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쉬 앙고라 1
며칠간 집을 좀 정리하고 전문가를 만나 상담도 하고
돈도 잘 계산해서 챙겨두고 이래야 정상일 것을.
난 무작정 돈만 싸들고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인도로 떠나기 전의 며칠간은 정말 아무런 잡념없이
오로지 블랙매직에 대한 기대만 부풀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지금 비행기에 올랐고
이 비행기는 아까 땅에서 떨어져 하늘로 올랐다.
며칠간 긴장해서 그런지
따뜻한 차를 마시자 이내 잠들어버렸다.
.....
..
"안 내리세요?"
"내리긴 뭘... 뭐가 올라갔나..."
"저기요~ 일어나세요."
쩝쩝거리며 눈을 떠보니 내가 잠들었었나보다.
친절하게 생긴 스튜어디스가 날 깨우고 있었다.
난 침을 닦을 생각은 않고 우아하게 일어나
짐을 챙겨 출입구를 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던 스튜어디스의 미소에 드디어
어색함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나와 인도 도로의 수많은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을
보면서도 난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지신있는 인도에서의 첫 걸음을 떼며
여유롭게 주위 사람들에게 미소까지 날려댔으니.
하지만 그 자신감이 얼마가지않아 망사스타킹마냥
숭숭 구멍이 나기 시작했으니,
군것질 한번을 할라쳐도 화폐단위를 모르니
만원주고 껌사는 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조그만 배낭을 꽉꽉 채우기 시작한 잔돈들.
그제서야 내가 낯선나라에 왔다는 생소함과
외로움이 날 덮쳐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점점 저녁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해가 벌건 노을을 남기며 넘어가려하고,
노점상 사람들은 처량하게 홀로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날 힐끔거리며 간판 불을 켜고 있었다.
길은 더러웠고 악취도 심했다.
가끔씩 떼로 몰려다니는 꼬질꼬질한 애들이 자꾸만
내 배낭을 주시했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 많이 겪어보고 느꼈던 것이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외국은 처음이라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가?
웃고 싶으면 허리가 땡길 때까지 웃어버리고,
잠이 오면 하루든 이틀이든 일단 자버리고,
슬퍼지면 남김없이 모두 쏟아내 버리는 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
난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한국이라면 쪽팔릴 일이었겠지만 여긴 내가 아는 사람하나
없는 인도였다.
엄마아빠가 죽고 영안실에 누워 있을때 받았던 충격,
아무 말 없던 그들이 끝내 태워지던 순간 그제서야 터져나오던 울음,
친척들이 알아보고 직접 사서 나에게 건네줬던 내 이름으로 된 집의 열쇠를
받았을 때의 묘한 감정,
아무도 없던 새 집에 들어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또 다시 울었던...
옛날 사진을 하나하나 보는 것만 같았다.
한참 울다보니 낑낑대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슥 닦고 일어나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 허리를 굽히고 날 쳐다보며 서 있었다.
"-웨어 라 유 프롬-"
겁이 많을 것 같은 커다란 눈을 가졌지만 여느 인도여자와는 좀 다르게 생겼다.
피부색이 인도인 특유의 구리빛으로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고,
키가 커다란 것도 아니었다.
문들 인도에는 사기범이 그렇게 많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난 긴장하기 시작했다.
"와,와이...?"
"코리안?"
"....."
거짓말을 그렇게 잘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코리안?'이라는 말을 듣고는 수긍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고
움찔거리기만 했다.
그녀는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환하게 웃었다.
"한국인이죠?"
잠시 '한국인이죠'란 말이 어느나라 말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서서히 나에게 녹아들기 시작했다.
한국말이었다!
난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물었다.
"한국인이세요?"
"아뇨, 우리 엄마에요!"
그 말은 즉, 자신이 아닌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말이겠지?
"한국말 잘 하시네요!"
"아직은 잘 못해요. 왜 혼자세요?"
"아... 일행이 잠시 화장실에 갔어요."
사기꾼이라면 지금이 절정이라는 생각에 얼른 둘러댔다.
그녀는 금새 '아~' 하며 내 말을 믿었다.
"난 또 혼자인 줄 알았네. 여기서 이렇게 젊은 분이 혼자 여행
안 하거든요, 무서워서."
"아...네..."
"그럼 즐거운 여행 하세요~"
주위가 더욱 밝아졌다 했더니 간판불이 모두 켜져
날 비추고 있었다.
사람도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순진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서서 가는
그녀가 사람들에게 가려지고 있었다.
또 혼자가 되는 것이다.
"저기!!"
그새 난 겁쟁이가 되어 버린 걸까?
난 그 아가씨를 쫓아 뛰고 있었다.
────────
"그럼 얼른 말하지 왜 거짓말 했어요!"
난 그녀에게 혼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몬두'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녀의 엄마는 한국사람, 아빠는 인도사람이라
자신은 혼혈아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제일 한국어가 서툴다고 했다.
한국에서 살고 싶긴 한데 한국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가족중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 모두 한국말은 할 줄 알고,
언젠가는 한국에 꼭 가서 살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나는 광활한 공터에 천막들만이 자잘하게 펼처져 있는
곳에 다다랐다.
몬두는 종간에 촘촘하고 엉성하며 길게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언제나 다니던 길인듯 여유롭게 나와 이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많은 천막들 중 어찌 그리도 자신의 집을 잘 찾는지.
퇴색된 검은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손님왔다!"
젖먹이를 안고 뛰쳐나온 그의 어머니는 예상외로
젊은 분이셨다.
40대 초반? 아니, 30대 후반일지도.
몬두가 이제 18살 정도 되니 젊어도 아주 젊으신 분이다.
몬두의 어머니는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며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몬두에게 재빨리 무어라 말하자,
몬두도 지지않고 신속히 무어라 지껄여댔다.
마침내 몬두의 어머니가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고 풀 죽은 표정이 되자,
몬두는 신이 나서 날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룸형 천막 안에는 몬두와 젖먹이 아기 말고도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두명 더 있었다.
그리고 벽 쪽으로 누워 자고 있던 남자가 부스스 일어나
날 올려다 보았다.
"아빠, 며칠만 묵으시다 갈 손님이야."
몬두의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달리 바로 싱긋 웃더니
탈탈 털고 일어나 어질러진 것들을 주워 담았다.
"죽이라고 생각하고 먹어요."
몬두가 나에게 노란 무언가를 내 왔다.
마셔라는 어머니의 손짓에 난 조금 꺼림칙 하긴 했지만
꿀떡꿀떡 넘기기 시작했다.
끝 맛이 단 향이 나는 게 먹을 만 했다.
"이름이 머요?"
서툰 한국어로 어머니가 물었다.
난 내 이름은 이태영이라는 것을 말하고,
어머니의 이름은 '만드라',
아버지의 이름은 '쟝',
뒤엉켜 놀고 있는 애 둘이는 쌍둥인데
'노미'와 '오미'라 부른다고 했다.
"애기는 아직 이름 없어요."
몬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손수 거적때기같은 천조각을 바닥에 펴고 누웠다.
나도 누우라고 쟝씨가 바닥을 탁탁 치며 웃어보였다.
난 엉거주춤 앉았다가 어설프게 누워보았다.
바닥은 차고 딱딱했다.
"어딜 여행하려고 왔어요?"
"난 그냥... 주술사나 만나보려고."
"주술사?"
그 때 갑자기 쟝씨와 만드라부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놀란 나도 엉겁결에 같이 일어나 앉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돈 많은 사람인가보나!"
만드라부인이 서투른 한국어로 감탄했다.
쟝씨가 물었다.
"어느 주술사를 만나볼려고?"
"아직 잘 몰라요. 블랙매직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그건 정말 무서운겁니다."
몬두가 겁에 질린 듯 말했다. "제 친구가 그것 때문에 몇년동안 병으로
일어나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우리 동네 사람 중 하나는 하루아침에
죽어서..."
"나,난 그런 것 때문에 주술사를 찾는게 아니에요!
그저 한번 배워 볼려고 그러는 거라구요."
안타깝게도 쟝씨 가족들은 더 겁에 질린 듯 했다.
"괜찮은 주술사라면 제가 알고 있어요."
몬두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 그녀는 돈도 많이 요구하지 않고,
그녀가 뛰어난 주술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그저 낙타를 빌려주면서 돈을 벌고 있어요.
그녀는 푸쉬가르에서 낙타를 기르고 있어요."
"이름은? 나이는?"
내가 물었다.
"이름은 모르겠어요. 자주 바뀌어서... 나이도 잘 모르겠어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더라구요. 하지만 중요한건 그녀는
한국인이라는 거에요."
"내일 떠날 수 있을까요?"
"내일 제가 그 쪽으로 데려다 드릴께요, 걱정마세요."
몬두가 약간 불안하게 웃었다.
난 최대한 친절하게 웃어 보인 후 거짓 하품을 하고
잠이 오는 척 스르르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비밀에 싸인 낙타를 기르는 주술사라.
게다가 한국인에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인.
아침이 오길 기다려보았지만 끝내 날이 밝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뒷담]
꼬릿말 감사하구요.
처음엔 좀 지루할지도 모르겠네요.
판타지 삘이 좀 나는데 이건 엄연한 로맨스물이구요.
그냥 특이한 배경위에서 로맨스를 그려보고 싶었을 뿐...(퍽)
무언가 특별한 걸 많이 기대하시면 좀 실망하실수도 있을꺼같아요.
편수가 많아질수록 로맨스로 빠져들기 때문이죠...
다시말씀드리지만
이 판타지삘은 로맨스를 위한 배경일 뿐입니다!
written by 나비환상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터키쉬 앙고라 1
나비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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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1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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