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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安重根 (1879~1910) 】
"민족의 [聖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 역에서 대기하던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권총 4발을 쏜다.
그리고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추가로 쐈다.
重根, 素未見伊藤,
안중근은 본래 이토 히로부미를 본 적이 없는데,
惟嘗於報紙所載之小像, 竊識之.
오직 일찍이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은밀히 알게 됐다.
乃披軍隊而入, 擧槍射之,
곧 군대를 헤치고 들어가 총을 들어 쏘니,
三丸中胸腹, 伊藤遂死.
세 발이 배에 맞아 이토 히로부미는 즉사했다.
又射伊藤從者三人, 亦皆仆.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 세 사람을 쏘니, 또한 모두 쓰러졌다.
於是, 重根, 大呼大韓萬歲, 軍隊就而縛之.
이에 안중근은 크게 “대한만세!”라 외치자, 군대가 나와서 그를 포박했다.
重根大笑曰: “我豈逃者哉?” -『韶濩堂集』
중근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도망 갈 사람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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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타난 이토 히로부미 암살장면
重根, 奮起曰:
안중근이 의기충만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老賊來此也, 天假機會也.”
“늙은 도적놈(伊藤博文)이 여기에 오니, 하늘이 빌려준 기회다.”
直走哈爾賓驛, 立露軍之背後,
곧바로 하얼빈역으로 달려가 러시아 군대의 등 뒤에 서서
相距直十步, 擧銃一發, 中李藤胸.
서로의 거리가 다만 십 보일 때에 총을 들고 한 발을 쏘니 이토의 가슴에 맞았다.
各軍, 來集, 奪重根銃, 付憲兵.
각 군대가 부리나케 모여들어 중근의 총을 빼앗았고 헌병에 붙잡혔다.
重根, 倒其銃而予之, 以拉丁語, 三呼大韓獨立萬歲.
중근은 총을 거꾸로 들고 주었고 라틴어로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다.
被縛, 重根, 拍掌大笑曰:
결박 당하자 안중근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我豈逃者哉. 我欲逃, 我不入死地.”
“내가 어찌 도망가겠나. 도망가려 했다면 나는 사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네.”
於是, 全球震動, 人皆吐舌曰:
이때에 온 지구가 진동했고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韓國有人.” -『韓國獨立運動之血史』
“한국에 대단한 사람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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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의 안중근 의사 유언
及其最終公判後, 謂二弟定根ㆍ恭根曰:
최후 공판이 끝난 후에 두 아우 정근과 공근에게 말했다.
“我死後, 埋我骨於哈爾濱公園之傍,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待我國權回復, 返葬故土.
우리나라의 국권이 회복되길 기다려 고국에 묻어주게.
我往天國, 亦當爲我國家恢復盡力,
내가 천국에 가서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진력할 것이니,
汝等爲我告同胞,
너희들은 나를 위해 동포에게 말해다오.
各擔國家之責任, 盡國民之義務,
각자 국가의 책임을 담당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同心一力, 建功樹業,
같은 마음과 하나의 힘으로 공을 이루고 업을 세워
大韓獨立之聲, 達於天國,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도달한다면,
則餘當蹈舞, 呼萬歲矣.”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외칠 거라고 말일세.”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 立刑場, 欣然而言曰:
경술(1910)년 양력 3월 26일 오후 10시에 형장에 서서 흔쾌히 말했다.
“余爲大韓獨立而死,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고,
爲東洋平和而死, 死何憾焉?”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는 것이 어찌 섭섭하겠는가?”
遂換着韓服, 從容就刑, 年三十有二. -『韓國痛史』
마침내 한복으로 환복하고서 조용히 형을 받았으니, 나이가 3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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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전 안중근의사가 지은 친필 장부가
장부가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 쥐 도젹 ○○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 ○○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한테서 총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만세라는 뜻.
처음 발사된 4발 가운데 3발이 이토에게 적중했다.
곧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한다.
이토 히로부미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일제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거사 이듬해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여순)감옥에서 결국 순국한다.
이때 안의사의 나이 32살. 그리고 약 5개월 후(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 김아려 여사, 작은아들 안준생, 큰아들 안분도
안중근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유족들은 그대로 남겨졌다.
서슬퍼런 일제 식민지시대, 그 가족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제 1909년 10월 26일, 거사 이후 우리가 잘 모르는 안중근의 가족들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안중근은 의거 직전 동료를 통해 유족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연해주에 거처를 마련했고 급히 그곳으로 가라는 내용이었다.
기차를 타고 연해주로 가는 길 유족들은 중국 어느 정거장에 닿았다.
맞은편엔 기차 한대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이 실린 기차였고
그때까지도 가족들은 안중근의 의거를 모르고 있었다.
안중근의 유족들, 중국 상하이에서
야반도주하듯 머나먼 연해주 땅에 도착한 가족들은 늘 불안감 속에 생활했다.
그러다 1911년 여름, 7살의 맏아들 안분도는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죽었다.
가족들은 일제가 저지른 짓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7~8년을 떠돌다 가족들은 중국 상해로 이주한다.
상해에 출범한 임시정부가 가족들을 부른 것이었다. 상해에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안중근의 유족을 아끼고 보호했다.
이때 안준생은 가톨릭스쿨에 입학해 영어를 공부했다.
안의사의 의거 이후 가족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평안한 날들이었다.
윤봉길 의사
그러던 어느 날, 임시정부가 사라졌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1932년 4월 29일)
일본은 배후에 있는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를 찾아내기 위해 상해를 샅샅이 뒤졌다.
안중근의 유족은 그렇게 상해에 버려졌다.
일제는 사라진 임시정부 대신 안중근의 유족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유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살았다.
맨 왼쪽 안준생, 맨 오른쪽 이토 히로쿠니
특히 안준생은 서른살이 될때까지도 제대로된 밥벌이를 할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은 안준생이 직장을 얻으면 나중에 들이닥쳐 언제나 훼방을 놓았다.
유족들은 그렇게 상하이에서 끝도없는 터널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안준생의 앞에 일본 고위층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안준생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안중근이냐고 물었다.
안준생이 머뭇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들 중 하나가 자기를 미나미 총독이라 소개했다.
미나미 총독
그는 안준생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안준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무슨말이냐 되물었다.
미나미 총독은 안준생에게 곧 서울 박문사라는 절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 행사에 참여해 이토히로부미의 아들인 이토히로쿠니에게 사과하라고 제안했다.
사실 제안이 아닌 협박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안준생은 죽게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나온 일을 잊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안준생
안준생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변졀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안을 거절하고 이렇게 죽는 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생각했다.
사실 안준생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히토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안준생은 고작 3살이었다.
대신 낯선 이국땅에서 어머니, 할머니 누나와 함께 집 없이 떠돌아다닌 기억,
임시정부가 떠나버린 상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끼니를 때웠던 기억,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서 변변한 일자리 없이 비참한 나날을 보낸 기억들이 순간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냥 잠깐 어느 한순간이라도 편하게 산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안준생은 생각했다.
"아버지는 영웅이었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영웅처럼 살 수 없고 그렇게 살 필요도 없다"
박문사에서 참배하는 안준생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博文寺)
얼마 전부터 떠돌던 믿기지 않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박문사 마당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미나미 총독의 연설이 끝나고 이토 히로쿠니가 무대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라는 소개와 함께 미나미 총독은
안준생을 불러 안중근의 아들이라며 소개했다.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그때 미나미 총독이 두 사람을 무대 가운데로 이끌었고
안준생 앞에 선 이토 히로쿠니가 한 손을 내밀었다.
안준생이 허리를 숙이며 두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고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날 이후 안준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고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일본 곳곳을 돌며 '눈물의 화해'를 재현했다.
조선사람들 대부분은 안준생에 대해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 자식)'라 칭하며 침을 뱉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반드시 죽여 응징해야할 대상으로 안준생을 꼽았다.
그리고 백범일지에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청에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적어놓았다.
안준생의 어머니 김아려 여사
막대한 상금을 받고 안준생은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어머니 김아려는 돌아온 안준생을 껴안으며 "고생했다"고 위로했다.
또한,
측은한 눈길로 아들을 보며 30년 지옥 같은 고생길을 걷어낸 ‘변절’을 어루만져주었다.
안준생과 그의 가족들
안준생은 2살 많은 정옥녀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그리고 어머니 김아려의 조언에 따라 약국을 차렸다.
그렇게 안준생은 많은 돈을 벌고 풍족하게 살며 인생에서 더없이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아내 정옥녀와 자식들을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의 국내로 혼자 귀국했다.
귀국한 안준생은 부산에서 폐결핵을 앓다
1951년 귀국한 그해 쓸쓸하게 사망한다.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나요?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나요.
아버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죽음을 택한 것이지만,
나는 왜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겠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안중근의 삶과 믿음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다. 안중근의 집안은 전통적인 기반을 누리던 문중이 어떻게 복음화 되며, 동시에 교회에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변모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갑신정변 때부터 새 기운을 찾으려던 이들은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틀을 갖추었다.
안중근은 19세 때 고향 사람 32명과 함께 영세하여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고, 신부의 복사로 전교하러 다녔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를 놓지 않았다. 하느님을 모시고, ‘천진하고 명랑한 신앙’을 갖게 된 안중근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해냈다.
그는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했다. 후에는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활동을 하면서 함북 경흥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한복판, 러시아군이 대열해 있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주변에 있던 고관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의거 후 안중근은 만세를 부르고 총을 든 채 순순히 체포되었다. 긍지에 가득 찬 그의 태도는 수많은 애국심을 부추겼다. 박은식을 비롯하여 중국의 양계초 등 국내외 지성들이 그를 세계적 안광眼光을 지닌 평화 사상가로 기렸다. 심지어 일본인 간수나 지성인들도 그의 사상에 공감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용기와 삶의 기반을 이룬 신실한 신앙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계동성당과 황해도 전교
빌렘(홍석구 신부)
황해도 천주교회사는 황해도의 첫 선교사인 빌렘 신부와 안중근 일가의 신천 청계동이 중심이었다. 안중근 토마스는 1879년 황해도 지역의 유력가문이던 안태훈 진사와 백천 조씨 사이에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1897년 1월 10일 부친을 비롯한 청계동 주민들과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때 공소가 시작되었다.
영세 입교 후 안씨 집안은 천주교 선교에 앞장섰다. 안태훈의 6형제 중 장남만 제외하고 전부 입교했는데, 셋째 즉 안중근의 부친은 빌렘 신부의 외무장관, 넷째 안태건은 전교회장, 안중근은 복사를 맡았다.
안중근 가족은 청계동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서 헌신했는데, 1898년 4월 빌렘 신부가 청계동으로 옮겨오면서 황해도의 두번째 성당이 되었다. 청계동의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고, 황해도 자체의 교세도 급증하여, 한때는 황해도의 교세확장이 전국에서 선두였다. 우도 신부 등 여러 신부가 황해도로 투입되었다. 청계동은 황해도 선교의 지휘부 역할을 했다. 안중근은 여기서 제대로 맺어진 신앙의 열매였다.
청계동 성당
안중근의 전교활동
안중근은 영세한 후 빌렘 신부의 복사가 되어 해주, 옹진 등 황해도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종사했다. 안중근은 ‘충실’했고, ‘모범적’이었다.
그는 혼자서만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재주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의 정리라고 할 수 없다며, 한번 먹기만 하면 장생불사하는 음식과 한번 통하기만 하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재주를 함께 나누자고 군중을 초대했다. 그리고 주요교리, 교회조직과 체계 등을 설명하며, 세계 문명국 지성들은 모두 천주를 믿는다고 설파했다. 그는 모두 천주의 의자義子가 되어, 현세를 도덕시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영복을 누리자고 외쳤다.
교리 강론 중인 빌렘 신부
그런데, 대한제국이 급박하게 몰락해가자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는 간도와 연해주를 배경으로 망명생활을 하며,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 나섰다.
의병전쟁 중에도 그는 아침, 저녁 기도와 묵주신공을 빠뜨리지 않았다. 의병의 짐 속에는 항상 ‘공과’와 첨례표가 있었다. 물론, 전투에서도 복음정신을 실천했다.
1907년 안중근 부대는 경흥에서 무장전투를 하던 중 일본군들을 체포했다. 이때 포로들을 끌고 이동할 수 없었던 안중근은 동지들의 처형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석방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과 ‘그리스도의 사명’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풀려난 포로들이 정보를 제공하여 안중근 부대는 초토화되었다. 안중근과 동료 두 사람은 산속을 헤매면서 12일 동안 단 두 끼의 밥을 얻어먹는 극도의 위기상황을 맞았다. 안중근은 죽을지 모른다고 판단되자, 두 동료에게 주요교리를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 대세를 베푸는 것부터 했다.
1909년 의거를 결행하기 전날 밤에는 머물던 집의 객실에서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줄칼로 권총 탄알 끝을 뾰쪽하게 갈고 십자표시를 새겨 7발을 장탄해 놓았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십자성호를 그었다. 다음 날도 거사 성공을 위해 특별히 기도했다.
안 의사가 빌렘 신부에게 보낸 편지
하늘로 가는 준비
안중근은 거사 후 뤼순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신앙의 사람 안중근은 처형되기 전에 하늘로 가는 준비를 마쳐야 했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형제들을 통해, 편지와 전보를 이용하여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와 빌렘 신부께 성사를 볼 수 있도록 요청했다. 또한 그는 일본 당국의 허가도 얻어내어, 재판 담당판사가 주교와 신부에게 옥에서의 성사를 허락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안중근의 사촌도 뮈텔 주교를 찾아갔다. 주교께 여러 번 여행을 청했던 빌렘 신부는 결국 허락 없이 뤼순에 갔다.
3월8일 신부는 안중근의 두 동생과 함께 안중근을 면회했다. 면회가 끝나자 안중근은 고해성사의 기회를 요청했다. 일본인들은 다음날 오전 10시로 정해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검찰관은 형무소 규칙상 수감자와 개인적 면회는 허용되지 않는다며 제동을 걸었다. 신부는 몇 시간에 걸쳐 고해성사에 대해 설명했으나, 결국 통역과 간수들이 배석한 가운데 성사를 집행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신부와 안중근은 마치 어느 오래된 대성당의 한구석에 있는 것처럼 성사에 몰입했다. 성사가 끝나자 안중근은 신부에게 영성체를 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안중근이 형무소장에게 허가를 청했고, 형무소에서는 이를 허락했다.
다음날인 3월 10일 10시 신부는 안중근의 동생들과 함께 옥으로 갔다. 난관은 안중근의 영성체였다. 형무소에서는 수감자의 독살을 염려하여 규칙상 외부 음식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신부는 가져온 제병들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두 형제에게 직접 제병을 골라 맛보게 했다. 이런 소동을 거친 뒤, 겨우 신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응접실에서통역인과 직원들이 신부를 도와 제대를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자 안중근이 들어왔다. 신부는 그의 수갑을 풀어주게 했다. 신부는 안중근에게 말했다. “ … 주님의 은총에감사하고,자네가 바치게 될 마지막 미사인 이 미사에 성실히 참례하도록 노력하게. 자네가 청년 신자였을 적에 청계동에서 내가 미사 드리는 것을 도왔듯이 나를 돕도록 하게.”
형무소장 등 11명이 제대에서 3m떨어진 곳에 각자자기의 검에기대어 반원 형태로 둘러서 있었다.
신부와 안중근은 성호경을 그으며 미사를 시작했다. 안중근은 5년 동안 미사참례를 하지 못했어도 응답문을 한 구절도 잊지 않았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응답했다. 미사는 천천히 거행되었다.
둘은 벅찬 감격 속에 몰입했다. 복음서 봉독 후, 신부는 한국어로 된 성경 말씀을 읽고 안중근에게 설명했다. 산상수훈이었다.
“자네 역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온 그 군중 속으로 들어왔네. … 우리 주님은 착한 강도가 지은 죄를 꾸짖지 않으시고 그에게 ‘오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네.”
미사는 안중근의 영성체로 끝맺었다. 성체성사와 노자성체를 한꺼번에 베풀었다.
안중근과 빌렘 신부
안중근은 특별히 1910년 성금요일인 3월 25일을 처형일로 요청하고 허락받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토가 죽은 26일 같은 시간에 형을 집행하여 이토를 위로하고자 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전날 밤 받은 어머니가 지어 보낸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간수 네 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갔다. 교도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를 사살함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이 서로 협력해서 동양평화를 도모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3분 남짓 기도를 하고 말없이 사형대로 올라가 “동양 평화 만세”를 외치고 의젓하게 그의 길을 갔다. 그가 몸에 지녔던 성화聖畵는 관에 부착되었다.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청계동에는 부활대축일 미사를 마치고 기뻐할 때 안중근의 순국 소식이 도착했다. 부활종이 천천히 조종을 올렸고, 신자들은 경당에 모여 연도를 바쳤다. 영세 신부에게서 노자성사를 받은 안중근은 영세받은 곳에서 연도를 들으며 그가 바라던 하느님께로 갔다.
안중근은 옥에서 유서를 남겼다. 그가 순국 전 이틀간에 걸쳐 쓴 어머니, 부인,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각각 다른 사람에게 보낸 유서의 첫 인사말이 “찬미예수”였음이 눈에 띈다. 찬미예수란 1862년부터 천주교 신자 사이에 친소나 신분의 구별 없이 쓰이던 인사였다. 그의 신앙은 생활 속에 철저히 배어있었다.
그리고 안중근은 모든 이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생전에 그는,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입니다.”라고 외쳤다. 그가 매사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힘이었다. 또한 그가 지녔던 범 인류애적 정의와 평화는 이 믿음에서 퍼 올린 가르침이었다. 성실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답으로 내려주신 열매였다.
안중근의 유묵 경천
안중근의 명랑한 신앙과 교회적 갈등
안중근은 철저한 신앙인이었지만, 그의 인생의 중추였던 교회는 그의 신념에 찬 행위를 부정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안중근의 그리스도교적 행동에는 의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의거에 대해 당시 교회는 다른 의견을 가졌다.
뮈텔 주교는 의거 소식을 듣고 천주교인이 연루되었음을 부인했고, 나중에는 대중매체에서 저격범이 천주교 신자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주교는 이토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고, 안중근의 의거를 단순한 살인행위로 보았다.
안중근도 감옥에서 이런 평가들을 전해 들었다. 그는 고립무원에 빠졌지만, 자신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다 체포된 포로일 뿐이며 자신의 행위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라는 대의를 위한 정당한 것임을 굽히지 않았다.
재판장이 안중근에게 저격 후 자살하거나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한국 독립의군 참모중장으로서 … 그때 비록 호신용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살이나 도주와 같이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실제로 형장까지 찾아와 성사를 준 빌렘 신부도 일찍부터 안중근의 민족운동에 반대했었다. 안중근은 뮈텔 주교께 대학설립을 건의했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또 그는 무장투쟁에 투신하러 러시아로 가던 중 원산본당의 브레(Bret, 백) 신부로부터 반침략 민족운동에 투신한다는 이유로 성사를 제한 당했다. 그는 한때 빌렘 신부의 전횡을 참지 못해 갈등하기도 했다.
그래도 안중근은 교회에서 상처받지 않았다. 그의 신앙은 걸림이 없는 ‘천진성’이 있었다. 마치 우리 초대교회처럼 평신도로서 긍지가 살아있었다.
결국, 1993년에 이르러, 김수환 추기경의 입으로 일제강점기 교회가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며,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의거로 선언했다. 안 의사가 혼자 투쟁할 때 위로하지 못한 교회는 뒤늦게 그를 인정했다.
그러나 안 의사의 신앙은 언제나 동일했다. 그에게는 교회의 가르침과 세속의 정의가 나뉘지 않았다. 또한 ‘동양평화론’처럼 안중근에게 있어서 이웃이라는 범위는 범 인류였다. 그래서 안중근의 이상적 공정, 이상적 평화의 입장이 적敵조차 감동시키고, 시대가 바뀌어도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세계적 보편질서를 지향하면서도 각 나라 현장에서 운행되는 교회가 사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안중근은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실천했다.(출처: 『영성생활』 63호, 2022년 5월, 김정숙 -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역사학))
청계동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