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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6월6일 현충일에 강진 다산의 발자취를 돌아 볼 답사 계획이 참여 인원 저조로 취소하고 뜻있는 몇몇이서 대구 수목원-남평문씨 세거지- 한훤당 김굉필 선생 종택- 도동서원을 답사 할 계획을 세워 떠납니다.>
아래 글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조선 500년간 가장 존경 받는 선비로 평가 받는 스승 입니다.우리 가까운 곳에 한훤당 선생님의 여러 유적들이 있습니다. 기회 되면 한번 가보시기를 권하는 곳 입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동방 5현 중 수현(최고의 선비)으로 존경 받는 인물이다 스승인 김종직 선생(밀양출신)으로부터 소학을 철처히 배워 본인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불렀다.
소학이란 기초 학문이 조선 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무오사화, 감자 사화를 거치면서 유배 되었고 유배지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을 만나 가르쳤다.김안국, 최산두, 조광조, 손중돈 등 조선의 걸출한 인물의 스승이었다.
그의 스승 김종직 선생이, 세조의 녹을 먹었고, 성종때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고 녹을 먹는다는 이유로 한때 스승과 의절하기도하였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성원 중 가장 아름다운 서원으로 평가 받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서원이다. 환주문, 절병통, 긴 담은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강학당을 받치는 기단은 성곽을 쌓은 형식으로 쌓았고, 용머리를 군데 군데 박아서 화재를 예방하는 목적을 두었다. 강학단 기둥에 흰 문종이를 30Cm 폭 정도로 둘러쳐저 있는 모양은 동방 5현중에 수현이란 표시이다.입구의 은행 나무가 다른 노거수의 은행나무와 다른 특이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 가실 때, 목욕 재개하고 깨끗한 한복으로 갈아 입고 정좌하여 수염을 꼬아서 옆으로 재끼고 사약을 마셨다고 한다. 부모로 받은 신체의 일부인, 수염을 사약에 담글수는 없다는 의미이다.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효경(孝經)》에 실린 공자의 가르침이다.사약을 받고 죽음에서도 소학을 실천한 위대한 스승이다.<한훤당 깅굉필>김굉필(金宏弼,1454년~1504년 10월 7일)은조선전기의 문인, 교육자,성리학자, 화가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김일손,김전,남곤,정여창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1472년(성종 3년) 19세 때 경상도 합천군 야로말곡 남교동(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 남교마을)에 사는 순천 박씨(朴氏) 가문으로 장가들었다. 처가 주변 개천 건너 지동(地東)이라 부르는 작은 바위 아래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이후 김굉필은 한훤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1480년(성종 11) 식년과 생원시와 초시에 합격하고,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494년(성종 25년)훈구파출신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연좌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전남 순천군으로 이배되어 1504년 갑자사화로 시장에서 사형되었다. 중종 반정후 복권되어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고,1517년 증우의정으로 추증 되기도하였다.
김종직이 죽기 전까지 함께 강론하며 사제의 예를 다했다는 기록이 최근 김종직이 다른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나와 있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이심원·김안국·이연경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김굉필의 문인들과 이들의 학통은 후대에 가서 조광조,백인걸의 학통과 함께 기호 사림파를 거쳐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문묘에 종사된동방5현중의 한 사람이다.한훤당 김굉필은1454년 어모장군 김유(金紐)와 한승순의 딸 청주한씨의 아들로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나, 집안을 따라 달성군 현풍으로 이주, 그 곳에서 성장했다. 그리하여 일설에는 그의 고향을 대구광역시나 경상북도로 보기도 한다.만년에는경상남도 합천에 정착했다.
<소학과 청년기>영남의 유학자 김종직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어느날 《소학》의 어느 글귀를 읽고 깊이 감동한다. 이후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 (小學童子)"라 일컬었고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문 전통을 이어,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가 되었다. 그는《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문을 할 수 없고,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학에 나온대로 실천에 힘썼다.그는 남들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하여 이 때문에 고민하였으나, 김종직은 그에게 학문을 하는데 있어 늦고 빠른 것은 없다며 자신은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천에 힘쓴다면 나중에는 크게 발전할 것이라며 권면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였으니 더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였다. 초기에는 힘들었으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기 시작, 나중에는 새벽에 닭이 울지 않아도 저절로 기상하게 되었다.김종직의 문하에는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 되었다. 조광조, 정여창, 김굉필, 손중돈, 감안국, 최산두 등 역사에 남을 인물이 이다. 김굉필은 김종직 문하에서 김전(金詮),김일손,권오복,남곤,이목,정여창등을 만나 교류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그는 김종직의 뛰어난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 있을 때 향시에 합격했는데, "업문유미식천기, 소학서중오작비, 종차진심공자직, 구구하용선경비"라고 쓴 향시의 답안이 전한다.그뒤1480년(성종 11) 식년과 생원시에 3등 32위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는 중에도 조정의 정책에 대한 여러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 유생이 된 첫 해에 초시에 합격하였다.<김종직과의 결별>그러나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 참판에 등용된 뒤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김굉필은 이를 비판하였다. 이때 김굉필을 비롯한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스승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중직에 임용되자, 김종직은 조정에 건의 하나 올리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굉필은 스승과 사이가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편의 시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타협적인 처세를 완곡하게 비판했다.도(道)라는 것은 겨울엔 갖옷 입고 여름엔 얼음 마시는 것인데 /날 개면 가고 비 오면 그치는 것을 어찌 전능(全能)이라 하겠는가 /난초도 속된 것을 좇아 결국 변한다면 /어느 누가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자신을 신랄하게 풍자한 제자의 시에 심기가 불편해진 김종직은 이에 화답하는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내면서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내비치면서 자신의 처세가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분수에 맞지 않게 공경대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내가 어찌 임금을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그대 같은 후학(後學)들이 나의 허물과 어리석음 조롱하지만 /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는 않네.그러나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굉필의 나이 39세가 되는 1492년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지기 남효온이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연보(年譜)에는 남효온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나오지만 김종직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를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다.<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오랫동안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그는1492년 스승이 죽자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서실을 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성리학을 널리 확산시켰다.수많은 양반 관료들과 중인들, 양인 자제들까지도 그의 문하에 찾아왔고,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문하생을 받아들였다. 재물 욕심이 없던 그는 일부 뜻있는 지인들과 제자들이 일부 수업료를 냈을 뿐, 수업료 역시 받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는 신재최산두(崔山斗), 모재김안국과 김정국형제, 주계정 이심원, 이연경, 이약수(李若水), 문서귀(文瑞龜), 안우(安瑀), 정붕(鄭鵬) 등의 제자들이 이름이 알려졌다.그는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직접 현실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기와 치인의 직접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현상은조광조 등을 거쳐 후대의 사림 내에 확산되었다. 그밖에 그는 또 이(理)를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관료생활과 무오사화>1494년(성종 25년)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훈구파 재상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훈구파의 거물이었던 이극균은 김종직의 문하생을 대거 발탁해서 요직에 앉혔는데, 그는 후일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이극돈의 친동생이었고, 이극균 자신도 김굉필과 김종직의 문하생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다.1494년(성종 25년)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김굉필은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전생서 참봉, 북부주부 등을 거쳐1495년(연산군 1년)12월 28일 북부주부(北部主簿)에 제수되고, 1496년(연산군 2년)군자감주부가 되었다.그 뒤 사헌부감찰을 거쳐1497년 형조 좌랑이 되었으나 7개월만에 사직 상소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498년(연산군 4년) 동문 김일손 등이 실록에 조의제문을 실은 것과 남곤 등의 연산군 비판,폐비 윤씨복위 반대에 염증을 느낀,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오랜 고문 끝에 김일손이 그해7월 17일 김종직의 문인이라고 진술한 명단에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그도 처벌을 받게 된다.<유배 생활과 최후>이때 그는 김일손,권오복,남곤등의 동문이며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고, 2년 뒤에는 전라도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고 특히 평안도 회천 유배지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를 만나 그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그밖에도 최산두, 이장곤, 김안국, 김정국 형제, 이장길, 정붕, 성세창, 강흔, 정응상, 이연경, 이심원, 윤탁, 우성윤, 김구(金絿), 정응상, 허경, 박한참, 윤신, 유우, 민구손, 최수성, 이담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김굉필이 유배지(流配地)를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順天) 승평(昇平)에 있던 친한 후배 정여해의 집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자 정여해는 항상 병 중이어서, 가마를 타고 김굉필을 방문하여 위로했다. 한번은 정여해가 그를 찾아와 김굉필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문(上疏文) 초(草)한 것을 보이고 그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은 그 상소문을 살펴보고 안 된다고 하며 '만약 이 소장을 올리면 우리 동지들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니 올리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실망한 정여해는 그날부로 상소문을 불살라 버리고 어찌할 수가 없음을 알고 통곡하며 순천의 집으로 돌아와 이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으며정여해 등의 친구들이 그를 방문하여 위문했다. 저서로 《경현록》, 《한훤당집》이 전한다. 그는 그림에도 능했다 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다시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궁중파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순천에 유배, 그해10월 7일 철물시(鐵物市)에서 효수(梟首)하라는 명을 받고 유배지에서 사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사후죽은 뒤 그의 수급은 효수(梟首)되어 순천부의 철물시장에 걸려졌다. 중종 반정뒤 연산군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증 승정원 도승지겸 경연 침찬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이황은 그를 '근세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하여 성리학도통의 정통으로 규정했고, 그의 제자 조광조와 그의 문인 백인걸, 백인걸의 문인이이, 성혼등을 통해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이들은 다시 선조때에서 인당을 형성하게 된다.중종 반정이후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 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그 결과1517년(중종12년)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 되었음이 역설되어 증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냈다.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은 1519년(중종 13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화를 받으면서 남곤(南袞[6])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해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중종 반정 직후부터 계속되어 1575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1577년(선조 10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문묘에 종사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화곡서원, 회천의상현서원, 현풍의도동서원, 순천의옥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문묘 종사 배경>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상소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임금이 제안했을 때, 정광필은 자신의 자제가 김굉필의 문하생인데 추향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이 독실한 사람이기는 하나 문묘종사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신중론을 폈다.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奇遵)이 종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정몽주가 도학의 연원을 열었으며, 정몽주가 길재를, 길재는 (여러 대를 거쳐) 김종직을, 김종직은 김굉필을 가르쳤으니 (도학의 학통이 이어진 것이며) 김굉필이 송유(宋儒)의 실마리를 얻어 주자와 같은 위치에 올랐으니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여창, 김굉필, 성삼문과 박팽년에 대해서도종사를 의논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가 이심원을 거론하자 정광필이 반대했는데 임금도 이에 동의했다..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자신들의 직계 스승을 배향하기 위한 것이라며 훈구파는 물론 온건 사림파들, 김종직의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의 문인들 역시 반대하였다. 결국 광해군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다.
조선 500년을 관통하여 주자학 성리학 사리파라는 학맥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안향-정몽주-길재-김숙자-김굉필-조광조-양산보로 이어진 성리학이 정통 학맥이다. 공고롭게도 안향이 영주, 길재가 서산(구미), 김숙자가 서산, 김종직이 밀양, 김굉필이 현풍 출신으로 모두 경상도가 고향이다.
성리학의 종조라고 하는 김종직과 김굉필의 학문의 핵심은 <소학>이었다. 특히나 김종직은 스승이 아버지 김숙자로, 아버지에게서 소학을 뼈속까지 배워서 제자들에게 소학을 철저히 가르친 휼륭한 스승이었다. 김종직은 영남은 물로이거니와 호남의 최산두 김안국 형제 등등도 제자를 두어 호남의 인재 양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호남의 최고 선비인 하서 김인후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의 판단으로 김종직은, 조선 500년 중에 스승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 가장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참 스승으로 자리 매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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