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사전 장례의향서”]
찬미예수님,
지난 주일“연도회”월례회가 있었다.
새로 단장된 강당에서 연도회를 했다.
벽면 처리와 천장 선택이 탁월하였고, 또하나의 성전을 접한 느낌이였음은 나혼자만의 행복은 아니였을거다.
어느 상가에서 가족들의 분분한 의견 때문에 장례를 치르는데 애태우신 신부님께서
내가 원하는 나의“사전장례의향서”를 작성하실 요량으로 찬찬히 설명을 해주셨다.
내가 원하는 나의“사전장례의향서”그것은? 요즘 노인들에게 폭발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는데,
즉! 본인이 죽으면 이러한 ‘장례용품’으로 이러한 절차로 장례를 치러 달라는 부탁을 “연도회”와 가족에게 남기는 글이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의논하시고 다음 달 총회까지 제출하시라 신다.
어르신들은 종이를 받아들고 “웅성웅성” 떠드셨는데, 그 구여우심이 시험지를 받아든 초등학생을 연상케 했다.
제각기 한마디씩 하심을 내가 엿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소리의 어르신들 탓이다.
성직자는 염을 않는다더라!
난 염을 안 할 거야! 그대로 화장할 거야! 난 수의대신 입던 삼베옷을 입을 거야!
난 염습 때 둘러서서 훌쩍이며 구경하듯 하는 게 싫어! 등등
사실 그렇게 의사표시를 하실 수 있고 주장을 글로서 남길 수 있음도 축복이다.
정신이 흐려 판단력이 흐리면 또 엉뚱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사후에 가족들도 함께 작성된 그것은 존중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있고 죽음을 주제로 토론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있을까?
죽음이라는 말은 함부로 다룰수 없고, 섬뜩해서그런지 왜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꺼릴까?
심지어 중환자는 친지나 이웃들도 별로 반기지 않고, 병문안 시 진정성도 보이지않는다. 환자가 모를리 없다.
얼마나 섭해할까? 죽음은 옮는병도 아닌데...
우리는 나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의 목숨이 다함을, 정말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에이 그런 예긴 하지말자! 경망스럽다, 예우가 없다... 등등
아이들에게 인성교육과 성교육, 그리고 출산교육도 하는데, 인생살이 가운데 아주 자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왜 꺼리는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죽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말에도 동의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에도 반론을 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인데! 외교인들은 그런지 몰라도... 세상은 항상 바뀌어 가고 있고 요즈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위에 보면 많은 이들이 죽음을 생각하고 또 준비한다. 특히 4대 교리를 믿는 가톨릭신자는 더 잘 준비하는 것 같다.
“죽음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천국은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이다” 라고 하며..
마무리를 잘 한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하는 것이며, 믿는이들 로써도 마땅히 준비해야 하고,
또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드릴 수 있도록 신앙으로 무장하여 외교인과 차별 나게도 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나도 회원이지만 아직 젊다. 난 어떠한 형태로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이승에서의 마무리를 잘 해야 남은 이들이나 성현들이 이쁘게 바라보실까?
아직 첫 글자도 적지 못하고 ‘의향서’를 가만히 내려놓고 생각중이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맑을 때, 본인의 ‘장례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게 배려해주신, 자상하신 신부님께 감사함을 느꼈다.
아멘!
첫댓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네요
어쩔땐..기쁠거 같고
어쩔땐 슬플거 같고...
자식만 아니면...기쁜길..
좋은 방법이네요
난 무서워! 벌 벌!, ,,ㅎ
신부님 참으로 신선한 발상입니다.
우린 죽음이 전혀 낯선 세상이라 생각하지요.
언제쯤이나 나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될른지요
고맙습니다. ㅎㅎ
요즘 폭발적으로 노인들께 인기랍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길
그럼에도 피하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내 일이 아닌 듯...
두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