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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4일 수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제1독서 : 느헤 2,1-8
복 음 : 루카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는 운전해서 낯선 지방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도를 보고서 경로를 미리 확인해야 했습니다.
만약 조수석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수시로 지도를 보면서 길을 확인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종이 지도를 보지 않습니다.
보험회사에서도 이제 보험 가입할 때 지도를 선물로 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적의 정보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창기에는 검색 속도가 느려서 그냥 종이 지도 보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연히 빠르게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편합니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아마 그만큼 내비게이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때, 불안해하지도 또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비게이션을 신뢰하는 정도는 될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그 길은 아니라며
자기 편해 보이는 반대편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마음 가는 대로만 살겠다면서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첫 자리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가장 정확하게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면서 함께하도록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달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충분히 허락할 수 있는 이유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작별 인사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걸린다고 이 정도도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결단을 가져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 긴박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주여, 이제 나의 회상과 고백을 원하시오니 이 마음을 굽어보소서.
그토록 차지던 죽음의 끈끈이에서 빼 주신 내 영혼, 이제 당신께만 붙게 하소서(성 아우구스티노).
당신 밖에 없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결혼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서원 하고 수품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항구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무엇에서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행을 맛보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것과 천상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차마 한 가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달리다 둘 다를 잃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더더욱 되씹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묶이면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오늘 순간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최선으로 다하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음에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수품 때의 마음으로 기쁨이 넘쳐나야 하지만 그 마음은 꼭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가시밭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고 세상 것을 더 많이 즐기고, 세상 것을, 더 달콤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거기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상 것을 더 찾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저에게 그래도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두 마음 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는 제 마음을 당신이 아오니
부족함을 꾸짖어 주시고 당신께 대한 한결같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상상력 사전’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시각적인 언어를 표현의 준거로 삼아 말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주로 청각적인 언어를 빌려서 말하는 사람이며,
셋째는 감각적인 언어를 많이 구사하는 사람이다.
시각파들은 ‘이것 봐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미지를 빌려서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여 주고 관찰하며 색깔을 통해 묘사한다.
또, 설명을 할 때는 ‘명백하다. 불분명하다. 투명하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장밋빛 인생’이라든가 ‘불을 보듯 뻔하다. 새파랗게 질리다.’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청각파들은 ‘들어봐요’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그들은 ‘쇠귀에 경 읽기, 경종을 울리다. 나발 불다’처럼
어떤 소리를 상기시키는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고, ‘가락이 맞는다.’라든가 ‘불협화음, 귀가 솔깃하다.
세상이 떠들썩하다.’같은 말들을 자주 쓴다.
감각파들은 ‘나는 그렇게 느껴, 너도 그렇게 느끼니?’하는 식의 말을 아주 쉽게 한다.
그들은 느낌으로 말한다.
‘지긋지긋해, 너무 예뻐서 깨물어 주고 싶어, 썰렁하다, 화끈하다. 열에 받치다. 열이 식다.’같은 것이
그들이 애용하는 말들이다.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그 사람이 눈을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일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요구했을 때
눈을 들어 위쪽을 보는 사람은 시각파이고,
눈길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은 청각파이며,
자기 내부의 느낌에 호소하려는 듯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낮추는 사람은 감각파다.”
무엇이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기질을 타고나는데 다른 것들을 포용하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관계를 맺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토마 사도는 시각파인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예수님께서는 그런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그런가 하면 바오로 사도는 청각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가면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인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은 새와도 대화할 수 있었고, 장미와도 대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기도하던 성당에는 비둘기 한 쌍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몇백 년을 이어가며 성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이 유혹을 견디기 위해서 장미밭에서 굴렀을 때, 장미는 가시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인이 기도하던 곳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의 다짐을 모아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는 대조되는 세 인물과 그에 따른 예수님의 세 가지 태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하는데, 그
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되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은 내치는가 하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는 가지 못하게 하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이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가르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 역시,
당신을 진정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곧 당신의 제자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를 더 앞세우는 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또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도록 해 달라고 하는 <세 번째 사람>에게는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그 아무것도 그리스도 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엇보다도 ‘앞서 먼저’, 자신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이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 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것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이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늘나라를 앞세우는 일입니다.
거처할 곳이 묻혀 썩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주님!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을 따르려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
어떤 사람이 주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57절) 말한다.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 하신다.
이 말씀은 그를 바로 잡아 하느님 안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늘의 새와 여우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채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이다.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들어오셔서 쉬실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하였다. 주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 하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례로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61절)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간적인 일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하여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한다면 가차 없이 끊어버려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끊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악마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반대의 길로 가려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아무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개인적인 이유로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몰두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데 망설임 없이 즉시 따를 수 있는 자세와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잘못된 선택으로 계속 후회가 된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명의 새로운 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심각하게 고려해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시며 견딜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고려해 보라고 하십니다.
한 제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세상의 시선에 사로잡힌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편의는 물론 세상에서도 완전히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무언가 선택을 하기 전에 꼼꼼히 숙고해 보고 결정하라는 내용일까요?
물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을 많이 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뇌가 피로해지기 때문입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압 데익스테르후이스(Ap Dijksterhuis)는 선택에 관한 많은 실험을 통해
복잡한 조건이 많은 선택일수록 오랜 심사숙고가
오히려 많은 후회를 하게 만든다는 결과를 입증하였습니다.
만약 몇 가지 조건만 살펴보면 금방 좋은 차와 나쁜 차를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숙고하는 시간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의 품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 숙고를 많이 할수록
시간이 지난 뒤 후회하는 확률이 커졌습니다.
다른 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커진 것입니다.
반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골라야 했을 경우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도가 컸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이 고려하지 않은 덕분으로
내가 이것을 선택하여 잃게 되는 저것의 장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을 것이라는 편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이득이 있고 잃는 고통이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한 것도, 학과를 선택한 것도, 직업을 선택한 것도, 배우자를 선택한 것도,
자녀를 더 낳기로 선택한 것도, 덜 낳기로 선택한 것도
후회가 될 수도 있고 잘했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결과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많은 고려를 하고 선택한 경우는 지금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함이 크게 느껴지고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장점들이 크게 여겨져서 선택에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는 합니다.
그러면 왜 이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런 것일 줄 몰랐다!”라고 말합니다.
신중히 고려해 보지 않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사제를 선택해서 얻는 행복보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아서 얻을 행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크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의 선택이 잘 된 선택이었다고 믿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사제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25년 이상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에 신중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렇게 결심하면 됩니다.
시인 정호승 씨가 기자 생활을 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철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은 성격이 완고하여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성철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먹고 설거지가 끝난 후
하수구로 내려가기 직전에 걸려있는 밥풀들을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찍어서 드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려면 부처님께 먼저 1,000배를 해야 했습니다.
또 그분에게 사진을 찍자고 자세를 취해달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호승 씨는 운 좋게도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받았습니다.
해인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백련암 방향을 가던 중
백련암 표지판이 나오자, 그 앞 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사진기를 마구 눌러대는데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합니다. 벌써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습니다.”
“그래,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
정호승 씨는 이 말씀이 농담인 줄 알았으나 있는 필름을 다 쓸 때까지도
아무 불평 없이 원하는 포즈를 다 취해주었다고 합니다.
(참조: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정호승의 새벽 편지 중)
성철스님은 지나치게 사진을 많이 찍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정호승 씨를
만나겠다고 한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을까요? 분명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만나기로 한 순간부터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매사에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런 마음이 왔는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많은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런 잘못에 후회가 없습니다.
발전하는 기회로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냥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지만, 그 이후로는 해충도 많고 물도 부족하고
만나도 맛이 질리고 고기도 먹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도 자꾸 이집트 쪽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탈출시켜 준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회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신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선택은 아버지의 선택 안에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길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던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주님 뜻 안에 머물며 주님 안에서는
나의 모든 선택에 후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모든 선택에 있어서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하느님 선택안에 머묾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마주 대하는 세상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요한이 보도하는 제자들의 소명사화는 공관복음의 그것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첫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였다.(1,35-40)
두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 것에 힘입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이나, 다른 하나는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으로 추정된다.
요한복음에서 특이한 점은 한 제자가 다른 제자의 소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을 예수께 인도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께 인도한다.(1,41.45)
나타나엘은 공관복음의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나타나엘은 예수께 가기 전에 필립보를 만났다.
필립보는 그에게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록한
메시아이며 요셉의 아들로서 나자렛 출신의 예수를 만났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나자렛 출신이라는 말에 나타나엘은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예수님을 만나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후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의 메시아 고백을 인정하고,
그가 지금까지 체험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더 큰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장차 드러내실
자신의 영광과 하늘나라에 관한 표징과 기적이다.
오늘 복음의 말로 표현하자면,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과 땅에 내려온 사람의 아들 사이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케한다.(창세 28,10-17)
결국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을
나타나엘이 스스로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하느님을 보필하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非可視的이다.
물론 천사들도 하느님께서 특별히 허락한 사람과 경우,
즉 토비아, 즈가리야, 마리아, 다니엘과 요한의 환시,
요셉과 동방박사들의 꿈속에서와 같이 可視的 형상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천사들은 비가시적인 모습으로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 사이의 중개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은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이 땅에 현존하심을 말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세상은 열린 하늘과 마주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의 도래와 강생으로 인간 세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을 의미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현 캐트린 수녀
스승님과 길을 가다 뜬금없이 말하였네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다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시니
저에게는 어떻다 하실것인지요?"
스승님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쉿! 말하지 않아도..." 라고 하시네.
스승님과 나
길을 가네.
[출처] 루카 9,57-62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