 모습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쳐다보던 남궁지우가 무엇인가를 물으려다 갑자기 엄해진 갈태독의 전음에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럼 이미 알고 계셨단 말인가….'
남궁지우도 지금 백산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강호무림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공포의 전설, 파멸안(破滅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지우보다 더욱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석숭이었다. 그의 표정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럼 지금껏 저 친구의 능력이 파멸안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단 말인가… 그것도 백색지안? 오! 하늘이여….'
백산을 쳐다보고 있던 석숭이 내심으로 지르는 소리였다.
유리처럼 투명한 백색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가문에서 내려오던 전설 한 가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무려 천오백 년 전에 신(神)들을 몰살시켜버렸다는 학살자(虐殺者)의 전설이….
'결국은 동시대에 모두 나타나는 것인가… 신도 나타나고 그들의 천적(天敵)인 학살자까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석숭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남궁세우가 오래된 고서에서 보았다는 파멸안에 대해서 그보다 더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석숭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도 파멸안의 주인인 백산의 도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백산의 일방적인 도살에 지금껏 아무 소리 없이 검만을 휘두르던 혈의인들이 멈칫멈칫 물러나고 있었다.
공포였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아 돌며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오십 명이 투입되었다. 극고한 사법으로 인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살수보다 더 은신술에 강하고, 기척을 숨기고자 한다면 어떠한 고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죽이고자 했던 적은 한 명도 처치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도살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 앞에 있는 백색의 눈동자, 분명 숨을 쉬는 인간이 분명할진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백색의 눈동자와 붉은 색의 악마 다섯이 전부였다.
몸으로 막으면 몸이 잘리고 검으로 막으면 검이 잘린다.
피할 곳이 없었다.
입고 있는 털옷에 자신들의 피가 스며들었는지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놈이 움직였다. 혈의 복면인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 백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예비동작도 없이 그대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마치 유령의 움직임처럼 무릎조차 굽히지 않은 채 바람을 따라서 흐르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백산의 오른손이 뻗어지고 수천비 세 개가 혈의인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이에 놀란 복면인 한 명이 온 힘을 다해서 한 걸음 움직이며 피했다.
그러나 비도를 피했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앞으로 뻗고 있던 팔이 그대로 횡으로 휘둘러지고 피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던 뇌룡사가 혈의인을 그대로 삼등분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수되던 비수가 이미 잘린 목 위에 있던 머리를 뒤통수부터 거꾸로 관통하며 돌아왔다.
"우욱! 우엑!"
남궁세가의 두 부녀가 토하는 소리였다. 남궁미령에게는 살인 장면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지만 남궁지우는 과거에 많이 보았었다.
그의 나이 십오 세 때 백살혈겁이 있었고, 이후에도 무수한 죽음을 보아왔다.
그러나 단연코 처음이었다. 가장 깨끗하게 죽은 것이 머리와 가슴과 허리가 잘린 세 토막의 시체였다.
대부분의 혈의인이 팔과 다리와 같이 몸통이 분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인간에게 자신의 형이 검을 들이댔다고 생각하니 진저리가 쳐졌다. 저 친구 혼자만 있어도 남궁세가가 멸망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백색 투명한 눈동자와 약간 웃는 듯한 입매, 죽음에 대한 느낌도 없이 그냥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전설이 말하는 파멸안이질 않는가.
그의 행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저항의지를 상실하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도 못하고 공포에 절어 있는 혈의인을 장작을 패는 것처럼 머리에서 가랑이까지 찢어버린 다음 허리 부분을 잘라버린다.
사등분이 된 몸통은 백산이 다른 먹이를 찾아서 움직인 후에야 분리되고 있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삼십 명이 넘던 일류고수들이 다 사라진 것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분해되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마지막 혈의인이 죽어가면서 본 것은 백색 투명한 하얀 눈동자의 중앙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조그마한 흑점이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백산이 주는 엄청난 공포에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두 부녀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모두가 백산의 무공에 대해서 알고 있다.
십장 크기의 전륜나한 백팔 개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엄청난 무공, 그러나 그것은 전륜나한일 뿐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비도를 휘두르는 백산의 모습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언제나 웃으며 헛소리만 하던 백산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 마리의 분노한 야수(野獸)였다.
아직도 못 다한 미련이 남았는지 먼 곳을 쳐다보며 홀로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만해요, 산! 제발 그만해요."
주위의 이상한 분위기에 정신을 차린 조천영이 백산을 향해 뛰어가면서 외쳤다.
이래서 말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고 분노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백산의 모습을 알기에.
"보았느냐?"
갈태독이 소운과 석두 그리고 광견조에게 하는 소리였다.
"천영이는 팔을 조금 다쳤다. 그런데도 저놈이 저렇게 분노했다. 다치지 마라, 죽지 마라. 너희 형님을 살인마로 만들기 싫거든 강해져라.
그것만이 저 녀석의 손에 피를 묻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저 녀석의 손에 피가 묻게 되면 그 결과는 지금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파멸안(破滅眼).
백색지안(白色之眼) 일성(一城) 멸(滅)이라 했던가.
그러나 갈태독도 모르고 석숭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마지막에 죽은 혈의인이 보았던 백색 눈동자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던 검은 점 하나. 흑색지안(黑色之眼)의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힘들겠지만 평소처럼 행동해라. 어색한 모습 보이지 말고 소운이도. 아이에 대한 것은 내가 별도로 이야기하마."
분노밖에 남아있지 않은 머릿속을 빨리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한다. 정(情)이라는 감정으로 꽉꽉 채워서 발산되기 시작한 분노를 막아야 한다.
마지막에 쳐다보았던 곳, 아직도 백오십여 명 정도가 숨어있는 곳이다. 그곳까지 달려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은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결국 내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가!'
피 냄새가 싫어서 의원이 되고자 했던 갈태독이 살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백산보다 먼저 손을 써야 이 참혹한 살행(殺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백산의 분노를 막을 수 있다.
"괜찮은 거야?"
"그래요, 아무 이상 없어요. 자 봐요!"
조천영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웃어 보였다.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 조각들을 보면서도 웃고 있었다. 이럴 수밖에 없다. 깨지기 시작한 살얼음을 다시 얼리기 위해서는 웃어야 한다.
이 사람의 기분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 구토가 나올 것 같은데도 꾹 눌러 참고 있는 조천영은 필사적이었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누님, 안 그래도 되요. 나도 내가 한 짓을 알고 있어요. 다음부터는 자제해 볼게요."
마불신승을 만나고 난 후에 생긴 변화였다.
무상대법력(無上大法力), 그것이 백산의 머릿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고 있었다. 옆에서 자극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있는 것이다.
가슴속에 있는 항마불주(降魔佛呪)를 가만히 만져본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시작하지는 않을 거야,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약속할게."
그의 결심이었다. 살인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조천영이 슬퍼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다짐을 하고 있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만 지키고 살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마저도 접겠다는 소리였다.
"약속해요, 세 번, 세 번은 참겠다고 알았죠?"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금이 갔던 얼음이 다시 얼어붙고 있었다. 더욱더 단단하게 붙고 있었다.
"큰 형님! 그만 놀고 갑시다. 어디 장가 안 간 놈 서러워서 살겠소?"
소살우였다. 그도 과거 어린시절 지천 참사의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이다. 그때는 무서워서 걷지도 못했다. 수없이 많은 날들을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무공은 강했지만 자신들보다 더 약한 사람이다. 친인(親人)의 조그마한 상처에도 견디질 못하고 부서지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뭐 하오? 빨리 안 오고."
* * *
"어떻게 되었나?"
"많은 것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워낙 공포에 질려있었는지라…."
"공포? 사령귀매대법(邪靈鬼魅大法)을 거친 사사대원들이 공포를 느꼈단 말인가?"
사령귀매대법, 인간의 감정을 완전하게 말살시키는 천사맹의 비전대법 중의 하나이다.
이 대법을 받은 자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오욕칠정이 모두 사라질 뿐 아니라 생명체로서의 기척이 사라진다.
마음만 먹으면 체온뿐 아니라 심장 박동 수까지 멈출 수 있는 대법이다.
그런 대법을 거친 자들이 암습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공포를 느끼고 죽어갔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나?"
"이들의 눈동자에 남아있는 잔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약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일행 중 여자 한 명이 몸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맹주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맹의 최정예인 사사대(死死隊)를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사사대의 능력,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흔적을 자신의 동공 속에 남겨두는 극고한 사법마저도 익히고 있었다.
"그래? 황산을 넘기 전에 그놈들을 정리한다. 우선은 여자가 약점이니까 여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허점이 생길 때 나머지를 공격하라."
백오십에 달하는 인원이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먼저 시작하지 않겠다. 지키기만 하겠다는 백산의 다짐.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없었다.
다만 자신이 가진 것,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조그마한 행복 이외에는 지킬 게 아무것도 없는 백산이었다.
몽운령(夢雲嶺).
저 멀리 운해에 잠겨있는 천도봉(遷都峰)이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천도봉으로 오르는 안개가 쉬었다가 잠이 드는 곳이라 해서 몽운령이라 했던가.
흐르는 바람을 타고 희미한 운무 덩어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을 오른다.
"영감! 아까는 왜 그들을 느낄 수가 없었죠?"
일행은 살육의 현장을 출발하여 황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도봉이 올려다 보이는 이곳 몽운령을 지나고 있었다.
갈태독과 백산, 두 사람은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두 사람이 매복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동안 고생은 했지만 광견조의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면 많은 희생이 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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