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제자백가의 사상
묵가의 사상
墨家-思想 전국시대에 묵가(墨家)는 유가와 병립하는 유력한 학파였다. 맹자는 묵자와 양주(楊朱)의 사설(邪說)이 유행되고 있는 데 분격하고 있었으며 한비자(韓非子)도 '세상의 현학은 유儒)와 묵(墨)이다'라고 하였다. 한대 초기에는 학자를 통칭하여 '유묵'이라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후 중국의 사상계에 있어서는 유가사상만이 역대 왕조의 공인을 받아서 비상하게 번영하고 묵가사상은 이단사상이라 하여 배격되었다. 묵가사상 및 그 원전(原典)인 <묵자(墨子)>에 대한 재평가가 청조의 권위가 동요한 19세기 말에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묵자는 처음에 유가에 나아가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은 거의 유가사상에 반대되고 있다. 유가가 부모형제들의 혈연관계를 윤리의 기본에 두는 데 반하여, 묵가는 그러한 차별에 관계하지 말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였다(兼愛論). 유가가 인재의 등용에 있어 덕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여 군자와 소인의 차별을 엄격히 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농민이건 상공업자건 구애할 것 없이 재능있는 자는 계속해서 등용하라고 하였다(尙賢論). 유가가 관혼상제나 일상의 의식을 중시하는 데 대하여 묵가는 군주의 긴요하지 않은 지출을 덜고(節用論), 궁중 음악 등은 그만두고(非樂論) 장례의식 등도 간소하게 하라고 하였다(節葬論).
유가가 인간의 도덕적 실천(人道)을 중히 여기면서도 오히려 인력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천도(天道)나 천명(天命)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일체 명(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非命論), 인간의 행위의 선악은 모두 귀신에게 감시받으며, 귀신은 정확하게 그에 대응하여 상벌을 내린다고 한다(明鬼論). 유가가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중요시하고 어느 군주를 섬기느냐 하는 판단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하위자(下位者)는 상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尙同論), 인간 중의 최상위인 천자(天子)도 천(天)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天志論).
이러한 특징을 구비한 묵가사상은 개조(開祖)인 묵자가 이끄는 집단이 성벽의 수축이나 방어작전 등에 종사하는 공인(工人)의 집단이었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유가의 사상이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토론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묵가사상은 묵자의 사후 그 지위를 이은 수령(首領) 밑에 결속한 집단의 내부로부터 서서히 정리되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묵자(墨子)>는 그 집단 활동의 결정(結晶)인 것이다.
묵자
墨子 생몰 연대 미상. 공자(孔子) 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활약한 묵가(墨家)의 개조(開祖). 이름은 적(翟)이며 송(宋) 또는 노(魯)의 태생이라고 전해진다. 묵(墨)이라는 성은 자자(刺字)의 형(刑)을 받은 죄인의 출신을 표시한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깎고 갓을 쓰지 않았으며, 맨발에 짚신으로 돌아다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의관에 위의(威儀)를 바르게 한 상류계층 출신은 아니고, 아마도 각지의 국군의 의뢰를 받아서, 성벽의 수축이나 방어작전에 종사하는 공인(工人) 집단의 수령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묵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초왕(楚王)은 공수반(公輸般)이 발명한 운제라는 공성기계를 사용하여 송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노에서, 10일간 주야를 달려와 공수반(公輸般)과 도면 위(圖上)에서 공방작전을 전개한 끝에 공수반의 공격 수법을 무력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수반이 자기를 살해하려는 것을 안 묵자는 "송(宋)을 공격하여도 송의 성벽에는 자기의 제자 금활리(禽滑梨)가 300인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묵자가 인솔하는 집단은 도성의 수축이나 방위라는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묵자의 법(法)'이라든가 '묵자의 의(義)'라고 불리는 규율 밑에서 굳게 결집하여 있었다. 묵자 사후 그 수령의 지위는 거자(巨子) 라고 불리는 후계자에 의해 전국말까지 대대로 계승되어 오면서 그 집단원은 거자(巨子)의 명에 헌신적으로 복종하였다.
묵자는 처음에 유학을 배웠다고 하나 뒤에 그것을 탈각하고 혈연적 폐쇄주의를 타파하여 사람들이 널리 서로 사랑할 것(兼愛主義), 자기 국가의 이익 본위의 전쟁을 그칠 것(非攻主義), 신분을 불문하고 재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할 것(尙賢主義), 쓸데없는 의례적 낭비를 절약할 것(節用節葬主義)등 유가의 학설과 상반되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뒤에 맹자로부터 '사람의 도를 무시하는 금수의 가르침이라'하여 비난과 공격을 당함으로써 이후 중국에서는 19세기 말에 이르도록 묵자사상은 이단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묵자의 주장에는 춘추전국시대의 변동을 사회의 밑바닥에서 경험한 자의 솔직한 소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 점에서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그 겸애론·비공론(非攻論) 등은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묵자
墨子 중국의 전국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묵가 집단에 의하여 집대성된 저작집. 일부는 개조(開祖)인 묵자 자신의 언론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그의 후배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으로 추측된다. 원래 71편이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53편이다. <묵자(墨子)>의 제편(諸篇)은 그 내용에 의하여 다음의 다섯으로 분류된다.
① '친사(親士)'부터 '삼변(三辯)'까지의 7편, 이것은 묵가의 잡론집이다.
② '상현(尙賢)'부터 '비명(非命)'까지의 23편, 이것은 묵가의 주요 사상으로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③ '경(經)' '경설(經說)' '대취(大取)' '소취(小取)' 6편, 이것은 말의개념이나 표현의 논리를 분석한 것이다.
④ '경주(耕柱)'로부터 '공수(公輸)'까지의 5편, 이것은 개조 묵자의 언행·사저집으로 공자를 논란한 비유(非儒)편도 이 부류에 들어 있다.
⑤ '비성문(備城門)' 이하의 11편, 이것은 묵가의 방어전술을 적은 것이다. 이들 중에서 ③류는 일괄하여 묵변(墨辯)이라고도 호칭되는데 기하학·광학·역학 등에 관한 명제(命題)도 포함하는 특색 있는 중국 고대의 논리학의 부분이다. 또 ⑤류는 성의 방어전술에 필요한 병기·기구·설비·자재의 제작이나 취급하는 법을 논한 이색적인 부분으로서 성의 방어를 청부하는 묵자 집단의 특성을 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묵자>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유가(儒家)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갖는 ②류일 것이다.
즉 '상현(尙賢)' 은 관리의 임용에는 신분·직업에 구애하지 않고 넓게 문호를 개방하여 인재를 구하라고 말하였고, '상동(尙同)'은 상위자(上位者)의 명령에 하위자는 복종하여 부강을 달성할 것을 말하였고, '겸애(兼愛'는 자국과 타국, 자가와 타가의 차별을 없애고 사람은 널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비공(非攻)'은 전쟁이 불의이며 백성에게 해로움을 주장하고, '절용(節用)' '절장(節葬)'은 군주의 의례적인 사치에 반대한 것이다. '천지(天志)'는 천(天)을 최고의 존재로 하여 천자(天子) 이하 이에 순종할 것을 말한 것이고, '명귀(明鬼)'는 사람의 사후의 영혼의 실재를 강조하여 그 상벌을 두려워하라고 말한 것이다. '비악(非樂)'에서는 궁정음악(宮廷音樂)이 백성의 이익에 배반됨을 말하였으며, '비명(非命)'에서는 숙명관을 배제하여 사람의 근면한 영위에 대하여 귀신은 반드시 보상을 준다고 말하였다. 이것들 10론(論)에는 각기 상·중·하의 3편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가 분실, 23편이 남아 있다. 상·중·하 각편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조금씩 자구나 사상 내용에 상위(相違)함이 있어 묵가의 주장의 변천이나 분파의 자취를 더듬을 수가 있다. <묵자>는 맹자에 의하여 이단사상으로 배격당한 이래 추종자를 거의 갖지 못하였으나, 청조(淸朝)의 고증학의 전성 속에서 재인식되어 손이양의 <묵자간고>와 같은 우수한 주석서가 제작되었다.
도가의 사상
道家-思想 유가(儒家)사상과 아울러 후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가사상이다. 도가사상은 노자(老子)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노자는 공자보다 선배로서 공자는 일찍이 노자에게 예를 배운 일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이것이 후대 유가의 사고방식에 매우 대립적 입장에 서는 사상인데도 <논어(論語)>나 <맹자(孟子)> 중에는 도가사상에 대하여 말한 바가 없다. 맹자 시대에 유가에 대립한 것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었다. 오늘날 양주는 도가의 일파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논어>에도 <맹자>에도 노자에 관한 사항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당초 유가와 강하게 대립한 학파는 묵가였다.
그 때문에 노자는 공자보다 훨씬 뒤의 전국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다(馮友蘭의 말). 그렇지만 <논어(論語)>를 읽으면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憲問扁). "원(怨)을 갚는 데 덕으로써 한다"는 것은 <노자(老子)>에 보인 말이다(63장). 또 "무위(無爲)로써 다스린 분은 순(舜)이었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노자>의 '무위'를 생각게 한다. 또 <논어>의 증자(曾子)의 말에 '도를 지녀(有)도 없는 듯 덕이 실하여도 허(虛)한 것 같이'라는 말이 있다(泰伯篇). 유무(有無), 허실은 이것 역시 <노자>에서 자주 보는 대립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논어>에 노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만 노자적인 사고법이 전연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전설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楊子江 남쪽의 대국)의 사람이라고 한다. 남방 초국 문화는 북방의 문화와 처음부터 달랐다.
북방의 풍토에서 생긴 <시경(詩經)>과 초(楚)의 풍토에서 생겨난 초사(楚辭)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초사의 대표작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읽으면 초조(焦燥)해 하고 있는 굴원에 대하여 굴원의 누이가 고독한 성실함을 지키지 말고 세속 사람들과 동화(同化)되는 것이 좋다고 타이른 말이 있다. 초사의 하나인 '어부사(漁父辭)'에서 홀로 결백함을 지키려 고민하는 굴원(屈原)에게 어부는 세속의 진애(塵埃)와 탁한 것을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도가적이다. <논어(論語)>에는 초(楚)의 광인(狂人)을 가장한 접여(接輿)라는 인물이 정치의 이상에 불타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공자에게 지금의 정세는 정치에 종사하는 것이 위험하니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초(楚)나라 격조의 노래로 비판하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예로 볼 때 초(楚)의 지방에는 옛부터 도가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인생관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가사상도 그러한 사회적, 지리적 배경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노자(老子)>에 실린 글은 때때로 압운(押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철학시로서 전해진 것이 어느 시기에 산문으로 정리된 것같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노자>의 사상을 노자 개인의 철학으로만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거기에는 많은 인생의 철학이 압축·집약되어 있는 것 같다. 남방 초에서 발생한 생활철학, 그것을 전한 철학시(哲學詩)가 어느덧 <노자>에 종합된 말로 응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철학은 인생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린 노옹(老翁)의 말이라 하여 추앙되다가 나중에 아예 노자(老子)라는 개인의 철학처럼 굳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가사상은 인간에게 분수를 지키고 무욕(無欲)하는 생활을 하라고, 또 정치적 혼란에 직면해서는 은둔자로 생활하는 등 일견(一見)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가르쳐 절대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사상은 후대에 있어서 문학자에게 많이 애호되었다. 예컨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 보이듯이 훌륭한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문학작품을 낳았다. 또 그 사상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화되었을 때 불교철학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禪)과 도가의 사상과는 근저에 있어서 통하는 것이 있다. 또 한편 도가의 철학에 불교의 형태를 받아들여서 민중종교로서의 도교가 성립하였다. 후세의 중국 민중사회에 도교가 준 영향은 크다.
도가사상은 예컨대 감필체(減筆體)라고 칭하는 공간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 수묵화나 무도의 일종인 권법에도 영향을 주었고 지극히 중국적인 동시에 지극히 동양적인 유현(幽玄)한 특성을 낳는 근원이 되었다. 도가에 대해서는 오늘날 아직도 알 수 없는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그것은 주로 은자의 철학으로서 설명되기 때문에 주장한사람의 성격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중국 학자들의 평가에 의 하면 도가사상은 몰락 귀족의 사이에서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그 철학에는 준열한 역사와 풍토 위에서 생활한 서민들의 지혜도 혼입되어 있다고 생각하나 몰락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노장의 철학을 사랑하여 뛰어난 시를 지은 도연명(陶淵明)도 몰락 귀족이었다. 도가의 시조로 여겨지는 노자(老子)의 사고방식에는 유물적(唯物的)인 요소도 보였지만 장차 그 사상은 열자(列子)에서 장자(莊子)를 거치면서 매우 유심적(唯心的)인 철학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그 사상 내용은 참으로 동양적이며 또한 전인류의 지혜로서도 손색없는 독특하고 훌륭한 철학인 것이다.
노자
老子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노자로 상정되는 인물이 3인이 있다고 하였다. (老子 韓非列傳). 첫째로 이이(李耳, 자는 담(聃=老聃)를 들었다.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예(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언(言)을 저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음에 든 사람은 역시 공자와 동시대의 노래자(老萊子)로서 저서는 15편 있었다 한다. 세 번째 든 것은 주(周)의 태사담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경과한 때에 진(秦)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후세에 노자라고 하면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하는 이이(李耳)를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이라고 하는 인물은 도가의 사상이 왕성하던 시기에 그 사상의 시조로서 공자보다도 위인(偉人)이었다고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설일지도 모르겠다. 펑유란(馮友蘭)은 노자가 전국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지만 노자에게 특정 개인을 상응시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벌써 종교적 신앙에 빠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마천이 요약한 바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고 결론 지은 것은 사가(史家)로서 올바른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노자의 말이라고 하여 오늘날 <노자>(<老子 道德經>이라고도 한다) 상·하 2권 81장이 남겨져 있다. 거기서 기술되고 있는 사상은 확실히 도(道)의 본질, 현상계의 생활하는 우수한 철학인 것이다.
예컨대 도를 논하여 이렇게 말한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기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자랑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수장(首長)이지만 자기를 만물의 주재로는 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일반적으로는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해는 뛰어난 것이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 의 미신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强)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 세상과 함께 사는 일을 권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사람들은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확실히 유심적인 것이다.
관윤
關尹 주(周)의 철학자. 성은 윤(尹). 이름은 희(喜)이다. <사기>에 의하면 노담(老聃)은 주(周)의 쇠함을 보고 주를 떠나려고 관소(關所)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인 윤희(尹喜)에게 권고받아 <도덕경> 5천여 언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관령 윤희가 즉 관윤(關尹)으로 노자의 제자가 된다고 한다. <장자(莊子)>의 '천하편(天下篇)'에 관윤의 말이라 하여, 사람은 아집(我執)을 버리면 자연(自然)대로의 동작이 발휘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동(動)하기 물과 같고, 그 고요함이 거울과 같으며, 적(寂)함이 청(淸)과 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불이편(不二篇)'에는 '관윤(關尹)은 청(淸)을 귀히 여긴다'고 평하고 있다.
열자
列子 이름은 어구(禦寇). 정(鄭)의 은자로서 기원전 4세기경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열자(列子)> 8편이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세의 위작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열자(列子)>의 사상을 남긴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열자>의 황제편을 보면 열자가 관윤(關尹)과 나눈 담화가 기재되어 있으므로 관윤을 통하여 노자의 사상을 배운 사람이 아닌가 한다. 노자는 현상의 본원을 도(道)라고 불렀으나 열자는 도를 태역이라고 바꾸어 불러 천지만물을 생성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도가적 우주론을 노자 이상으로 깊게 구축한 것이 열자이다. 그리하여 우주간의 흐르는 법칙을 좇아 사는 것이 인간의 진실된 삶의 방법이라고 했다.
<열자>의 '천서편(天瑞篇)'에 "정(靜)하고 허(虛)하면 그 거(居)를 얻으리라"하는 말이 있으나 <여씨춘추> '불이편(不二篇)'에는 "열자는 허(虛)를 귀히 여긴다"는 일언으로 평한다. 저 유명한 '우공이산(愚公移山)' '기우(杞憂)'의 이야기는 <열자(列子)>에 실려 있는 우화(寓話)로서 <장자(莊子)>와 함께 도가적 우화가 풍부한 서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양주
楊朱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자(字)는 자거(子居). 위(衛)의 사람이다. 양주(楊朱)의 전기도 매우 애매하다. 묵적(墨翟)과 아울러 그의 설이 천하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맹자(孟子)>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4세기로부터 3세기에 걸쳐 그 학설이 유행했던 것 같다. 펑유란(馮友蘭)은 도가사상의 출현을 묵자(墨子) 이후였다고 생각하여 양주(楊朱)를 그 시초를 삼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양주의 학설은 <맹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및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 보인다. 양주(楊朱)는 하나의 생명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생활의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생명을 기르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생명의 주체는 '나(我)'다. 그 '나'를 소중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자(老子)는 무아를 말하여 무아속에 개인의 존속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양주는 노골적으로 무엇이든 나를 위해서만 해야 한다는 위아(爲我)설을 말하였다. 그것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묵자(墨子)가 말하는 '겸애'의 생각과는 대조적이다. 양주의 이 주장은 한 마디로 '전성보진(全性保眞)'의 설이라고 평가받고 있다(<淮南子>氾論訓의 楊朱評). <여씨춘추> '불이편(不二篇)'에 양주를 평하여 '양생(楊生)은 나(己)를 귀히 한다'고 이르는 것도 양주사상의 특색을 한 마디로 논한 것이다.
직하의 도가들
稷下-道家 제(齊)의 위왕(威王)·선왕(宣王) (전357∼전301) 때 제의 국도에 많은 학자가 모여 세상에서 '직하의 학(稷下學)' 이라고 호칭되는 학문의 성시가 도래했다. 도가에는 팽몽(彭蒙), 전병(田騈), 신도, 환연(環淵) 등이 있었다. 팽몽은 전병, 신도의 선생이 되는 듯하다. 팽몽, 전병, 신도의 학설에 대해서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 해설이 있고 전병, 신도, 환연에 대해서 <사기(史記)> '맹자(孟子) 순경(荀卿) 열전'에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연은 전병, 신도의 스승이었다는 말도 있다. <사기>는 이외에 접자(接子)라고 하는 도가의 이름도 든다.
<장자> '천하편(天下篇)'에 의거하면 팽몽, 전병, 신도는 만물을 제(齊)하는 것을 도(道)라 하면서, 지(知)를 버리고 자기를 떠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에 대해 자기를 버리고 만물과 동화할 필요를 논하여 무아의 입장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무아이면서 나를 세운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역시 양주의 위아(爲我)를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만물을 제(齊)한다고 하는 것은 장자의 근본사상의 하나인데 그 싹이 이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사기>에 의하면 신도는 조나라 사람으로 <십이론>을 지었다고 한다. 오늘날 불완전하나마 <신자>라고 하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후인이 모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병, 접자(接子)는 제나라 사람이라 하고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전병은 진병(陳騈)이라고도 하며, 환연에는 <상하편(上下篇)>이라고 하는 저서가 있었다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직가(稷家)의 묵가에 송견, 윤문(尹文)이라고 하는 두 학자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묵가이면서도 도가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었음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송견, 윤문(尹文)은 '금공침병(禁攻寢兵)'을 창도하였다고 <장자> '천하편(天下篇)'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이 곧 묵가(墨家)의 사상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욕과천(情慾寡淺)'의 설을 창도했다고 <장자> '천하편'에 말했고, <순자(荀子)> '정론편(正論篇)'에서 송견은 모멸당해도 욕으로 삼지 않음을 주장, 이 마음이 사람을 전쟁으로부터 멀리하는 근본이라 생각했다 한다. '정욕과천(情慾寡淺)' '견모불욕(見侮不辱)'의 생각은 참으로 도가적이다. 그들은 묵가의 전쟁부정론의 근본에 도가적 생각을 도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자
莊子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철학자. 이름은 주(周), 자는 자휴(子休). 송(宋)의 몽현(蒙縣)사람. 일설에는 양(梁)의 몽현(蒙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몽현의 '칠원(漆園)의 아전(吏)'이던 장자는 <사기(史記)>에 의하면, 제(齊)의 선왕(宣王)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직하(稷下)의 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행동을 기록한 일화를 종합하여 보면 맹자보다 조금 후인 기원전 3세기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사기>에 의하면 장자의 학통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노자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10여만 언의 '우언(寓言)'을 기록하여 노자의 도를 밝혔다고 한다. 오늘날 <장자(莊子)>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내편 7편은 주로 장자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하여 장자의 사상을 아는 기본 자료로 간주된다.
외편·잡편은 장자의 후학의 무리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장자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제물론(齊物論)과 양생주론(養生主論)·소요유론(逍遙遊論)이다. 장자는 천지는 나와 아울러 생(生)하므로 만물은 나와 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체의 이(理)에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만물을 차별하여 시비를 벌이고 있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전체를 보지 않고 한 국부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가지여서, 죽는 것은 다만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세상의 현상은 한편으로 가한 것이 있으면 한편으로 불가한 것이 존재한다.
가부의 평가는 일방으로 편벽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천지만물을 투철하게 보면, 가(可)도 없고 불가(不可)도 없이 만물은 모두 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리고 만물에 동화하는 일 그것이 인간존재의 참된 존재 방법이며 궁극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명한 제물론(齊物論)으로서, 이러한 생각은 직하(稷下)의 도가에서 발하여 다시 더 철학적으로 심화된 것이다. 장자(莊子)는 또 '양생주(養生主)' 편에서 "선을 하여도 명(名聲)에 가까이 함이 없이 몸(身=眞)을 보전할지어다"고 한다.
이 말은 양주가 말하였다는 전성보진(全性保眞)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소요유(逍遙遊)'편에서는 명(名)과 공(功)과 기(己)를 버리고 상대적 가치평가의 입장에서 떠나 천지의 사이를 소요하라고 설파한다. 이것은 시비의 판단이나 피아상대(彼我相對)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떠났을 때 비로소 천지만물과 일치하여 자연의 진성(眞性)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주만물에 미치는 도(道)의 본원의 자세를 말함에 있어서 장자는 여러 가지 우화를 인용하여 교묘하게 철학적 논지를 심화하여 간다. '소요유(逍遙遊)'에서는 붕(鵬)이라는 새를 매미와 뱁새로 대비시킨다. 그리하여 한정된 자기 세계에서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세계를 떠난 곳에서 보면 취할 것이 못되는 견해라고 하는 것을 교묘하게 예증(例 )하여 간다.
또 '제물론(齊物論)'에서는 어느날 장주(莊周)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나비가 된다. 그 때에 장주가 나비로 된 것인지 나비가 장주로 된 것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으나 참으로 유유하여 기분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 말을 하여 제물(齊物)의 경지를 설명하였다. 그러한 우화들은 훌륭한 픽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자(莊子)>는 철학서로서 우수할 뿐 아니라 문학서로서도 뛰어났다. 외편·잡편에서도 장자의 후학은 다시 많은 우화로 장자의 사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공자의 무리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희화화(戱畵化)한 비판을 가하였다. <장자>에 이르러 유가에 대항의식은 강렬하였다.
명가의 사상
名家-思想 춘추전국시대의 사회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사물이나 사물의 실태와 그 호칭과의 사이에 복잡한 엇갈림이 생기게 되었다. 예컨대 '군(君)'이라는 말을 보면 그것이 옛날 노예적 봉건사회의 군장(君長)을 뜻할 경우도 있고, 유가가 주장하는 왕도적 군주를 뜻할 때도 있고, 신흥의 봉건 지주계층의 정치적 주권자를 뜻할 때도 있다. 각각 다른 개념에 의하여 군(君)을 논한다면 갖가지의 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실태와 호명(呼名)을 바로 하려는 명실의 논의가 생겼다. 한편 또 여러 가지 발상을 하나의 논리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논리학이 필요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열국 사이를 유세하며 책모(策謨)를 안출하려면 논리를 전개해서 궤변마저 농(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명가'라고 불리는 일파의 논리학자들이 출현하였다. 명가에서는 명실을 바로하려고 하는 명실론의 방향과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같이 궤변술을 연구하는 두 흐름이 혼재하였다. 명가의 출발은 춘추시대의 정(鄭)의 대부(大夫) 등석(鄧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등석은 자산(子産=公孫僑)과 함께 정국의 국정에 임하였으나, 자산이 지은 법령의 자구해석을 둘러싸고 일일이 자산과 다투어 마침내 자산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등석은 자산이 정한 법에 대하여 변호사적 입장에서 법령의 확대해석을 용허하지 않고 법의 불비를 찔러 자산과 논쟁했던 것이다. 자산은 우수한 정치가로서 공자로부터 존경받은 사람이었으나 그 자산(子産)에게 논리를 구사(驅使)하여 등석은 저항하였다. 등석의 저라고 전해지는 <등석자(鄧析子)>가 오늘날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인이 편집한 것이지 등석이 지은 것은 아니다. 등석에 대해서는 <여씨춘추(呂氏春秋)> '이위편(離謂篇)'에 설명되어 있다. 명실론은 <묵자(墨子)>의 '귀의편(貴義篇)'에 '명(名)'과 '취(取)'의 문제를 놓고 '명'은 개념적 지식, '취'는 사실에 즉(卽)한 구체적 인식으로 '취'야말로 제일의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가치관이 변동하는 사회에서는 '실(實)'을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묵가의 이러한 생각은 바로 묵가 후학의 논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제(齊)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였는데, 그 위왕(威王), 선왕(宣王) 시대(전357∼전301)에 천하의 학자를 초대하여 잘 대접하였다. 또 도성(都城)의 남문을 직문이라고 하였는데 이 직문 아래에 초빙한 학자의 저택을 짓게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이 시기의 학술을 직하(稷下)의 학이라고 하였다. 이 직하에 모여든 학자 중에는 묵가의 송견과 윤문(尹文)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개념의 분석을 왕성하게 행한 듯한데, 그것을 별유(別宥)라고 칭하였다(<莊子> '天下篇'). 유(宥)라 함은 구역의 뜻이니 개념의 경계를 변별하는 것이 즉 '별유'이다.
송견·윤문의 후배에 공손룡(公孫龍)이 있었다. 묵가(墨家)의 논리학을 해설한 것이 <묵자>중의 '묵경(墨經)'편이다. 묵경은 경상(經上)·경하(經下) 및 경설상(經說上)·경설하(經說下)·대취(大取)·소취(小取)의 6편으로 되었고 묵가의 후학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 중에 공손룡의 궤변을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작된 시대는 혜시(惠施), 공손룡보다 후인 것 같다. 공손룡이 묵가와 관계가 깊었던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 궤변적 논리학은 혜시(惠施)에서 시작되어 공손룡(公孫龍)에 의하여 깊어진 것이지만, <공손룡자(公孫龍子)>에 보이는 공손룡의 이론('白馬는 말이 아니다' 등)은 얼른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그 논리의 구성이나 발상 방법이 근대과학의 수학이나 물리학의 논증 방식이나 발상에도 견줄 만하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궤변이 단순한 궤변술에 그치고 말았을 뿐이다. 전국 말기의 종횡가(縱橫家)라고 칭하는 유세가들은 이런 유(類)의 궤변술을 상당히 많이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이 명가의 사고방식이나 논리의 형성 방법이 과학사상으로 전개한 일은 전부터 없었다. 중국인은 별로 추상적인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고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길 바란다. 따라서 명가의 설은 공손룡(公孫龍) 이후 학술적으로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고 근근히 묵가의 후학에 의하여 '묵경(墨經)'이 정리된 것에 그쳤다. 그러나 명실론은 그 후 순자(荀子)에게 받아들여져 이후 유가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혜시
惠施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철학자로 장자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혜시(惠施)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 전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제설을 종합하면 혜시는 송나라 사람으로서 양나라 혜왕(惠王) 밑에서 벼슬하여 법전을 만든 일도 있고, 혜왕 몰후에는 양왕(襄王) 밑에서 9년간 벼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자와 대를 같이 하였음을 <장자(莊子)>에서 알 수 있다. <장자>의 '천하편(天下篇)'에 의하면 혜시의 저서는 다섯 수레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저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설은 <장자> '천하편(天下篇)'이나 <순자> '불구편(不苟篇)' 에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근근히 알 수가 있다. <한비자(韓非子)> '칠술편(七術篇)'에 의하면 혜시도 또한 묵가였던 것 같다.
혜시(惠施)의 궤변은 그 논제가 표시되어 있을 뿐 해설이 없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공간론에 흥미를 가졌던 것 같다. '두께(厚) 없는 것은 쌓지 못하겠지만 그 크기는 천리(千里)' 등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학상(數學上)으로 말하는 점(点)은 얼마를 쌓든지 점이지만 공간에는 무한의 점이 존재하고 하나의 점속에는 또 우주가 있다고 하는 것을 논한 것일까. "나는 천하의 중앙을 안다. 그것은 연(燕)의 북이며 월(越)의 남이다"라는 논제도 있다. 천하의 중앙은 이론상으로는 하나 밖에 없으나 그것은 최북단의 나라인 연(燕)의 북이라도 좋고 최남단의 나라인 월(越)의 남에 있어도 좋다.
요컨대 중심을 어느 곳에서 보는가에 의하여서 공간의 넓어짐이 변경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널리 만물을 사랑하면 천하가 일체로다'라고도 한다. 이 생각은 역시 묵가(墨家)의 겸애설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킨 것인 듯하다. 이상, 혜시(惠施)의 궤변은 <장자>의 천하편'(天下篇)'에 소개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공손룡
公孫龍 자는 자병(子秉)이며 조나라 사람이다. 조(趙)의 평원군(平原君)에 벼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기원전 3세기 중엽까지 활약한 사람 같다. 묵가의 송견, 윤문의 후배라 하며 그 궤변은 '묵경'에도 해설되어 있으므로 혜시(惠施)와 같이 묵가의 동지라고 생각된다. 혜시의 궤변론에 대하여 공손룡이 독자적인 궤변을 떨쳐서 응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장자(莊子)> '천하편'에는 공손룡이 궤변 21조를 실었고, <열자(列子)>의 '중니편(仲尼篇)'에는 8조를 실었다. 공손룡의 궤변으로 유명한 것은 '알에 털(毛)이 있다' '백마(白馬)는 말이 아니다, 견석(堅石)은 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알에 털이 있다'는 말은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론을 결론적으로 집약한 것인 듯하다.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논제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말이라는 것은 형상에 이름을 붙인 것이요 백(百)이라고 함은 색(色)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색에 이름을 붙인 것과 형상에 이름을 붙인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또 "만일 사람이 말을 구하였을 때는 황마(黃馬)나 흑마(黑馬)도 되겠지만, 백마를 구하였을 경우에는 황마·흑마로는 주문에 맞지 않는다.
설령 백마를 말이라고 한다면 황마·흑마도 말인 이상 어느 것을 가져와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도 황마·흑마를 가져오는 것으로는 합당하지 않는다 하면 백마가 말이라고 하는 가정(假定)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마는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논리에는 확실히 속임수가 있다. 그러나 형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색(質)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동일하게 논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그 나름대로 옳을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단단한 돌은 돌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외에 공손룡은 "비조(飛鳥)의 그림자는 아직까지 움직인 일이 없다"라고도 한다. 그림자는 물건의 정지의 순간에 비치는 것이기 때문에, 비조의 그림자라고 할지라도 정지의 순간의 점의 연속인 까닭에 비조의 그림자는 아직까지 움직인 일이 없다고 한다. 공손룡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여 <공손룡자(公孫龍子)> 6편이 남아 있다.
법가의 사상
法家-思想 봉건제(封建制)에서 군현제(郡縣制)로 이행하고 있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씨족제(氏族制)적 봉건국가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 유가의 덕치사상에 반대하고 새로운 법치사상에 의해 중앙집권국가를 만들려고 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들은 사상가로서 학파를 형성하였다기보다 실제 정치가로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문헌상으로 그 자취를 살핀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덕치(德治)에 중점을 두는 사상과 법치(法治)에 중점을 두는 사상은 이미 춘추시대부터 대립되고 있었다. 춘추 말기 정(鄭)의 재상이었던 자산(子産)은 법령의 조문을 명문(銘文)으로 하는 동기(銅器)를 만들었다(전536).
이것은 중국에 있어서 성문법 공포의 최초로서 씨족제적 봉건국가의 체질 변혁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같은 경향은 제(齊)의 재상을 지낸 안영(晏孀)에게서도 보인다. 전국시대에 처음으로 법치를 주장한 인물에 이회, 오기(吳起), 상앙, 신불해(申不害) 및 신도 등이 있다. 그들은 법가 사상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의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전국 말기에 나타난 한비(韓非)였다. 그는 법(法), 권술(權術), 권세(權勢)를 중시하여 중심에 법을 두고 '권술'과 '권세'를 유기적으로 결부시켰다. 신불해(申不害)의 '권술(權術)'에 대한 생각, 상앙의 법에 대한 생각, 신도의 권세(權勢)에 대한 생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법체계를 만들어냈다. 그는 원래 유가의 순자에게 사사하여 그 예(禮)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비(韓非)의 생각은 중앙집권을 도모하려는 군주의 이익과 일치하였으며, 씨족제를 유지하려는 귀족들과는 충돌하였다. 후에 진시황(秦始皇)이 그를 중용하려고 하였으나 이사(李斯)에게 시기를 당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대로 진(秦)의 실제 정책에 취해져서 진제국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관자
管子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의 재상이던 관중(管仲)의 저작으로 믿어졌으나 현재로는 전국시대 제(齊)에 모인 사상가들의 언행을 전국시대부터 전한(前漢) 때까지 현재의 형태로 편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관중(管仲), 이름은 이오(夷吾). 제(齊)의 공자(公子) 규(糾)에게 벼슬하여 후에 환공(桓公)과 적대관계였으나 환공의 신하 포숙(鮑叔)의 추천에 의하여 환공의 신하로서 재상이 된 후 제를 춘추시대의 5대 강국 중 제일 가는 강국으로 만든 공적을 세웠다. 관중은 제에 있어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며, 또 제의 직하(稷下)는 전국 시대의 학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거기에 모인 학자들이 관중에 청탁하여 <관자>를 만든 것인 듯하다.
이 <관자>는 원래 86편이었으나 10편은 분실되고 76편이 현존한다. 전체가 <경언(經言)>, <외언(外言)>, <내언(內言)>, <단어(短語)>, <구언(區言)>, <잡편(雜篇)>, <관자해(管子解)>, <경중(輕重)>의 8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관자해>는 <경언>의 해석이겠지만 다른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경언>이 다른 부분보다 오래 된 것임은 인정되기 때문에 <국어(國語)>, <좌전)> 등의 관중에 관한 기록과 서로 보충하여 합하면 관중을 알기 위한 사료(史料)로 삼을 수 있다. 그 내용은 정치·법률·제도·경제·군사·교육·철학 등 다방면에 걸쳤고, 특히 시대의 변화로 인한 예(禮) 사상의 무력화에 대하여 그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으로 구제하려는 도가와 권력에 힘입는 현실적인 법을 도입하려는 법가의 사상과의 관련이 이 관자(管子)에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 유가(儒家)·묵가(墨家)·병가(兵家)·농가(農家)·음양가(陰陽家) 등 여러 종류의 학설이 혼입되어 있어 이 점으로 보아도 <관자>가 한 학파의 저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자산
子産 (전585경-전522)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정국(鄭國)의 재상. 이름은 교(僑), 자산(子産)은 자. 공손교(公孫僑)라고 호칭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정(鄭)의 귀족 출신이다. 당시의 정치는 귀족에게 주도권이 장악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중앙집권을 목표로 하는 군주에 있어서는 큰 장애가 되었었다. 자산이 출생한 것은 귀족 상호간의 다툼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군주와 귀족과 신흥 사서인(士庶人) 간에 균형이 잡혀진 시기였다. 거의 동시에 제(齊)에서도 하급 귀족 출신의 안영이 나와 국정을 좌우하였다. 귀족 출신인 자산은 나라의 재상으로 뛰어난 견식과 합리적인 사고에 의하여 귀족정치의 폐해를 꿰뚫어보고 국내에 평화를 이룩하였다. 국외적으로는 대립하는 북방의 진(晉)과 남방의 초(楚), 2대 강국에 끼여 있었지만 그의 시책에 의하여 소강(小康)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그는 국내의 귀족간의 항쟁에 대해 혹은 중립 혹은 역이용하는 등 갖가지의 방법을 써서 나라의 유지에 노력했다. 토지제도를 개혁하였고, 경지를 정하여 강제적으로 계획적 농업행정을 단행하고 세제의 개혁을 행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은 처음으로 법령의 조문을 명문(銘文)으로 하는 동기(銅器)를 만든 것이리라(전536). 진(晋)의 귀족인 숙향(叔向)은 이것에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씨족제하에 있어서의 형벌은 임금의 덕과 믿음에 의지해야 하는데, 성문법(成文法)을 공포하면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전통과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신장(伸長)하고 있던 사서인의 세력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종래의 귀족 중심의 예에 대한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오래지 않아 진(晋)에서도 법을 성문화하여 공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신흥세력의 신장을 말하는 것이다.
상앙
(전390-전338)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 위(衛)의 왕족 출신.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앙, 상(商)은 후에 진(秦)에서 받은 봉지(封地)에 따른 성씨이다. 맹자(孟子)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처음에 위(魏)에 벼슬하였으나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고, 그곳을 떠나 진(秦)의 효공(孝公)에게서 벼슬하여 왕에게 변법(變法)을 건의했다. 그것은 가족제도를 개혁하여 대가족 제도를 분해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중앙집권을 도모한다. 소가족에 알맞은 토지제도를 개혁한다. 그렇게 되면 국가에 의한 경지(耕地)와 과세(課稅)의 장악이 용이해진다. 도량형(度量衡)의 통일과 부락(部落)제도의 강화, 군공(軍功)에 따른 수상(授賞) 등과 함께 이 개혁에 의하여 진(秦)은 중앙집권의 실효를 거두어 강대해져 갔다.
그러나 이 개혁은 진의 귀족의 저항을 초래하여 기원전 338년 효공(孝公)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하면서 그는 체포되어 거열(車裂)의 형(刑)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상앙의 개혁안이 후에 진(秦)·한(漢)의 중앙집권국가 형성의 기초가 된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앙의 저서로서 <상군서(商君書)>가 전하여지고 있다. <상군서>는 그의 자저라고 볼 수는 없고 상앙의 법치사상을 승계한 후학이 상앙에 가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비
韓非 (?-전233)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로 법가(法家)에 속한다. 전기는 분명치 않다. 한(韓)의 공자(公子). 출생년은 알 수 없다. 법가사상의 집대성자로서 전국 제자(戰國諸子)의 최후의 한 사람이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유가의 덕치주의를 배척하고 성악설과 예설(禮說)을 계승하여 중앙집권을 도모하는 전정국가(專政國家)의 정치이론을 세웠다. 한비(韓非)는 멸망 직전에 있었던 모국 한(韓)의 전도를 근심하여 신불해(申不害), 상앙을 모방한 변혁안을 제출하였으나 채택되지 못하였다. 후에 진왕(秦王) 정(政-始皇)이 그 안을 보고 한비(韓非)의 저서임을 알고 그를 초청하려 하였기 때문에 기원전 234년 한(韓)의 사자(使者)로서 진에 갔으나 이사 등의 모략을 받고 다음 해 옥중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그가 우선 문제로 삼는 것은 한 국가에서 군주의 위치와 국내에 존재하는 토호세력에 대해서다. 토호세력은 군주와 서민과의 사이에서 도당(徒黨)을 조직하고 국가질서를 파괴하여 중앙집권을 도모하는 군주에게는 큰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서민의 구리심(求利心)을 국가이익과 합치시키는 일에 힘써 상벌효과와 법치사상을 중시하였다. 그의 법치사상은 법(法)을 중핵으로 하여 권술(權術)과 권세와의 3결합(三結合)으로 되어 있다. 그는 신불해가 권술을 주장하고, 상앙이 '법'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둘 다 한편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르는 법(法)이라 함은 성문화되어 공포된 법을 가리키는 것이며, 권술이라 함은 군주가 흉중에 간직한 군신을 통어하는 방법이다. 또 신도가 말한 권세라고 하는 것을 취하여 법치(法治)가 인치(人治)보다 우수하다는 것과 법과 권세가 보합(補合)함을 말하였다.
한비(韓非)는 자연발생적인 민간질서보다 인위적인 국가질서를 추구하였다. 법은 그 경우의 지주이고, 권술은 실제의 시행방법이며, 권세는 시행자 자신의 태도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그의 사후 얼마 안 되어 진(秦)의 정치에 채용되어 마침내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한비자
韓非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한비와 그의 학파의 저작으로 55편이다. 원래 '한자(韓子)'라고 불렀으나 당대(唐代)에 한유(韓愈)가 한자(韓子)라고 호칭됨에 서로 혼동되지 않도록 이 책을 <한비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기(史記)>에 진시황(秦始皇)이 <고분(孤憤)>, <오두>를 보고 대단히 감복한 것이 기록되어 이 책이 한(韓)의 멸망을 근심한한비(韓非)의 대책으로서 이뤄진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비자(韓非子)>는 <초견진(初見秦)>이라는 편으로 시작되었고, 이어 <존한(存韓)>이 놓여 있으며, 또 속에는 노자의 해석으로 생각되는 것도 있어 그 성립 시기와 작자는 한 시기에 한 사람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중에서 한비(韓非)가 "고분(孤憤)·<오두>·<내외저(內外儲)>·<세림(說林)> 등 전부 10여만 언을 저작하였다"고 기록한 후 한비의 전기를 이런 등등의 편을 기준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비자(韓非子)> 55편 중에서도 <고분>·<오두>·<내외저>·<세림>의 각편을 한비(韓非)의 자저로 인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고분>, <오두> 및 <현학> 3편만을 한비의 자작으로 보는 것이 정론(定論)으로 되어 있다. <고분(孤憤)>에서는 당시 사문(私門)의 권세가 만연되어 국가의 질서가 어지러워진 상태를 기술했다. <오두>의 두는 나무 속에 들어박혀 내부에서 파먹는 벌레를 뜻하는데, 그 벌레와 같이 내부에서 나라를 좀먹는 것이라 하여 학자(學者)·언담자(言談者)·대검자(帶劍者)·환어자(患御者)·상공민(商工民) 등 오자(五者)를 들고 있다. 학자라 함은 인의나 겸애를 주장하고 옛날을 숭상하는 유자(儒者) 묵자(墨者)를 지칭한다.
언담자라는 것은 합종·연형(連衡)을 꾀하여 제국을 순회하는 유세가(遊稅家) 등을 말한다. 대검자라 함은 국가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유협(遊俠)의 무리를 말하고, 환어자(患御者)라 함은 사문(私門)에 종사하여 군역(軍役)을 빠지는 등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말한다. 상공민이라 함은 상인(商人)을 말한 것인데 자기는 활동하지 않고 농민의 재산을 탐하여 얻는 사람, 이들은 모두 국가 통제의 한계 외에 있어서 중앙집권을 도모하려는 군주에서 장해가 되는 자들이었다. <현학(顯學)>에서는 주로 유자(儒者)·묵자(墨者)의 해로움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상 3편 이외에 그 학파의 학설과 토론을 기록한 것에 <난(難)1-4>, <난세(難勢)>, <문변(問辯)>, <문전(問田)>, <정법(定法)>이 있다. 각편 모두 타학파의 주장을 소개하고 거기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밖에 이 학파가 전한 설화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설화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한다. <세림(說林) 상·하>, <내저설(內儲說) 상·하>, <외저설(外儲說) 좌상, 좌하, 우상, 우하>, <십과(十過)> 등이 있다. 또 도가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후기의 법가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인 <주도(主道)>, <양확(楊確)>, <해로(解老)>, <유로(喩老)>등이 있다. 또한 <해로>, <유로>의 2편은 가장 오래된 <노자(老子)>의 주해로서 때로는 이것을 한비학파와는 전연 관계 없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선진 법가사상의 총합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병가의 사상
兵家-思想 춘추전국시대 열국간의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군사에 관한 사상·지식·기술에 관련된 서적이 차츰 나타났다. 그런 저술을 한데 묶어 병가(兵家)라고 칭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기재되어 있는 <오손자 병법(吳孫子兵法)> 82편과 <제손자(齊孫子)> 89편이다. <오손자(吳孫子)>는 춘추시대의 군사 사상가 손무(孫武)의 저작이라 하고, <제손자(齊孫子)>는 전국시대의 손빈(孫 )의 저작이라 한다. 현재는 다만 <손자(孫子)>13편이 남아 있을 뿐인데 13편의 <손자(孫子)>가 <오손자(吳孫子)>인지 <제손자(齊孫子)>인지는 예로부터 이론(異論)이 있다. 그러나 <손자(孫子)> 13편 중에는 병거이천승(兵車二千乘)이라든가, 10만의 병사를 규모로 하는 용병법(用兵法)을 설명한 것과 그 속에 나오는 장군이 춘추시대 사람이 아닌 점 등으로 보아 현존의 <손자(孫子)>는 대규모 전쟁이 행해졌던 전국기(戰國期)의 것으로서, 아마도 <제손자>의 작품일 가능성이 짙다. 다만 일부에는 <오손자>의 기록도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까닭으로 현존하는 13편의 <손자>는 예로부터 <손자>라는 명칭하에 전래된 두 종류의 책 중 <제손자>를 주재료로 한 발췌본(拔萃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병가는 본래부터 군사사상·군사지식·군사기술을 논하는 것이지만, 그 사고방식의 기저에는 법가적인 것이 강하게 내재한다. 예컨대 현존의 <손자>에 있어서 전쟁에 승리를 얻기 위한 5개 조건을 <5사(五事)>로서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도의에 부합해야 하는 것, 둘째 천(天)의 시(時)에 좇을 것, 셋째 땅의 이(利)에 좇아야 할 것, 넷째 우수한 장군을 얻는 것, 다섯째 엄정한 조직·규율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計篇).
이 다섯째의 설명은 법가의 사상에 통하는 것이다. <손자>에 기록되어 있는 것 중에서 다음 말은 유명하다. "적(彼)을 알고 나(己)를 알면 백전(百戰)이 위태하지 않고 저를 모르고 나만 알 뿐이면 일승일패(一勝一敗)한다. 저를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백전이 다 위태롭다."(謀攻篇) 이것은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과 나의 내부 모순을 변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됨을 말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무릇 용병의 법은 나라를 온전히 함을 상으로 삼고, 다른 나라를 격파함은 이에 다음 간다. 또 군사를 온전히 함을 상으로 삼고, 타국의 군사를 격파함은 이에 다음 간다.(中略) 따라서 백전백승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서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善)이다."(謀攻篇) 이 사고방식 속에는 도가적 발상도 있으나 단지 군사상의 관점에서만 용병(用兵)을 말하지 않고 정치의 연장선에서 '용병'을 말하는 곳에 <손자>의 군사사상의 본질이다. 이외에 병가의 현존하는 주요한 책으로는 <육도(六韜)>와 <오자(吳子)>가 있다.
육도
六韜 주(周)의 여망(呂望=太公望)의 저서라고 하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만들어진 책인 것 같다.
손자
孫子 13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손빈의 저작을 주로 하면서 춘추시대의 손무(孫武)의 설도 채택한 병법서의 다이제스트판이다. 손빈의 빈은 이름이 아니다. 발을 잘리는 형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손빈이라고 했다. 병가의 가장 대표적인 책이다.
오자
吳子 6편. 전국시대의 오기(吳起)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 병법을 전하는 문인에 의하여 후대에 저작된 것이다.
농가의 사상
農家-思想 춘추전국시대에 있던 농가사상에는 기술과 사회사상에 관한 것 두 방면의 것이 있으나 여기서는 후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주례(周禮)>, <관자(管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속의 몇몇 편에 농업 생산기술에 대하여 말한 기록이 있다. 사회사상가로서 저명한 농가는 허행(許行)이다. 허행은 춘추시대의 등(藤)나라에 살면서 수십인의 문인에게 농업생산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주장하였다. 허행이 있는 곳으로 곧 송(宋)에서 진상(陳相)을 주령(主領)으로 하는 수십인이 달려 왔다.
허행의 무리들은 농업신(農業神)이기도 하고 상고(上古)의 전설적인 제왕이기도 한 신농(神農)의 교(敎)라고 하는 것을 기치로 삼아 국군(國君)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것을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商人)의 농민에 대한 이윤추구를 배척하였고 그에 저항하였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생산에 필요한 공구생산 등의 수공업자 역시 노동에 종사하는 자라 하여 그 존재의 의의를 인정하였다.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에 의하여 자신의 생활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剩餘)는 각자 노동자의 소유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해만 천하는 균평(均平)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공상적(空想的) 사회사상에 가까운 면이 있으나, 당시 점차로 강고해진 열국 봉건지주의 부궁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종횡가의 사상
縱橫家-思想 종횡가란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변설로 책략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시켜 그 힘의 밸런스를 이용해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그 시조는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 한다. 귀곡선생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사람인 왕후를 가리킨다. 하남성(河南省)의 귀곡(鬼谷)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귀곡선생이라고 한다. 병가(兵家)인 손빈도 그 문인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귀곡선생의 문인으로서 가장 저명한 활동가는 소진(蘇秦), 장의(張儀) 두 사람이다.
오늘날 <귀곡자(鬼谷子)> 12편이 존재하나 그것이 귀곡선생의 저서라고 하는 확증은 없다. 소진(蘇秦)은 낙양(洛陽) 사람이다. 당시 점차로 강대해진 진(秦)에 대하여 연(燕)·한(韓)·위(魏)·조(趙)·제(齊)·초(楚)의 6국이 연합하여 진(秦)에 대항할 것을 득의에 찬 변설로 열국에 설파하였다. 이것을 합종설(合縱說)이라고 한다. 소진의 이 책략 때문에 진은 15년간 침략을 정지하였다. 소진의 동생인 소대(蘇代)도 소진과 힘을 합쳐서 합종(合縱)의 성립에 노력하였다. 장의(張儀)는 위(魏)의 사람으로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에게 배웠다.
소진·소대의 합종설에 대하여 6국이 연합, 진에 복종하여 섬길 것을 주장한 연형설(連衡說)을 열국에 주창하였다. 한때 합종설의 세력에 패하여 위로 돌아가 그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그의 연형설이 승리하였다. 이에 합종설의 주장자인 소진은 제(齊)에서 암살되었다. 종횡가의 무리는 책모(策謀)를 다해 지배자 계층간에 권력 투쟁을 야기시켜 놓고, 그 권력 투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확보하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
음양가의 사상
陰陽家-思想 음양이원(陰陽二元)과 5행(五行)을 조합하여 신비적인 종교철학을 쌓은 것이 음양가이다. 음양과 5행을 조합하여 한 개의 철학 체계로 만든 것은 제(齊)의 추연(騶衍)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양가는 이 추연으로 대표된다.
추연
鄒衍 기원전 3세기경의 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사람이며 한편 추연(鄒衍)이라고도 쓴다. 맹자보다 조금 뒤의 사람이다. 제나라 땅은 전통적으로 미신적·주술적·신비적 사상의 경향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중국 재래의 5행사상(五行思想)과 음양2원론(陰陽二元論)을 교묘하게 조합하여 소위 음양5행사상을 구축하였다. 추연의 저서라고 하여 <추연(鄒衍)> 49편, <추자종시(騶子終始)> 56편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추연의 철학으로 유명한 것은 소위 '5덕종시설(五德終始說)'과 '적현신주설(赤縣神洲說)'이다. '5덕종시설'이라 함은 왕조(王朝)는 그 왕조에 부여(附與)된 5행의 덕의 운행논리(運行論理)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흥폐가 교체된다고 하는 일종의 신비적 역사철학이다. 진(秦)을 수덕의 왕조(水德王朝)라 하고, 그 이전의 4조(四朝)를 황제(黃帝)=토덕(土德), 하(夏)=목덕(木德), 은(殷)=금덕(金德), 주(周)=화덕(火德)에 배치하여 5행상극의 이론대로 각 왕조는 다음에 나타난 왕조에게 타도될 운명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물은 5행상극의 최후의 것으로서 왕조순환은 수덕(水德)의 구유자(具有者)인 진(秦)에 그친다고 하여 진왕조의 정통성 및 절대성을 말하였다.
적현 신주설(赤縣神洲說)이라 함은 전우주는 81주(洲)인데 그 중의 9분의 1인 9주를 점거하고 있는 것이 적현신주(赤縣神洲)라고 이르는 중국의 토지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신비적인 우주철학이다. 9주설(九洲說)은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에 쓰인 것이다. 9(九)는 궁(窮)으로 통한다. 그 9(九)와 9(九)를 승(乘)하여 우주를 설명하려는 단순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하는 바는 역시 신비적 주설(呪說)이다. 추연(鄒衍)이 말한 5덕종시설(五德終始說)은 얼마 안 되어 진(秦)이 망하고 한왕조(漢王朝)가 출현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또 새로운 한대(漢代)의 왕조론에 의하여 권력의 교체를 설명, 역사의 예언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추연(鄒衍)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는 음양과 5행의 조합은 한대에 더욱 복잡·세밀해져서 자연현상이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 심지어 정령(政令)의 방식에까지 그 논리가 이용되게 되었다.
잡가의 사상
雜家-思想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제설(諸說)을 절충 해설하여 집대성한 것이 소위 잡가(雜家)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있다.
여씨춘추
呂氏春秋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사실상의 아비 여불위(呂不韋)가 많은 학자를 집합하여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절충·통합시키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령(政令)의 참고서로 한 것이 <여씨춘추>이다. 26권이 있는데 12기(十二紀) 8람(八覽)·6론(六論)으로 나누어진다. 취급한 학설 중에는 도가(道家)의 것이 가장 많고 유(儒)·병(兵)·농(農)·법가의 설도 섞여 있다. 이것을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은 이 12기(十二紀)의 요약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