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념처와 위빠사나>
제가 관법觀法 수행 중에 정定을 경험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일어나는 마음 자체만 관觀하고(찰나에), 관함과 동시에 생각의 티끌까지 공空 속으로 던져버린다(역시 찰나에, 공 속으로 던진다는 의미는 미련없이 단호히 버린다는 마음도 내지 않는 것)고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찰나 관觀을 하다 보면, 찰나 생生 된 마음에서 ‘정지’ 상태가 올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 필름을 연속으로 보다 마치 정지 화면을 보듯이 말입니다.
이때는 명확한 적정寂靜의 상태이고, 삼매라고 해도 됩니다. 가끔씩 반복되는 이 상태는 시공時空을 떠나, 언제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지속되는지 당시에는 잘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정’ 인 것을 당사자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몸은 거의 무중력 상태와 같아 무게감은 물론 어떤 물질적 느낌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체를 이루는 낱낱의 세포가 우주의 원자들과 하나가 되어 마치 ‘춤추는 듯한’ 묘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마음은 지극히 안온해 일체의 생각 자체가 아예 일어나질 않습니다. 오직 무한한 법계와 내가 구별이 없다는 경계에서 ‘환희’만이 남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평생 이 경계에 들어가 본 경험이 두 번밖에 없습니다. 관법觀法 수행과 관찰 수행은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관찰수행은 위빠사나vipassana가 대표적인데, 대상을 주체와 객체로 분리해서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수행법입니다. 관법 수행과는 집중해야 할 상대가 전혀 다르고, 집중 한 후의 ‘처리’도 전혀 다릅니다.
위빠사나에 의한 몸 관찰을 예로 들면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대상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관찰을 요즘은 주로 ‘마음 챙김’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관찰 수행도 오감五感의 감각기관을 너무 자극하는 번잡한 장소에서는 사실상 실수實修가 어려운 수행법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정통 위빠사나 수행을 정말 열심히 하는데, 한 달씩 공동 수행도량에서 단식까지 병행할 정도로 정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어느 날 제게 하소연을 하더군요. 남편 건강이 염려되고, 더욱 오랜만에 남편이 집에 오면 TV는 아예 못 보고, 전화 벨소리도 진동으로 해야 하고, 친척이나 친구가 집에 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말하자면 자신의 감각기관에 닿는 대상을 ‘억지로’ 줄이는 데만 신경을 쓰니, 이런 남편 때문에 도무지 자신의 삶은 감옥보다 더한 고통의 세계라고 눈물까지 내보였습니다.
“그래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고, 한 고비만 넘기면 달라질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참 속상하더군요.
이래서 위빠사나가 스승 없이도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대중적’ 수행이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간화선같이 격리된 장소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더욱이 위빠사나가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수행법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런저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병폐를 극복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현대인에 맞게 관법을 만들었습니다. 방법은 일체의 생기되는 대상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오로지 대상에 의해(반연攀緣되어) 일어나는 ‘마음’만 관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조금만 노력하면 아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굳이 사념처와 대비를 하자면, 사념처 중 오직 심념처心念處, 그 속에서도 현재에 ‘일어나는 마음’만 집중 관찰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8정도의 하나인 정정正定은 사념처 중 이심념처心念處를 발전시킨 수행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선정四禪定은 사념처 중 심념처를 다시 세분화한 수행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간화선이 발생하기(1,300~1,400년경 중국의 대혜 선사가 주창함) 전까지의 수행법은 단지 ‘마음을 관조 혹은 묵조하는 선禪’이었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스스로 관찰하고 점검 하는 일은 다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불자라면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관조〔照見〕하는 것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요즘 갑자기 ‘힐링healing’이 대유행입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feeling(느낌)의 우리말인 힐링인 줄 알았습니다. (마음의) 치유라는 의미의 힐링이더군요.
명상도 역시 인기가 높아갑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교의 수행과 연관시키는 것은, 불교 전통수행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넌센스입니다. 힐링이나 명상은 마음의 가장 전방에서 정화되지 못해 욕망과 시비를 그대로 갖고 있는 ‘감정’이, 바깥의 대상과 마주칠 때 일어나는 ‘감정’을 수용하는 타협안을 제시해 주는 수준의 감정 다스림을 익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를 수행이라 할 수는 없고 ‘마음 정화 혹은 순화’라면 충분해 보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얄팍해졌는지 본격 수행을 말하는 스님들보다, 수행을 예능 다루듯이 ‘힐링’ 수준에서 말하는 탤런트화 되어가는 스님들에게 사람들이 모이니, 이런 현상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불교의 깨달음이 ‘마음 정화학淨化學’ 수준으로 곤두박질 한 것인가요? 도무지 구별이 안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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