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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7일 토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 바룩 4,5-12.27-29
복 음 : 루카 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한겨울 동네 친구들과 놀던 중에 추우면 햇볕이 잘 드는 담벼락에 나란히 기대서서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기억입니다. 그러면 따뜻한 것은 물론이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납입니다.
중학생 이후 그렇게 담벼락에 기대서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햇볕에 얼굴이 타지 않을까 싶어서 그늘만을 찾았습니다.
햇볕은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태워버릴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기억이 떠올려져서 사제관 베란다에 나가서 따뜻한 햇볕을 느껴보았습니다.
약간 덥기도 했지만, 요즘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져서인지 그 햇볕이 좋았습니다.
햇빛이 천천히 피부를 통과해 스며들고 빛과 따뜻함으로 몸 전체가 채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으로 몸 전체가 채워지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햇볕을 맞기 위해 먼저 햇빛이 비치는 담벼락에 기대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 먼저 나가야 합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으면, 또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빛을 느낄 수가 있을까요?
지금 당장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얻으려는 것보다 먼저 주님을 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사랑과 은총도 보일 것입니다.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주님의 이름만으로도 마귀들이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에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에 맞춰서 행함으로 인해
하늘나라에 가까이 가게 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귀를 쫓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름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이 세상의 삶은 결코 무한한 시간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머물면서 이 세상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찬란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세월을 이기는 유일한 기술은 ‘희망을 유지하는 것’이다(송정림).
주님의 이름으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하고 끝마무리합니다.
기도하되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지니고 계시고 그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가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언제나 주님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머물길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 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98년 9월입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과 월요일 아침 미사를 마치고 ‘온천’엘 가기로 했습니다.
신부님을 모시고 온천엘 가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고, 그만 아침 미사에 늦었습니다.
제의실에서 본당 신부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제의실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조 신부님이 미사에 늦을 사람이 아니니 10분 전에도 안 나오면 꼭 전화를 하세요.”
저는 신부님께 야단을 맞을 줄 알았는데 신부님께서는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저는 미사 30분 전에는 고백소에서 성사를 주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녀님에게 미안했습니다.
25년이 지난 9월입니다. 저는 마음 편히 아침 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퀸즈성당 본당 신부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모두 걱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도 제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전화하였습니다.
나는 평상시처럼 아침 산보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날 아침 미사가 제 차례였는데 저는 깜빡 잊었습니다.
수녀님은 본당 신부님에게 전화를 하였고, 본당 신부님이 저를 대신해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신부님도, 신자들도 모두 저를 걱정하였습니다.
제가 혹시 아픈 것은 아닌지, 산보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4년 동안 한 번도 미사에 늦은 적이 없었기에 그만큼 저를 믿어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부주의를 탓하지 않고, 먼저 저를 걱정해 주었던 신자분들과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평소에도 미사에 늦은 적이 있었다면
본당 신부님도 저의 부주의를 먼저 탓하였을 것입니다.
저의 성실함이 있었기에 본당 신부님은 저의 부주의함보다는
저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교를 하고 다녀온 제자들을 맞이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낸 일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대견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교만해 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무엇이 하느님나라에 기록될까요?
우리의 업적, 능력, 재물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와 이웃을 위한 선행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튀르키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고자 유럽을 침공하였습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비오 5세 교황은, 이 전투의 대승이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나중에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적성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운전 중에 묵주기도를 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차를 세우고 묵주를 꺼내는데 제 앞으로 큰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운전했다면 큰 트럭과 충돌할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묵주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묵주기도를 하려고 준비만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저는 그 뒤로 매일 묵주기도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2002년 ‘빛의 신비’를 제정하였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는 환희의 신비,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고통의 신비,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는 영광의 신비로 완성되었습니다.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면 성모님의 전구로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루카 10,22)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10,22).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을 불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기쁨에 넘쳐 보고드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두 그를 경배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처럼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님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묵주기도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셨기에, 자주 바치셨고,
그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분이 계신데, 바오로 6세 교황님이십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마리아 공경에 대한 교황 권고를 발표하셨는데,
이 문서는 제2차바티칸공의회 교회 헌장 제8장,
다시 말해서 마리아 헌장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시킨 교황님의 가르침입니다.
교황님께서는 권고를 통해 묵주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묵주기도는 복음서에서 영감을 받은 묵상기도이며, 복음적 성격이 강한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들과 기본 형태가 복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를 아주 간단히 ‘요약된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철저하게도 복음적인 기도입니다.
② 묵주기도는 성모송의 조화로운 연속으로 복음의 근본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③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구속사업을 이루신 과정을 순차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에는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님 유년기 시절의 신비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절정,
곧 수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구원사 안의 중요한 사건들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④ 묵주기도는 교회 공식 전례는 아니지만, 교회 전례에서 비롯되며, 우리를 교회 전례로 이끌어 줍니다.
묵주기도와 관련된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고백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묵주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기도가 묵상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네 보십시오!
묵주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에서 찬미와 간구의 요소 외에도 더욱 본질적인 요소인 묵상,
더 나아가서 관상의 중요성이 더 많이 강조되어야겠습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선교의 참된 기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21-24절)은 결과 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담고 있다.
첫 부분은 루카 복음의 고유사료로서 앞서 파견된 12제자의 귀환 때에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는 대목을 보면, 12제자의 파견 때와는 달리,
다만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10,9)
그런데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두 가지 일에다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 결과는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기뻐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계시 말씀,
그리고 제자들의 행복 선언에 관한 내용으로서
마태오복음(11,25-27; 13,16-17)에도 병행절이 발견된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지혜를 똑똑하다는 사람들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 때문이다. (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당대의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두루 다니며 선포한 것을 기뻐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대가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無知로 이어진다.
무지는 곧 罪이다.
하느님과 일치하신 예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에 대한 認識과 知識이 허락된다. (22절)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어떤 누구도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23-24절)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찬미 수녀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10,24)
합니다...
나는
예언자처럼 갈망하지도 않았고
임금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지금 내가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은
나보다 먼저 하느님을 갈망하고 전해준
많은 분들 덕분입니다.
임금, 예언자, 예수님, 사도들, 제자들, 교부, 사제, 학자, 순교자,
수도자, 신앙선조,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은인...
보고 또 봐도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하는 일만이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출처] 루카 10,17-24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