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3·1운동 이후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온통 독립 위한 삶… 日 ‘용의 조선인 133’ 지목
늘 부국강병이 소원 ‘첫째도 둘째도… 교육’ 강조
중국군 비행사에서 임시정부의 주역으로 활약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에 대해 질문을 한다. 내가 만난 후손분들은 대부분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선조들의 독립정신을 알리기 위해 시간을 쪼개 활동하는 후손들, 그들은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휘날리는 독립청년이었다.
교육 강조한 그, 전 재산 장학금으로
독립운동 관련 연구를 하다보면, 책에 담긴 지식보다 현장에서 가슴으로 배우는 때가 많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한국의 어머니들, 그들은 광복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광복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권기옥 여사의 후손 ‘권현 선생님’과 연락을 했다. 그가 기억하는 권기옥 여사는 “나는 늘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도 교육, 둘째도 교육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1975년부터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시작해서 1985년에는 전 재산을 정리해 대학 장학회에 기부했고, 2015년까지 서울대 학생 등 140여 명에게 ‘권기옥 장학금’으로 전달됐다는 것이다.
3·1운동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사는 삶
광복 이후에도 독립정신을 실천한 권기옥.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19살 3·1운동 때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이후는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권기옥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당시 숭의여학교에는 학내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대가 있었는데, 바로 송죽(松竹)결사대였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기 있는 여학생이 모여 태극기를 제작,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그들은 평양 3·1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19세 소녀였지만 3·1운동 참여로 체포·고문을 당했고, 구류에 이어 6개월 수감되지만 이후의 활동은 더 가열했다. 그는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했던 ‘결백회’와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한 ‘면려회’, 순회 민중계몽활동에 주력했던 ‘브라스 밴드단’과 함께 평남도청 폭파지원, 여자 전도대를 조직하며 전국 강연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상해 망명의 길에 오른다.
최초 여류비행사의 또 다른 이름, ‘용의 조선인 133’
권기옥의 치열했던 삶은 독립운동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주 감시 대상이었다는 것이 「용의 조선인 명부」에 기록된 ‘용의 조선인 133번 권기옥’에서도 드러난다. 1920년 평남도청 폭파사건에서 폭탄 제조를 도왔던 권기옥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상해로 망명하면서 삶의 변화를 맞이한다. 많은 임시정부 요원들과 만나는데, 특히 임시정부 군무부총장으로 미국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던 노백린과의 만남은 그가 잊고 있었던 비행사의 꿈을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하면 비행사의 꿈을 펼칠 수 있을까…’ 부푼 비행사의 꿈을 안고 중국 비행학교의 문을 두드린 지 수차례, 드디어 권기옥은 1923년 말 중국 윈난항공학교의 제1기 학생으로 합격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비행기에만 몰두하며 학업에 열중하기를 여러 해, 1925년 2월 28일 첫 한국인 여류비행사로 소식을 알렸다.
중국군 비행사에서 임시정부, 한국애국부인회의 주역이 되다
타국의 비행사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본의 감시와 타국의 설움,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염원으로 많은 책임을 감내해야 했다. 중국 항공처 부비행사, 국민정부 동로항공사령부 비행사 등 중국에서 그의 입지가 높아질수록 일본은 물론 중국의 감시는 격해졌고 간첩 혐의로도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남편 이상정이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권기옥의 활동도 임시정부 활동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한국광복군의 한·중연대와 한국애국부인회 재건에 힘을 쏟았으며 여성독립운동가 단체결성에 앞장섰다.
1943년 2월에는 ‘3·1운동 정신 계승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여성항일운동 참여, 남녀 평등한 지위획득과 향유’ 등을 내용으로 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선언문’ 발표를 통해 여성독립운동가로 국내외에서 활약했다. 또한 임시정부 군무부 공군설계위원회 위원으로 한국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작전 구상, 공군건설계획에도 적극 참여해 힘을 보태었다. 광복 후에도 그의 활동은 이어져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유일한 여성전문위원으로 초창기 한국군의 조직에 힘을 보탰다.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나라를 빼앗기는 건 한순간이었고, 다시 찾는 데는 36년이 아니라 50년이 걸렸다. 결국은 반으로 나뉘어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했구나…” 라고 탄식을 했던 권기옥이 평생 가슴에 품었던 나라는 부유하고 강한 나라! 다시는 침략을 당하지 않는 나라였다. 늘 최초의 수식어가 따라다닌 당찬 신여성, 권기옥! 1911년 은단 공장의 여공으로 근무했던 그가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일선에 서며 주목받았던 이유는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유와 평화를 갈망했던 순수청년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