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사탕 / 이지현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분양받은 아파트로 가기 전 1년 정도 살 집이었다. 전학까지 가기는 애매했기에 나는 매일 20분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당시 살던 고향은 여기저기 아파트가 막 들어서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한 동네 전체가 이미 공사 중이거나 곧 철거가 진행될 곳도 여럿이었다.
이사 간 동네는 대학교 근처에 있는 꽤 번화한 거리였다. 한 골목만 안쪽으로 들어서면 풋풋한 풍경이 보물처럼 숨겨 있었다. 집을 나서면 바로 앞에 작은 개울이 흘렀다. 10살짜리 여자애가 물에 빠지지 않고 건널 수 있을 만큼 얕고 폭이 좁았다.
개울을 건너면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버려진 철로가 나타났다. 철로를 경계점으로 낡은 처마의 키 작은 단독 주택들이 일렬로 자리한 길들이 있었다. 조금 더 걸으면 드디어 학교랑 한껏 가까운 대로변이 나왔다. 기찻길 주변 동네도 곧 철거될 예정이라 이미 빈집이 많아서 등하교 시간조차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엄마는 ‘외동딸 꾸미기’를 좋아했다. 덕분에 그 여름 나는 알록달록 조화와 리본이 가득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진주알이 그득한 은색 메리제인 구두를 신고 다녔다. 부잣집 다이애나를 동경했던 「빨간 머리 앤」 속 고아 소녀 앤처럼 꾸미기를 좋아했다면 딱 취향 저격의 패션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렇지 않았다. 학교 구석에서 키우는 공작새가 보는 이도 없는데 화려한 날개를 뽐내는 모양이 내 모습 같아 엄마가 코디해 준 패션이 그저 쑥스러웠다.
하지만 싫다 말하지도 못하고 소심했던 아이는 매일 아침 엄마의 열정적인 배웅이 골목 모퉁이로 사라지자마자 재빨리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책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20여 분의 등하굣길을 걷는 동안 나는 챙겨간 책을 읽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학교와 집을 오갔던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마무리되고 여름방학이 가까워질 무렵, 그날도 한 손엔 화려한 밀짚모자를 성의 없이 들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읽으며 집에 가던 중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돌 하나가 날아와 발아래로 떨어졌다. 일순 걸음을 멈추고 돌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다. 한 남자아이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뭘 그렇게 읽고 다니는 거야!” 하며 고함을 쳤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다짜고짜 모르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다니! 잠깐 얼어 있는데 아이는 원하는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아서인지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답답하다는 듯 또 한 번 뭘 읽는 거냐고 물었다. 전에도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났다.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나보다 키도 작고 한두 살은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였는데 아무래도 같은 학교는 아니었는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침착한 척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보이며 “「왕건」이야. 재미있어.” 하고 답했다. “왜 맨날 걸어 다니면서 책을 보는 거야?” 아이는 또 말을 걸었다. 아마 꽤 오랫동안 나를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아이의 눈에 내가 도드라진 게 책을 읽고 다니는 모습 때문이었는지, 내 화려한 패션 때문인지 몰라 일단 들고 있던 모자를 등 뒤로 슬쩍 감췄다. 뭐라 답할지 몰라 물끄러미 서있는데 주머니에 들어있던 알사탕이 번뜩 생각났다. 사각사각 투명한 비닐에 싸여있는 과일 맛 알사탕 한 알!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들어 “먹을래?”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상황을 평화롭게 넘어가고 싶었다. 달콤한 사탕이라면 왠지 뿔이 난 듯한 그 아이를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저하며 염려한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사탕?” 하면서 열 발자국 정도는 떨어진 곳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이는 사탕을 빼앗듯 채가며 그 자리에서 비닐을 까 입으로 쏘옥 집어넣었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사탕을 녹여 먹으며 어디 학교 다니냐, 어디 사느냐 묻는 질문에 나는 대충 대답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사라져버린 순간 어색하게 인사하고 뒤돌아 가는데 등 뒤에서 계속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서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때마침 주머니에 있던 알사탕 덕에 위기를 벗어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돌팔매 만남 이후에도 가끔 아이는 낮은 담장 아래 서서 “오늘은 뭐 읽냐?”거나 “사탕 있어?”라고 물었다. 그 아이가 나보다 어렸기에 “너 왜 어린 게 반말이야!”라며 한 번쯤 따질 만도 했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소심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나에게 사탕이 없어도 더 이상 돌을 던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게 손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나칠 만큼 하굣길 만남에 익숙해할 때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그 길을 지나갈 일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여 후, 등굣길에 마주한 그 동네는 혼돈의 공사장이었다. 낮은 담장의 작은 단독주택들도 기찻길도 모두 사라지고 예전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대형 단지의 아파트를 짓느라 포클레인과 타워크레인이 혼란스러운 길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골목에 살던 그 아이도 이제는 붕괴된 집을 떠나 이사를 갔는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만나지 않는다고 그리워할 사이도 아니었는데도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다. 우리 가족 역시 겨울이 채 끝나기 전 새집으로 이사했다. 그 여름의 기억은 차차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몇 년 후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본 그곳은 키 큰 아파트 숲이 되어 있었다. 나도 더 이상 엄마가 입혀 주는 대로 옷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근처를 지날 때마다 철거되기 전 낮은 담장들, 철로와 개울 그리고 내게 돌을 던졌던 그 소년이 생각난다. 그가 도르르 굴려가며 천천히 녹여 먹던, 평화의 상징이었던 알사탕, 소심했던 나를 지켜줬던 그 알사탕과 함께. 나에게 알사탕은 첫사랑의 달콤함이 아닌 기찻길 옆 담벼락에서 느닷없이 날아온 돌멩이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