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을 위한 기도
푸르던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낙엽이 되어 떨어지며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11월을
교회는 죽은 영을 위로하는 위령성월로 지낸다.
죽은 영을 위로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죽어 떠도는 혼을 산 사람이 위로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이 산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환생을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를 보면 사람이 죽어 천당에 들지 못하면,
혼령으로 남아 위로를 받을 때까지 세상을 배회하면서
때론 산 자를 괴롭히기까지 한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따르면 - 놀라지 마라 - 산 이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는 혼은 없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육이 땅에 묻혀 썩는 동안 영이 구천을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영만이 아니라 그의 육까지도 창조하셨기에
인간의 육도 영과 함께 구원되기를 원하신다.
위령성월은 산 자가 죽은 자의 혼을 달래기 위하여 기도하는 달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평생 바친 기도를 기억하는 달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가?
특별히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불쌍한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가?
그들을 위하여 미사 봉헌까지 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한다.
하지만 이를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연옥 영혼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를 마치 연옥 영혼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우리가 기도를 해주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삶을 마감하였다.
살아 있는 우리들의 기도가 더 이상 그들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없다.
우리가 죽은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하고
기도하는데서 드러나듯이,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살아 있는 우리들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그들이 살아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바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우리들의 후손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는 것처럼
그들도 그들의 후손인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며 살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후손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바라듯이,
우리를 위한 그들의 기도가 또한 헛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과 바람이 죽은 이를 위한 우리의 기도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는 죽은 이와 산 이,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기묘하게 서로 통공한다.
연령을 위한 기도는 결코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이를 위한 기도다.
언젠가는 죽을 이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나만의 행복을 위하여 비는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천지 창조부터 종말까지 존재한, 존재하게 될 모든 생명체를 위하여 기도하게 된다.
연령을 위한 기도는 우리가 시공을 넘어 살게 하는 우주적인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