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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제1독서 : 느헤 8,1-4ㄱ.5-6.7ㄴ-12
복 음 : 루카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신용 정보 회사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에는 실패의 벽이 있습니다.
그곳의 안내문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실패한 순간을 자세히 기록하세요.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쓰세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이 방식을 따른 사람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실패에 대해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큰 좌절과 절망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삶에 실패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패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태어나면서 계속 실패를 경험했던 우리입니다.
아기가 처음 걸음마를 시작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넘어졌습니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실패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이 순간을 한 단계 자기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인간 세상의 눈으로는 실패로 보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이 순간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이 실패했다고 단정했습니다.
악에 패해서 이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보이는 수난과 죽음이 그냥 단순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져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실패를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실패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로 보이는 삶 안에서도 예수님 사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른 일흔두 제자도 파견하십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위로와 평화를 전하라고 세상에 파견됩니다. 분명 중요한 파견입니다.
또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면서
걱정도 가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가난과 검소한 삶을 강조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세상의 것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서 이 전교 여행이 실패로 끝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외침처럼,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 나라는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면 차츰 그 행복을 크게 생각하여 남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한다(벤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 아침기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더 귀한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지역이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감사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키나와’는 가보지는 않았지만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이 사는 섬이라고 합니다.
‘사르데나’도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이 사는 섬이라고 합니다.
오키나와에 사는 어르신들은 모두 ‘이키가이’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정체성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가치입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입력하면 정확하게 길을 안내합니다.
마찬가지로 ‘이키가이’가 있는 사람은 삶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10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균형 잡힌 식단, 적당한 운동, 긍정적인 생각도 100세 이상 노인이 많은 이유가 된다고 합니다.
사르데나는 마을에 높은 경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사를 매일 오르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다고 합니다.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지만 사르데나에는 ‘요양원’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은 80세가 넘으면 50% 이상이 요양원엘 간다고 합니다.
가족이 돌볼 여유도 없고, 그만큼 몸이 허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르데나에는 요양원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공동체는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노인들과 대화하고, 아프면 찾아가서 돌봐준다고 합니다.
노인들의 경험과 연륜을 듣는 것이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요양원에서 말년을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것보다 공동체와 함께 말년을 감사하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100세 노인들에게는 행복입니다.
동창신부님이 ‘황금전설’이라는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저자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1993년 11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상임이사겸 부소장으로 일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국가톨릭대사전』(전12권)의 편찬 책임을 맡았으며,
상당수의 연구서와 역사 관련 화보집을 발간하였다.
2005년 12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절두산 순교성지(서울 마포구 합정동 소재)의
주임 신부를 겸임하면서, 박물관의 수장고 설치 및 전시 시설보완을 통해
2009년부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의 초대 관장을 지냈다.
2013년 2월부터 시흥4동 성당 주임 신부를,
2019년 2월부터 현재 우면동 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역서로는 『옥스퍼드 교황사전』(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마이클 윌시 지음, 분도출판사, 2014),
『르네상스 미술로 읽는 상징과 표징』(조지 퍼거슨 지음, 일파소, 2019)이 있다.”
저는 신부님이 이런 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신부님은 모든 과목의 수업을 정성껏 필사 하였습니다.
시험 때가 되면 많은 신학생들이 신부님의 방을 찾았습니다.
신부님이 필사한 노트를 복사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의 정성과 노력이 깃들인 노트를 기꺼이 친구들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과 같은 방을 쓴 적도 있고, 1986년 1월 30일에 같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의 노트필기 습관을 꾸준히 이어서 신앙인들의 영적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을
번역한 신부님께 존경과 찬사를 드립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이키가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이키가이는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편찬하고,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는 그들의 ‘이키가이’를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키가이’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맡겨진 ‘이키가이’를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인생을 오래 사는 것도 기쁨이지만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상에서의 100살이 아니라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 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탈출 24,1; 민수 11,25).
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 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 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 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자들입니다.
파견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외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하신다.
양들은 이리 떼의 먹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째서 양들과 같은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평화밖에 모르는 양들이 어떻게 잔인한 맹수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모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만 의탁하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바삐 다녀야 한다. 그들이 생필품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었느냐 벗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 일을 모두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셨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라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이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복음 선포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인정에 끌린 행위가 거룩한 임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5절)
우리는 방문을 하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한다.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빌어준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 전파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전하는 사람에게 더 유익하다.
평화가 전달되면 그 사람과 우리에게 다 유익한 일이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시겠다고 한다.
이 응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 라고 하신다.
나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할 것인가?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루카 10,1-2ㄱ)
당시 사람들은 세계의 민족을 일흔두 민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다는 말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셨음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라는 말은, 열두 사도가 아닌 제자라는 뜻인데,
열두 사도가 아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사도들이 하는 일과 거의 같고,
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의 같습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라고 그 제자들을 미리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제자들의 활동은 곧 주님의 활동이며,
제자들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가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서로 증인이 되어주라는 뜻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ㄴㄷ)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 적다.”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회개와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꾼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교활동은 ‘잃은 양’을 되찾는 활동이고,
‘잃은 자녀’를 되찾는 활동이고, 하느님의 일꾼을 모집하는 활동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은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의 도움을 잘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기도부터 해야 하는 일이고,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사람이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해주는 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3-8)
선교활동은 신앙을 증언하는 활동이고, 사람들을 ‘신앙의 삶’으로 초대하는 활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 자신이 ‘자신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삶으로 하는 선교활동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은, 하느님만 믿으라는 뜻인데,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만 믿는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만일에 돈 걱정이나 하고, 궁핍한 상황을 못 견뎌 하는 모습이나 보인다면,
그런 모습으로는 복음을 선포할 수도 없고,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대할 수도 없습니다.
돈 걱정이나 하는 사람이 선포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이리 떼 가운데에 있어도, ‘양’의 모습을 잃으면 안 됩니다.
즉 ‘겸손’과 ‘온유’와 ‘자비’를 잃으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신앙인은 이리 떼 가운데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참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속의 헛된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는 사람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교활동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인사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활동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늘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신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말씀은,
“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일꾼을) 먹이시려고 천사를 보내실 수도 있고,
천사 같은 사람을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신앙인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주는 대로 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선교 임무의 핵심 : 평화주의, 성사와 말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로부터 세상의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된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공관복음의 공통된 보도이지만(마태 10,1-39; 마르 6,8-11; 루카 9,1-6)
오늘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카복음의 특종기사에 속한다
물론 열둘과 일흔둘이라는 파견의 규모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루카복음이 제자들의 파견기사를 두 번이나 보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루카복음이 나름대로 설정한 예수님 공생활의 시기적인 구분에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열두 제자의 파견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 안에서 이루어졌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상경기(루카 9,51-19,28)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을 결정하시고
사마리아 지방을 통하여 가려 하셨음을 보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와 거부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9,51-56)
따라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 한다면, 앞으로 거쳐 가야 할 곳으로
또 한 번의 제자 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카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10,2)는 말씀을 삽입하여
일흔두 제자라는 대규모 파견의 시급함과 타당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2차 파견에서도 1차 파견(루카 9,1-6) 때와 똑같은
선교 상의 여장 규칙과 임무를 훈시하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어린양에 비유되고,
파견되는 곳의 환경과 사람들이 이리떼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
선교상의 어떠한 안전장치나 무장도 허용되지 않는 파견자의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는 딱 두 가지이다.(9절)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이는 곧 聖事를 베풀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는 그곳에서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사람이나
병이 들어 마음과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이리떼와도 같은 백성들을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교화하여
그 나라의 어린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이리로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심판을 면할 길은 없다.
파견된 제자들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다.
만약 한 동네가 連帶的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거부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의 발에 묻은 흙을 털어 버리고 가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선교사의 거부는 곧 복음의 거부이고, 복음의 거부는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거부하는 동네 전체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12절)이다.
소돔이 어떠한 곳인가?
도시 전체의 엄청난 죄상이 야훼의 분노를 사게 되어 아브라함의 애끓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義人 열명이 없어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로 멸망 당한 도시가 아니었던가?(창세 19,24-28)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는 소돔보다도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음 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는 일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 선포는 그저 이리떼 속에 보내어지는 어린양처럼
철저한 평화주의와 두 가지 임무, 즉 성사 집행과 말씀 선포를 준수해야 한다.
한 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복음을 선포하거나,
세속적인 특혜와 지위확보나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수용하는
昨今의 선교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