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독서일기의 어려움.
나는 책을 읽고나면 독서일기를 쓴다.
읽고 나서 얼마가지 않아 읽은 내용을 모두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날려버리면 또 읽어도 되지만,
그렇게 읽어도 읽은 내용을 날려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독서일기를 쓴다.
게으름만 없으면 최대한 자세하게 쓰려고 한다.
그리고, 되도록 정확하게 쓰려고 한다.
그래서 읽으면서 대충 메모를 해놓는다.
책의 줄거리도 좋고, 주요 등장인물도 좋고, 책을 읽을 당시의 내 느낌도 좋고 말이다.
그래도, 독서일기 쓰기가 어려운 장르가 있다.
외국 인물, 특히 많이 알지 못하는 외국의 인물에 관한 책은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독서일기 쓰는데, 최대한 시간을 줄이는 습관이 있어 더욱 어렵다.
그렇다고, 안쓰면, 읽은 내용이 곧 잊혀지고,
쓰려고 하면 낯선 외국 지명이나 외국인 이름,
그리고 인물의 사전 배경 등의 어려움.
넬슨 만델라.
이 사람의 이름은 많은 사람이 알 것이다.
대충 남아프리카 인종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오랜 감옥생활 끝에 출옥하여 인종해방에 성공을 했고,
남아공 대통령에도 오르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 사람.
이 정도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알고 넬슨 만델라에 대한 상식이다.
남다른 길을 간 인물로써,
충분히 그의 삶을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때 그때 읽었을 때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는데,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쉽지 않다.
독서일기의 정확도를 위해 책 뒷편에 소개된 연대기를 일부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1. 지은이
이 책의 지은이는 자크 랑이라는 프랑스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했고,
미테랑 대통령 시절,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프랑스 사회당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프랑스 자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인권운동과 문화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다고 한다.
넬슨 만델라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일을 했던 그 또한
넬슨 만델라의 큰 지지자였다.
그런 그가 넬슨 만델라에 대한 글을 쓴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좋은 점은 썼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영웅이 아닌 순박한 인간적인 모습도 많이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자크 랑은 넬슨 만델라를 한며의 연극배우로 묘사하였고,
해박한 고전문학의 지식을 이용하여 평전을 한편의 연극처럼 구성하였다.
총 다섯막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구성은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제1막에서 그는 안티고네의 아프리카인 형제이다. 이상주의자이며 열정적인 젊은이인
그는 도시의 법에 복종해왔지만, 어느날 문득 보다 숭고한 책무를 위해 그것을 위반해야
함을 깨닫는다. 제2막에서 그는 스파르타쿠스가 된다. 비참한 처지에 있는 동료들의
선두에 서서 로마에 대항해 양날 검을 휘두르는 노예 말이다. 제3막에서 그는 인간에게
해방의 불을 가져다준 죄로 바위에 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이다. 제4막에서 그의 조국은
혼란스럽고 내란이 벌어질 위기에 놓여 있지만, 그는 <태풍>의 프로스페로로서 칼리반의
저주를 피하는 데 성공하는 마법의 왕자이다. 마지막으로 제5막에서 그의 배역은 넬슨
왕이다. 어떤 역할이 이보다 더 적합하겠는가. 그는 마침내 자유로워진 조국의 신화적인
창조자이자, 비극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침몰하기 직전의 아프리카 대륙을 미몽에서
깨어나도록 한 목격자이다."
2. 투옥 전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넬슨의 어린시절 이름은 '로하바'였다.
로하바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란 뜻을 가졌다.
넬슨의 아버지는 국가정책에 저항하여
넬슨은 강제로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게 된다.
어린 시절 넬슨은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교육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어린 나이는 인종차별에 대해 실감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가서 세상의 눈을 돌리면서, 조국의 현실에 직시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퇴학한 후,
정략결혼을 피해 오하네스버그로 갔다가
평생 스승이자 동료인 시슬루를 만나게 된다.
시술루는 만델라를 법률사무소에 취직시켜 주고, 넬슨은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넬슨은 시술루의 사촌동인인 에블린 메이즈를 만나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백인에 저항하는 큰 두개의 단체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산당이고, 하나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였다.
넬슨은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몸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시술루 등과 함께 청년연맹을 창설하였다.
본격적인 정치 활동의 시작이었다.
...
1948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게 된다.
흑인에게 선거권이 없던 선거에서
백인의 보호정책을 쓰겠다는 국민당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선거에서 이긴 국민당은 백인의 안전과 기독교 문명을 보장하겠다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내놓는데,
이 정책은 인종차별 정책의 근본이 되었다.
이후 아프르트헤이트 정책은 10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늘어나는데,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교통수단과 공공장소의 편의시설도 분리되어 사용되었고,
거주지 지역까지 구별하는 등 강력한 인종차별 정책이 시행되었다.
...
아프리카 국민회의에서는 이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해 반대운동을 하였는데,
그 방법론은 시술루는 시민불복종 강령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은 인도의 간디가 전개가 비폭력운동을 본받은 것이다.
사실, 혈기 넘치는 넬슨은 이런 비폭력운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
그는 처음으로 백인이 아닌 사람으로 법률사무소를 열었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등 흑인인권운동을 시작하였다.
1952년 공산주의 금지 관련하여 아프리카 국민회의 의장인 모로카 박사,
총서기 였던 시술루, 넬슨 만델라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만델라에게 있어 이제는 정치가 전부였다.
그런 만델라를 아내인 에블린은 참을 수 없었고, 그들은 이혼을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강도가 심해지고,
그에 따른 만델라 같은 인물들의 행동이 법에 규제받는 것이 점점 늘어났다.
첫번째 부인과 헤어진 몇년 뒤,
같은 사회 운동을 하는 위니프레드 마디키젤라와 재혼을 하였다.
...
1960년 범아프리카 회의가 주도했던 평화시위운동에서
경찰이 발포해 67명이 죽고 4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을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델라는 무쟁투쟁노선을 착수하려고 한다.
하필 이때 비폭력 저항의 공로로 남아프리카저항운동을 이끌던 루툴리 대장이 노벨평화상을 받는 바람에,
만델라와 무쟁투쟁노선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지만,
루툴리 대장도 얼마가지 않아 만델라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국민회의 산하 '국민의 창'이라는 비밀 군대가 결성되었다.
이후 만델라는 탐보와 함께 아프리카 주변국을 돌면서
무장투쟁의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그렇게 외국을 다니다가 은신처로 돌아가던 중
거주지 명령 위반과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되고, 수감되었다.
3. 27년의 수감생활
처음에는 5년이라는 형을 받았다.
하지만, 1963년 '국민의 창'의 고위 간부가 모두 체포되면서,
만델라 역시 그 일원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을 면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감형되어 사면조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수감생활은 27년이나 이어졌다.
만델라 뿐만 아니라, 시술루, 음베키, 음흘라바 등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이끌던
이들이 모두 로벤 아일랜드의 감옥안에 있었으니,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최고 사령부가 감옥에 있었다고 볼수 있다.
만델라는 감옥에서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도 인권을 주장하며,
합리적인 못한 일에 대해서는 강력히 저항하였다.
그런 간수 중에 만델라를 존경하는 이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제임스 그레고리란 간수이다.
그는 만델라와 평생 친구로 지내게 된다.
1969년 만델라의 부인 역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들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은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1976년 그런 투쟁 중에 13살짜리 소년이 경찰의 총에 의해 죽으면서,
전 세계 언론이 남아프리카 문제를 주목하게 되었다.
남아공 정부도 그에 굴하지 않고 더욱 인종차별에 강도를 높이는 와중에
흑인의식운동의 창시자인 스티브 비코가 고문당한 뒤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유엔은 남아공에 대해 압박을 가하게 되자, 남아공 정부의 탄압이 완화되기도 하였다.
...
몸은 감옥에 있지만, 그의 생각과 그의 입은 감옥 밖에 있었다.
그를 대신하여 그의 딸이 그의 글을 읽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동료들이 각종 회의에서 그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가 투옥한 지 20년이 넘으면서 그를 석방하라는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는 1988년 70번째 생일을 감옥에서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9년 국민당의 총수가 데 클레르크로 바뀌는 데,
이는 만델라와 남아공에 있어 큰 변화의 물줄기였다.
데 클레르크는 개혁을 통해 남아공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아프리카 국민회의 참모진을 석방하고,
이어서 아프리카 국민회의 등에 내려진 금지령을 철회하고,
사상법의 석방, 사형 중지를 선포하게 된다.
이 지침에 따라 만델라 역시 27년의 긴 수감생활을 마치게 된다.
그의 동료 데스몬드 투투는 만델아의 27년의 수감생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지난 27년은 만델라에게 강철같은 성격을 연마하도록 해주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그 정도의 아량과 연민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견디어온 고통들이 다른 그 무엇도 가져다줄 수 없을 정도의 권위와 신뢰를 주었다."
4. 변화의 시대
넬슨 만델라는 수감 이후 본격적인 인종차별을 위한 노력을 실시한다.
해외 곳곳을 순방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벤치마킹도 하고,
국내에서는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계속된 만남을 통해 새로운 남아공을 만들어 갔다.
드디어 수백년 이어진 인종분규가 종식되고,
아파르트헤이트도 사라졌다.
이런 공으로 넬슨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데 클레르크를 이어 선거에서 승리한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남아공은 화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자신을 27년간 가두었던 남아공의 전 대통령과도 화해의 악수를 하였다.
지난 힘들고 고통의 과거는 현재의 찬란한 순간 속에 모두 묻혔다.
남아공은 그야말로 급변하였다.
책에서는 언급 안했지만, 그런 급변이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도 하였다.
수백년 이어져인 인종차별이 하루아침에 해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분별한 자유와 이어져서도 안된다.
예전에 읽었던 존 쿳시의 <추락>이라는 소설에서 이런 남아공의 현실을 꼬집기도 하였다.
...
그리고 2010년 월드컵이 남아공에서 열린다.
아직 치안 문제와 기반시설에 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아직,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변하고 있다. 진화하고 있다.
그들은 늘 진행형이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
그들이 2010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유치하면서,
보다 성숙하고, 도덕적이고, 발전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
역시 나라의 리더는 중요하다.
만일 데 클레르크가 없었다면,
만일 넬슨 만델라가 없었다면,
지금의 남아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물론 언젠가는 그들의 인종차별은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가 이루어질 거라면서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것이었다.
달려가서, 뛰어가서, 조금이라도 빨리 얻어냈다는 점에서
넬슨 만델라가, 데 클레르크가 위대한 사람인 것이다.
허탈한 듯, 호통한 듯, 얼굴 가득 미소짓는 책 겉표지의 만델라 얼굴이 보기 좋다.
책제목 : 넬슨 만델라 평전
지은이 : 자크 랑
펴낸곳 : 실천문학사
펴낸날 : 2007 년 10 월 20일
정가 : 15,000 원
독서기간: 2008.08.30 - 2008.09.04
페이지: 415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