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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 3. 13. 수요일.
햇볕이 맑고 밝고 깨끗하다.
봄은 어느새 와서 나날이 따뜻하다.
아파트 베란다에 올려놓은 화분에서 군자란 꽃대가 올라와 화려한 꽃을 피운다.
꽃대 하나에 꽃송이는 12개. 암꽃과 수꽃의 가루를 서로 묻혀서 혼배해야 하는데도 붓자루(붓대)가 없다.
헌 칫솔로 꽃가루를 묻혀서 서로 교배시켰다. 나중에 씨앗을 흙에 묻어서 새싹을 낼 계획이다.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이슬람 금식기간인 '라마단'이 2024년 3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단다.
오는 4월 8일까지 한 달간 금식한다. 라마단 기간 중 새벽부터 해질녁까지 금식하며, 해 지면 그제서야 만찬 이프타르(iftar)를 즐긴단다.
이 뉴스를 보고는 제사에 대한 내 생각을 일기로 썼던 기억을 더듬었다.
어떤 문학카페 올린 내 글을 퍼서 <아름다운 5060카페> '삶방'에도 올린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면서
최 윤 환
오늘은 2023. 12. 16. 토요일.
무척이나 춥다. 기온은 종일토록 영하권이었다.
나는 요즘 한 달이 넘도록 피곤하다.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오늘은 할아버지의 제삿날이다.
내 중학교 1학년 때인 양력 1962년 12월 1일 대전에서 돌아가셨고, 2023년 음력 달력으로는 12월 17일이 제삿날이다.
* 이처럼 음력달력은 해마다 양력 날짜가 변한다.
예전에는 제사를 음력 날자로 지내려면 밤 12시의 첫번째 자시(子時)인 밤 23 : 00 ~ 01 : 00에 지내야 한다.
요즘에는 제사 지내는 시간을 돌아가신 날의 전날인 자정을 전후로 하는 집안도 있을까? 의문스럽다.
내 아내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음력 하루 전날인 저녁 무렵에 지낸다.
내 상식 기준으로는 제삿날은 돌아가신 바로 그날, 당일이다.
이처럼 제사는 양력과 음력으로 지내려면 날짜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양력과 음력은 한 달 전후로 차이가 난다.
제사 지내는 것이 나한테는 무척이나 힘이 든다.
* 4대 제사 : 한 세대는 25년 정도 차이이기에 4대는 100년간 쯤이다. 제사 지내는 당사자가 선대를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4대 제사 대상인 고조부모와 증조부모의 제사조차도 몇해 전에는 시사/시향으로 돌렸다.
이제는 2대 제사 대상인 조부모님의 제사는 음력으로, 1대 이상인 부모님은 양력으로 지낸다.
오늘 오전에 서울 송파구 잠실 새마을시장 마트로 제사 용품을 사러 간다는 아내한테 나는 일렀다.
'조금만 사 오셔.'
오늘 제사에는 우리 내외, 큰딸, 큰아들네 4명, 막내아들이 참가했고, 둘째 딸네네는 참가하지 않았다. 유치원생인 외손자가 요즘 감기에 걸려서 아프다고 한다. 혹시라도 전염시킬까 봐 자중한다는 뜻이다.
나는 제사를 주관하면서 친손녀와 친손자한테 제사 지내는 방법을 조금 알려주었다. 음료수를 조심스럽게 직은 술잔에 따라 부어서 상에 올린 뒤 절하도록 제례교육을 시켰다.
* 나는 술 대신에 순도가 낮은 음료수로 대체한다. 우리 최씨네는 술에는 아주 약한 집안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손녀, 초등학교 2학년인 손자는 어설프게 주전자를 기울어서 술잔을 채우고는 엎드려 절을 했다.
장난스럽게...
나는 오늘 종일토록 무척이나 피곤하며, 은근히 아팠다.
제사를 더 줄였으면 하는 생각조차도 들었다.
제사 지내려면 주방에서 음식 장만하는 주부(며느리)도 힘이 들고, 음식물을 사도록 돈을 지불하는 남자들도 힘이 든다. 특히나 직장에 다니는 자손들은 조퇴를 해서 제사 지내는 장소로 가야 한다. 이처럼 모두한테 다 힘이 든다.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4대 제사라고 해도 시간과 비용이 제법 많이 들어간다.
제사는 자손인 남자가 지낸다.
여자 자손은 시집가면 시댁제사를 지낼 뿐 친정제사에는 별로 관계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 관계한다고 해도 고작 직계 부모의 제삿날에만 친정으로 오겠지만서도 그것조차도 쉬운 일은 아닐 터. 예컨대 설과 추석에 친정으로 와서 친정부모의 차례상에 절을 올릴까?
제사가 끝난 뒤 저녁밥을 먹었다.
밥을 먹은 뒤 아내는 별도로 상을 또 차렸다.
생일 케이크를 올려놨다.
내일인 12월 17일은 큰딸 생일, 12월 24일에는 큰아들과 친손자의 생일이 겹쳤다며 미리 축하한다고 말했다.
생일 축하 당사자는 세 명.
케이크에 촛불을 켜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아내는 생일 당사자들한테 돈이 든 봉투를 각각 나눠주었으며, 초등학교 3학년인 친손녀한테도 용돈을 주었다.
생일 케이크를 먹은 뒤 헤어지면서 아내는 제사 지낸 음식물을 골고루 나눠서 며느리한테 건네주었다.
손녀는 큰고모와 함께 자겠다고 떼를 쓰면서 남았고...
제사상차림은 해마다 간소화로 진행 중이다.
내 어린 시절인 1950년대, 청소년시절인 1960년대, 청년시절인 1970년대를 떠올리면 최근의 제사상차림은 무척이나 간소화되었다.
과거를 떠올린다.
제사를 지내려면 쌀을 씻어서 물 불린 뒤에 절구통에 넣고는 짓찧어서 떡가루를 내야 했고, 물에 불린 쌀자루를 지게에 짊어지고는 멀리 떨어진 방앗간으로 가서 떡가루를 내어 뜨겁게 삶아야 했고, 긴 가래떡을 뽑아서 솔은 뒤에는 칼로 잘게 썰어야 했다. 심지어는 읍내 가는 구장터인 대천리, 읍내인 새장터인 대창리 방앗간으로도 가야 했다.
내 시골집 뒷켠에 숯불 화덕을 준비 설치하고, 무쇠솥 뚜껑을 뒤집어서 그 안에 전 등을 부쳐야 했다. 블을 조금씩 때면서.....
물에 담가 불린 콩을 멧돌에 갈아서 즙을 내어 생두부를 만들고, 엿기름가루를 큰 가마솥에 넣고는 불 때서 감주/식혜 등을 만들어야 했고, 때로는 쫀득거리는 엿도 고았다.
내 어린시절에는 우리 식구, 종조할아버지네, 작은아버지네에서 많은 가족, 친척들이 몰려와서 일하며, 절을 함께 올렸다.
음력 시월 상달 초순에는 시향 시제가 있었다. 산지기네 세 집에서 음식물을 장만하여 산으로 날랐다.
제례 도복을 입는 제사꾼들이 득실거렸고 ...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인 2023년인 지금 나는 제사 규모를 줄이고 또 줄여서, 이제는 서울에서 우리 가족끼리만 지낸다.
오래전 일이었다.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인 고향, 대전, 서울, 공주 등지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한테는 직계 조상은 각자가 알아서 제사 지내자고 합의를 봤다. 고조부모, 증조부모는 4대 제사 대상인데도 나는 몇 해 전부터 나는 이를 시향/시제로 돌렸다.
지금은 내 조부모, 내 부모에 대해서만 제사 지낸다.
이처럼 줄이고, 또 줄인다. 그런데도 이것조차도 벅차다는 생각이 이따금씩 든다.
오늘처럼 피곤하고 지친 날에는 더욱 그랬다.
조부모님의 두 분 각각의 제사도 한 분의 제사 기일로 합쳤으면 싶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어머니와 아버지 제사만큼은 따로 따로 지내고 싶다.
내 부모의 제삿날은 음력이 아니라 양력이다. 돌아가신 당일을 기준으로 저녁 무렵에 제사 지낸다.
이게 합리적일 것 같다.
나는 음력 달력을 잘 모른다. 년간 달력을 꺼내서 일일이 대조확인해야 한다.
음력으로 지내는 제사 날짜는 해마다 양력 날짜와는 무척이나 다르다.
나는 제사 지내는 시간조차도 미리 앞당겨서 저녁 무렵에 지낸다.
이처럼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자손들이 제사를 지낸 뒤 자기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여러 곳에 흩어졌던 조상님네의 무덤을 한 곳으로 집중화시켰다.
서해안고속도로 토지수용으로 충남 보령시 웅천읍 죽청리 집단 산소를 이장해야 했고, 구룡리 앞뜰에 있는 농공단지 조성으로 또 이장해야 했고, 읍내 대창리에 있는 증조부 산소, 대전 대덕구 읍내동에 있는 조부 산소, 고향 구룡리 상전산에 있던 집단 산소도 위 아래로, 고향 죽청리에 있던 집단산소도 위 아래로 있던 묘소들을 파묘하여 거듭 이장했다.
특히나 작은아버지 소유의 산 구룡리 신안재에 있던 내 동생(쌍둥이 동생) 무덤조차도 파묘해서 죽청리 산말랭이에 있는 아버지 무덤 아래로 이장했다.
* 숙부 소유의 산 꼭대기에 오르면 서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산길을 타고 내려가며서 충남 보령군 남포면 용머리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 등으로 다니기를 좋아했던 쌍둥이 형제... 전망이 좋고 길목이 좋은 곳에 동생의 무덤을 썼다. 산에서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다.
최근 2~3년 전에도 606지방도로 확장공사로 서낭댕이 도로변에 있는 구룡리 화망의 산소 집단묘역이 또다시 토지수용되었다. 내 직계는 물론 방계의 산소 10개 쯤을 바로 인근에 있는 죽청리산으로 이장해야 했다.
이런 과정이 몇 차례나 거듭되면서 웅천읍 죽청리산 말랭이(정상)로 점차로 집중시켰다.
10여 대의 조상 무덤을 내 소유의 산 한 군데로 몰았다.
* 5촌당숙네, 사촌형제네 방계는 각자 소유의 산에 별도로 방계들의 산소를 쓰고....
묘지를 집중화시키니까 득이 된다. 해마다 8월 초에 실시하던 벌초행사의 장소와 규모도 자꾸만 줄어들어서 벌초비용도 크게 감소화되었다. 여기 저기에 흩어졌던 묘역이 집중화되니까 이동시간도 줄어들었다.
* 벌초행사 때에는 집안 모두가 함께 시행한다.
서해안 경주최씨 집안에서는 자손들이 무척이나 귀하다. 자손인 아들들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산소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는 자손들은 직계 남자이지, 직계 여자들은 아니다.
여자들은 시집가서 시댁의 제사나 지낼 뿐 친정제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근자에는 민법, 가정법 내용이 개정되면서 재산상속 비율은 남녀 차이가 없이 균등하다.
법규대로 시행하는 집안도 있겠지만 대체로는 남자 자손한테 재산상속을 더 주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을 게다.
이런저런 이유로 산소를 고향 서낭댕이 앞산(죽청리산)으로 집중화시켰고, 고향에 내려가면 집단산소에 들러서 산소 묘역을 둘러본다. 내 손에는 늘 삽, 톱, 호미, 낫 등을 들고서 묘역을 샅샅이 살핀다.
무더운 8월에는 벌초꾼 몇 명을 구해서 예초기로 풀을 깎는다.
이처럼 벌초하며, 시향/시제를 지내려면 자동차를 운전해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처럼 몸소 움직이면 이게 다 돈이다. 직접비용, 간접비용을 합치면 년간 수월찮게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시집간 딸들은 이런 비용을 낼까? 설마?
비용을 내는 딸들도 있을 수는 있을 게다. 하지만 거의 희박할 게다.
시집간 그녀들은 시댁의 행사에나 참가하지, 친정의 행사에는 관여하지 못할 게다.
내 집안의 경우도 그렇다. 나한테는 시집 간 누이들이 여럿이고, 사촌네도 시집 간 누이들이 여럿이고, 5촌 고모네, 대고모네 등등을 헤아리면... 시집 간 그들은 친정의 차례와 제사행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시집간 여자들은 최근에 개정된 민법을 들먹거리면서 '재산상속은 남녀 구별없이 똑같다' 논리를 주장해서 친정재산에 욕심을 낸다.
이게 빌미가 되어 친형제 자매끼리조차도 다퉈서 가족우애가 상하고, 심지어는 법정재판으로 다투기도 한다.
나는 제사를 지내되 조상의 영혼이 있다라고는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있다. 제사, 차례 등을 지내면서 돌아가신 그분들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한다는 뜻에 불과하다.
이런 구실로 먼 거리에서 사는 가족 친지들이 모여서, 서로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조상의 영혼이 있다면 내가 이렇게 어렵게, 힘들게, 아프게 살겠냐? 개뿔 ...
엄청나게 거들먹거리면서, 잘난 체를 하면서 훨씬 잘 살 게다. 물론 아프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큰 인물이 되어서....
거짓말, 사기꾼에 가까운 종교인들, 제례 음식물을 생산/판매하는 장사꾼들이나 꾸며낸 거짓말과 제사제도일 게다.
나는 아무런 종교도 없고, 제례문화에 대한 상식도 별로 없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불과 몇 살에 불과한데도 급사했다는 친누나(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 질식사)와 친형(옴병에 걸려서), 그리고 나와 쌍둥이었던 동생은 만20살에 뱀한테 물려서 죽었다.
조상의 영혼(귀신 등)이 있다면 왜 자손인 어린아이, 앳된 청년을 일찍 죽게 놔두었느냐고 나는 따지고 싶다.
나는 기억한다. 내 대학생 2학년 시절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왔다가 뱀 물려서 죽은 작은쌍둥이. 동생이 죽은 뒤에는 벌떼같이 찾아오던 교인들, 무당 무수리들의 괴기한 종교집단 사람들....
신(영혼 등)이 있다면 내 동생이 죽기 전에 신적인 조치를 미리 했어야 했을 터. 죽은 뒤에서야, 하등의 가치가 없는 거짓 ,짝퉁, 허위들이었다.
이런 경험을 가진 나한테는 제사문화는 후손이 죽은 그들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한다는 차원에 불과하다.
나한테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이다.
2023. 12. 16. 토요일.
첫댓글 뿌리없는 나무 없듯이,,,조상님,부모님 없는 자손들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나를 있게한 조상님들께 감사한 마음과 정성은 갖추어야 할것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어느 정도껏은 그래야겠지요.
제가 기억하는 1950년대, 60년대의 제사와 지금의 제사는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많이도 축소되고 사라졌지요.
잊을만하면 다가오는 제사가 항상 헷갈리는데
여자들은 참 신기하도록 우리 챙긴다 우리 어머니가
차리시던 상을 마누라는 건너뛰고 효심이 지극한
우리 며느리가 솔선수범하는 게 대견터이다
그간 세상 이곳저곳 다니면서 살펴봐도 우리네
조상숭배사상만큼 윤리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의 조상숭배의식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조상을 잘 모시면 복을 받아 잘 산다는 신앙적인
사상인데 이에 따른 의식도
핵가족화 도시화에 편승 많이 간소화 되었다지요.
예컨대 일 년 중 자주 돌아오는 제사도 합제(合祭)로
한 번으로 해결하고 이것마저도 여러 생활 여건상
어려우면 산소를 찾아 믹서커피 한 잔 올리면서
두 번 절하는 모습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하는
개인의 생각을 해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디
댓글 고맙습니다.
음10월 시향 시제를 지내려면 고향에 내려갔지요.대천시내 제숫물 판매업소한테도 제례음식물을 배달받아서 시제를 지냈는데
올해부터는 산소 벌초하면서 시제를 지내기로 합의 봤지요.
제상을 잘 모시려면 그게 다 돈이며, 시간이며, 정성이지요. 노인네들이야 아뭇때라도 시간을 내겠지만 직장생활하는 자손들은 큰 부담이 될 터.
8월 말 9월 초(추석 이전) 벌초한 직후에 간단하게 지내야겠습니다.
시향 지내려고 저는 지금껏 시골 다녀왔는데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이더군요.
저는 시력이 나빠져서 운전대를 아내한테 넘겼는데 아내가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운전하기 힘들어 하지요.
그렇다고 기차 버스를 이용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제례문화를 더욱 줄여야겠습니다.
님의 제언처럼 믹스커피 한 잔도 좋은 방법이 되겠지요.
앞으로는 그렇게 변할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1950년대, 60년대의 제사문화는 왜 그렇게 요란했던지... 물론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았지요.
2020년대인 지금에서 보면 천지개벽한 것처럼 많이도 변했지요.
자손들도 귀하고....다 쓸데없는 짓거리로 해석됩니다.
나는 장손 이라서 제사를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도 일년에 3번을 지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일년에 1번으로 줄여 버렸습니다
제사에 시간과 노력과 돈을 너무 많이 소모하는거 같아서 이었지요
그런데 요새 보니 다른 분들도 제사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디다
나도 무신론자이고 제사 지낸다고 조상이 도와 준다고는 절대로 생각을 안합니다
다만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만 생각합니다
이상 입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댓글 고맙습니다.
제사 등을 더 줄여야겠습니다.
자손도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전국에 나가서 사는데
제사 차례 시향 등을 지낸다고 해서 한 곳으로 오고 가려면 그게 다 돈과 시간이지요.
과거 조선조에서는 지나치게 충효사상을 빚대어 제례문화를 숭상했지요.
지금은 새로운 세상이기에 제사 등의 의미가 희미해졌지요.
저도 돌아가신 날짜를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차례 등을 지내지요.
하나의 예
대한민국 지금도 중국의 공자 맹자에 대해서 제사를 지내주나요?
제사 문화는 우리만의 고귀한 마음가짐이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제사문화... 지나치지 않으면 좋지요.
일가 친척들이 함께 만나고, 제례음식물을 준비하고, 파는 업체들도 돈 벌어야 하니까요.
지나치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