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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생이 현덕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매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거의 방 하나에 부엌이 한 칸, 마당이랄 것이 곧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같은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잿더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 깨어진 사기 요강이 굴러 있는 토담 양지짝에 누더기가 널려 한종일 퍼덕인다.
냄비 하나와 사기 그릇 몇 개를 엎어 논 가난한 부뚜막에 볕이 들고, 아무도 없는가 하면 쿨룩쿨룩 늙은 기침 소리가 난다. 거푸 기침 소리는 자지러지고 가늘게 졸아들더니 방문이 탕 하고 열린다. 햇볕을 가슴 아래로 받으며 가죽만 남은 다리를 문지방에 걸친다. 가느다란 목, 까칠한 귀밑, 방 안 어둠을 뒤로 두고 얼굴은 무섭게 차다.
"노마야―"
힘없는 소리다. 대답은 없다. 좀더 소리를 높여 부른다. 세 번째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악성을 친다. 역시 대답은 없다. 다시금 터져 나오는 기침에 두 손으로 입을 싼다.
길 하나 건너 영이 집 토담 밑에서 노마는 그 소리를 곰보 아버지가 곰보를 부르는 소리로쯤 들어 넘기고 만다. 마침 영이가 부엌문 옆에 붙어서서 손을 뒤로 돌려 숨기고,
"이거 뭔데."
조금 전 영이 할머니가 신문지에 떡을 사들고 들어간 것과 영이가 투정을 하던 것까지 아는 일이니까, 노마는 그 손에 감춘 것이 무언지 의심날 게 없는 터다. 그러나,
"구슬이지 뭐야."
"아닌데 뭐."
"물부리지 뭐야."
"아닌데 뭐."
"석필이지 뭐야."
"이거라구."
마침내 영이는 자신이 먼저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하고 턱밑에 인절미 한쪽을 내민다. 금세 노마는 어색해진다. 두어 번 어깨를 젓더니 슬며시 뒷짐진 손이 풀려 받는다.
영이보다 먼저 먹어 버리지 않을 양으로 적은 분량을 잘게 씹어 천천히 넘기며, 차츰 노마는 곰보를 부르던 소리는 기실 아버지가 저를 부르던 음성이던 것을 깨달아 간다. 그러나 일부러 대답지 않은 그 일이 목을 넘어가는 떡맛보다 더 고소하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하는 반항이다. 날마다 아침에 집을 나갈 때 어머니는 노마에게 이르는 말이 있다.
"아버지 곁에서 떠나지 말고 시중 잘 들어라. 아버지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 말은 어머니 자신이 할 일이지, 노마가 할 일은 아니다. 자기가 할 일은 노마에게 맡기고 어머니는 한종일 좋은 데 나가 멋대로 지내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온다. 그 동안 아버지나 노마가 얼마나 자기를 기다렸던 거나 그 하루가 얼마큼 고초스러웠던가는 조금도 아랑곳하려고도 않는다. 다만 봉지에 저녁 쌀을 가지고 온 것이 큰 호기다. 그리고 바람에 문풍지가 떨어진 것까지 노마의 잘못으로 눈을 흘긴다. 실로 야속하다. 이런 어머니가 이르는 말쯤 어기었기로 그리 겁날 것이 없다.
그러나 노마 저는 모르지만 여기엔 자기네답지 않게 어머니만이 인조견이나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며 선창에 나가 많은 사람에게 귀염을 받는 것에 대한 반감과 샘이 크다. 어머니는 이른바 '항구의 들병장수'다.
노마는 이런 어머니를 보았다. 몰래 어머니의 뒤를 밟아 선창엘 갔었다. 그러다 선창 마당 가운데서 어머니를 잃었다. 다시 찾았을 때 노마는 좀더 놀랐다. 목선 쌓아 올린 볏섬 위에 올라앉아서 어머니는 사오 인 사나이들과 섞여 희롱을 하고 있다. 어깨에 팔을 걸고 몸을 실린 조선 바지에 양복저고리를 입은 자에게 어머니는 술잔을 입에다 대주려 하고 그자는 손바닥으로 막으며 고개를 젓고 그리고 술을 받아 마시고 나서 또 빈 잔에다 술병 아가리를 기울이는 어머니를 제 무릎 위에 앉히려 하고 아니 앉으려 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어머니를 중심으로 희희낙락하는 것이었다.
노마는 그런 어머니를 전혀 꿈에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그곳에 와서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떨고 일찍이 노마 자신도 한번 받아 보지 못한 귀염을 뭇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닌가. 자기 어머니가 그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노마는 저도 갑자기 흥이 오르는 듯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저와 어머니의 관계를 크게 알려 주고도 싶었다. 노마는 어머니를 불렀다. 두번 세번. 그러나 햇볕을 손으로 가리고 지그시 노마를 보던 어머니는 점점 자기 집 부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그러진 얼굴로 변했다. 같은 얼굴로 어머니는 노마를 창고 뒤로 끌고 가 말없이 머리를 쥐어박는다.
이런 때 등뒤로 배에 있던 양복저고리가 나타나서 좋았다. 그는 어머니를 안아 뒤로 밀고, 양복저고리에서 밤을 꺼내 노마 머리 위에 흘려 떨어뜨리며 웃었다. 붉은 얼굴에 밤송이 같은 털보였다. 집에 있을 때 어머니는 담벼락같이 말이 없고 간나위가 없다. 노마를 나무라도 말보다 손이 앞서 소리 없이 꼬집거나 쥐어박거나 할 뿐, 언제든 성이 안 풀려 몽총히 입을 오므린다. 남편이 부르면 대답은 없이 얼굴만 내놓는다. 그를 대하고는 아버지도 멍추가 된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내가 보는 데서는 일부러 더 앓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고 눕거나 이불을 들쓰고 될 수 있는 대로 아내에게서 눈을 감으려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나가고 없으면 일어나 앉아 이불도 개올리고 노마를 상대로 이야기도 한다.
"노마야 노마야."
가랑잎이 다그르 굴러내리며 지붕 너머로 아버지의 가느다란 음성이 넘어온다. 방 안에서 들창을 향해 부르는 소리리라. 노마는 살금살금 앞으로 돌아간다. 필시 요강을 가시어 오라고 창문 밖에 내놓았을 것이니 살며시 부시어다 들고 갈 작정. 왜냐하면 노마는 요강을 가시느라고 지금까지 가래를 한 것이지, 결코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는 변명을 삼으련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는 요즈음으로 노마를 곁에서 잠시라도 떠나지 못하게 한다. 오줌이 마려워 일어서도 벌써 '어디 가니' 그리고 영이하고도 놀지 말고 아무하고도 놀지 마라, 만날 아버지와 같이 방 안에만 있어 달라는 거다. 그러니까 노마는 아버지가 잠드는 틈을 엿보지 않을 수 없고, 그러나 잠이 깨기 전에 돌아와 앉기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흔히 날벼락을 맞는다.
노마는 앙가슴을 헤치고 볕을 쪼이고 앉았는 아버지와 마주친다. 갈가리 뼈가 드러난 가슴이다. 그 가슴을 남에게 보이는 때면 공연히 화를 내는 아버지니까 노마는 또 한 가지 죄를 번 셈이다. 지레 울상을 하고 손가락을 입에 문다.
"노마야, 이리 온."
그러나, 고개를 쳐들게 하고 코밑을 씻기더니,
"저리 가, 앉어 봐라."
비탈을 찍어 판 손바닥만한 붉은 마당에 오지항아리 몇 개가 섰고, 구기자나무 그림자가 짙은 한편은 볕이 당양하다. 아들을 땅바닥에 주저앉히고 아버지는 묵묵히 바라다보기만 한다. 장독 뒤로 한 포기 억새가 적은 바람에 쏴쏴 하고 어디서 귀뚜라미도 운다. 몰랐더니 여기는 흡사 고향집 울 안 같은 생각이 났다.
추석 가까운 날 맑은 어느 날 어린 노마가 양지짝에 터벌거리고 앉아 흙장난을 하는 그런 장면인 성싶은 구수한 땅내까지 끼친다. 지금 아내는 종태기에 점심을 담아 뒤로 돌려차고 뒷산으로 칡넝쿨을 걷으러 갔거니―---
"노마야, 너 절골집 생각나니."
"응."
"너두 가보구 싶을 때 있니."
"응."
밭 가슬에 주춧돌만 남은 절터가 있는 작은 마을이 있다. 묏갓에는 나무가 흔하고 산답이나마 땅이 기름지고, 살림이 가난하다 하여도 생이 욕되지는 않았고 대추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밤참으로 배불렀었다. 다 고만두고라도 거기는 너나 사정이 통하고 낯이 익은 이웃이 있고 길가의 돌 하나 밭둑길, 실개천 하나에도 어릴 때 발자국을 볼 수 있는 땅이다.
그러나 몇 해 전은 지금 여기서처럼 진절머리를 내던 그 땅이었고 그때는 지금처럼 이 잘난 곳을 못 잊어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그때 영이 할머니의 편지를 믿는 구석이 없었더면 그처럼 단판 씨름으로 지주가 보는 앞에서 마름 김오장의 멱살을 잡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 덕에 나머지 작인들은 지주에게서 나오는 비료대도 제대로 찾아 먹을 수도 있었고, 예외 없이 마름집 농사에 품을 바치는 폐단도 면하였지만, 자기는 그 동티로 이내 땅을 뜯기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편지 사연대로 쉽게 좇기 위하여 일부러 자기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려고 한 짓 같기도 하였다.
'선창 벌이가 좋아. 하루 이삼 원 벌이는 예사고 저만 부지런하면 아이들 학교 공부시키고 땅섬지기 장만한 사람도 적지 않다.'
이 말을 다 곧이들은 것은 아니지만 땅 없이는 살 수 없는 살림이요, 그 꼴을 김오장에게 보이기가 무엇보다 싫었다. 하기는 처음 떠나온 얼마 동안은 그 말이 사실인 성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선창에 나가 소금을 져나를 때도 그렇다. 이백 근 들이 바수거리를 짊어지고 도급으로 맡은 제 시간 안에 대느라고 좁다란 발판 위를 홑몸처럼 달음질치는 일을 닷새 이상을 붙박이로 계속하면 장사 소리를 듣는다는 고역을 노마 아버지는 남우세 없이 꿋꿋이 배겨 냈다. 본시 부지런한 것이 한 가지 능으로 감독의 눈에 든 바 되어 매일 일을 얻을 수 있던 노마 아버지라, 자기말고도 얼마든지 곬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배고픈 얼굴들에 위협이 되어서뿐만이 아니다. 영이 할머니의 편지에 말한 바 아들 자식 학교 공부시키고 땅섬지기 장만하려는 애초에 고향을 떠날 때 먹은 결심이 광고판처럼 눈앞에 가로 걸려 악지를 썼다.
그러나 그 아들놈에게 학생 모자 하나를 사주겠다고 벼르기만 하면서 노마 아버지는 먼저 몸이 굴했다.
점점 배에서 뭍 위로 건너가는 발판이 제게 한해서만 흔들리는 것 같고, 그 아래 시퍼런 물이 무서워졌다. 아래서 쳐다보이는 허연 산 소금더미가 올라가기 전에 먼저 어마어마해 기가 질렸다. 무릎에 손을 짚어야 하게쯤, 허리는 오그라들고 걸음은 뒷사람의 길을 막고 핀잔을 맞는다. 밤에는 식은땀에 이불이 젖고 밭은 기침이 났다.
마지막 되던 날 그는 전일 하던 대로 소금더미 위로 올라서서 부삽으로 가리키는 장소에 기우뚱하고 한편으로 몸을 꺾어 소금을 쏟는 동작에서 그는 몸을 뒤채지 못하고 그냥 엎으러져 두어 간통 씨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몸에 조그만 상처도 없으면서 그는 전신의 맥이 탁 풀려 사지를 가둥거리지 못했다. 한 자가 장난처럼 팔을 잡아채는 대로 허청으로 몸을 실리었다. 그리고 노마 아버지는 이내 선창과 연을 끊었다. 몸살이거니 하고 며칠만 쉬면 하던 병은 점점 골수로 깊어 갔다.
"노마, 너 소금 선창에 나가 봤니."
"응."
"중국 호렴배 들어찼디."
"응."
"소금 져나르는 사람 들끓구."
"응."
잠시 노마를 내려다보던 추연한 얼굴이 흐려지더니,
"보기 싫다. 보기 싫여, 저리 가거라."
자기가 먼저 발을 들어 구중중한 방 안으로 움츠러들이자, 방문을 닫는다. 그러나 조금 후 노마를 불러들인다. 아버지는 잔말이 많다.
"영이 할머니 집에 있디."
"응."
"영이두."
"있어."
"뭘 해."
"놀아."
"너두 놀았지."
"……"
"바가지 목소리 숭내내는 놈 누구냐."
"수돗집 곰보라니까."
"그놈 어디 사는 놈인데."
"수돗집 살어."
"수돗집이 어디지."
"……"
어제도 그제도 묻던 소리를 또 묻는다. 바가지는 성이 박가래서 부르는 별명만이 아니다. 주걱턱인데 밤볼이 지고 코까지 납작하고 빤빤한 상이 바가지 같다. 그는 홀아비다. 노마 집에서 지붕 둘 높이로 올라앉은 움집, 쪽 일그러진 문엔 언제나 자물쇠가 채워 있다. 그는 두루마기 속에 이발 기계를 감추어 차고 선창으로 나갔다. 커다란 구두를 신고 그것이 무거워 그러는 듯이 뻗정다리로 질질 끈다. 그러나 선창에 나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머리 깎을 자를 끌어내는 수는 용하다. 그럴듯한 사람이면 꾹 찍어 창고 뒤, 잔교 밑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채를 벌인다. 그는 막 깎는 머리 이상의 기술은 없다. 그러나 오 전 십 전 주는 대로 받는 이것으로 객을 끈다. 그는 남에게 반말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대신 저도 남에게 허우 이상의 말을 쓰지 않는다.
팔짱을 찌르고 직수굿이 머리를 맡기고 앉았는 검정조끼 입은 자는 이발 기계를 놀리는 바가지에게 말은 건다. 노마 어머니 얘기다.
"털보는 뭐여! 그게 본서방인가."
"본서방이 뭐유, 생때 같은 서방은 눈을 뜨고 앉었는데, 뭐 하나뿐인 줄 아슈. 선창 바닥에 잡놈이란 잡놈은 모두지."
"자넨 그 여자하구 장가든다면서 정말여."
"흐흐흐흐."
그러나 바가지와 노마 어머니는 사이가 옹추다.
배방장 밖에 남자 고무신에 하얀 여자 고무신만이 놓여 있을 바엔 묻지 않아도 알 일이로되―--- 바가지는 체면을 모른다. 하늘로 난 문을 구둣발로 찬다.
"어물리 김서방 예 있수."
저도 사나이에게 볼일이 있다는 것이지만, 머리 깎을 사람을 인도해 가는 곳이 가마 곳간 구석, 떡집 뒤 의지간 같은 노마 어머니가 자리를 잡았을 듯한 장소를 골라 다니며 헤살을 놓는 데는 좀 심하다. 또 짓궂은 자는 일부러 바가지를 그런 곳으로 들여보내기도 한다.
"저리 야깡집 뒤로 돌아가 보슈. 누가 머리 깎으러 오랍디다."
남들이 킥킥킥 웃음을 죽이는 장면에 바가지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 돌아서 나온다. 그러나 어색한 것은 사나이다.
"없네 없어. 누가 좋아서 먹은 술인가베, 억지로 떠너서 먹은 술 값 거 너무 조르는데."
여자를 으슥한 곳으로 이끌던 같은 방법으로 사나이는 조끼 주머니를 움켜쥐고 겅정겅정 놀리듯 떨어져 간다.
"날 좀 보슈. 날 좀 보슈."
노마 어머니는 후장걸음으로 따라가다는 남자가 마당 군중 가운데 섞이자 멈춘다. 볏섬을 진 자, 떡목판을 벌이고 선 자, 지게를 벗어 놓고 걸터앉은 자, 노마 어머니를 둘레로 적은 범위의 사람이 음하게 웃을 따름 그리 대수롭지 않다.
현장에서 좀 떨어져 노마 어머니는 바가지의 앙가슴을 움켜잡는다.
"넌 나허구 무슨 대천지 원수루 남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장사허는 데 헤살이냐. 이 요 반병신아."
"헤살은 누가 헤살여, 임자가 헤살이지. 임자만 장사구, 난 장사 아닌 줄 알어." 옳거니 그르거니 옥신각신하다가 종말은,
"난 허가 없이 머리를 깎어 주구 임자는 허가 없이 술을 팔구. 헐 말이 있거든 저리 가 헙시다. 저리 가 해."
우마차가 연달아 먼지를 풍기며 가는 큰길 저편 끝 수상경찰서 지붕을 머리로 가리킨다. 하기야 피차가 크게 떠들지 못할 처지다.
때로는 털보가 사이를 뻐기고 들어서 남자의 멱살을 잡고 민다. 마찻길을 피해 담뱃가게 옆으로 밀고 가 넉장거리로 땅에 눕힌다. 허리에 손을 걸고 내려다보고 섰다가 허위적거리고 상체를 일으키면 발로 툭 차 눕히고 눕히고 한다. 둘레에 아이들이 모이고 제 행동이 남의 눈에 표가 나게쯤 되면, 좌우를 돌아보며 털보는 변명이다.
"대로상에서 젊은 여자의 멱살을 잡고 이눔 병신이 지랄한다고 쌍스러 그 꼴은 보구 있을 수가 없거든."
그곳 마당지기 앞잡이 노릇으로 그렇지 않아도 세도와 주먹이 센 털보다. 그와는 애초에 적수가 안 된다. 얼음에 자빠진 쇠눈깔 그대로 바가지는 그만 맥을 놓는다.
그러나 바가지는 노마 어머니에게 앙가슴을 잡힐 때처럼 복장이 두근거리는 때는 없고 그가 자기 아닌 딴 사나이와 가까이하는 것을 보는 때처럼 쓸쓸한 때는 없다. 그럼 노마 어머니에게 바가지는 정을 두는 거라 할 터이나 뻔히 저도 남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상대고 보니 한번 얼러라도 볼 것이로되 그렇지 않다. 다만 이런 날이면 술을 마시는 거고 술이 취하면 으레 노마 아버지를 찾아가 앞에 앉는다. 끄물끄물 침침한 등잔불 아래다. 앉은 키는 선 키보다 음전하고 그래도 노마 아버지에게 비하면 바깥 바람에 닦여난 생기가 있다. 무릎 사이에 턱을 괴고 우그리고 앉았는 그 앞에서만은 새끼 같은 팔목도 홍두깨만큼 실해지는 모양. 바가지는 연해 가냘픈 팔뚝을 걷어 올린다.
"내 얼굴이 어떠우. 눈이 없수 코가 없수. 남 있는 거 못 가진 거 없지. 노마 아버지 보기두 나 병신으로 보이우."
하고 바가지 같은 상판을 더 그렇게 보이게 다그쳐 든다. 한편으로 불빛을 받고 검붉은 얼굴은 그럴듯이 험하다.
"헐 수 없어 머리는 깎어 줘두, 그눔 뱃놈들보담야 뭘루두 기울 것 없는 나유."
'그렇잖소' 하고 방바닥을 탁 붙이었던 손바닥으로 다시 제 가슴을 때린다. 같은 짓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그래도 부족해서,
"뭐 돈벌이를 남만 못 하우. 외양이 병신유."
"그렇지, 그래."
노마 아버지의 건성으로 하던 대답이 나중에는,
"아, 그렇다니깐두루."
하고 퉁명스러진다. 그래도 바가지는 만족지 못한다. 보다 확적한 대답이 듣고 싶어서 또 그렇찮소, 급기야는 뒤를 보러 가는 척 노마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 서성거린다. 그러나 바가지는 얼마고 직수굿이 머리를 숙이고 기다리고 앉았다가는 또 가슴을 때리었다.
이 동네 아이들은 제법 눈치가 빠르다. 골목으로 꼽쳐 돌아서는 노마 어머니 등뒤를 향해 바가지의 음성 그대로를 흉내낸다.
"내 얼굴이 어때여. 눈이 없나 코가 없나. 털보 그놈보다 못생긴 게 뭐여."
수돗집 곰보가 선봉이다. 노마 어머니 모양이 멀찍이 사라지자, 다른 아이들도 여기 합한다.
"다리는 뻗정다리라두 머리 기계만 잘 놀리구 돈 잘 벌구 술 잘 먹구."
털보는 때로 노마 집으로도 왔다. 검정 모자를 눈을 덮어 눌러쓰고 턱을 쳐들어 밖에 서서 방 안으로 둘러보며 서슴는다. 모양으로 주름살이 억척인 다듬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양복저고리. 방 안에 들어와서도 그는 모자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랫목에 도사리고 앉았는 노마 아버지에게 하는 조심이리라. 곧 돌아갈 사람처럼 엉거주춤 발을 괴고 앉았다. 슬며시 노마 아버지는 몸을 일으킨다. 침을 뱉으려는 것처럼 허리를 굽혀 방문 밖에 머리를 내놓더니, 발 하나가 나가 신발을 더듬자 객은 주인을 붙든다.
"쥔, 어딜 가슈. 같이 앉어서 노시지 않구."
"요기 좀 갈 데가 있어서 편히 앉어서 노슈."
그러나 털보는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에 요를 엎어 깔고 다리를 뻗고 앉는다. 그는 두루마기를 벗고 노마 어머니는 소반 귀에 촛불을 붙인다. 방 안은 갑자기 환해진다. 아버지가 털보로 바뀐 변화보다 노마는 이것이 더 크다. 윗목 구석으로 보꾹으로, 난데처럼 스스러워진다. 도리어 제 집에 앉은 듯이 털보는 스스럽지 않다. 촛불 붙인 소반에 김치 보시기 새우젓 접시의 술상을 차린다.
어머니는 말없이 술을 따르고 말없이 털보는 받아 마실 따름, 전일 선창에서처럼 희롱치 않는다. 그러나 털보는 맥적게 노마를 보더니, 이끌어 가까이 앉힌다.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노마 머리 위에 무엇을 얹는다. 남북이 나온 장구머리다. 눈을 희번덕이며 머리를 젓는다. 값싼 과자 한쪽이 떨어진다. 노마는 짐짓 놀란다. 털보는 호호호 울상으로 웃는다. 문어발이 나온다. 밤이 나온다. 담배 딱지가 나온다. 나중에는 손바닥이 딱 머리를 때리고,
"손 대지 말고 떨어뜨려 봐라. 떨어뜨려 봐."
머리를 젓는다. 앞뒤로 끄덕인다. 떨어지는 것이 없다. 빈탕이다. 동떨어진 웃음 소리가 잠시 왁자하였다가 꺼진다. 더 심심해진다. 멀뚱멀뚱 얼굴만 서로 보다가, 털보는 문득,
"요새 군밤 좋더라. 너 좀 사오겠니."
"어디 국숫집 앞 말이지."
"싸리전 거리 구둣방 앞 말야. 거기 밤이 크고 많더라."
하고 어머니가 가로챈다. 거기는 길도 서투르고 또 밤이 무섭다. 그리고 노마는 거기말고도 근처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을 먼 데를 가야 하는 불평도 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구원을 청한다. 어머니는 눈을 흘기고 털보는 외면을 한다.
꿈에 가위를 눌리는 때처럼 밤길은 뒤에서 무어가 쫓아오는 것만 같다. 걸음을 빨리 노면 놀수록 오금이 붙고, 개천에 허방을 빠질까 꺼먼 데면 모두 건너뛰는 우물 앞 골목길이 더욱 그렇다. 골목을 빠지면 큰길, 거기서부터는 가리킨 대로 오른편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급기야 구둣방 앞에서 굽는 밤은 도리어 잘다. 몇 번이고 지나 놓고 온 것이 굵고 많을 성싶다. 노마는 다시 그런 놈을 찾으러 다닌다.
돌아오는 길은 정말 무서운 밤이 된다. 컴컴한 골목에서 밝은 거리로 나올 때보다 밝은 데를 버리고 컴컴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무서움이란 또 유별하다. 노마는 우물 앞 골목을 들어서 눈감은 개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만가만 발자취를 죽인다. 그러나 발소리보다 더 똑똑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반대로 거칠게 발을 구른다. 목청을 뽑아,
"순풍에 돛을 달고……."
맞은편 양철지붕을 울리는 그 소리가 또 노마 아닌 딴 목청 같아 무섭다. 이런 때 한번은 허연 것이 전선주 뒤에서 나와 앞을 막았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잡아끌었다. 가등(街燈) 밑 가까이 왔다. 아버지였다.
"더럽다. 그거 버려라, 버려."
까닭을 모르게 아버지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도록 노하였다. 노마는 고개를 숙이고 종이봉지를 발 아래 떨어뜨린다. 아버지는 발로 차 개천으로 굴린다. 몇 개 길바닥에 흩어진 것까지 발로 뭉갠다. 퉤퉤 침을 뱉고 더러운 그 물건에서 멀리 하듯이 노마의 팔을 이끈다. 집과는 반대로 언덕 저편 뒤 사정(射亭) 있는 편으로 향해 길을 더듬는다. 아버지는 숨이 가빠 헉헉한다. 터져 나오는 기침에 몸을 오그린다. 사정 밑 아카시아나무 아래 이르자 그는 더 걷지 못했다. 나무에 몸을 실리고 늘어뜨리고 서서 굵은 숨을 내쉰다. 노마는 조마조마 다음에 일어날 행동을 기다리며 발발 떤다. 아버지는 호흡이 차츰 졸아들며 평조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아카시아나무와 한가지 아버지는 어느 때까지나 미동도 없다. 거칠게 들고나는 숨 그것 때문에 성미가 모두 풀리었는지 모른다. 노마는 좀 싱거워진다. 그 아버지가 묵연히 내려다보는 컴컴한 바다 저편에는 등대가 이따금씩 끔벅일 뿐 밤은 괴괴하다.
이튿날 아침 노마 아버지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차비를 차리는 아내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깨뜨리었다. 댓돌에 떨어져 강한 소리를 내고 병은 두 동강이 났다. 눈에 노기가 없었더면 그가 그랬을 듯싶지 않게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방 한구석에 맥을 놓고 섰다. 어머니는 돌아앉아 입었던 나들이옷을 벗는다. 인조견 치마저고리를 찌든 헌 털뱅이로 바꿔 입으면 고만, 이웃집에 쌀을 꾸러 갈 때, 그만 정도의 싫은 얼굴도 못 된다. 입가에는 비웃음 같은 것이 돈다.
"누군 좋아서 그 노릇 하는 줄 알우. 모두 목구녁이 포도청이지. 남의 가슴 아픈 사정은 모르고."
"굶어 죽더라도 그만두란밖에."
"이눔 저눔에게 갖은 설움 다 받구 하루 열두 번두 명을 갈구 싶은 것을 참구……."
잠시 울음 없는 눈물을 코로 푼다.
"아아, 글쎄 그만두란밖에 무슨 말야…… 굶어 죽드래두 그만두란밖에."
나도 생각이 있다 싶은 노마 아버지의 호기찬 소리는 별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랫집 춘삼네를 통해 성냥갑 붙이는 재료를 얻어 왔다. 그 집은 아들이 조합에 든 인부여서 밥을 굶는 형편은 아니나 늙은이 양주가 심심소일로 성냥갑을 붙여 살림에 보탠다. 그러면 혹은 대끝에 올라 여기다 목숨을 걸고 바재면 아니 될 것도 같지 않다. 하기야 하루 만 개 가까이만 붙였으면 공전이 일 원 오십 전, 그만하면 우선 급한 욕은 면하겠고 그리고 노마 어미에게 할 말도 하겠고, 하루 만 개!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이니 인력으로 아니 되란 법도 없으리라. 오냐 만 개만 붙여라―--- 번히 그는 열에 동하기 쉬운 성품이어서 매무시를 졸라매며 서둘렀다.
그러나 곰상스런 일에 익지 않은 손가락은 셋에 하나는 파치를 내어 뭉쳐 버린다. 풀칠을 너무 많이 해서 종이가 묻어난다. 사귀가 맞지 않고 일그러진다. 마음이 바쁜 반대로 손은 곱은 듯이 굼떠진다. 다른 때 없이 오줌이 잦아 몇 번이고 일어난다. 부엌 뒤로 돌아가 낙일(落日)을 바라보며 몸을 떨고 부지런히 돌아가 다시 일을 붙잡는다. 하지만 밤 어둑한 등불 아래 그림자가 크고 꽤 많이 쌓인 것 같아 세보면 단 오백을 넘지 못했다.
그보다는 아내가 손톱 하나 까딱지 않고 종시 코웃음으로 보려는 것이 괘씸하다. 그가 거들어 주었으면, 못 해도 오백의 갑절은 성적이 나올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편에 얄미운 경계심이 있는 것을 알고야 권하기는 아니꼽다. 앰한 노마만 볶는다.
"코를 질질 흘리고 넌 구경만 헐 테냐. 요 인정머리 없는 자식 같으니."
그리고 물을 떠오너라 풀을 개오너라 아내가 할 일을 시킨다. 잘난 솜씨를 자식에게 본보기를 보이며 가르친다. 노마는 아버지의 시늉을 내어 무릎 하나를 올려 턱을 괴고 앉아 손등으로 코를 문대며 빰에 풀칠을 한다.
그러나 부자의 힘을 모아 하루의 성적은 천을 한도로 오르내리었다.
"이것두 기술인데 하루 이틀에 될라구. 차차 졸업이 되면―---"
하고 장래를 둔다고 하여도 며칠에 한 번 모아서 아내가 머리에 이고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하찮게 몇십 전 은전을 손수건에서 풀어 내었다. 그래도 생화라고 여기다 세 식구가 입을 대야 했고, 그들 하루 소비량에 비하면 그것은 황새걸음에 촉새로 따르지 못할 경주였다.
밤이 깊어서 노마 어머니가 문득 잠이 깨어 떠보면, 그때까지도 남편은 이불을 들쓰고 앉아서 쿨룩쿨룩 어깨를 들먹거리며 손을 놀리고 있다. 가슴에 찔려 거들까 하다는, 그는 못 본 척 돌아눕고 만다. 번연히 생화가 안 되는 노릇을 공연한 고집을 쓰는 남편이고 보매, 일찍이 지쳐 자빠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옳다 싶었다.
딴은 그대로 되고 말았다. 그는 동네 이사람 저사람 선창과 인연이 있는 사나이를 만나는 대로 농을 주고받는다. 마당에서 바가지 움집을 쳐다보고 말을 건다.
"요새 벌이 많이 했소, 여보."
문 앞에 구부리고 열쇠 구멍을 찾다 바가지는 돌아다보고 어리둥절해한다.
"지금 돌아오는 길유? 선창에 자거리배 약산배 들어왔습디까."
그러나 노마 어머니의 전에 못 보던 상냥한 얼굴에 의아하여 바가지는 내려다보기만 한다.
"아, 새우젓 선창에 가봤었어? 자거리배 들어왔습디까."
창 밖에서 아내는 근심 없이 웃고 지껄인다. 그 소리에서 아내의 선창을 못 잊어하는 마음을 노마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그것처럼 느끼며 순간 일손을 놓고, 슬며시 벽을 향해 몸을 실리었다. 피대가 벗겨진 기계처럼 갑자기 가슴의 맥이 높고 느지러진다. 오장이 그대로 목을 치밀어 넘어오려는 덩어리를 이를 악물고 막는다. 급기야는 한모금 한모금 입 밖에 선짓덩이를 끊어 냈다. 가을 하늘과 같이 깊고 가라앉은 눈으로 노마 아버지는 윗목에 돌아앉은 아내를 누워서 고개만 들고 본다.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검정함에서 꺼내 하나하나 내 입고 얼굴에 분첩을 두들긴다.
'오냐 두 달만 참어라.'
하고 노마 아버지는 아내의 등을 향해 말없이 변명을 한다.
'몸을 추스는 대로 나두 하던 일을 계속하겠구, 하루 천이 되든 이천이 되든 붙이는 대로 쓰지 않구 모으면 새끼 꼬는 기계 한 틀쯤은 장만할 밑천은 모일 게구. 그것 한 틀만 가졌으면 앉어서두 아내가 하는 하루벌이는 나두 능히 벌 수 있겠구. 오냐 두 달만 참어라.'
곁눈으로 남편의 안색을 살피는 아내의 눈을 피해 그는 고개를 돌린다. 아내의 그 눈에도 노마 아버지는 눈물이 났다.
*
해가 저물면 아침에 나갔던 사람들이 각기 제 나름대로 컴컴한 얼굴로 돌아오고 이집 저집 풀떡풀떡 풀무질하는 소리와 매캐한 왕겨 때는 연기가 온 동네를 서린다.
노마 어머니가 늦게 돌아오는 날은 영이 할머니가 저녁을 지어 주러 왔다. 재물재물한 눈을 인중을 늘이며 비집어 뜨고 풀무질을 하랴 아궁이에 왕겨를 한 주먹씩 던져 넣으랴 주름살 많은 깜숭한 얼굴을 더욱 오그린다. 그러나, 노마 아버지는 알은체도 않는다. 밥쌀을 내라고 바가지를 내밀어도 얼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이키지 않는다. 저 늙은이가 저녁을 짓는 때문으로 아내가 늦게 돌아오게 되기나 한 듯싶다. 아니라 해도 아내의 밤늦게 돌아오는 그 일에 분명 노파의 짬짜미가 있으리라. 이것만이 아니다. 노마 아버지 자기가 당하는 오늘날의 불행 전부, 자기가 불치의 병을 얻어 눕게 된 것도, 아내를 들병장수로 내보낸 것도 모두―- --부엌에서 영이 할머니의 홀짝홀짝 코를 마시는 소리에도 비위가 상했다.
"저녁 그만두슈."
"왜."
하고 노파의 빨간 눈이 방 안을 들여다보며 새물거린다.
"우린 걱정 말구, 댁 저녁이나 가보슈."
"또 속이 아픈 게로군그래, 어째."
"먹든 안 먹든 우리가 할 테니, 당신은 가요, 가."
그러나 이만 말에 뇌까리지 않을 만큼 면역이 된 영이 할머니려니와 말을 한 당자도 오래 심금을 세우지 못했다. 본시 모두가 앞뒤 절벽으로 답답한 제 운명―---이것은 더욱이 아내를 거리로 내보내 밤을 세우게 하는 사실로 나타나 속을 뒤집어 놓는다―---에 대한 제 입술을 깨물 때 같은 암상이 충동이는 때문이다. 조금 지나 영이 할머니가 밥상을 받쳐 들고 들어올 때쯤 되어서는 그에게 아랫목을 권하리만큼 노마 아버지는 마음을 돌린다. 그러나, 영이 할머니는,
"아닐세, 여기두 좋구먼."
"아 글쎄, 이리 내려와 앉으라니깐두루."
"아닐세 아닐세."
노파는 좀더 제 모가치의 밥그릇을 밀며 모로 앉는다.
"아 글쎄, 거긴 차다니께두루."
소리는 다시 퉁명스러워진다. 밥상을 거칠게 앞으로 당긴다. 모래알을 씹는 상으로 맛없이 밥을 떠넣는다. 그 얼굴이 좀 풀릴 만해서 영이 할머니는 코를 홀짝홀짝 뚝배기 바닥을 긁더니,
"노만 그래두 어멜 잘 둬서."
하고 아랫목 편을 흘낀 보고,
"여편네 손으로 밥 걱정, 땔 걱정 안 시키구―---그건 수월헌가. 맘성이구 인물이구 마당에 나오는 여자치곤 아깝지 아까워."
노파는 그 말이 노마 아버지의 성미를 것게 될 줄은 꿈밖이다. 젓가락짝으로 소반 귀를 두들기는 서슬에 놀라 입을 봉한다. 노마 아버지에겐 아픈 데를 꼬집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자기를 향해 배를 채는 큰소리라 하여 괘씸해하는 거다. 이내 밥상을 밀어 낸다. 까닭을 모를 이런 경우에는 모두 제 잘못으로 접고 마는 영이 할머니는 우두망찰해 어쩔 줄을 모른다. 만약에 노마 아버지가 돌부리에 발을 채이고 화를 냈다 하여도 노파는 역 제 잘못으로 안심찮아하리라.
노마 아버지는 이불을 쓰고 눕더니, 갑자기 이불자락을 젖히고 뻘겋게 상기한 얼굴을 든다.
"모두 그놈의 편지 땜야. 그게 아니더면 이놈의 고장이 어디 붙었는 줄이나 알았습디까. 뭐, 하루 이삼 원 벌이는 예사구."
그가 편지 때문이라는 것은 곧 영이 할머니 탓이란 말이다. 그러나 한고향에서 아래윗집 사이에 지내던 정분으로도 그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서 부른 것은 아니다. 갑자기 의지하고 살던 아들을 여의고 선창에 나가 품을 파는 자기 아들과 같은 사람들을 볼 때 그 가치가 갑절 돋보였을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나 노마 아버지는 좀더 심악하게,
"노마 어밀 쓰레기꾼으로 꼬여 낸 건 누구구. 들병장수로 집어넌 건 대체 누구여."
"그건 앰한 소릴세. 첨 날 따러 나올 때두 난 열손으로 말리지 않었든가, 왜, 젊은 사람을―--- 할 노릇이 못 된다구."
모두 선창에 나가 영이 할머니는 낙정미를 쓸어 모은 쓰레기꾼, 노마 어머니는 잔술을 파는 들병장수, 일터를 같은 마당에 가진 탓으로 듣는 억울한 소리다.
하기는 노마 어머니가 처음 쓰레기꾼으로 마당엘 나오자 영이 할머니는 은근히 반기었다. 그는 인물보다 맨드리가 쓰레기꾼 축에 섞이기는 아까웠다. 번히 쓰레기꾼이란 정작 볏섬도 산으로 쌓이고 낙정미도 많이 흘려 있는 지대조합 구역 내에는 얼씬도 못 하고, 목채 밖에 지켜 섰다가 벼를 실고 나오는 마차가 흘리고 가는 나락을 쓸어 모은다. 그러나 기실은 구루마 바닥에 흘려 있는 나락을 쓸어 담는 척하고 볏섬에다 손가락을 박고 치마 앞자락에 후비어 내는 것을 본직으로 꼽는다.
그러다 들키면 욕바가지를 들씌운다. 쓰레받기 몽당비를 빼앗긴다. 앙가슴은 떠다박질리고 채찍으로 얻어맞는다. 그러나 마차 뒤에 달라붙은 여인들을 향해 채찍을 든 마차꾼도 노마 어머니를 대하고는 그대로 멈춘다. 머리에 숙여 쓴 수건 아래 수태를 품고 고개를 숙인 미목이 들어앉은 아낙네가 노상 봉변을 당한 때 싶다. 마차꾼은 금세 언성이 숙는다. 욕이 농으로 변한다.
차츰 노마 어머니는 이력이 나서 자기가 먼저 선손을 건다.
"아제 내 이것 가져다가 돌절구에 콩콩 빻아 가는체로 받쳐서 대추 박아 꿀떡 해놀 테니 부디 잡수러 오슈."
하고 마차꾼의 뒤로 실리는 등판을 떠다민다. 그 틈에 나머지 여인들은 볏섬에 달라붙어 오붓이 갉아 모은다.
선창 사나이들은 노마 어머니에게 실없이 굴었고 노마 어머니는 그들이 만만히 보였다. 여보란 듯이 쓰레받기를 내흔들며 노마 어머니만은 지대조합 구역 내를 출입해도 무관했다. 쓰레기꾼을 쫓는 것이 소임인 털보도 그에게는 막대기를 들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 슬슬 따라다니며 실없이 지근덕거리었다. 차츰 노마 어머니는 쓰레기꾼들에게서 멀어 갔다.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인조견 치마를 헐게 눅게 끌었다.
그가 누구 발림으로 들병장수가 되었는지 영이 할머니는 도시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를 자기가 꼬였단 말은 참 앰하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노마 아버지와 같은 병으로 여읜 영이 할머니는 아들에게 해보지 못한 한을 노마 아버지에게 풀기나 하는 듯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음으로 양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나 노마 아버지는 그 뜻을 받아 주지 않는다. 아마 영이 할머니가 인복이 없는 탓인가 보다.
그러나 이유는 하여튼 까칠한 귀밑, 어복이 떨어진 다리, 엄나무 가시같이 피골이 맞붙은 아들의 몰골대로 되어 가는 노마 아버지를 대하고는 불쌍한 생각은 곧 자신에게 무거운 죄밑이 되어 내리덮어 할 말도 못 한다. 다만,
"남의 앰한 소리 말구, 자네 몸만 꺾이네. 화가 나두 참어야 하네. 참어야 해."
그러나,
"제발 내 눈앞에 뵈지 좀 말라니께두루. 그럼 내가 먼저 피해 나가야겠수."
하고 노마 아버지는 경망스레 일어나 대님을 친다 하여 그예 노파를 쫓아낸다.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 들고, 어린애처럼 면난쩍어하며 방문 밖을 나갔다. 그 팔짱을 오그린 알스런 어깨가 길 아래로 사라지자, 노마 아버지는 문득 일어나서 방 밖에 머리를 내민다.
"영이 할머니, 영이 할머니."
조금 전과는 음성도 딴판으로 안타깝다. 대답은 없다. 끙 하고 자리에 몸을 달아 누우며 쓰게 눈을 감는다. ―---어미 없는 어린 영이를 업고 울타리 밑에서 호박잎을 헤치고 섰던 영이 할머니. 아들을 앞세우고는 밖에 나갔다 길을 잃어버리기 잘 하는 영이 할머니. 뉘우치는 것은 아닐 텐데 영이 할머니의 이런 장면도 머리에 얼씬거린다.
그러지 말자 해도 영이 할머니의 얼굴을 보면 노마 아버지는 그예 비위가 상한다. 늙은이가 박복해 아들 며느리 다 앞세우고 같은 운명으로 호리려고 노마 아버지를 가까이 한다. 아니라 해도 그를 보기는 싫다. 그러나 하루라도 아니 보면 공연히 기다려지는 영이 할머니다.
며칠 발을 끊어 아주 노했구나 하였더니 영이 할머니는 전에 없이 신바람이 나서 왔다. 그는 제멋대로 드나드는 방문 위에 부적 한 장을 붙여 놓았다. 또 있다. 검정 보자기를 끌러 무엇을 내놓는데, 난데없는 남생이 한 마리다. 요술장이처럼 노파는 호기차게 노마 아버지를 쳐다본다. 남생이 잔등에도 노란 종이에 붉은 주(朱)자를 흘려 쓴 부적이 붙어 있다.
"금강산에서 공부를 하구 나온 사람이라는데, 아무네 누구두 이걸루 십 년 앓던 속병이 씻은 듯이 떨어졌대여."
그러나 노마 아버지는 마이동풍으로 응등그리고 앉았더니 남생이를 윗목으로 밀어 버리고 이불을 쓰는 거다. 영이 할머니는 어안이 벙벙하고 만다. 남생이는 항아리 뒤로 들어가 기척도 없다. 한참 그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치마고름을 말며 앉았더니 영이 할머니는 소리 없이 돌아갔다. 얼마 후 노마 아버지는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이켰다. 남생이다. 그는 난데없는 것을 처음 보는 듯이 신기하게 고쳐 본다. 부스럭부스럭 남생이는 어둑한 함 뒤를 돌아 벽과 반짇고리 사이에서 기웃이 머리를 뽑아 들고 좌우를 살핀다.
"잡귀를 쫓고 보신을 해주고, 있는 병은 떨어지고 없는 병은 붙지 않고 남생이 이놈만큼 무병장수를 하리라."
남들이라 영험을 보았겠나 하고 영이 할머니가 옮긴 말 그대로를 남생이 이놈도 그 징글징글한 상판에 말하는 듯싶다. 느럭느럭 방바닥을 긁으며 남생이는 천 근 들이 무거운 잔등머리를 짊어지고 가까스로 몸을 옮긴다. 알 수 없는 무엇을 전할 듯이 음흉스레 노마 아버지에게로 가까이 온다. 그는 숨을 죽이고 누워 지켜본다. 남생이가 베개 밑 가까이 이르는 대로 조금씩 몸을 일으켜 마주 노리다가 살며시 일어앉는다. 가만히 남생이를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남생이는 머리와 사지를 옴츠러트린다. 차돌과 같이 묵직한 무게다. 아니 전혀 차돌이다. 산 물건치고는 이렇게 고요할 수가 없다. 방 전체의 침묵을 남생이는 삼킨다. 한참 만에 조심조심 머리를 내민다. 손바닥을 흔든다. 도로 차돌이 된다.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뭉친 덩어리다. 그것은 하루 저녁에 묵은 씨앗에서 새움이 트는 그런 힘이리라. 여기다 노마 아버지 자신의 시들어 가는 가지를 접붙여서 남생이의 생 맥이 그대로 자기에게도 전해 올 듯싶다.
"영물의 짐승이라 사람의 일은 모르는 걸세."
이번에는 노마 아버지 자신이 무심중 영이 할머니의 말을 입에 옮기어 본다. 이튿날 영이 할머니는 부적을 받아 가지고 와서 내놓지를 못하고 망설이는데, 의외로 노마 아버지는 두 손으로 받다시피 하여 대견하였다. 까닭에 그는 부적 한 장을 구하는 데 은전 한 닢이 드는 것과 매일 한 장씩을 써야 한다는 말을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마 아버지는 불에 태워서 그 재만 정한수에 타서 먹으라는 부적을―---이것이 또한 영이 할머니에게 하는 단 한 가지 고집이리라―---맞은편 바람벽에 붙여 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남생이가 생긴 후 아버지는 노마에게 범연해졌다. 한종일 눈에 아니 보여도 부르지 않았다. 노마는 제 세상을 만났다. 아버지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남생이가 무서워 피하는 것이니까 노마는 한종일 밖에 나가 놀아도 구실이 되었다.
먼저 영이에게 까치걸음으로 뛰어가 얼마든지 놀아도 좋은 몸임을 자랑한다. 창문 앞 양지짝에 앉아서 영이는 할머니가 선창에서 쓸어온 흙에 섞인 나락을 고른다. 그 앞에서 노마는 혼자 팔방치기를 한다. 길바닥에 금을 긋고 될 수 있는 대로 손을 저고리 소매 속으로 넣으려니까 팔죽지를 새 새끼처럼 하고 깡충깡충 뛰며 돌을 찬다.
"오랴 이랴."
"걸렀다."
노마는 곧잘 일인 이역을 한다. 한편은 노마, 또 한편은 영이다. 되도록 저편의 골을 올리려고 거르는 때는 전부 영이 쪽으로 꼽는다. 그러나 영이는 대척도 않는다. 여전히 저 할 일만 한다. 키에 담아 두 손으로 비비어 흙을 가루가 되게 한 후 바람에 날린다. 다음 모래와 나락이 남은 데서 모래를 골라 내는 것이 아니고 모래 틈에서 나락 알을 골라 내는 거다. 손에 융 헝겊을 감아 쥐고 모래 위를 눌렀다가 떼면, 누릇누릇 나락 알만이 붙어 오른다. 그것을 둥구미에 털며 영이는 능청맞게 웃더니,
"너희 어머닌 그런다지."
"뭐."
달아날 준비로 담모퉁이에 붙어 서서 고개만 내놓고 영이는 해해거리며,
"너희 어머닌 그런다지."
그러고 담 저쪽 모퉁이로 달아나 아웅거린다. 노마는 바지괴춤을 움켜쥐고 머리를 저으며 쫓아간다. 쫓기며 쫓으며 네모진 영이 집 둘레를 두고 맴을 돈다. 거진 거진 잡힐 듯해서 영이는 숨이 턱에 차,
"아니다 아니다."
굴뚝 구석에 머리를 박고 오그린다. 노마는 양 어깨를 찌그러이 누르며,
"이래두. 이래두."
"안 그럴게. 안 그럴게."
그러나 영이는 몇 걸음 물러서 머리카락을 다듬어 올리며 정색을 한다.
"너 바가지가 그러는데 너희 어머닌 달어난데."
"거짓부렁."
"정말이다. 너 너희 아버지 앓기만 하구 벌이두 못 하구 하니까."
"그럼, 좋지. 나두 쫓아다니며 구경하구."
"누가 달아나는 사람이 널 데리고 가니, 얘 쉬라."
"그럼 어머니 혼자."
"아니래, 너 털보하구래."
"거짓부렁 말어."
"정말이다, 너."
"거짓부렁야."
"정말이다, 너."
"거짓부렁."
옆에 고무래 자루를 집어 들고 다가선다. 그 얼굴에 장난이 아닌 정색을 보자 영이는 겁이 난다.
"그래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노마는 안심이 안 된다. 요즈음으로 더 아침은 일찍이 나가고 저녁에는 늦게 돌아오는 어머니는 이렇게 야금야금 노마와 집에서 떨어져 가는 시초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와도 사이가 더 차고 노마에게도 쌀쌀해진 어머니다. 그렇다면 집에는 노마하고 아버지만 남게 되겠고―---그때엔 노마가 대신 벌지 그까짓 거, 그러나 무섭다.
영이의 그 아니다 소리를 좀더 분명히 듣고 싶어서, 노마는 고무래 자루를 둘러메고 달아나는 영이를 부엌 뒤로 쫓아간다.
문득 노마는 걸음을 멈춘다. 어쩐지 그 동안 집에 무슨 변고가 났을까 싶은, 사실 다른 때 같으면 아버지는 벌써 열 번도 노마를 찾았을 것이 아니냐. 어쩌면 지금도 그랬는지 모를 일. 그것을 못 듣고 장난에만 팔려 있었던 것인지 뉘 알리요.
노마는 살금살금 방문 밖에 가 귀를 기울인다. 아무 기척도 없다. 문구멍으로 방 안을 살핀다. 아버지는 무릎을 끓고 앉아 먼 소리를 듣는 사람의 모양으로 두 손을 한편 쪽 귀에다 몰아 대고 있다. 손바닥 안에는 남생이가 들어 있다. 맞은편 바람벽에는 여남은 장의 부적이 가지런히 붙어 있다.
*
잿더미가 쌓인 토담 모퉁이 양버들나무는 노마의 아름으로 하나 꼭 찼다. 노마는 두 손에 침을 바르고 단단히 나무통을 안는다. 두어 자 올라갔다는 주루루 미끄러져 내린다. 허리띠를 조르고 다시 붙는다. 또 주루루―---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래위로 나무를 살핀다. 상가지에 구름이 걸린 듯이 높다. 한데 수돗집 곰보는 단숨에 저 끝까지 올라가니 놀랍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기차가 보인다, 윤선이 보인다, 큰소리다. 노마가 곰보에게 따르지 못하는 거리는 이것만이 아니다. 제법 곰보는 어른처럼 그들의 세계를 아이들 말로 해석해 들인다, 선창에 관한 풍차 같은 소문을 알린다, 유행가를 전한다, 활동사진 시늉을 낸다. 또 어른처럼 돈을 잘 쓴다. 마음이 내키면 일 전에 하나짜리 눈깔사탕을 매 아이 하나씩 돌리고도 아깝지 않아한다. 그러나 그 돈의 출처를 묻는 때만은 자랑을 피한다. 다만 '저 나무도 못 올라가는 바보가' 하고 어깨를 씰기죽한다. 그는 헌 양복에 캡을 젖혀 쓰고 어른과 함께 선창에 나가 해를 보낸다.
노마는 틈틈이 나무 올라가기에 열고가 난다. 볼따구니를 긁히고 손바닥에 생채기를 내고 바지를 찢기고, 그래도 노마는 그만두지 않는다. 장난이 아닌 거다. 곰보가 가진 높이까지 이르는 그 사이를 가로막은 장벽이 곧 이놈이었다.
이 고비를 넘기기만 하였으면 금방 거기는 선창이 있고, 활동사진이 있고, 돈이 있고 그리고 능히 어른의 세계에 한몫 들 수 있는 딴 세상이 있다. 그때에 노마는 자기 아니라도 족히 아버지 모시고 잘 살 수 있는 노마임을 여보란 듯이 어머니에게 보여 줄 수도 있으련만 아아!
노마는 두어 간 떨어져 달음박질해 나무에 달라붙는다. 서너 자 올라간다. 한 간 거리쯤 올라간다. 옹이 뿌리를 딛고 손바닥에 침칠을 한다. 찍 미끄러지며 쿵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저절로 울음이 터지는 것을 꽉 입을 다물고 아픔이 삭기를 기다린다.
뒤에서 호호호 웃음 소리가 나며 누가 목 뒤를 잡아 일으킨다. 바가지다.
"임마 나무엔 뭣 하러 올라가는 거여."
그리고,
"너 떡 사줄련."
"……"
"너 나 따라오면 떡 사주지."
"어디 말야."
"선창 마당까지."
떡 아니라도 반가운 소리다. 금방 아픈 것이 낫는다. 두루마기 아구리에다 손을 넣어 뒷짐을 지고 바가지는 앞으로 쓰러질 듯이 구두를 끈다. 노마가 천천히 걸어도 그 걸음은 뒤떨어져 노마를 부른다.
"너 아버지가 좋으냐, 어머니가 좋으냐."
"다 좋지 뭐."
네거리를 건너서 구둣방 옆을 지나며 바가지는,
"너 마당에 있는 털보 알지. 그게 누군데……."
"……"
"너희 집 아랫목에 누워 있는 사람이 정말 아버지냐, 털보가 정말 아버지냐."
"……"
"정말 아버진 털보지, 털보여, 응."
노마는 저고리 소매로 코를 문댄다. 모자점 유리창 안의 발가숭이 인형에 눈이 팔려 못 들은 척한다. 혼자 바가지는 호호호 웃음을 참지 못한다.
선창 칠통 마당 어귀에 이르렀다. 갑자기 엉덩이를 들이대며 바가지는 노마의 다리를 잡는다.
"업혀라, 업혀."
어린애 아닌 노마를, 그리고 제 걸음도 바로 걷지 못하는 꼴불견이 아닌가. 노마는 싫다고 등을 내민다. 그러나 업혀야지 떡을 사준다는 거다.
시커먼 화물차가 한참 지나가고 훤하게 앞이 열리자, 건너편 일대는 전부 볏섬이 더미 더미 산을 이루었다. 말구루마 소구루마가 길이 미어 나온다. 볏섬 사잇길을 왼편으로 꺾어 나서면 바다, 제이 잔교서부터 제삼 잔교 일폭은 크고 작은 목선이 몸을 비빌 틈이 없이 들어찼다. 꾸벅꾸벅 고개를 빼고 볏섬을 져나르는 자, 섬에다 삭대를 찔렀다 빼며 '다마금요, 은방요' 허청대고 외는 자, 뒷짐을 지고 서서 두리번거리는 모직 두루마기를 입은 자, 그리고 지게를 벗어 놓고 볏섬 위에 혹은 가슬에 무더기 무더기 입을 벌리고 앉았는 자, 그들의 무심한 눈은 거의 한곳으로 모인다. 가운데 무럭무럭 오르는 더운 김과 시큼한 냄새를 휩싸고 섰는 한 덩어리가 있다. 각기 젓가락과 사발을 들고 고개를 쳐들어 먼산을 바라보며 입을 쩍쩍거린다. 바가지는 그들 사이를 뻐기며 소리를 친다.
"여기두 탁배기 한 사발 노슈. 그리구 시루떡 한 조각허구."
앞에 선 자가 팔을 내리자, 노마는 수건을 오그려 쓰고 시루의 떡을 비는 여자의 모습이 익다. 남 아닌 자기 어머니였다. 떡을 들고 내밀던 손이 멈칫한다. 잠깐 낭패한 빛이 돌더니 태연하다. 노마 아닌 남을 보는 거나 다름없다. 노마는 차마 손을 내밀어 받지 못한다.
뒤에서 노마 머리에 손을 얹으며 굵은 음성이,
"얘가 누구요."
"내 아들놈여."
하고 바가지는 다 들어 보라는 음성으로,
"머리는 장구통이라구 이눔 신통헌 눔여. 제 에민 노점을 앓구 자빠졌구 애빈 이 모양으로 난봉이나 다니구, 집에서 어미 병 고신이며 부엌 설거지까지 이눔이 혼자 허는데 해두 잘허거든."
노마 어머니는 손구루마 한 채에다 한편에는 시루떡, 한편에는 막걸리 항아리 모주 냄비를 걸어 놓고 사발에 술을 부랴 보시기에 모주를 놓으랴(이렇게 하여 노마 어머니는 바가지의 의기를 꺾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쁘게 손을 놀린다.
더부살이는 아닐 텐데 여기 털보가 시중을 든다. 일일이 술값을 받아 목거리를 해 앞에 늘인 주머니에 넣는다. 막걸리통을 날라 온다. 냄비에 부채질을 한다. 바가지는 노마를 내려놓고 앞으로 어머니의 정면에 서게 한다. 그는 한층 목청을 높인다.
"이녀석 에미 말 좀 들어 보슈."
하고 여자 음성으로 고쳐서,
"나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께 날 버리구 맘대루 딴 계집을 얻든 살림을 배치하 든 상관없지만 이 자식은 무슨 죄로 굶주리게 하는 거냐. 선창엔 그렇게 드나들면서 그 흔헌……."
털보가 앞치마에 손을 씻으며 뒤로 돌아와 바가지의 구두를 툭 차고 턱으로 건너편을 가리킨다.
"나두 내 돈 내구 술 사먹는 사람유. 어째 함부루 툭툭 치구 내모는 거여."
"누가 내모는 건가 이 사람아. 나허구 헐 얘기가 있으니 저리 좀 가잔 말이지."
"헐 말이 있거던 예서 해."
하고 이건 뭐냐 어깨를 잡은 손을 툭 차버리고 몸을 뒤로 채기는 했으나, 너무 지나쳐 뒷사람의 팔을 쳐 술사발을 엎지르고 쓰러졌다. 와아 하고 웃음 소리가 높아진다. 둘레가 터져 더러 젓가락을 든 자가 그편으로 둘러선다. 잠시 땅을 짚고 주저앉아 바가지는 눈을 지릅떠 털보를 노리더니 한번 해볼 양으로 일어선다. 몇 보 걸음을 옮기자, 그가 앉았던 자리에서 한 자가 보자 하나를 집어 들고 쳐든다. 허리에 찼던 이발 기계를 싼 보자다. 바가지는 기급을 해 돌아서 손을 벌린다. 그러나 먼저 털보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일은 우습게 되고 말아, 보자 한끝을 털보가 잡고 한끝은 바가지가 매달려,
"이리 내어, 이리 내어."
"이리 좀 와, 이리 좀 와."
털보가 끄는 대로 바가지는 달려서 건너편 창고 뒤로 사라진다. 벌어졌던 자리는 다시 오므라들었다. 겹으로 울립을 한 사람 가운데 노마 어머니의 모양은 파묻히었다.
그편을 멀찍이 등지고 돌아서, 그러나 어머니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리를 두고 노마는 뒷짐을 지고 섰다. 제이 잔교 위 엿목판 옆이다. 어머니가 노마를 노마 아니로 보아 준 야속함은, 노마도 어머니를 어머니 아니로 보아 주었으면 그만이다.
너무 잔잔해 유리 같은 바다다. 놀라움밖에 더 표현할 줄 모를 커다란 기선이 떠 있다. 가난한 사람처럼 해변 쪽으로는 목선이 겹겹이 모여서 떠돈다. 잔교 한편에 여객선이 붙어 서서 사람과 짐을 모여들인다. 통통통 고리 진 연기를 뽑으며 발동선이 우편으로 물살을 가르며 달아난다. 저 배가 보이지 않거든 노마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리라 한다. 마침내 발동선은 시커먼 중국 배 뒤로 사라진다. 그러나 어쩐지 미진해 다시 이번에는 여객선이 사람을 다 태우고 움직이기 시작하거든 하고 노마는 자리를 뜨지 못한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배가 움직이기 전에 어머니는 왔다. 그러나 건너편 세관 앞을 오면서부터 눈을 흘기고,
"뭣 허러 까질러 다니니. 배라먹게."
하고 노마의 머리를 쥐어박고,
"아버지에게 말하면 이거다, 이거여."
주먹을 쥐어 으르는 시늉을 내다가, 그 손바닥을 펴 돈 한 닢을 보이며 어머니는 눙친다.
"바가지가 오재두 듣지 말구, 아버지 시중 잘 듣고 있어, 응 착하지. 그리구 아예 나 봤단 소리 말구, 응."
어머니는 등을 두들기며 음성이 다정하다. 노마는 낯을 찌푸린다. 그 속은 어쩐지 울음이 나와 참는 것이다.
이날처럼 노마에게 집의 아버지가 불쌍하고 쓸쓸하게 생각된 때는 없다. 아버지는 쓰레기통 옆에 다리 병신보다 더 가엾고 노마 자신보다 더 작고 쓸쓸하다. 오늘도 아버지는 앞가슴에 남생이를 올려놓고 누웠으리라.
노마는 지나가는 가게마다 기웃거리며 손아귀의 돈 한푼과 그곳에 놓인 물건과를 비교한다. 사과, 귤, 감, 유리병 속에 든 과자, 모두 엄청나다. 골목길로 들어서 늙은이가 앉았는 구멍가게에서 노마는 붕어과자 하나와 바꾼다. 아버지에게 드릴 생각이다. 아버지는 노마 이상으로 이런 것들에 군침이 나리라.
조금 후 눈으로 박은 콩알이 떨어져 손에 잡힌다. 할 수 없으니까 노마는 먹는다. 비위가 동한다. 이번에는 제 손으로 지느러미를 떼어 먹는다. 이런 것은 없어도 붕어 모양이 틀려지는 것이 아니니까 표가 안 난다. 그러나 꽁지만 먹자는 것이 야금야금 절반을 녹이고 만다.
노마는 차츰 무거운 마음에서 풀어져 즐거워진다. 멀리 떨어지면 항구는 마치 커다란 소꼽장난판 같다.
*
노마가 급기야 토담 모퉁이 양버들나무를 올라갈 수 있던 날 노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실로 이상한 날이다. 그렇게 어렵던 나무가 힘 안 들이고 서너 간 높이 쌍가지 진 데까지 올라가졌다. 거기서부터는 손잡을 데 발 놀 데가 다 있어 한층 두층 곰보 이놈도 이만큼 높이는 못 올랐으리라.
그 내려다보이는 시야가 결코 뒤 언덕 위에서 보는 때보다 그리 넓지도 멀지도 못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늘 보던 길, 집, 사람 들이 아주 달라 보이도록 나무 상가지에서 거꾸로 보기는 노마 아니면 할 수 없다.
"곰보야, 곰보야."
제법 큰 소리로 별명을 부를 만도 하다. 저 아래서 조그맣게 영이 할머니가 울상을 하고 쳐다본다. 이런 데서 거꾸로 보는 사람의 얼굴이란 저런 게다. 음성까지 울음에 섞여 손짓을 한다. 오늘 노마의 성공은 영이 할머니를 울리다시피 장한 것인지도 모를 일. 그런데 노마 집 문 앞에는 동네 집 여인들이 중게중게 큰일난 얼굴로 모여 섰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그러나 어머니 음성이 분명한 곡성이 모기 소리만큼 가늘다.
모두 거짓부렁이다. 참 설움에서 우러나오는 울음이고야 목청만이 노래 부르듯 청승맞을 수 없다. 치마폭에 얼굴을 싸고 엎드리었다. 문득 낯을 들 때 어머니가 굴뚝 뒤로 돌아가 털보와 수군수군 공동묘지를 쓸 것인가 화장을 할 것인가 손가락을 꼽으며 구구를 따지는데, 어머니는 영이 할머니보다도 예사롭다.
만약에 노마 아버지의 뒤축 끊어진 커다란 고무신을 전대로 방문앞 댓돌 위에 놓아만 두었으면 한잠 깊이 든 때 아버지나 다름없다. 그것을 신을 임자가 없다는 듯이 뒷간 옆에 내던져 굴리는 고무신을 볼 때만 노마는 언짢은 생각이 들어 도로 제자리에 집어다 놓는다. 그러면 어머니는 고질을 떼어 버리듯이 한 짝씩 집어 멀리 길 아래 쓰레깃더미가 있는 편으로 팽개쳤다. 영이 할머니는 노마를 집 뒤 들창 밑 아무도 없는 데로 끌고 가 은근히 묻는다.
"노마, 너 남생이 어디 간 거 아니?"
"어제는 보았어두 오늘은 몰라."
"거 참 심상헌 일이 아니다."
하고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남생이가 없어졌음으로 해서 그런 일이 생기었다는 듯이 갑자기 울음에 자지러진다.
저녁때 길목을 막고 헤갈을 하고 서서 바가지는 노마 집 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 서방은 속여두 난 못 속인다. 담벼락에 붙여 논 건 뭐구, 남생이는 다 뭐여. 멀쩡하게 산 사람을 앉혀 놓고 연놈이 방자를 해. 방자대루 돼서 좋겠다."
아이들 머리 너머로 어른들도 팔짱을 찌르고 우뚝우뚝 서자, 바가지는 기세가 높아진다.
"모두 그눔의 농간야. 그눔이 뒤에 앉어서 방자두 놓게 하구 그리구……."
그러고 저녁밥에 필시 못 먹을 독을 탔을 것이다. 아니면 멀쩡하게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별안간 요강요강 선짓덩이를 쏟아놀 리가 없지 않으냐―---그러나 바가지가 취중이 아니고 성한 정신으로 한 사람을 붙잡고 넌지시 하는 말이라 하여도 곧이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가지 자신의 처신이 글러 그런 것만이 아니다. 남의 집 일에 발벗고 나서서 초상비 일동일절을 대고 백지 한 장을 사려도 손수 비탈을 오르고 내리고 하는 털보에게 일반은 인정 많은 사람이라 지목이 돌았다.
저녁에 노마는 잠자리를 영이 집으로 옮기었다. 방울 등잔을 가운데 두고 앉아서 노마는 영이에게 전에 없이 다정히 군다. 위하던 호루라기를 저고리 고름에서 풀어 영이에게 주어도 아깝잖다. 이런 때 노마에게 호루라기 이상의 무슨 귀중한 것이 있었더면 좋았다. 왜냐하면 노마는 어떻게 영이에게 착한 일을 하고 싶으나 그 방법을 몰라 한다.
그날 동네 여인들은 변으로 노마에게 곰살궂게 하였다. 이사람 저사람 머리도 쓰다듬고 떡 같은 것도 갖다 준다. 측은해하는 낯색으로 노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노마는 그들이 하는 대로 풀없는 낯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 속은 어쩐지 겉과 같지 않은 것이 있어 외면을 하는 거다.
"넌 울지두 않니? 남들이 숭보라구."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노마에게 울기를 권한다. 그러나 자기처럼 아니 나오는 울음을 소리만 높여 울면 더 흉이 되지 않을까, 노마는 남부끄러 못 운다. 그러나 영이 할머니가 진정으로 자기가 먼저 울어 보이며 권하는 때도―---
"어떻게 울어."
노마는 사실 제 식으로 진정 울려 해도 도시 울음이 나지 않는다. 거기 실감이 따르지 않는다. 호젓한 집 뒷담 밑으로 돌아가 노마는 짐짓 시르죽은 표정을 한다. 담벼락의 모래알을 뜯어 내며 '아버지는 영 죽었다' 하고 입 밖에 내어 외워 본다. 그리고 되도록 울음이 나오라고 슬픈 생각을 만든다. 하나 머릿속에는 담배 물부리를 찾느라 방바닥을 더듬는 아버지가 나타난다. 거미발 같은 손가락이다. 창 밖에서 쿵쿵 발을 구르며 먼지를 터는 아버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얼굴은 형용을 잡을 수 없다. 그보다는 오늘 노마가 나무 올라가기에 성공한 그 장면이 똑똑히 나타나 덮는다. 갑자기 노마의 키가 자라난 듯싶은 그만큼 보는 세상이 달라지는 감이다. 노마는 부지중 마음이 기뻐진다. 어쩔 수 없는 기쁨이다. 아아,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에게 죄스런 마음이다. 어떻게 무슨 커다란 착한 일을 하기나 하지 않으면 무얼로 이 마음을 씻을 수 있으리요.
"영이야."
"응."
노마는 빤히 영이의 얼굴을 마주 본다. 이처럼 영이가 어여뻐 보이기는 처음이다. 눈두덩 위의 곁두데기까지 무척 귀엽다. 노마는 불시에 두 팔로 영이 목을 끌어다녀 흔든다. 다시 무릎 사이에 넣고 꾹꾹 누른다.
"아이 아이 아이."
뜻에 반하여 노마는 그만 영이를 울리고 만다.
출전:조선일보(1938.1.8~25)
* 연구자료
현덕 문학의 재조명
1.머리말
현덕(玄德, 본명은 玄敬允, 1909-?))은 사람들에게 아직 낮선 작가이다. 그는 등단과 동시에 화려한 조명을 받았으나, 일제 시대에 겨우 이 년 남짓(1938-41) 작가 활동을 한 게 전부라서, 월북 이후론 크게 주목되지 못했다. 월북 문인들이 해금과 함께 활발하게 연구될 때에도 현덕에 대해서만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현덕 문학을 재조명하는 이 글의 문제의식을 제공해 줄 것이다. 첫째는 그가 카프에 소속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월북 문인들에 대한 재조명은 주로 카프 문인들에 집중되었으니, 이는 80년대가 민족문학 또는 계급문학 운동의 고조기였음과 관련된다. 문학 연구와 비평이 밀접한 연관을 갖고 당대 문학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면서 현실 변혁에 대한 의지를 고무시킨 80년대 민족문학 운동은 그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카프와 비슷한 오류를 일부 반복한 점에서 냉정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그가 해방 이후에도 뚜렷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다시 한번 민족문학 운동이 고조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카프 시기와 함께 이 시기 역시 관심의 초점이 되었는데, 카프 출신 문인들뿐 아니라 새로운 신진 작가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였으나, 현덕은 여기에조차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문학가동맹의 출판부장이었다는 사실만 가끔 환기될 뿐이었다. 일제 시대의 작품 활동과 해방 이후의 행적에 관한 연속성을 파악하는 데에서 그 동안 합당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것에는 첫째 오류의 시각이 끼어 있다. 셋째는 그한테 장편소설이 없고 북한에서의 작가적 명성도 희박한 데다가, 남한에 연고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탓에 그의 생애조차 감감하다는 점이다. 과작(寡作)의 작가였던 만큼 그에 대한 연구가 시들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 또한 30년대 후반기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동안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사실의 반영이다. 현덕은 서울 삼청동의 한 별장에서 태어났다. 이는 구한말 궁궐의 수비대장으로서 종2품에까지 오른 그의 조부 현흥택(玄興澤, 1858-1924)의 위세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부친 현동철(玄東轍)은 금광에 손을 대다 가산을 탕진하고 밖으로 나돌았으며, 식구들은 각자도생으로 친적 집들을 돌며 살았다. 그는 당숙네인 대부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대부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여 기간 공부하고 제일고보에 입학(1925)했으나 학비 때문에 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다. 수원 발안 등지에서 막노동일을 했으며, 일본에도 건너가 온갖 잡일을 다해봤지만 몸이 쇠약해 결국은 돌아와서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무신]이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이후 김유정과 깊은 친교를 맺는다. 서울 동대문 밖 낙산과 줄기를 같이하는 산동네에 유정과 현덕이 각각 경사면을 달리하여 살았다. 김유정을 통해 안회남도 알게 되는데, 안회남은 현덕의 등단과 문단 활동을 많이 도왔다. 김유정이 죽고난 뒤 인천의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소설 [남생이]를 쓴다. 그것이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생활을 하면서 [경칩](1938.4.), [두꺼비가 먹은 돈](1938.7), [골목](1939.3), [잣을 까는 집](1939.4), [녹성좌](1939.6-7), [군맹](1940.2)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한다. 1938년부터 39년에 걸쳐 {조선일보} 부록으로 매주 발행되던 {소년조선일보}에 잇달아 '노마' 시리즈 동화를 발표했고, 어린이 잡지 {소년}에는 주로 소년소설들을 발표하였다. 본디 몸이 허약한데다 유정처럼 그도 폐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중편소설 [녹성좌]와 [군맹]을 신문에 연재할 무렵에는 {소년조선일보}에 쓰던 '노마' 시리즈 동화를 아우 현재덕(玄在德, 1912-?)에게 넘겨준다. 곧이어 1년 여 동안 요양차 황해도 지방엘 갔다오는데, 당시 문단을 새롭게 주도해간 {인문평론}과 {문장}에 그가 단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못한 까닭가 여기에 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창작활동이 어렵게 된 시기에 그는 와카모도(若素) 제약회사의 조선출장소 광고부에서 일을 했다. 민족문학 작가회의에 소속되어 있는 전승묵(全承默) 시인이 당시 이 회사의 급사로 있으면서 현덕과 알고 지냈다는데, 전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 회사엔 이른바 불령선인들이 많았다. 다마야 고히찌(玉俗高一)라는 일본의 리버럴리스트 작가가 초대 출장소장을 맡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현덕은 함께 근무했던 화가 박기성(朴基星:해방 후의 행적으로 보아 월북했을 것이라 함)과 둘이서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화와 오장환이 자주 찾아 왔다고 하며, 특히 현덕보다 아홉 살 아래인 오장환은 길 건너편 광산 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던 관계로 가끔씩 시 원고 뭉치를 가져와 현덕에게 보여주곤 했다. 향토색 짙게 배인 오장환의 제3시집 {나 사는 곳}은 바로 이때 씌어진 것들을 해방 후에 묶어낸 것이다. 해방이 되자 현덕은 회사의 종업원관리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좀체로 말이 없고 웃음으로 대답을 하는 성격이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군자로 통했다고 한다. 현덕은 관리위원회 사무를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며 문학가동맹의 일로만 바빴다고 전승묵 시인는 전한다.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위원이자 아동문학부 위원이었으며, 홍구에 이어 출판부장을 역임했다. 이 때 출간된 소설집 {남생이}에는, "병고를 무릅쓰고 문학운동과 문예공작에 종사하는 인간으로서 이 성실성이 반드시 문학적으로 결실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고 끝을 맺는 김남천의 발문이 실려 있는데, 이로써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 사업에 전념한 현덕이 소설을 쓰지 못한 이유가 설명된다. 문학가동맹 서울시지부의 소설부 위원장, 문학대중화위원회의 위원으로서도 활동했고, 정부 수립 후엔 보도연맹의 가입을 피해 지하로 숨어 지내며 쇼로홉의 {고요한 동}(제1권, 대학출판사, 1949)을 노어 전공자인 이홍종과 공동으로 번역 출간하였다. 6.25 전쟁이 나서 서울이 인공 치하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현덕은 밖으로 나온다. 동란 전에 월북한 문인들이 인공 점령하의 서울에 와서 조직한 남조선문학가동맹의 명단을 최근 입수해 보았더니, 안회남이 위원장을 맡았고, 현덕은 부위원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감옥에서 나온 이용악과 이병철이 각각 선전부장과 사업부장인 것을 보면, 현덕은 보도연맹의 가입을 피한 경력이 대우받은 모양이다. 각종 전쟁기 회고물에서 현덕의 이름을 찾기 어렵고, 어쩌다 나타나더라도 뚜렷한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의 조용한 성품 탓이 아닌가 한다. 현덕의 이름이 나오는 거의 유일한 다음의 글은 이런 사정을 어느정도 엿보게 해준다. …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에는 문학동맹과 연극동맹과 미술동맹이 판을 차리고 이른바 김일성의 노래와 소위 인민항쟁가가 귀를 아프게 했다. 문학동맹에는 형무소에서 소위 해방되어 나왔다는 이용악과 이병철이 창백한 얼굴에 도끼눈을 하고 있었고, 소위 지하에서 나왔다는 현덕이 앉아 있었고, 이북에서 넘어왔다는 안회남이가 위원장이 되어 호령을 하고 있었다.(강조 필자) 그는 9.28 서울 수복 때 월북을 한다. 호적엔 50년 9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신고자는 아우의 처인 이계희).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아우 현재덕은 결혼신고(1950.1)가 되어 있으나, 현덕은 미혼인 채이다. 그는 결혼식을 하지 않고 동거 생활을 해왔다는데, 월북 당시 5살쯤 된 딸 아이와 갓난아이가 있었다니까 해방 뒤에 곧 동거를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모친과 처자식 모두 데리고 갔으며, 아우 현재덕도 함께 월북했다. 월북하지 않은 식구로 부친과 누이들은 남한에서 사망하였고, 현재덕의 처와 딸이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현덕은 월북 후에 전쟁과 관련한 몇 편의 작품을 썼으나 대부분 자연주의 작풍으로 호되게 비판되었으며, 한동안 이름이 보이지 않다가 60년 전후에 다시 활동하여 {수확의 날}(1962)이라는 단편집을 한 권 낸다. 하지만 그 이후론 어떤 활동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 아동문학과 관련해서는 아우 현재덕의 이름만을 간혹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3.카프 해체 후 30년대 문학의 조건 한국의 근대문학은 20년대에는 민족과 계급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상적 구도는 30년대 들어 미학적 구도로 바뀌는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20년대 문학의 대립 구도가 고스란히 30년대 문학의 대립 구도로 수평 이동한 것은 아니다. 상대 비교를 전제로 할 때, 30년대 문학의 미학적 구도는 그 성격으로 보아 20년대 문학의 사상적 구도와 계기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30년대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단순히 대립 관계로만 파악하는 것은 역사적 계기를 무시한 형식 논리의 소치이다. 무엇보다 작품의 실상이 이와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20년대 문학 일반이 리얼리즘의 확립 도정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 놓여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30년대의 리얼리즘은 20년대 리얼리즘의 단순 연장일 수 없음이 오히려 분명해진다. 여기엔 30년대의 새로운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발흥이 이것과 대응한다. 리어리즘에 기반한 20년대 민족문학이 민족을 계급으로 조정하는 힘에 의해 현실에 대한 한층 심화된 인식에 도달했듯이, 30년대 민족문학은 리얼리즘을 모더니즘으로 조정하는 힘에 의해 비로소 문학에 대한 한층 심화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자에 카프가 존재했다면 후자엔 구인회가 존재할 터이다. 결국은, 민족과 계급이 모두 근대성이라는 한 몸의 두 얼굴인 것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도 함께 근대성의 두 얼굴인 것을 옳게 파악하는 데서 민족문학 또는 근대문학에 대한 논의가 바루어질 것이라 판단한다. 카프 시기와는 다른 문제 의식을 갖고 출발한 30년대 신진 작가들을 평가함에 그동안 보이지 않는 두 개의 통념이 작용해왔다.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그 역의 시각도 존재한다).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이라는 언표가 이 현상을 요약한다. 그런데 30년대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 우선 이 시기 모더니즘의 발흥은 안으로 카프 시기의 문학적 한계와 맞물려 있고, 밖으로 새로운 근대적 풍경과 맞물려 있다. 뿐 아니라 파시즘의 진군이라는 시대의 폭력도 걸쳐 있다. 우리에게 모더니즘은, 소박한 반영론으로서 속류 사회학주의에 경사된 카프식 리얼리즘을 쇄신하는 역사성에다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특수성까지 겹쳐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모더니즘의 외연이 무한히 확장되어 하나의 개념으로선 공허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시기의 모더니즘을 '역사적 모더니즘'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한편, 30년대 후반기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본격화함에 따라 도시화가 진전되고, 농촌의 피폐화, 도시 세궁민과 실업자의 증가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파시즘의 강화에 따른 정치 사상 운동의 퇴조, 카프의 와해와 전향 등 지식인에겐 환멸과 암흑의 시기였다. 임화는 이 시기 소설의 딜레마를 시대 현실의 중압을 들어 설명한다. "작가의 희망을 살리려면 리얼리즘 대신 로맨티시즘을 취"하지 않을 수 없고 "현실을 있는 대로 그리면… 오히려 암담한 절망을 얻게 되"는 현실, 곧 "작가의 생각을 살리려면 작품의 사실성을 죽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을 버리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소설이 이른바 "세태소설과 내성소설로 분열"해간 현상 역시 "시대의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큰 거리로 떨어져 있는 현실 자체의 분열상의 반영"(347-8쪽)일 터였다. 따라서 30년대 문학은 "말할려는 것과 그릴려는 것과의 분열"(346쪽)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혼돈과 방황, 암흑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전래의 리얼리즘은 이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아이디얼리즘으로 증발하느냐, 아니면 자연주의로 포복하느냐의 갈림길에 처한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표현된 '최초의 문단 좌우합작노선'은 기실 30년대 후반기의 이러한 조건 위에서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파시즘이 강화되고 카프가 와해된 이후부터 뚜렷한 이념적 구심이 없었다든가, 코민테른 노선으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고려할 순 있겠지만, 그보다는 카프(리얼리즘) 쪽과 모더니즘 쪽의 상호 반성에서 사상적·미학적 합류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의 비평가 임화와 김기림의 글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30년대 후반기의 문단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 출판부와 {조광}, 일제 말 가장 유력했던 {문장}과 {인문평론}을 꼼꼼히 살펴보더라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30년대 후반기의 작품들이 그 점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30년대 소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20년대 소설의 '현실'과 비견되는 '일상'이 하나의 문제적 범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둘은 단절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보다 일상이 문제로 된다는 것은 '낡은 것이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념적 위기와 과도적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층 겹으로 에워쌓인 새로운 현실 앞에서 작가들이 그것을 포획할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30년대엔 '지식인의 자의식'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수법이 등장하여 수많은 내성과 세태 소설을 낳는다. 이상과 박태원이 선두에 섰고, 최명익, 유항림, 허준 등 많은 신진 작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의 소설을 리얼리즘과 대립적인 의미의 모더니즘으로만 파악할 때 그 내용은 대단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문제는 여전히 '현실'로서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30년대 소설의 일상성 탐구는 새로운 방법의 고민과 함께 작품의 육체성을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현덕의 소설에는 위의 작가들만큼 지식인의 자의식이 드러나 있지 않다. 이것은 그의 소설이 주로 농촌과 도시 변두리의 하층민 세계를 다루고 있는 데에서 비롯한다. 지식인의 자의식 대신 현덕의 소설엔 나이 어린 '노마'가 등장한다. 이 노마의 존재는 그의 소설을 가장 매력적이게 하는 동시에, 그동안 그의 소설의 한계로 지적되어 온 요인이다. 노마의 순진성은 향수의 매력을 지니되 결국은 현실에 대한 순진한 시각의 반영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덕 소설의 중층 구조를 간과한 것으로, 그 판단에는 분명히 카프식 리얼리즘의 시각이 배어 있다. "향토색 짙은 모더니즘적 기법이 바로 현덕의 미학적 감성대… 인조 보석을 연상하리만큼 치밀한 구성력… 숨겨진 토착어를 채광하여 가장 적절한 위치에다 정렬시키는 깔끔한 장인 의식… 그러나 오히려 이런 치밀성 때문에 민중적 친근감이나 구수한 흙 냄새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동심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자체가 순수성의 한계 때문에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에 이르지 못함을 예시한다." "소작인이 소작인의 적대 관계인 상태로 접어들어 농민 조합 운동의 분위기는 그림자도 없이 되어 버린다." "갈등은 못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구조를 취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주관을 살리자면 작품의 사실성이 죽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자면 주관이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던 임화의 말을 상기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현덕이 일제 말기에 작품 활동을 했으면서도 아이디얼리즘과 자연주의라는 두 개의 함정을 피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노마의 존재가 관건이 된다. 중요한 것은 [남생이]나 [경칩]에서 노마는 일관된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고,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노마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의 세계는 그것대로 당대의 실상과 삶의 모순을 리얼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노마는 당대 삶의 파탄 구조와 타락상을 극명한 대조 효과로 부각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연 현덕의 소설이 동심이란 순수성의 한계 때문에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을 그려내지 못했고, 하층민들끼리 물고뜯는 구조에 지나지 않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동심적 시각 때문에 계급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남생이]에서 노마 아버지는 "지주가 보는 앞에서 마름 김오장의 멱살"(44쪽)을 잡아쥔 까닭에 소작을 잃고 부두의 자유노동자가 된다. [경칩]에서 홍서네는 병들어 땅을 부칠 가망이 없는 노마네 소작에 마음이 끌려 지주집 안주인한테 달걀 꾸러미를 들고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작만으론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어 개펄로 부두로 날품 일을 나가야 했던 노마네나 홍서네였다. [뚜꺼비가 먹은 돈]에서 노마가 잃어버린 돈은 농촌 계몽 사업과 관련해 감옥에 갇힌 노마의 아버지와 연결되고 있다. 물론 이런 계급적 갈등은 이들 소설의 중심 내용은 아니다. 그렇게 하자니 사실이 희생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작가는 농민의 생활고와 이농민의 현실, 그들이 도시 변두리로 자리하면서 겪는 여러 문제들을 주목하였다. [잣을 까는 집] [골목] [군맹]은 도시 변두리 산동네, 특히 세궁민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잣을 까는 집]은 일자리를 잃은 석공네의 비참한 살림 형편을, [골목]은 실업자 지식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다룬 작품이고(주인공은 허영기 그득한 아내의 성화에 날마다 시달리는데, 자기가 순사 시험에 떨어질 체격임을 알고서야 시험을 보기로 한다), [군맹]은 무허가 토막 철거를 둘러싼 주민들의 집단적 대응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녹성좌]는 사회주의 문화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의 고민과 좌절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모두 떠나더라도 끝내 자리를 지키려는 주인공의 발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현덕은 일정하게 각성한 주인공들을 작품 속에 포함하고 있으며, 농민, 도시 빈민, 실업자 지식인, 사회주의 문화운동가 등 당대 민중의 피폐해진 삶을 통해 시대 현실에 접근하여 했음이 밝혀진다. 모두 전형적인 상황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리얼리즘 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둘째로 하층민들끼리 물고뜯는다는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생이]는 우선 30년대 인천항 부두의 생태에 관한 정밀한 보고서이다. 배 와 육지를 잇는 연육교를 중심으로 볏섬이나 소금 따위를 져나르는 부두의 자유노동자들과, 그들을 상대로 하는 무허가 이발사, 들병 장수, 그밖에도 그곳 마당지기 앞잡이에서부터 낙정미를 주워 모으는 사람들까지, 이른바 '선창 벌이'의 생활을 한 폭에 담아내었다. 작가는 이들의 생태를 단지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또렷한 인상과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당대 삶의 추이를 정확하게 해부해나간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노마는 유일하게 성장의 주인공이다. 아버지가 죽던 날, 노마는 그렇게도 오르려 하나 못 오르던 나무에 기어올라 세상을 거꾸로 바라다본다. 원래 나무에 오르면 기차와 선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자기는 돈을 벌어 병든 아버지와 밖으로 나도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노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털보와 눈이 맞아 아버지를 배반했고, 부친상을 당했어도 나오지 않는 눈물 때문에 갖게 되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은 동무 영이에 대한 보살핌의 감정으로 옮아간다. 바로 여기에서 이 작품은 도저한 암흑 속에서도 일말의 생기를 내뿜는 것이니, 이것은 최원식 교수가 김유정의 작품에서 주목한 바의 새로운 층위에 값한다. [경칩]에서는 노마 아버지의 친구 홍서가 주인공격이 되어 '그러지 않으려도 그렇게 되고마는 안간힘의 밀려남'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곧 이 작품은 홍서가 노마네 소작권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을 홍서의 내밀한 심리 추적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서의 배신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따금씩 밭두덩을 뛰어다니며 등장하는 노마와 그의 또래 친구들을 근거리 또는 원거리 묘사로 적절하게 구사하여 파멸하는 농촌 풍경을 한층 고적하게 만드는 한편, 시대의 우수로 가득한 향토적 서정을 촉발해낸다. 그리고 회생할 가망이 없는 친구 논을 차지한 데 대한 홍서의 연민이라든지 미안한 감정과, 땅에 대한 농민의 육친적 애정을 진하게 교차시킨다. 여기서 노마의 존재는 홍서의 배반을 개인의 악덕으로 치부하지 않게 해주는 해학의 장치로서 결정적이다. 홍서가 노마네 땅을 밟고 서서 온갖 감정에 빠져 있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노마가 나타나 말을 건다. "우랭이 잡우?" 그런데, [남생이]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의 해학성은 거꾸로 가슴을 저미는 통증과 고독감, 연민의 정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파멸은 정작 노마네가 맞이하는 내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아무것도 모르고 노마가 멀리서 홍서를 향해 막대기 총을 쏘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홍서는 무심결에 되돌아가는 노마를 불러 백동전을 하나 건네 준다. 담배를 사려고 넣어 두었던 돈이다. 그에겐 적은 돈이 아니로되 아까운 줄을 모르는 홍서였다. 허나 무슨 뜻으로 그 노마에게 돈을 준 것인지는 또 좀 몰랐다. 다만 보리밭 사잇길로 둔덕을 넘어가는 노마의 검정 바지 저고리를 입은 작은 뒷모양이 무한 측은했다. 조금 후 둔덕을 넘어 맞은편 언덕길에 노마를 선두로 조랑조랑 기동이 형제가 뒤를 따라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멀어 가는 모양이 보일 때 홍서는 좀더 마음이 애련했다. 점점 그 모양은 졸아지며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홍서는 자기 한 몸만 천리 만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외로움에 사무친다.(38쪽) 끝 장면에서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홍서는 친구 노마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홍서 자신이 노마 아버지만큼 귀 뒤에 살이 여위든, 아니면 노마 아버지 자신이 홍서만큼 귀 뒤에 살이 오르든"(같은곳) 하지 않고서는 "골수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거듭 짙은 외로움에 휩싸인다. 인물의 내면을 꿰뚫고 시대의 본질로 다가서는 이런 대목은 신경향파 작품 이상으로 당대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노마를 통해 개척한 현덕 소설의 새로운 층위는 무엇보다 당대 현실 속에서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로 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으니, 현덕의 문학도 흔들리다가 마침내 두 방향의 분열을 겪는다. [두꺼비가 먹은 돈]은 노마를 더욱 전경화한 바람에 그야말로 순진성의 세계로 떨어졌고, 가장 적극적인 주인공을 내세운 중편소설 [녹성좌]는 구성과 인물을 장악하는 힘이 현저히 약해서 작품성을 결하고 있다(김남천은 {남생이} 발문에서, 자신이 퍽 주목한 이 작품이 "중단"되고 말았다고 밝힌 바 있으나, 신문 연재물에선 완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장편으로 구상했던 것을 건강상의 이유로 서둘러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작품 [군맹]은 새로운 도시개발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성문 밖 토막촌 사람들의 운명과 생태를 다각도로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철거민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이 지도자의 매수로 실패하고, 남은 인물들은 "자기 앞에 가로막힌 컴컴한 어둠을 자각"(224쪽)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결국 현덕은 시대의 한계 때문인지, 희망 없는 현실의 암흑을 그리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30년대 모더니즘과 함께 연마된, 인물의 내밀한 행동심리를 수반하는 풍부하고도 정밀한 묘사력과, 이를 바탕으로 시대의 본질을 일상성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30년대 후반기 리얼리즘 소설의 특질이 그의 모든 작품을 관류하고 있다. 동화에는 노마, 기동이, 똘똘이, 영이가 계속 등장한다. 이들 중 기동이 하나만은 부잣집 아이로서 다른 아이들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 그것은 기동이가 가게에서 돈 주고 산 장난감이나 과자 따위로 아이들 앞에서 곧잘 으시대는 탓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사이 좋은 한 동네의 천덕꾸러기들이다. 기동이한테 간혹 부여되는 벌이란 아이들이 저들끼리만 알고 기동이에게는 안 가르쳐 준다든지, 기차놀이에서 손님으로 태워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정도이고, 함께 놀 때에도 기동이에겐 끝에 가서 당하고야 마는 배역('쥐와 고양이 놀이'에서 고양이, '토끼 삼형제 놀이'에서 늑대)을 정해 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동이가 가지고 오는 먹을 것이나 장난감들은 가난한 아이들에겐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여기서 노마의 총명함이 발휘된다. 그는 장난감 없이도 각종 놀이를 주도해 나가며, 궁리 끝에 손수 장난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진하면서도 용기와 지혜를 함께 갖춘 노마의 형상엔 다음 세대를 향한 작가의 의식과 소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소년소설 가운데 대표작 [나비를 잡는 아버지]를 보면, 마름과 소작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 구조이면서도 마름집 눈치를 보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현실을 바우가 온몸으로 깨닫고 껴앉는 것으로 끝이 난다. 소년소설에서는 청소년기의 특성대로 우정과 양심, 의리, 연민의 세계를 주로 다루었다. 같은 시기에 쓴 것들인데도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과 아동문학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이렇듯 다르게 나타난다. 하지만, 동화의 세계에서나 소년소설의 세계에서나 현덕은 확고한 리얼리즘의 정신 아래 작품을 썼다. 더욱이 '계급모순 환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카프 아동문학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 현덕은 자리한다. 아동문학에서 그는, 어린이의 심리 특성과 독자의 연령을 옳게 파악하고 수용한 일급 작가였다. 민족문학 전체의 유산으로서 20년대 경향문학의 충격과 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충격을 정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가 있다. 30년대 중반부터 이념적·미학적 대립이 해소되고 문단의 통일적 기운이 무르녹아 있었음을 우리는 현덕의 삶과 문학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0년대 후반기 문학을 살핌에는, 새로운 현실의 도래와 더불어 카프 시기의 낭만적 충동은 거의 소멸했음에도, 당시 모더니즘이 창작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최명익, 허준, 유항림 같은 작가에게서도 발견되지만, 백석, 이용악, 오장환 같은 시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철저한 리얼리즘 정신에 바탕하지 않고서는 정비석 류의 감각적 통속문학, 김동리나 이효석 류의 신비주의 문학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기 또한 쉬운 일이었다. 이제 30년대 문학의 세련도를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으로 파악하는 시각의 문제점을 다시 돌아보자. 30년대 문학의 세련도가 정치 사상성의 후퇴를 반영한다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냐 할 때는 또 사정이 다르다. 30년대 문학의 세련도는 현실의 단순 재현이라는 속류 사회학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현실을 포획하려는 문학적 대응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30년대 문학을 바라볼 때는 '파시즘의 대두에 따른 시대의 한계'와 그 속에서도 진행되었던 '한 점 빛을 향하는 힘겨운 고투'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30년대 후반기의 신진 작가들뿐 아니라, 흔히 카프와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구인회에 속한 작가와 시인들, 예컨대 이태준, 정지용, 이상, 박태원, 김유정 등의 문학을 오늘날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비롯한다. 민족이냐 계급이냐가 우문인 것처럼,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택일적 주문에서도 이젠 벗어나야 하겠다. 페리 앤더슨이 지적한 바대로 새로운 시간의 흐름만을 구성하는 모더니즘의 개념 자체는 매우 공허하지만, 모더니즘은 새로운 문명의 충격에 대한 응수를 형식면에서 탐구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민족문학은, 리얼리즘을 가장 뚜렷한 미학적 원리로 인정하되 현실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모더니즘(모더니티)을 흡수 지양함으로써 자기를 갱신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민예총 인천지회 주관 제4회 인천민족문학제 발표문, 1996)
* 심화 연구자료
현덕 자료 1. http://dongsim.net/gnu4/bbs/board.php?bo_table=hyundek&wr_id=4&page= 2. 원종찬 박사학위 논문 http://dspace.inha.ac.kr/pdfupload/1498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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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덕의 동화를 읽을 때 마다, 이토록 순수하게, 인물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현실적 비참함을 담담하게,....담담해서 차라리 너무 슬프게 끔 그려낼 수 있었던 그의 감수성과 필력에 놀라곤 합니다. 학봉님 덕분에 오랜만에 '남생이'를 다시 읽고... 가슴이 아픕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