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lling Stone Interview with BONO - by Jann S. Wenner
10월 첫째주, 난 보노를 만나기 위해 유투 멤버들이 두번째 북미투어를 앞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멕시코로 갔다. 보노와 래리는 식구들과 함께였는데, 마침 엘비스 (래리의
아들 애론 엘비스 뮬렌) 의 생일을 맞이해서 바비큐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태풍이
올 듯한 바깥 날씨를 보며, 보노는 나를 침실로 안내했고 우린 대화를 시작했다. 정오에
시작한 대화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시작됐다. 전체적으로 10시간이
넘게 얘기한 셈이다. 유투의 공연에 가본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드라마틱하면서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지 알 것이다. 말 한마디마다 재치와 매력이 넘치는 그는
이야기하는 걸 매우 좋아한다. 2주후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5번째 공연을 하기 전날,
보노는 롤링 스톤 사무실에 한두시간 정도 머무르며 기사에 대한 이야길 나눴다.“이게 다
끝나고 나면 당신은 안티 보노틱한 별명이 하나 필요할 거다” 라는 농담을 하며.
보노와 그의 밴드 이야기는 멤버들간에 벌어진 여러 일들과 – 활동을 시작한지 2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놀랄만큼 안정적인 밴드다 – 보노가 힘을 쏟고 있는 사회정의에
관한 것이다. 보노는 우리에게 어떻게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그는 그의 삶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설명한다.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뉴욕
타임스에선 그를 두고 “명성이라는 국제 통화로 금고를 채우는 1인 정부… 근래
대중문화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이라 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밴드의 초창기 시절부터 힙합에 대한 그의 애정, 순탄치 않았던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이어진다. 보노는 그의 삶과 일에 대해 가감없이 말하는
극소수의 아티스트 중 하나다. 그는 평론가만큼이나 그의 앨범들에 대해 심한 말도
쏟아낼 줄 안다. 여기에 실린 인터뷰는 아마 우리가 나눈 대화의 20%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보노는 가능한 오래도록 청중을 붙들고 얘기하고 싶어하니, 우리 모두
동참하는 게 좋을 것이다.
Q: 그 많은 선글래스는 대체 어디서 나는 건가?
불가리다(주: 명품 브랜드가 아닌, 나라이름). 많은 사람들이 선글라스
옆면의 B 를 보고 단지 그게 나의 자기 과시라고 생각한다. 그건 절반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Q: 왜 항상 선글래스를 쓰고 있나?
빛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눈이다. 누가 내 사진을 찍으면, 플래쉬가 하루 종일
어른거린다. 오른쪽 눈은 부풀어 오른다. 염증이 있기 때문에 자주 빨갛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약간의 허영심, 약간의 프라이버시, 약간의 민감함 때문이다.
Chapter I. 성장과정
Q: 더블린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
흔히 말하는 중하위 계층 동네에서 자랐다. 미국엔 그런 데가 없다. 중산층? 하지만
깨끗한 거리와 좋은 사람들이 있지 않나. 솔직히 말하면, 주변엔 항상 폭력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집은 방 3개 딸린 평범한 곳이었고, 다들 골방이라 부른 작은 곳이 내 방이었다.
어머니는 일찍이 당신의 아버지 무덤가에서 돌아 가셨다. 며칠만에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은 거였고, 그때부터 남자들끼리만 사는 집이 됐다. 우린 다들 상당한
마초였고, 그런 공격적인 성향은 내가 아직도 많이 신경쓰는 부분이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그 수준의 공격성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Q: 똑똑하면서 성깔있는 십대였던 것 같은데, 별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집에서
자란 것 같다.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가르친 아이리쉬적인 태도는 “니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현실을 봐라” 이런 식이었나?
내 아버지 밥 휴슨은 더블린 중심가 출신이다. 오페라를 좋아하긴 했지만 전형적인
더블린 사람이었다.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 좀 있었단 얘기다. 독학으로 셰익스피어에
정통했었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훌륭한 테너였다. 그의 인생에서 참 안 됐던
것은 피아노를 안 배웠단 거다. 이상하게도 자식들에게 큰 꿈을 갖지 말라는 식이었다.
음악적으로든 뭐든. 꿈을 꾼다는 건 곧 실망이었으니까. 난 어렸을 떄 똑똑한 편이었다.
십대 시절, 내가 멍청하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학교 성적이 개판이었다.
집중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학교 밖의 세상을 믿기 시작했고, 음악은 일종의 복수같은
거였다.
Q: 막다른 골목같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것의 중간적 성질은 그걸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활달하면서 정신이 나간
듯한 무리와 어울려 다녔고, 더블린 한 복판에서 이상한 짓을 하곤 했다. 접사다리와
전기드릴을 들고 버스에 탄다든지 하는 미친 짓거리들. 유머가 우리의 무기였다. 손에
드릴을 들고 아무말 없이 그냥 서있고 그랬다. 어려서 그런거다.
Q: 그냥 사람들을 놀리려고? 아니면 행위예술?
행위예술이다. 우리 마음대로 창조한 세계였다. 잘난 놈들의 특권에 대항하는
십대 시절의 방법이랄까.
Q: 많이 싸우고 그랬나?
물론이다. 딴 동네 패거리들한테 죽기 직전까지 맞는 게 일상이었다. 걔들이
시비를 걸면 대답을 조심스레 해야 한다. 안 그러면 괴롭다. 걔들이 세게 때릴수록
더 이상하게 반응하곤 했다.
Q: 괴짜같은 아이었나?
그렇다. 요즘 50센트가 나오는 영화의 음악을 맡고 있는 게빈 프라이데이가 제일
요상하게 하고 다녔다. 영화 이레이져헤드 같은 머리에 드레스를 입고 싸움용 부츠를
신었다. 하다보니까 싸움을 잘하게 되는 애들도 있었다. 엄청났던 동네 싸움들이
기억난다. 한번은 어떤 미친놈이 쇠파이프로 정말 죽일듯이 내 머릴 내려쳤는데 쓰레기통
뚜껑으로 막아서 살았다. 십대들은 죽음에 대한 개념이 없다. 남의 목숨이든 자기 목숨이든.
Q: 그게 십대적 반항같은 거였나?
반항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방어기제같은 거였다. 우린 사람들이 술 마시는 걸
비웃곤 했다. 술집에서 엄청 퍼마신 다음 길가에 토하기나 했으니까. 우리가 그들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Q: 영리한 애들끼리 모인 패거리였단 말인가?
우린 다 아웃사이더들이었다. 그닥 영리하진 않았다. 좋은 음반을 많이 갖고 있거나,
축구를 안 하거나 그런 게 좋은 거였다. 지금 돌아보면 거기엔 오만함이 있는거다. 남을
내려보는 것. 어쩌면 우리 아버지가 갖고 있던 것과 비슷한 오만이다. 오페라를 듣거나
크리켓을 좋아하는 것 따위등이 그를 차별화 시켰던 것 처럼.
Q: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노래 Sometimes you can’t… 을 썼다. 얼마전에
에지와 얘기를 했을 때, 당신이 아버지에게 호의적이 되고 있다던데.
그는 아주 놀랍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변에 있으려면 빠릿빠릿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친 않는다. 내가 내 아이들과 갖는 관계는
아버지와 나 사이의 그것과 다르다. 사실상 아버지와 나 사이엔 그런 것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제일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쟈니 캐쉬의 노래
A Boy Named Sue 를 알 것이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여자이름을 지어주고, 그 아이는
살아가면서 마초같은 녀석들에게 언제나 맞기만 하다가 결국엔 그 애가 가장 터프한
남자가 된다는 내용이다.
Q: 당신이 그런 소년이었단 얘긴가?
내가 뮤지션이 되는 것을 반대함으로써 – 그게 아버지가 나에게 바란 유일한 것이긴
했지만 –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꿈을 꾸는 건 곧 실망하게 되는 거라고, 그러니
큰 꿈 같은 건 갖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큰 꿈을 갖게 됐다.
밴드 따위는 기해껏야 5분, 10분 정도 밖에 가지 않는다며. 하지만 우린 아직 그대로다.
Q: 일반적인 부자간의 이야기 이상의 뭔가가 느껴진다.
당신은 키우기 굉장히 어려운 아이였을 것 같다.
분명 쉽진 않았을 거다.
Q: 당신 아버지는 엄마도 없는 아이 둘을 혼자 키웠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그에
대해 쌀쌀하고 냉정하다. 내 생각엔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내다버리지 않고 키운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 것 같은데. 한번도 당신이 아버지를 대한 방식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은
없나?
없다. 당신같은 망할 인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 집의 크리스마스는 그냥 아주
긴 말싸움같은 거였다. 나를 비롯한 온 가족이 소리나 지르기 바빴다. 아버지는 괜한
도덕적 잣대같은 게 있었는데, “그딴 건 안 해도 상관없어” 라는 식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현명하셨다. 본인은 좌익이었지만, 우익의 사람을 지지하기도 했다.
Q: 얘기를 할수록 당신 자신에 대한 말처럼 들린다.
그것 참 재미있는 시각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난 아버지를 사랑했다. 하지만 우린 적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욕이었다. 난 그의 병실에서 바닥에 메트리스를 놓고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큰 소리를 내서 깼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밥, 괜찮아요?” 라고 묻자, 그는
나름대로 쳐다보는 척 하며 말했다. “당신 그냥 지랄하지 말고 날 좀 여기서 내보내
주지 않겠소? 여긴 감옥같아. 집에 가고 싶어.” 마지막에 남긴 말이 그거였다
“지랄하지 마(Fuck off).”
Chapter II. 음악 교육
Q: 가장 처음으로 들었던 락 음악이 뭔가?
4살 때 비틀즈의 I want to hold your hand 를 들은 거다. 1964년이었던 듯.
크리스마스 다음날 비틀즈를 봤던 걸 기억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건 뭐랄까..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멜로디가 가진 파워뿐 아니라 머리모양이나 섹슈얼리티까지.
그 다음엔 탐 존스같은 사람이었다. 8살쯤 때인가 어느 토요일밤 티비에서 그를 봤다.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동물적인 뭔가가 있었고, 고삐가 풀린 듯 했다. 정말 자유롭게
노랠하고 있었다. 그는 백인이지만 아주 진한 흑인 목소릴 갖고 있었다. 물론 그리고
나서 엘비스도 있다. 그를 봤을 때 대체 이게 뭔가하고 생각했다. 방안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으니까. 그를 보면 사람들이 말을 멈추곤 했다.
Q: 엘비스를 본 게 언제였나?
그 전에도 노래는 들어봤지만,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건 무슨 컴백 스페셜같은 거였다.
그는 서서 노랠하고 있었는데, 앉아선 도저히 노랠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그가 분위기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그를 조종하고 있었단 거다. 그 자유로움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Q: 그 시기에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다른 것들은 어떤 게 있나?
롤링 스톤즈나 레드 제플린, 그 다음엔 더 후 같은 것들이었다. 존 레논의 Imagine 을
기억한다. 난 12살이었는데, 내가 처음 산 레코드중 하나였다. 정말 나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마치 그가 귓속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14살에 어머니를 잃었을 땐 플라스틱 오노 밴드로
돌아갔다. 비슷한 시기에 밥 딜런도 있었다. 그의 어쿠스틱 앨범들을 들으며 그런 노래를
연주해야겠단 생각도 했다. 우리 형과 나는 비틀즈 악보집도 있었는데, 난 그걸 보며
기타를 치려 했고 형은 옆에서 도와 준답시고 깨작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배웠다는
게 쪽팔리지만, 정말 굉장히 뛰어난 곡인 If I had a hammer 가 또렷이 기억난다.
Q: 그런 60년대의 비틀즈, 롤링 스톤즈, 더 후, 킹크스 같은 음악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15살때 더 후에 정말 필이 꽂혔다. 그 시끄러운 소음과 파워코드와 분노속에 어떤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내가 그때 발견한 것은 나의 아주 중요한 면중의 하나다.
일종의 임무같은 거였는데, 탐험해야 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느꼈다. 그걸
피트 타운센트 (더 후의 기타리스트)와 밥 딜런을 보며 깨달았다.
Q: Imagine 이 가장 처음로 큰 영향을 미친 노래였나?
그 노래랑 밥 딜런이다. Blowin' in the wind 같은 포크송들 말이다.
그런 것들이 나를 존 레논으로 인도해 줬다.
Q: 밥 딜런이 당신을 존 레논으로 인도해 줬다고?
포크송이기 때문이다. 포크송과 그 가사, 속삭임과 조용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테이프 레코더로 내 방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존 레논이랑 통화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과장없이
얘기하는 건데, 그 음악은 방의 모양세를 바꿔 버렸다. 방 바깥의 세상도 바꿔 버렸다.
당신이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바라보고 있는 것들을 말이다. 존 레논이
Oh, my love 를 부른 게 기억난다. 마치 성가같았다. 분명 그건 일종의 기도다 – 그가
무신론자이긴 했어도. 무언가의 베일이 벗겨지는 얘길 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랑이
가져다 주는 새로운 투명함을 창밖으로 내다 보는 것 같은 그 느낌이 기억난다.
내가 아직 20대 였을 때, 요코 오노가 내게 와서 손을 얹으며 말했다,“넌 존의
아들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Q: 당신의 밴드는 펑크에서 왔다고 한 적이 있다. 어떤 의미인가?
1976년이었다. 난 그냥 별 볼일 없는 십대의 학생이었고, 성적은 개판에 두 남자와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나중에 잘 나갈 게 분명했다. 아주 똑똑했으니까.
하지만 난 그렇게 되기엔 집중력이 너무 부족했다. 항상 머릿속에 멜로디가 떠 다녔다.
동네 클럽이나 교회 안이 조용할 때면 피아노 건반을 눌러 보곤 했다. 아래쪽에 있는
페달을 누르면 울리는 효과가 생겨서 음이 홀을 가득 채운다는 걸 알아냈다. 내 머릿
속에 있는 선율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음과 잘 어울리는 다른 음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그러던 와중, 29년전 토요일에 한 아이의 전단지가 나타났다. 말 그대로
‘아이’ 였는데, 그는 14살이었고 난 16살이었다. 그는 밴드를 시작하려 했고
드럼을 연주했다. 레디 마뉴엘이란 내 친구가 내가 그걸 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교외에 있는 래리의 집으로 데려갔다.래리는 작은 주방에
드럼세트를 놓고 있었다. 다른 몇몇 아이들도 있었다. 약간 머리가 좋아보이는
15살짜리 데이브 에반스(에지)와 역시나 머리 좀 있어뵈는 그의 형제 딕도
있었다. 딕은 그의 기타를 직접 만들었다. 그는 로켓에 아주 빠삭한 – 명함까지
갖고 다니는 – 천재였다.
래리가 연주를 시작했고, 아주 놀라운 사운드였다. 에지는 내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코드를 갈겼다. 굉장히 열려 있었다는 얘기다. 주변에 있던 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여자 애들도 다. 걔들은 래리가 거기에 사는 걸 알고 있었고, 소리 지르고
문짝을 기어 올랐다. 우린 래리가 항상 이래왔단 걸 알아 챘다. 그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한달도 안 되서 난 알리(보노의 부인)와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그녀를 알긴 했지만, 사귀기 시작했단 말이다.
Q: 아주 일진이 좋은 달이었던 것 같다.
물론이다. 아주 좋았다. 재미있는 건 그로부터 몇달 되지도 않아서 내 인생의
최저점에 도달했단 거다. 나는 아주 십대적인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계속 살고
싶은지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듣는지 마는지도 모르는 신에게 기도나
하고 있었다.
Q: 그러고 나서 펑크 락에 영향을 받은 건가?
아니다. 이건 펑크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76년 9월의 얘기다. 펑크는 그해
여름에 막 태동한 터였다. 애덤이 그 다음 여름에 런던으로 갔다. 그때 런던은
난리도 아니었다. 애덤은 스트랭글러스(주: U2의 매니져 폴 맥기니스가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밴드), 더 잼, 클래쉬 등의 레코드를 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것과 별개로,
이상하게도 우린 첫 리허설에서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모두가
의견을 말해야 했는데, 난 롤링 스톤즈의 High tide and green grass 시절부터의 곡들과
비치보이스를 하고 싶었다. 난 하드락 같은 것에 지겨웠다.
Q: 하드락이라면?
부풀어 오른 헤어스타일과 엄청 긴 솔로 같은 것 말이다. 난 “이런 락앤롤로
돌아가자" 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말했다, “오, 너 클래쉬는 들어봤어?”
그러고 나서 76년에 더 잼이 Top of the pops 를 냈을 때 “쟤들은 우리 또래잖아!
이건 가능할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지역 펑크밴드였던 Radiators
From Space 라는 애들이 Telecaster 이던가 하는 노래를 했다. 12마디 패턴이었는데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Q: 당신은 그 무렵 밴드에 대한 몰입이 어느 정도됐나?
우린 그냥 대강 연습이나 하고 그랬다. 이글스나 무디 블루스 같은 걸 연주했다.
하지만 좀 해보니까 우리가 개판이란 걸 깨달았다. 우린 실제로 남들의 노래를 연주할
수가 없었던 거다. 스톤즈 곡중에 Jumpin’ Jack flash 를 해봤는데 못 들어 줄
수준이었다. 그래서 우리만의 곡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더 쉬웠다.
Q: 라몬즈가 당신들에게 펑크 밴드로서 큰 영향을 미쳤나? 아니면 클래쉬?
클래쉬 보단 라몬즈다. 우리가 먼저 봤던 건 클래쉬지만. 77년 더블린에서 봤는데,
정말 엄청났다. 아주 폭력적인 분위기와 누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라몬즈의 것만큼 우리에게 꽂히진 않았다.
Q: 어떤 식으로 라몬즈에게 꽂혔나?
개인적으로 조 스트러머에겐 별 흥미가 없었다. 조이 라몬은
더스티 스프링필드처럼 노래를 불렀다. 내 목소리와 비슷한 멜로딕한 보이스였다.
Q: 데이빗 보위에게도 큰 영향을 받았나?
엄청나게. 그는 영국의 엘비스다. 그는 펑크의 미학적인 부분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난 내 방에 그의 사진을
걸어 놨다. 우리가 처음으로 웨딩 밴드를 했을 때 Suffragette City 를 연주했었다.
우린 패티 스미스를 듣기 시작했다. 에지는 탐 버레인을 듣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순간에, 펑크 코드만이 유일한 대안이 아니란 걸 알았다. 우린 남들이 다 하고 있는
것과 다른 종류의 음악적 언어와 색깔을 찾기 시작했다.
Chapter III. 영적인 삶
Q: 종교가 당신의 어린시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우리 어머니는 신교도였음에도
카톨릭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 둘의 구분이 심한 때였기 때문에,
우리가 특별하단 걸 알았다. 그 때문에 우린 동네에 있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곳으로 갔다. 부모님들이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가져야 했던 용기를 느꼈다.
Q: 교회에 가면 종교적인 느낌을 받았나?
그때도 난 교회 안에서 보단 밖에서 더 많은 기도를 했다. 그건 결국 내가 듣던
노래들에 대한 얘기로 되돌아 온다. 내가 듣던 노래들은 나에겐 기도같았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하는가?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가사)”는 나에게 그냥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그건
신에게 묻는 거였다. 그건 내가 답을 알고 싶어했던 질문인데, 난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학교 선생에게 물을 건 물론 아니었다. 존 레논이 “오, 나의 사랑,
내 인생 처음으로 내 눈이 크게 뜨였습니다 (Oh, my love 가사).” 를 불렀을 때,
이런 노래들이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혹은 육체적인 관계만 의미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그건 정신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Q: 그 시점에서 신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나?
잘 모르겠다. 교회에선 이런 질문을 잘 안 받으니까. 난 교회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걸 본다. 아주 가끔씩은, 성가를 부를 때 내 안의 뭔가 꿈틀 대는 게
느껴지기는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난 종교에 크게 신경쓰진 않는다.
Q: 당신의 초창기 노래에는 혼란스러움이나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게 많다.
보통 그 나이 때는 여자나 그 여자와의 트러블에 대한 거나 쓸 텐데.
맞다. 우린 그런 얘기는 좀 다른 방식으로 했다.
Q: 당신은 I want to hold your hand 같은 노래의 단계를 그냥 지나치고 곧 바로…
(주: 비틀즈는 초창기 평범한 사랑 노래를 통해 아이들로 급부상했으나,
중기 이후 실험적이며 철학적인 모습으로 변신해 아티스트로 진입했다)
...곧 바로 신비적인 것으로 뛰어든 거다. 밴 모리슨 같은 경우는 그 반대지만.
그 땐 정신적으로 휘몰아치는 15, 16살때였다.
구기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부모님들은 그냥 보통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다.
무슨 이상한 컬트적인 신교도들이었다. 미국으로 치면 오순절 교회같은 거. 그의
아버지는 구약성서에서 튀어나온 사람같았다. 그는 항상 성경에 대해 얘기했고, 종말이
멀지 않았으니 준비하라고 했다.
Q: 그런 사람들이랑 살았나?
그렇다. 그들과 교회도 같이 갔던 것 같다. 나랑 구기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비웃긴 했지만, 교회에서 하는 멋진 말에는 끌렸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풍부한 언어와 고대의 지혜로운 이야기들에.
Q: 그래서 그게 19살에 그토록 심각한 노래들을 쓴 이유인가?
이상한 얘길 하나 하겠다. 흑인음악과 함께 자란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영혼의
세례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런 사람들은 신 앞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그런 것에서 등을 돌려야 했고, 그래서 락앤롤은 타락한 음악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신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난 그런 것들이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으로 선택해야 하는 대상이라 보지 않았다.
Q: 악마의 음악이라는 락앤롤이 종교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지 않았다?
나의 상상력을 만들어준 사람들을 보라. 밥 딜런은 1976년에 비슷한 얘길 하고 있었다.
패티 스미스의 Horses 를 사 봐라, “예수는 누군가의 죄를 위해 죽었다. 그러나
그 죄는 내것은 아니다” 라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밴 모리슨의 Gloria 를 성가로
바꿔 버린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악마와 기독교와 씨름을 하고 있던 거다.
날 정말 흥분시킨 음악은 신에게 이끌어주는 것과 신에게서 도망가는 것 양쪽 모두였다.
양쪽 다 신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는 걸 알았다. 블루스는 신에게서 도망가는 쪽이고,
가스펠은 신에게 이끌어주는 것이다.
Q: 그리고 당신은 나중에 그걸 분석하고 알아낸 걸로 보인다.
블루스는 (다윗의)시편같다. 다윗이 노래를 부른다, “신이여,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어디 계십니까? 그러고도 당신 스스로 신이라 하십니까?”. 바로 이게 블루스다.
난 그런 식으로 신에게 화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Pop 앨범에 그것에 관한 노래도 있다.
사람들이 많은 혼란을 느꼈던 Wake up dead man 이다. “예수여, 도우소서. 난 이 세상에서
혼자입니다. 그리고 이 망할 세상도 마찬가지. 나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영원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일어나시오, 죽은 자여.”
Q: 그로부터 얼마 후에, 당신과 래리와 에지는 성경공부 그룹에 참여했다.
그건 어떤 것이었나?
우린 더블린의 거리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더 미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은 마치 1세기 시민공동체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초창기 기독교의
후계자같은 거였다. 그들은 열정적이고, 재미있었고 아무런 물질적 욕심이 없는 듯 했다.
그들의 성경에 대한 가르침은 예전에 구기 주변에 있던 녀석들을 생각나게 했다.
되돌아 보면, 그건 만족할 줄 모르는 지적인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좀 압박감이 들었다. 일종의 신성한 짝패들같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영적인 가르침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우리의 옷이나 외모가 괜찮은 척 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듣는 음악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귀걸이는 왜
하고 다니냐, 왜 모호크 말을 가지고 있냐 등등.
Q: 어떤 식으로 그들을 떠났나?
우리가 투어를 가게 되면서였던 것 같다.
Q: 그리고는 돌아가는 걸 까먹고?
음, 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려면 세상을 부정해야 했다.
그 나이때도 우린 어떤 짓을 해도 현실에서 도망갈 수 없단 걸 알았다. 특히나 그런
열렬한 종교집단을 통해서는. 그런 것은 외부의 압력보다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박감에 의해 오히려 더욱 타락하고 왜곡될 수 있다.
Q: 마틴 루터 킹에게 그렇게 강렬히 끌린 계기는 무언가?
1980년으로 넘어간다. 기독교적인 부활의 불길을 지나온 아이리쉬 락 밴드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도착한 날 밤에 티비를 틀자, 성경에 대해 떠들어 대는 수많은 사람들을 봤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미친 사기꾼에 불과한 게 너무나 뻔했다. 이게 뭐야라고 하며 채널을
돌리자 또 다른 비슷한 놈들이 나온다. 환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결국 우리가 하고 있는 말과 매우 흡사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닥치는 법을 배웠다. 이게 다 뭐야하고 생각하지만 계속 조용히
있는 거다. 거기서 그런 말을 하면 결국 그런 놈들이랑 똑같이 보이니까.
그러다 흑인 교회에 가서 보니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는
사회적 정의를 동반하고 있었다. 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믿고 있던
롤링 스톤지 기자 짐 헨크가 킹 목사의 전기인 “트럼펫이 울리게 하라
(Let the trumpet sound)” 를 건내준 것이다. 그게 내 인생을 바꿨다.
내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지만, 아직도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건 쉽지 않다. 그들은
내 신경을 거슬러서 조심하게 된다. 하지만 흑인 교회에 있으면 아주 편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을 데려갈 수도 있고, 음악과 노래가 있다.
Q: 지금 당신의 종교는 어떠한가? 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간단히 말하자면, 난 세상에 사랑과 논리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사랑의 힘과
만물에 숨겨진 논리. 그리고 그런 추측할 수 없는 힘을 가난한 집 아이의 탄생으로
표현해 낸 창조자의 시적인 천재성을 믿는다. 예수의 이야기는 내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Q: 어떤 식으로 설득력이 있나?
아티스트로서 그것의 시적인 측면을 본다. 그건 정말 뛰어나다. 그런 창조력의 스케일,
예측할 수 없는 우주는 스스로를 아이의 나약함으로서 묘사했어야 하는 것 이다. 내가
보기엔 정말 죽인다. 그런 걸 보면 날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살기엔
너무 힘들어서 기독교 딱지를 붙이진 않지만, 난 내가 최악의 기독교인 샘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냥 닥치고만 있는다.
Q: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종교적 행위들을 하는가?
난 그런 기도같은 걸 위해 매일 시간을 내려고 노력한다. 성당에 가면 정말로 평온해짐을
느낀다. 나는 또한 내 주변의 무신론자인 친구들과 그들이 믿지 않기 위해 갖는 용기를
존경한다.
Q: 곡을 쓸 때 성경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나?
어떤 식으로 그것의 심상이나 아이디어를 끌어다 쓰는가?
그것은 나를 지탱해 준다.
Q: 믿음으로서? 아니면 문학적인 면으로?
믿음으로서다. 그런 것들은 논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주제인데, 병신처럼 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난 의지할 구석이 필요한 종류의 인간이고, 절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의
주변에 있고 싶다. 난 내 집을 바위 위에 짓고 싶다. 왜냐면 물이 그렇게 높이 차오르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가 태풍을 몰고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에게 일종의
받침돌같은 구실을 한다.
난 그걸 역사서적으로 보지 않는다.“이것 참 좋은 충고군" 이라는 식으로 읽지 않는다.
그냥 그게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도록 놔 둔다. 이런 걸 rhema 라고 부르는데
번역하기가 애매한 그리스 단어다. 대략 무언가가 당신이 살고 있는 순간을 바꾼다는
뜻인데, 성경이 내게 그런 걸 하는 것 같다.
Q: 그게(성경이) 살아있다는 말인가?
그건 내게 정확한 선같은 것이다. 성경을 보면,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가 어떤 곳에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는 투명한 연못이라고 스스로 묘사하고 있다. 난 지금
“순례자와 그의 수행 부족 (The Pilgrim and His Lack of Progress)” 라는 시를
쓰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홍보에 도움이 될진 모르겠다.
Q: 요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신교정통파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난 행동하지 않는 믿음을 경계한다. 바깥 세상에 무관심한 종교를 경계한다. 2001년,
단 7% 의 신교정통파 성직자들만이 그들이 에이즈 문제에 나서야한다고 설문에 응답했다.
난 거기에 충격을 받았다. 난 가능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모임을 갖을 수 있도록
요청했다. 난 그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성경에 대한 지식을 동원했다. 그 시절의
문둥병과 그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뭔가를 빨리 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이 이 세상에서 하던 일의 반대편에 서게 될 것이라 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반응을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실제로 행동을 한 것이다.
Jesse Helms 는 공공연히 에이즈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생각들을 반성했다.
난 이 공동체를 미국의 진정한 자산으로 보기 시작했다. 난 그들을 ‘소심한
이상주의자들'이라 칭했다. 만약 그 이상주의의 반경을 넓혀줄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려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의미있는 것이 되길 원한다.
to be continued...
다음편 예고
IV. 정치적 깨달음
V. 명성, 밴드, 무대
VI. 딜런, 스프링스틴, 재거
첫댓글 감사합니다~~ 너무 잘봤습니다.. 보노도 역시 평범한 (약간은 껄렁한 ㅎㅎ) 십대였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굿샷.
오..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보기보단 인생 험하게 사셨구나 왜 그렇게 썬글라스를 끼고 다니는지가항상 궁금했는데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