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 불성>
여래如來라는 용어가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경전은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중중무진법계를 설명하며, 한 법계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의 이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이런 표현을 빌려 서방정토 아미타불을 표현해 보면 이렇습니다.
“…서쪽으로 10만 억 불국토를 지나면 하나의 불국토가 있는데 그 곳의 이름은 극락정토라 한다.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부처는 그 이름이 아미타여래·응공·정변지·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니라.…”
이렇듯 여래라는 말은 우주에 변만한 무궁한 법의 세계, 곧 여여如如(연기와 상응하니 같고 같다는 뜻이 여여)한 법계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화신으로 나투셨다, 오셨다〔來〕라는 의미로 여래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계法界는 붓다께서 깨달은 연기에 어긋나지 않는 우주의 빈틈없는 곳곳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이 자체가 대승불교의 상당히 깊숙한 사상에 도달한 것이기에, 여래라는 의미를 이해 하려면 대승불교사상 특히 화엄사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래에 감출 ‘장藏’을 붙인 여래장이 유식에서 말하는 가장 깊은 식 8식인 아뢰야식이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장의 개념은 중생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면 그 씨앗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그 씨앗이 바로 우주(법계)와 하나인‘나(我)’에게, 또 모든 중생에게도 있으나, 다만 욕망과 번뇌의 구름에 가리어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있기에 장藏(숨을 장)을 덧붙여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은 부처의 성품이라는 뜻으로 여래장과 근본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나 여래장과 불성은 경전에서는 분명히 다른 용도로 쓰이 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여래장과 불성을 가름해 보겠습니다. 여래장은 유식사상이 정립된 시기와 거의 유사한 기원후 300년 경 의 대승경전인 『여래장경如來藏經』에 처음 등장하고, 불성은 그보다 100여 년 뒤인 400년 경 편찬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일체의 중생은 불성이 있다”는 말로 처음 등장합니다.
여래장如來藏과 불성佛性이야말로 대승적인 발상의 종착점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둘이 우리에게 내재하기에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마 수많은 대승불교의 논사들이 이 문제를 궁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 논설論說들이 신앙성과 합쳐져 꽤나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여래장은 여래의 경계 즉 깨달음의 세계, 완전한 무결점의 세계 에서 보는 중생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무결점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성품은 깊이 내재되어 감추어져〔藏〕 있다”라고 깨달음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즉, 여래장이라고 말하는 주체가 부처(역사적 인물인 붓다와 신앙적 부처를 구별하기 위해 ‘부처’라 씀)라고 생각하고 용어를 이해하시면 됩니다.
불성은 부처의 성품이 있기에 언젠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불성은 중생의 입장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성품이기에 예비부처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의미로 불성佛性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중생이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부처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는 종자성種子性인 불성이 있기에 성불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여래장과는 달리 중생이 ‘나도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성품이 있다 는 가능성과 희망을 스스로 찾는 용어’가 불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주체가 부처가 아닌 중생인 것입니다.
밀교, 특히 선불교에서 “중생은 이미 부처다”, “네가 이미 부처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라는 단정은 실은 붓다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어느 경전에도 이런 사상을 확인해 주는 대목은 없습니다. 법화경에서 붓다께서 수기授記의 형태로 “장차 너희들도 부처를 이룰 것이다”라는 내용은 신앙인 믿음을 중요시 하는 법화경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여래장과 불성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열심히 정진하고 수행하면, 누구나 결국은 성불을 할 수 있다는 근원적 인因을 분명히 하는 데 있습니다.
법화경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경전이 중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붓다의 가르침을 잘 분별하여 따르라는 내용과 마음을 닦아 가는 방법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선사들에게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선방에서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일이 본분인 출가자의 격에 맞는 법문을, 세간의 이익과 부닥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재가 불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을 시켜 법을 설하기에 현실적 감각의 부족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재가 불자들에게 “네가 이미 부처다”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상대에게는 “난 아직 아닌데”라던가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것 인가?”라는 화두도 아닌 의심만 일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시비를 가리지 말고 분별심을 버려라”라는 말도 출가자에게나 해야 될 말이지, 모진 세상을 살아가는 불자들에게는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부담만 주는 말인 것입니다. 더욱이 붓다께서 깨달으신 연기緣起와 스님들이 불자에게 말하는 이런 식의 설법이 ‘합치’하는지도 의문입니다.
붓다께서 재세 시 특정 수행자 무리를 외도라 배척하신 것 역시 과연 ‘시비분별’을 떠난 마음에서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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