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출신의 현직 판사가 '법복'을 벗고 노무현 후보 법률특보가 됐다. 현직 법조인이 정치계나 대선 캠프로 결합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참여 동기가 최근 한 386 정치인의 훼절을 보며 결심한 것이라 그의 특별한 정치입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어제(28일) 노 캠프의 법률특보가 된 박범계 전 판사가 자신이 법복을 벗은 배경과 소감을 담은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와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 박범계 전 대전지법 판사.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몇 년의 방황기를 거쳐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를 키워준 할아버지는 못내 시국 상황이 걱정스러웠던지 1주일이 멀다고 학교를 찾아오셨다.
"데모 대열에 끼지 말어라."
할아버지의 말씀은 늘 나의 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의 꽃다운 생명이 채 피지도 못하고 거두어져 가고 있었다. 띄엄띄엄 양심에 떠밀려서 나갔던 거리는 청년에게 잠시의 위안과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최루탄과 **탄의 화학 연기는 이를 거부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폐부 깊숙이 쳐들어왔고, 청년은 토악질을 하면서 열심히 뱉어내려 했다. 마치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부정하듯이.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청년은 단발마적으로 반항만 했지 그 반항이 왜 저항이 돼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 때, 그들은 선두에서 있었다. 그래도 작은 일이지만 실천하려 노력했던 청년으로 하여금 언제나 비겁함을 느끼게 했던 영웅들이 있었다. 지금도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했던 학생운동의 리더들. 85년에서 87년은 청년에게 위안과 자괴감이 교차하는 그런 시대였다.
87년의 분열 속에 우리는 패배했다. 역사의 진보를 믿던 자 모두에게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손만 힘껏 뻗었지 몸의 중심은 마치 똥 누는 모습으로 엉거주춤했던 청년도 더할 수 없는 실망과 패배감을 가슴에 담고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 고(故) 조영래와 노무현
96년 한총련 사태 첫 구속영장 기각
- 박범계 전 판사는 누구인가
노무현 후보쪽 박범계(39) 법률특보는 63년 충북 영동생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연대 법대에 입학했다. 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94년부터 서울지법 남부지원, 서울지법, 전주지법, 대전지법 등을 돌며 9년 동안 판사로 지냈다. 박 특보는 28일 기자들에게 "김민석 전 의원이 정몽준 신당으로 결합하는 것을 보고 노무현 캠프에 합류할 결심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박 특보는 판사로 재직했던 지난 96년 한총련 사태에 참가한 지방 학생에 대한 첫 구속영장을 기각해 언론에 알려졌다. 또한 박 특보는 '안기부 법원에도 좌경용공 판사가 있다'는 내용의 예비군 교육용 비디오와 관련해 안기부장이 대법원장에게 사과를 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 이한기 기자
시대는 암울했다. 보통 사람의 시대라고 위정자들은 선전해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주눅들어 있었다. 인권과 정의는 주눅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사치였다. 넘볼 수 없는 사치였다.
<연수>지 편집장이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렵게 붙은 사법시험, 최상위에 속하는 합격 성적은 더욱 편집장의 실천을 가로막는 멍에로 작용했다.
서초·방배동의 선술집은 그 젊은 편집장에게 도피처였고,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던 그 많은 운동 가요는 편집장의 술 안주에 불과했다. 그때, 예비 법조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을 꼽아보라고.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으뜸이었다. 그 다음으로 꼽힌 사람이 노무현이었다. 고인을 인터뷰할 수는 없었다. 노무현에 대한 <연수>지의 인터뷰 내용은 사법연수생들에게 한 줄기 신선한 소나기였다.
80년대 양심과 명분의 뒤안길에서 그나마 양심을 지키려 했던 연수생들에게 삶의 지표이었다. 편집장에게도 판사가 되려는 삶의 목표에 내용이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예비 법조인은 그렇게 노무현을 만났다.
판사에게도 인권은 여전히 사치였다
어리석게도 3당합당을 반대하고 지역구도 타파를 외치며 실패해가는 정치 역정을 거듭하던 노무현도, DJ에 의해서 30대 초반에 파격적으로 발탁돼 단 한 번의 실패를 맛보지 않고 잘 나가던 김민석도 판사에게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저 사람, 노무현! 참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구나. 저 사람, 김민석! 정말 저 기세로 몇 년만 흐르면…. 판사에게는 그 이상 이하의 특별한 소회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판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최초의 문민정부 아래서도 줄어들지 않는 대학가와 산업현장에서의 대량 구속자들이었다.
지난 96년 8월 15일 연세대학교에서 벌어진 범청학련 통일축전(소위 한총련 사태)은 당시 정부에 의해서 불법 집회로 규정돼 금지된 행사였다. 대량의 구속자를 예고했던 첫 구속영장 청구 사건이 판사의 당직사건이 되었다. 집회에 참가하려고 학교 구내로 들어가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한 지방 학생에 대한 영장이었다.
판사에게는 그의 죄가 그다지 무겁게 보이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신문과 방송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때부터 수 주일 동안 판사의 근무실과 집에는 날이 선 쇳소리의 협박 전화가 쇄도했다. "자네 아들 잘 크고 있지?"
법원장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지만 판사의 아파트에 다녀간 경찰기동대 차량의 형사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사상을 물어보는 수사관으로 전락했다. 인권을 보호하고 정의를 심판하는 판사에게도 여전히 인권은 사치였다.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고, 판사가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 일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가슴 벅찬 일이었다.
마침내 그가 나의 법복을 벗겼다
다섯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세 차례나 고배를 마신 노무현은 올해 국민경선으로 50%가 넘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가 잘 나서도 이뻐서도 아니었다. 우직하게 인권과 정의, 그리고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타파하자고 외쳐온 경상도 사람에 대한 전라도 사람들의 애국적인 결단의 소산이었다.
그것은 대의명분을 생명처럼 지켜온 한 정치인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보답이었다. 이는 구한말 일제에 의해서 단행된 단발령에 항의해 들불처럼 일어나 번졌던 의병들의 대의명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그들 의병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투에 초롱초롱 영글었던 대의명분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 그것이었다.
도대체 노무현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대의명분을 좇아 단 한 번도 훼절하지 않고 묵묵히 정도를 걸어온 노무현이 범한 우가 무엇이었던가? 반(反)통일을 선동하였던가? 인권과 정의를 탄압하자고 목메였던가?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 다시 한번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 신탁통치를 받자고 외쳤던가? 김영삼씨를 만나 예전에 분열했던 민주화세력이 다시 한번 단결해 분열과 분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던 것이 그리도 잘못이었던가?
누구도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가 당당히 압도적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 다수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지지도는 오를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다. 법정 선거운동 기간을 수개월이나 남겨놓은 시점부터, 그래서 제대로 된 선거운동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온 지지도만을 근거로 후보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같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정몽준과 단일화를 하라고 한다. 떨어진 지지율을 다시 올리려 노무현에게 한 번도 힘을 실어준 적이 없는 그들이 지난 4개월 동안 한 것이 무엇이었나? 마치 갈 곳을 정해놓은 사람들이 어디로 갈까 의논해 보자는 식과 무엇이 달랐던가?
판사는 자신의 목요일 재판을 끝내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재판 후 잠시의 짬은 분노도 슬픔도 없는 평안 그 자체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누가 어디로 간단다.' 어릴 적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졸도를 한 경험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만이 시뻘겋게 시야에 들어오던 하늘이 새까맣게 변한 것이 당시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올 여름 뙤약볕 밑에서 함께 어깨동무하며 '대∼한민국'을 외치고 그의 서울시장 당선을 염원했던 노무현을 버리고 떠나겠단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민주주의를, 통일을, 시민의 인권을 함께 고뇌해본 경험이 없는 정몽준의 가슴에 안기겠단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의명분이 없다. 어찌됐건 양지만을 걸어왔던 그가, 이제 이곳이 음지가 되었다고 양지로 가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웃고 있었다. 정몽준의 가슴에 안긴 그는 한껏 흐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지난 10여년 가까이 민주화의 동지였고, 그렇게도 당선시키려 노력했던 후배의 변신에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목구멍 가득 담긴 구토를 애써 참으려하는 의식된 근육의 이완이었다. 판사는 먼 옛날 자신을 졸도케 했던 오뉴월 하늘이 까맣게 변하는 현상을 다시 경험해야 했다. 내가 과연 이 사무실에 앉아 잠시의 한가로움을 즐겨야 하나?
떠난단다. 모두가 떠난단다. 묵묵히 대의명분을 지켜온 노무현을 왕따시키고 떠나야 한단다. 오냐, 그러면 내가 그에게로 가지. 내 비록 별 힘없는 일개 판관에 불과하지만, 배우고 익힌 대로 정의의 심판을 내려주지.
빽없고 돈없는 노무현이 하루 아침에 떴다고 찝쩍거려보고 팽개치다 못해 이제는 그 더러운 가래침까지 뱉는 그에게로 내가 가지. 그리고 역사는 대의명분을 소중히 지킨 이들의 것이라고 말을 할 것이다. 저 구한말 한옥 사랑방에서 담뱃대를 입에 물고 공자왈 맹자왈하던 유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대의명분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것처럼.
인권과 정의라는 하나의 가치만을 전부라 믿고 살아온 판사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공부도 하고 타협도 해야 할 것이다. 울고 싶어도 웃는 법을 배워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두 눈 분명히 뜨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부패가 무엇인가? 안되는 일을 되게 하는 것이다. 안되는 일은 안돼야 한다. 인권이 무엇인가? 공포스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온전히 대접받는 것이다.
복지란 무엇인가? 굶주림과 헐벗음이 없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이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을 기초로 한다. 노무현은 이뤄낼 것이다. 부패가 없는 맑은 사회를, 시민이 공포스러워하지 않는 인권존중의 사회를, 내 몫이 비록 적더라도 이웃의 몫을 시기하지 않는 사회를. 나는 그런 노무현을 도우러 간다. 그것이 우리 시대 개혁의 완성이고 또 다른 시작임을 확인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