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를 읽고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에 전쟁은 시작되었다.
700여척의 전함마다 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가득 싣고 적들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은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 정발과 그의 군사들이
죽음으로 막으려 했지만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칼은 총에 닿지 못했고, 낫을 들고 일어선 백성들이 지천에서 죽어갔다.
4월30일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향하고, 5월 2일에 서울이 무너졌다.
총과 칼의 전쟁은 애당초 전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임진왜란은 총이 총을 겨누거나 칼과 칼이 맞선 전쟁이 아니라,
총이 칼을 도륙하는 살육장이었다. 고려 때는 몽고의 침입을 받았고,
임진란 이후에 병자호란이 있기는 했지만, 임진왜란만큼 참혹하지는 않았다.
허구한 날 말장난으로 죽고 죽이는 조선의 대신들은 적들의 전쟁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고, 전쟁을 눈앞에 두고도 서로의 주장을 헐뜯었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칼은 이순신의 칼이다.
이순신의 칼에는 “一揮掃蕩 血染山河” 라고 새겨져 있다.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다”라는 검명이 새겨진,
지금도 아산 현충사에 걸려 있는 이순신의 칼이다. 칼은 노래할 수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칼은 울었을 것이다.
적들이 능멸한 마을마다 백성들의 살 썩는 냄새가 가득한 산하에서 칼은 울부짖었을 것이다.
울부짖다 쓰러져 혼절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아들 면도 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걸어둔 칼 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들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노래는 작가의 것이다.
작가는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와 유성룡이 쓴 ‘징비록’과 남원의 한 의병장이 쓴
‘난중잡록’을 토대로 이순신의 분노와 한숨을 복원한다.
까맣게 타버린, 타서 재가 되어버린 이순신의 가슴을 그려낸다.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대한민국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업적에 빛나는 이 노련한 작가의 진혼곡은 경박하지 않고 장중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고.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도망 가버려 인기척 없는 산하에도 꽃은 피었다.
꽃은 피었되 바라볼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5년 후인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적장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의금부에서 갖은 문초를 당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몸뚱아리를 이끌고
남해 바다로 돌아가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조선의 임금 선조가 한 말을 적은 선조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끝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고. 폐결핵으로 기침속에서 살았던 선조는 영웅을 두려워했다.
임금은 총을 가진 적들에게 도망치면서 칼을 가진 그의 군사들을 두려워했고,
낫을 가진 백성들의 절망이 그에게로 향할 것을 두려워했다.
병약한 임금은 영웅의 탄생을 두려워했다.
반간들로부터 입수했다는 믿을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자살이나 다름없는
그 위태로운 바다로 출격하라는 것이 조정의 명령이었고,
그 위험한 출진을 하지 않은 것이 이순신의 죄목이었다.
임금의 한나절 기분을 위해서 한줌 남은 그의 군사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없었다.
그의 죄는 단지 그 뿐이었다.
목숨만을 겨우 부지하고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남해로 내려온 공에게
배는 한척도 없었다. 공이 “바다에 당도했을 때, 연안의 바다는 끈끈했고,
간고등어 썩는 냄새가 자욱했다.” 전쟁은 공명심만으로도 복수심만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은 칼이 닿지 않는 총을 가진 적 앞에 선 이순신의 울분을, 썩어가는 시체들만 남은
저 견딜 수 없는 남해바다를 묘사한다.
그동안 출간된 이순신에 관한 책과는 달리 소설은 영웅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은 인간을 말한다. 성웅이라는 굴레를 씌운 박제된 영웅이기 이전에,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뼈마디가 쑤시는 등판에 식은땀을 흘리는 인간 이순신을 이야기한다.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의 신음소리와 도망치는 군졸들과, 그들을 잡아다
적들보다 먼저 베어야만 했던 이순신의 탄식을 들려준다.
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은 그의 징비록에서
“부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고 했고, 난중잡록에는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고 적었다.
이것이 임진왜란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남편이 처를 잡아먹는 저 생지옥 속 아비규환.
총이 지키는 울진의 성류굴 속에서 모든 사람이 굶어 죽었고,
영월의 동굴에 숨은 산간마을 백성들은 연기에 질식해 죽고, 고씨성을 가진자만 살아남았다.
그래서 고씨동굴이 되었다. 고씨동굴은 살아 남은자의 이름일 뿐, 죽은자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산하가 적들의 손에 넘어간 암흑의 전쟁터,
희망이 보이지 않는 폐허가 된 그 전쟁터에서 무능한 조정은 영웅의 체포를 명했다.
선조실록은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임금이 털끝만큼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해버린 이상 누가 그를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의병장 김덕령이 반란 연루 혐의로 임금에게 장살되고, 의병장 곽재우가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산속으로 은거해 버리기 전부터 이미 조선 장수들의 용맹은 임금의 적이었다.
충무공의 후임인 원균의 군사가 칠천량 앞바다에서 전멸하지 않았더라면,
이순신은 의금부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적이 이순신을 죽이려했고 임금이 이순신을 죽이려 했다.
소설은 이 눈앞의 적과 서울의 적 사이의 이순신을 이야기한다.
어둠의 바다에 선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이야기한다.
배를 타고 밤바다에 나서 본 적이 있는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서 본 사람은 어두운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리라.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통제사가 되어 그는 다시 바다로 나선다.
330척 앞에선 12척. 적선으로 가득 찬 밤바다에서 12척의 전선으로 적 앞에 선
이순신의 戰意는 어떠했을까.
그러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임금에게 출진에 앞서 올린 이순신의 장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작가는 일러두기에서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자는 작가가 설정한 이순신의 고뇌와 한숨을 함께한다.
아들 면이 적들의 손에 죽은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나 군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 가는 그 막막한 상황에서 독자의 가슴도 답답해진다.
칼의 노래는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순신이 지은 詩 ‘한산도 야음’과 이순신의 일기인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칼’ 과 ‘영정’ 과 ‘선조의 교서’와 ‘충무공 팔진도’와
‘수군조련도’의 사진들을 본문 앞에 실었고, 본문 뒤에는 ‘칼에 새긴 검명’과
‘충무공 연보’와 ‘인물지’와 옥포, 한산, 당항포, 명량, 노량의 각 해전도를 실음으로써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를 쉽도록 배려한다.
이순신이 영웅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5천년의 긴 역사를 가졌음에도 이긴 싸움이 드물었고,
따라서 승전보를 전해온 장수도 몇 갖지 못한 이 나라 역사에서,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쳐부순 일본의 해군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나는 이순신장군의 전법을 연구하여 러시아 함대를 쳐부술 수 있었다”라고 고백했던,
세계 전쟁 역사에서 100% 승전은 나폴레옹도 아니고 넬슨제독도 아닌
오직 조선의 이순신뿐이라고 극찬 했던, 적국의 장군마저 그를 존경한다는
그런 영웅을 가져본 적 있었던가.
영웅은 탄생되지 않고 만들어진다. 영웅의 어린 시절이 어른일 수 없고,
영웅의 살아온 삶이 인간과 격리되거나 신격화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에게 덧씌운 성웅의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인간의 한숨과 눈물을 그린,
그래서 칼의 노래라고 제목을 붙인 이 소설이 결국에는 불멸의 영웅을 만들고,
소설을 읽고 난 그대는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가 부르는 슬픈 노래를 들을 것이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가 수상작 선정이유에서 밝혔듯이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작가의 저 유려하고 장려한 수사 몇 마디를 끝으로
이 독후감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나의 적은 전투 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적에게 물어 보아도 적은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먼 섬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바다는 내항 깊숙이 부풀었다.
해지는 쪽 하늘에서 붉은 노을과 검은 노을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내일은 비가 올 모양이었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어깨가 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음악 / Vangelis의 "Conquest of Paradise"
첫댓글 님의 글을 읽고나니..문득....."칼의 노래" 라는 책이 생각이 나서 한번 올려 보았습니다.......감사 합니다.......샬롬
아, 반갑습니다 예하님! 칼의 노래가 갑자기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감사합니다...편한 밤 기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