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몇 가지는 확실히 바뀌었다. 유치원에서 간식으로 가끔 나오던 '곶감'(함안 단감 유명하다)은 부산우유로 바뀌었다.
그리고 등에 걸쳐메고 다니는 '쓰리세븐' 책가방이 생겼다. 외할머니는 이 란도셀형 책가방더러 항상 '책보'라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
한편으로는 정말 싫은 뇌염모기 예방접종 주사도 의무적으로 맞아야 했고, 6학년 언니들이 맞던 '불주사'는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학교에서 내 준 숙제는 참 하기 귀찮았다. 받아쓰기 꼭 해야 돼? 구구단도? 아, 더 놀고 싶은데.
어쨌거나 그런 변화의 속에서 가장 컸던, 그리고 기뻤던 것은 드디어 '자전거'라 부를 만한 "나만의" 물건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세발자전거는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졸업했기 때문에 나는 자전거가 없었다. 읍내 장터까지 십리 길을 그저 뚜벅뚜벅 걸어다녔다.
장터 사는 친구들은 다들 어린이용 자전거에다 보조바퀴를 붙여 '네발자전거'를 만들어 탔다. 그걸 보며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부러웠었다. 황민구네 리모콘 칼라 테레비도, 황성용이네 핼리 비디오도 부럽지 않았지만
(어차피 태권도장에 비디오 있으니...) 자전거는 부러웠다.
사실 외할아버지께서 읍내까지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있긴 했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시꺼먼색 삼천리, 일명 '쌀집 자전거'였다.
이건 내 어린 체구에는 너무 큰 놈이었다. 그래서 마치 '이웃집 토토로'에서 칸타가 타고 다니던 것처럼 그렇게 매달려서 탔다.
정확하게 이런 모양새. 다행히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는 페달에 발이 닿았다. (다른 애들보다 조금 기럭지가 길었다.)
나보다 몇 살 터울 많은 누나는 고학년이 되면서 예쁜 빨간색 삼천리 자전거를 선물받았다.
보조바퀴가 없고 약간은 날렵한 일반 여성용 자전거였다. 장바구니가 없어 세련된 게 포인트.(....)
여전히 내 키에 비하면 발이 땅에 잘 닿지 않을 만큼 컸지만 그래도 외할아버지 것보다는 탈 만했다.
안장에 올라가려면 뭔가 딛을 게 필요해도, 적어도 매달려서 탈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1학년 때 기럭지가 고학년과 비슷했다. 신장만 그러면 다행할 것인데 체중도 같이 따라가니 문제...;;)
하여튼 누나가 피아노 학원 마치고 집에 올 때까지 그 자전거는 내가 썼다. 그것 때문에 누나랑 매일같이 아웅다웅 싸웠다.
만날 말싸움하다가 누나가 날 때리고 나는 울고, 어머니는 둘 다 평등하게 때리고(......)
어쩌면 나는 누나가 선물로 그것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질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티격태격은 1988년 5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모네 댁은 냉면과 고기를 파는 집이었다. 그 집은 냉면맛에 대한 고집이 있고, 그래서 항상 장사가 잘 됐다.
집안 사정이 좀 피었는지 그 시절에 벌써 오리지널 소나타(85년식)를 끌고다녔다. 마산시청 관용차가 '싸롱'이던 시절이다.
어쨌든 살림 넉넉한 이모는 이종사촌 형에게 새 자전거를 선뜻 선물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이종사촌 형은 자신의 헌 자전거를 타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 것이 될 거라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엉가야(이모는 어머니를 이렇게 부르신다), 우리 자전거 그거 쟈한테 주뿌까? 지 타고 댕기그로. 그래도 첨에 살 때는 좋은 기였거덩."
세상에! 비록 중고긴 했지만 프랑스제 자전거라는 말에 온 동네가 술렁거렸다.
면 내에서 바퀴 달린 것 중 외제는 일단 철도청 소속 미제 EMD 디젤기관차(....)
그리고 6.25 때 쓰던 '제무시(GMC)' 트럭 - 그것도 온통 녹이 슬어서 시퍼런 락카로 칠해놓은 - 정도.
실은 기차가 하루 네 번 지나가는 시골에서는 자전거 상표가 '삼천리'가 아니라는 것 그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을지도....
그런데.
막상 프라이드 승용차 뒷좌석을 눕혀서 억지로 구겨넣어 싣고 온,
도회지 마산으로부터 온 그 자전거는 첫눈에 보기에도 형편없었다.
프레임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고 페인트는 색이 바랬다. 체인덮개는 온통 우그러져 너덜너덜.
어쩐지 혁이 형이 안 탈만 했다 싶었다.(....) 싼게 비지떡
"이게 월남 자전거가?" 하며 구경온 친구들도 전부 뭔가 김샌 듯한 표정이었다.
- 그 때 '프랑스'는 어느새 '월남'으로 와전되어 있었는데, 학교의 '강 주사' 아저씨 때문이었지 싶다.
이 분이 소싯적에 베트남전쟁 갔다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아저씨 눈에는 외국은 (미국, 일본 빼고) 죄다 월남.
(지금 생각해보면 어차피 베트남은 프랑스의 영향을 좀 받은 지역이긴 하다. 쿨럭)
"아빠, 나 이거 안 탈끼다!"
하고 징징거리던 어린이날의 끝은 결국 어머니의 매차리(몽둥이)찜질로 막을 내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싯적에도 워낙에 고집이 고래심줄 같은 놈이었던지라, 내 기억에도 거의
몇 시간을 떼쓰며 데굴데굴 굴려다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없었구나 싶지만....)
게다가 마산 가서 본 형의 새 자전거는 얼마나 좋아 보이던지.
어쨌거나 모친도 근본이 경상도 여자인지라, 교사 경력 십분 발휘해 잘 타이르다가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나면 폭발(?)하고 말았다.
남의 집 새끼와 달리 제 집 새끼는 일단 패면 말은 들으니까.(.....)
(나는 어머니를 존경하지만 그 몽둥이는 존경하기 힘들다. 난 죽어도 내 자식 패지는 않을거다.)
그렇게 얻어맞고 나서 놀러 간 읍내 태권도 도장에서도 결국 싸움판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있는 대로 열이 받아가지고 있는데 거기다 대놓고
"니는 뭐 짜다라 자전거 자랑 해샀다가, 뭐 그리 얄구지 고물딱지를 주묵노?"
라고 어떤 놈이 약을 올려댄다. 나는 놈의 얼굴 한복판에 주먹을 날리고야 말았다.
쉬는 날이라고 만화 비디오 틀어 준 체육관에서, 태권도 겨루기가 아니라 때아닌 이종격투기가 벌어졌다.
결국 관장님한테 둘 다 줄빳다를 맞아야 했다. 무예를 배우는 놈이 함부로 폭력 쓰지 말라면서,
정작 사범님은 국민학교 1학년생들에게 야구방망이로 빠따질을 했다. 하여튼 최악의 어린이날.
그리고 그 다음 일요일. 자전거는 왜인지 산산조각 분해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잔뜩 들고 온 락카며 페인트, WD-40이 마당 한켠에 잔뜩 널려 있다.
아버지는 둥그런 마스크를 쓰고 프레임을 샛노랗게 칠했다.
우그러진 체인덮개도 망치로 두들겨 펴니까 그럭저럭 쓸만해졌다.
주홍색 도료(아마도 녹방지제가 아니었을지)를 시뻘겋게 입힌 후 꾸득꾸득 말린다.
그 뒤에 노란색 락카로 깔끔하게 칠을 했다.
"당신은 내가 아 자전거 손봐달라 캤지, 누가 일요일 꼭두새벽부터 시끄럽게 해사라 캤습니꺼."
라고 어머니의 잔소리가 안방에서 들려왔다. 아버지는 볼멘소리로 툴툴댔다.
"저 여편네가 고치주라 캐살때는 언제고."
어쨌든 반나절만에 자전거는 완전히 새 것처럼 바뀌었다.
우와.
하지만 아버지는 "쫌 심심하다 그자?" 라고 말씀하시더니 검은 색 락카통을 짤깡짤깡 흔들어댔다.
"우찌 할라꼬예?" 라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 "어, 니 치타 알제? 그거."
....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어쨌거나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고물딱지였던 자전거는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되살아났다.
원래 짙은 노란색에 알 수 없는 서양풍 만화캐릭터가 그러져 있던 낡고 우아한 프랑스제 자전거는,
그렇게 매우 야시시한 노란색에 검은 점이 박힌 (꼭 옛날에 전지현이 프린터 선전에 입고 나오던 옷마냥)
도발적인 자전거가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잃어버릴 래야 잃어버릴 수가 없는 컬러였다.
저거는 읍내 어딜 갖다놔도 "아 그 선생집 아들네미 자전거?" 라고 알아봤었으니까. [.....]
어쨌든 타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오버홀을 한 번 한 덕분인지 도로사정 나쁜 시골길에서도
미칠듯한 스피드를 낼 수 있었다. 게다가 튼튼했다. 부품이라든가 다른 모든 내구성이 정말로 뛰어났다.
체인이 가끔 빠지긴 했지만 곧 끼우는 요령을 터득하자 그쯤은 고장도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체인 한 번 빠지면 자전거포까지 밀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때를 벗겨내고 말끔히 수리하니까 의외로 강력한 머신이 탄생한 것.
이제는 친구들의 '네발자전거'는 내 시야에서 아웃! 어느덧 학년간의 자전거 스피드 경쟁에서
내 경쟁 상대는 4학년 형들이 되고 있었다. 평소 누나 자전거로 단련해뒀던 탓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원래부터 프랑스가 자전거로 유명한 나라임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십 년도 더 되어서의 일이다.
어느덧 자전거는 내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학원 갔다가, 혹은 멀리 먼 동네로 놀러갔다가
늦기 전에 집에 오려면 페달을 최고 속도로 밟아야 했다. 가끔 아버지 친구 선생님들한테 '니가 와 이 동네에 있노?' 하고
다른 동네 멀리 간 날 들키면 그날 저녁 또 한밤중에 북어 패듯 했다. 시골 학구는 거의 면 단위로 이루어져 있고,
집에서는 멀리 가면 길 잃어버린다고 면 밖으로는 못 나가게 했다. 이윤상 유괴 살인사건으로 온 나라가 흉흉하던 시절이다.
해가 지면 집에 가는 길이 무서웠다. 학교 사택은 동네에서 좀 떨어진 대나무밭 아래에 있었다.
이웃집이라고는 덜렁 두 개인데 우리 옆집은 조폭에서 은퇴한 할배가 살았고, 뒷집은 몰락한 만석꾼네 기와집이었다.
공통점은 무지하게 썰렁하다는 점이었다. 결정적으로 대나무밭과 학교 사이의 솔밭 등성이는 공동묘지였다.(......)
여튼 자전거가 생긴 덕분에 나는 읍내에서 학원을 다니고 놀다가도, 5시 30분에 시작하는 만화 '실버호크'와 '율리시스'가
시작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실버호크는 MBC였고 율리시스는 KBS였을 텐데 가물가물.)
3학년 즈음해서 마산으로 이사온 후에도 자전거는 계속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 야시시하게 도발적인 색깔은 도회지 와서도 화젯거리였다.(....)
서울이나 부산 사람들이 보면 웃을 일이지만 촌사람 눈에 마산은 역시 도회지였다. 정말 엄청나게 차가 많았다.
하지만 곧 적응할 수 있었다. 시내버스며 자가용(요즘은 이렇게 부르는 사람 잘 없죠?)을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잘도 끌고 다녔다. 이사오기 전에 이미 누나 자전거는 내가 잃어버렸고 - 내 자전거 말고도 누나 꺼 잠깐잠깐
끌고 다니다 결국 사고를 쳤다 - 이미 중학생이 된 누나는 자전거 대신 시내버스에 회수권을 넣고 다닐 나이였다.
내 자전거도 다시 세월을 먹어갔다. 몇 년을 끌고 다녔더니, 이미 4학년쯤 되어서는 어찌나 끌고 다녔던지
뒷바퀴 빗물받이가 날아가고 안장은 스펀지가 다 떨어져 쇠 프레임만 남아 있을 지경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한 번 오버홀을 했으니 잘 나가긴 했지만 워낙에 베이스가 오래 먹은, 그 당시로 거의 한 10년쯤 된 물건이라
가는 세월에는 장사 없지요...
정작 내가 자전거와 멀어진 것은 자전거를 안 타고 나간 어느 날
합기도 도장에서 돌아오다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휠체어와 목발을 번갈아 사용하던 나는, 완전히 재활하고 난 후에도 몸이 불편해 자전거는 타지 않았다.
키만큼 몸도 점차 비대해졌고 10여 년을 그렇게 살다가 고등학교 때 가서야 죽어라고 20Kg을 뺐으니...
그 때부터 자전거는 지하주차장 가는 층계참 아래 버려져 있었고, 그렇게 나는 자전거를 잊어갔다.
나는 이내 중학생이 되었고, 아침 일곱시 반에 집을 나서 밤 열한시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수능 칠 때까지도 그 자전거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렇게 남아있었다.
그러다 대학 다니던 시절 어느 날, 방학을 맞아 마산 집에 내려가 보니
예전에 자전거가 있던 곳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철장수가 주워 갔겠거니 했다. 어차피 거의 십여 년을 관리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내 어린 시절의 한때를 같이 했던 그 자전거가 더 이상 그 곳에 없었던 것을 보고는,
내가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강을 건너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전거는 더 이상 그 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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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으로 써 보려다가 생각이 한없이 길어져서 망글이라 이쪽에...
첫댓글 맛깔나게 재밌어요. 그냥 처음부터 아래까지 쭉 읽었습니다. 근데 끝이 조금 아쉽...
긴 글인데 쭉 읽어내려갔네요~ 경상도에 가본 적은 없지만 글 읽으면서 80년대 경상도 어느 마을을 머릿 속에 그려볼 수 있었어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 . 저도 어릴때 친척집 자전거를 얻었다가 , 옆집 형이 놀려서 바로 새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나네요 .
잘 읽었습니다. 평소에 작문을 잘 쓰시는 분이신 것 같아요. 재미있네요.
ㅋㅋ자전거. 조금 더 다듬으면 수필집 낼 기세~
무슨 기억력이 이렇게 좋은가요??ㅎㅎㅎ 남의 추억이 내 것 같네요.완전 생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