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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반변천 청송(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별도 탐방] ① 안동 반변천 수계-청송(1)
청송(靑松)
청송(靑松)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중동부에 위치한 군(郡)으로 반변천(半邊川) 수계의 동남부에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 영양군과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의 험준한 산악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낙동정맥을 경계로 영덕군, 포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의 보현산맥(팔공산기맥)은 영천시와 경계를 이룬다. 특히 청송은 부동면 일대는 주왕산국립공원에 자리하여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행정구역은 청송읍, 주왕산면(부동면), 부남면, 현동면, 현서면, 안덕면, 파천면, 진보면 등 1개읍 7개면 86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136개리). 군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군청로 51이다.
청송의 지세와 자연환경
동쪽은 낙동정맥의 태행산(太行山, 933m), 금은(金銀)광이(812m), 주왕산(周王山, 721m), 무포산(霧抱山, 717m), 대둔산(905m), 주왕산(周王山 721m), 무장산(霧藏山, 641m), 무포산, 구암산 등이 솟아 험한 산악지역을 이룬다. 남쪽은 보현산맥(팔공산기맥)의 지맥이 포항과 경계를 이루며 남북으로 나누는 지체구조(地體構造)를 이룬다. 구암지맥이 군(郡)의 중앙부를 횡단하여 용전천과 길안천의 산곡을 이루는 지형이다.
중북부에 방광산(519m), 중대산(680m), 서쪽에는 사일산(649m), 연점산(鉛店山, 871m), 산지봉(産芝峰, 890m), 구무산(676m) 산두봉(719m) 등이 솟아 안동시와 의성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은 비봉산(飛鳳山, 671m), 고산(529m), 광덕산(484m) 등이 솟아 있다. 남쪽은 구암산(九巖山, 807m), 면봉산(眠峰山, 1,113m), 베틀봉(930m), 보현산(普賢山, 1,124m) 등이 보현산맥을 이루어 포항시·영천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반변천 수계(水系), 청송(靑松)
반변천(半邊川)은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영양군의 한복판을 관통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반변천은 청송군 ‘진보’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임하댐’이 유입되고 난 후 ‘낙동강’에 유입된다. 청송의 반변천 수계의 주요 하천으로는 서시천, 용전천(龍纏川), 길안천(吉安川), 보현천(普賢川)을 들 수 있다.
영양에서 내려오는 반변천에 청송에서 첫 번째로 유입되는 지천이 진보의 ‘서시천’이다. ‘서시천’은 낙동정맥 태행산의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진보에서 반변천에 유입된다. ‘용전천(龍纏川)’은 부동면·부남면에서 흐르는 지류를 합하여 청송읍과 파천면을 경유하여, 영양에서 진보를 경유하여 서쪽 안동으로 흐르는 반변천(半邊川)에 합류한다.
‘길안천(吉安川)’은 현서면 방각산(方覺山)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현서면 보현산에서 발원하여 갈전리·성재리·복리를 지나 북류하는 ‘보현천(普賢川)’과 안덕면 명당리에서 합류한다. 더 나아가 신성리에 이르러 베틀봉·면봉산 등의 보현산맥에서 발원하여 월매리·개일리·도평리를 지나 북류하는 ‘눌인천(訥仁川)’과 다시 합류한다. 그리고 화부산(花釜山, 626m)과 연점산(鉛店山, 871m) 사이에 감입곡류를 형성하면서 관류한다. 그 뒤 임하면 신덕리에 이르러 반변천으로 흘러든다.
청송의 유물·유적
이 지역에서는 아직 선사시대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현대의 지리적 조건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시대의 유물·유적도 매우 적은 편이다.
불교문화재
청송읍 덕리의 보광사에는 ‘보광사 극락전’(普光寺極樂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4호), 부동면 상의리의 ‘대전사 보광전’(大典寺寶光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 부동면 상의리의 ‘대전사 보광전 석조여래삼존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6호), 부동면 상의리의 ‘대전사 명부전 지장탱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8호)와 대전사 명부전 지장삼존 및 시왕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9호), 대전사 주왕암 나한전후불탱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0호) 등이 있다. 그리고 파천면 송강리의 ‘수정사 대웅전’(水晶寺大雄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3호), 진보면의 청송 ‘이촌리오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4호) 등이 있다.
대전사 보광전 (삼층석탑)
청송에는 거대한 암벽을 병풍처럼 두른 주왕산(周王山)이 있다. 주왕산에서 주방천계곡이 특히 볼 만한 데, 그 입구에 대전사(大典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기도 하고, 진성여왕 6년(892년)에 낭공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합니다. 절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산을 뒤에 두고 자리 잡은 그 모습만은 무척 인상적이다.
대전사에서 중심 전각은 보광전(普光殿)이다. 이곳에는 석가여래불을 주존불(석조여래삼존상, 유형문화재 356호)로 모셨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년)에 중건한 것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일 뿐만 아니라 이곳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이 건물 앞쪽 마당에 석탑 하나가 있다. 대전사 보광전 삼층석탑은 많은 부분의 탑재가 없어져 최근에 새로 해 넣고 복원하였다. 하지만 이 탑이 있기에 이 절의 연륜이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유교문화재
청송읍 월막리의 ‘청송향교’(靑松鄕校)와 ‘찬경루’(讚慶樓, 보물 제2049호), ‘운봉관’(雲鳳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덕리의 ‘만세루’(萬歲樓,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2호), 진보면의 ‘청송 추현리 박씨효자려’(靑松楸峴里朴氏孝子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0호), 세장리의 ‘백호서당’(柏湖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1호)이 있다.
또한, 광덕리의 ‘진보향교’(眞寶鄕校,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 안덕면 신성리의 ‘금대정사’(金臺精舍,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현서면의 ‘도리추원당’(道里追遠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5호), 파천면 신기리의 ‘기곡재사’(岐谷齋舍,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1호) 등이 있다.
청송 송학서원
송학서원(松鶴書院)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에 있는 서원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고, 안덕면 당저(堂底)마을의 외가에 태어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임진왜란을 피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유풍(儒風)을 진작하고 유교 진흥에 많은 공이 있다 하여 청송 유림들이 1702년(숙종28)에 당저(현 명당3리)에 세우고 세 분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했다.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면서 조상의 유적이 있는 청송(靑松)을 동경(憧憬)하여 “청송의 백학은 분수에 없는 것이지만, 푸른 물 단산은 인연이 있나 보네.(靑松白鶴雖無分 碧水丹山儘有緣)”이라고 시를 지었다. 싯구(詩句) 중 “松”와 “鶴”자를 따서 ‘松鶴書院’이라 명명하였다. 무엇보다 청송은 퇴계의 입향조가 가문을 시작한 곳으로 진보(진성) 이씨의 본관이라는 것도 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문을 닦고 인간의 도리를 밝히려면 산자수명한 청송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송학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집이다.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실이 있고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다. 동재에는 직방재(直方齋), 서재에는 존성재(存省齋)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정연한 4개의 방에 툇마루가 있는 엄격한 얼굴이다. 별도의 담과 삼문으로 구획되어 있는 사당 존덕사(尊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송학서원의 모든 맞배지붕은 박공면 판자 끝 부분이 간결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송학서원은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서당을 모태로 1702년 유림에 의해 창건되었다. 180여 년간 송학서원은 삼자현 이남의 유일한 서원으로 인재 육성과 유림 활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이후 1882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당으로 격하했다. 다시 서원으로 격상된 것은 1996년이다. 사당은 2010년에 건립했다. 시작부터 현재까지 송학서원을 지키려는 유림의 안간힘이 서원의 정신이다.
청송향교
청송향교(靑松鄕校)는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이다. 1426년(세종 8) 청송부사 정지아(鄭之雅)가 창건하였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국난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인조 때에 증축, 중수하였고, 1693년 (숙종 19)에 대성전과 강당(명륜당), 주사를 현 위치인 월막리로 이건하였으며, 고종 6년(1869년) 12월 부사로 부임한 윤현기(尹顯岐)가 재임 3년 동안 개수하여 전해져 왔으나,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인하여 현재 정문에 서있는 청아루가 퇴락되어, 1962년 대성전 앞 동무와 서무를 철거하여 그 자재로써 청아루(菁莪樓)를 보수하였으며, 한때는 청송중학교 임시교실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大成殿'(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학통을 계승한 안연, 증자, 자사, 맹자의 위패와 송나라의 2현(二賢)인 정호와 주자, 그리고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 고려·조선 16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고 있다.. 해마다 음력 10월 初正日(초정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 또한, 매년 음력 8월 상정일(첫번째 드는 丁일)에 맞춰서 유교적 제례 의식인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는 등 유교문화의 전승에도 기여하고 있다.창,
향교(鄕校)는 조선시대에 지방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옛날로 말하면 지방학교로서 주로 양반의 자제들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향교는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불렸는데 수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 가운데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에 명하여 향교가 만들어지고, 또 잘 운영되는 정도를 가지고 지방관 평가의 기준을 삼는 등 설립을 장려하였다.
청송의 천연기념물
유서 깊은 청송에는 오래된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청송 신기동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192호), 청송 관리의 ‘왕버들’(천연기념물 제193호), 장전리에는 청송 안덕면의 ‘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3호), 부남면 ‘흥원리 개오동나무’(천년기념물 제401호), 현서면 월정리의 청송 침류정(枕流亭)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08호) 등 오래된 나무들이 있다.
청송 관리의 왕버들
이 중 청송 관리의 왕버들은 청송군 파천면 관리의 왕버들은 1500년 경에 심어진 거목이다. 높이가 18m, 근원둘레는 7.14m, 흉고둘레는 6.5m에 달한다. 본래는 굵게 자란 나무였으나, 벌집을 꺼내기 위해 서쪽 가지를 자른 후, 그 부분이 썩어 들어가 현재는 대부분 죽은 상태이다. 주변에 지름이 1m 정도 되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이 왕버들과 옆에 서 있는 소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한 총각이 마을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처녀의 아버지 대신 군대에 갔다. 그러나 그 총각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왕버들에 목을 매었는데 그 곁에서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이 나무는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서낭나무로 매년 음력 1월 14일에 나무 아래에서 마을 제사를 지내왔다. 특히 이 제사 때 사용한 종이로 글씨를 쓰면 명필이 된다는 말이 있어 제사가 끝나면 서로 다투어 종이를 가져갔다고 한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등지의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 버드나무에 비해 키가 크고 잎도 넓기 때문에 왕버들이라 불리며, 잎이 새로 나올 때는 붉은 빛을 띠므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나무의 모양이 좋고, 특히 진분홍색의 촛불 같은 새 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다워 도심지의 공원수나 가로수로도 아주 훌륭하다. 청송 관동의 왕버들은 우리 조상들의 전설과 문화가 배어있는 오래된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제19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청송의 고택
청송읍 청운리에 ‘청운동 성천댁’(靑雲洞星川宅, 중요민속자료 제172호), 현동면 ‘창양동 후송당’(昌陽洞後松堂, 중요민속자료 제173호), 파천면 덕천리에 ‘숭소고택’(松韶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3호), 중평리에 ‘평산신씨 판사공파종택’(平山申氏判事公派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9호)·‘서벽고택’(棲碧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1호), 파천면 덕천리의 ‘청송 초전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1호), 현동면 개일리의 ‘청송 오체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8호), 부동면 상평리의 ‘청송 덕양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9호) 등의 가옥이 보존되고 있다.
안덕면 신석리에 ‘방호정’(方壺亭,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1호), 현서면 월정리에 ‘침류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6호)이 있다. 파천면 송강리에는 ‘청송 한지장’(靑松韓紙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3호), 진보면 진안리에 ‘청송 옹기장’(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5호), 진보면 추현리의 ‘청송추현 상두소리’(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6호)가 전승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전국에서 유명한 ‘주왕산’(周王山)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송 덕천마을 송소고택(松韶古宅)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은 고려 말에 이름을 얻어 조선이 개국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고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던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의 후손들이 약 600년간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청송 심씨의 본향으로 조선왕조를 통해 정승 13명, 왕비 4명, 부마 4명을 배출하였고 심원부의 형 심덕부(沈德符)는 조선개국 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다섯째 아들 심온의 딸은 세종과 혼인한 소헌왕후이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영조(英祖)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지경리(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이곳 덕천동에 이거하면서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 대문 위에는 전서체(篆書體)로 '송소고장(松韶古莊)'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전서를 잘 썼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글씨이다. 택(宅)이라고 하지 않고 장(莊)자를 쓴 이유는 그만큼 이 집이 대저택이었기 때문이다. 대지만 3000평이다. 우리나라 장급(莊級) 저택으로는 강릉에 '선교장'이 있고, 청송에는 '송소고장'이 있다. 청송 심부자(沈富子)는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崔富子)와 함께 9대에 걸쳐 무려 250여 년간 만석의 부를 누렸던 영남의 대부호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집안이다. 조선 시대에 사가(私家)가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인 99칸(7개 동)의 위용을 자랑한다. 보은의 선병국 가옥, 강릉 선교장과 더불어 전국 3대 '99칸 고택'으로 꼽힌다.
1880년께 지어진 이 집은 조선 후기 상류층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대원군 때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 2명이 내려와 건축을 주도했다고 한다. 목재는 대부분 주왕산과 태백산 자락의 금강송을 사용했다. 송소고택(松韶古宅)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다.
송소 심호택의 둘째 아들 송정(松庭) 심상광(沈相光)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고 청송향교의 전교를 2회에 걸쳐 맡은 학문이 뛰어난 유학자로 지금도 매년 유생들이 송정학계를 열고 있다. 지금 고택의 주인은 심재오(66)는, 송소고택을 세운 송소 심호택(1862~1930)의 증손자로, 청송 심씨 가문의 11대 주손(胄孫)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서울에서 생활해 오다가 2010년 9월 부인 최윤희(63) 여사와 함께 낙향했다.
송소고택은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를 갖추며 7채의 총 99칸으로 이루어졌다. 전체적으로 'ㅁ자' 형으로 영남지방 특유의 양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송소고장(松韶古莊)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사랑채. 전면을 향했을 때, 오른쪽에 큰 사랑채 왼쪽에 작은 사랑채를 배치했다. 큰 사랑채는 막돌과 긴 돌을 툭툭 다듬어 3단의 축대를 쌓고 집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 가뿐하다. 작은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작은 사랑채는 큰 사랑채보다 한두 발짝 뒤로 물러앉았는데, 이는 유교 질서를 구현한 설계다.
큰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 사이 마당에는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을 사랑채에서 보이지 않도록 헛담을 두었다. 따로 출입문도 없는 헛담이 ‘ㄱ’자 형태로 사랑채를 감싸고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빤히 사랑채가 보이는데 내외법이 엄격하던 시절에는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사랑채를 가리는 헛담이 수줍게 두 손을 포개듯 앉아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도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담장에는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이것을 구멍담이라고 한다. 이 구멍의 수는 사랑채에서 보면 6개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다. 안채 구멍 1개에 사랑채 구멍 2개를 45도 각도로 연결해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나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 구멍은 안채에서 사랑채에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알아보기 위한 용도인 것이다. 별당은 두 채로 별채와 대문채로 되어 있는데, 온돌방 앞으로 누마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사랑방, 상방, 대청, 안방 2칸, 부엌으로 구성되며, 온돌방 윗부분에는 다락이 있어 수납공간으로 사용한다. 안방 안에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문화해설사인 최인서 씨는 “안주인이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작은 방에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이것의 유래로 ‘뒷방 마님’이라는 호칭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길 15-2
청송 심씨(靑松沈氏)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 입구에 ‘청송 심씨의 본향’이라고 쓴 화강암 표지석과 나란히 장방형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청송 심씨가 덕천마을에 입향하게 되는 연유와 형제간의 우의를 담은 것이다.《還去靑松》(환거청송, 청송으로 아우를 보내며)이다.
落葉滿程時 낙엽만정시 낙엽 떨어져 가득한 거리에
吾家兄弟離 오가형제리 우리집 형제 이별하는가
送君還故土 송군환고토 그대를 미리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白首看雲思 백수간운사 흰머리(형)은 구름을 바라보며 (아우)를 생각하노라
이 시는 석촌(石村) 심효상(沈孝尙)이 아우 만우(晩愚) 심효연(沈孝淵)을 고향으로 보내며 남긴 시(詩)다. 심효연(沈孝淵)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고향이 청송(靑松)의 덕천(德川)마을로 돌아와 살다가 1490년에 죽었다. 이곳 덕천은 시조(始祖) 문임랑(文林郞) 심홍부(沈洪孚)의 묘소가 있고 심효상(沈孝尙)-심효연(沈孝淵) 형제의 후손이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충효(忠孝)를 가훈으로 삼아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 청송 심씨의 본향(本鄕)이다.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가 넷, 부마가 넷, 정승이 열셋으로 전통적인 명문대가다. 청송 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 고려시대 때 종9품 문관의 품계)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받들고, 그의 증손인 심덕부(沈德符)와 심원부(沈元符) 등 크게 두 가문으로 나뉜다.
심덕부는 고려 말 왜구토벌의 공훈을 세우고 위화도회군을 도와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을 거쳐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청성(靑松의 옛 지명)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이 개국되자 회군공신(回軍功臣, 위화도 회군) 1등에 추록되었으며, 1399년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하지만 심원부(元符)는 정몽주와 길재 등과 더불어 새 왕조의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현재 청송에 흩어져 사는 후대들은 대개 원부의 후손이 많다.
심덕부(沈德符)의 아들 7형제 대에서 가세가 크게 융성하였는데, 다섯째 아들 심온(沈溫)이 세종의 국구(國舅, 장인)로서 영의정을 지냈고, 여섯째 심종(沈淙)은 태조(太祖)의 부마(사위)로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다.
심온(沈溫)의 둘째 아들 심회(沈澮)도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다. 심회(沈澮)의 증손인 심연원(沈連源)도 명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심연원(沈連源)의 아들 심강(沈鋼)도 명종의 국구(國舅)로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심강(沈鋼)의 손자 심열(沈悅)은 인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심열(沈悅)의 현손 심호(沈浩)도 경종의 국구(國舅)로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청송 소헌공원(昭憲公園)
조선시대 가장 어진 왕후로 칭송받는 세종(世宗)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시호를 따서 이름 지어진 역사공원이다. ‘청송(靑松)’은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本鄕)이라는 연유로 1459년(세조 5)에 청송군에서 ‘청송도호부’로 승격되어 437년간 도호부로서 위상을 지켜오다가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때 다시 ‘청송군’이 되었다.
‘운봉관(雲鳳館)’은 1428년(세종 10) 청송군수였던 하담(河憺)이 찬경루(讚慶樓)와 함께 건축하여 객사로 사용하여 왔고 선조 때 한 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1717년(숙종 43)에 부사 성환(成瑍), 1812년(순종 12)에 부사 강휘옥(姜彙鈺), 1871년(고종 8)에 부사 윤현기(尹顯岐) 등이 수차례 중수하였다고 전하며 특히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장소로,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 중당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되었고 동익사에 ‘雲鳳館’(운봉관)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오다가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찬경루(讚慶樓)’는 1428년(세종 10)에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 하담(河憺)이 운봉관과 함게 2층 16칸으로 건립한 누각으로 조선시대 관아건물에 배치되어 사신을 위한 연회나 지방유생들의 시문회(백일장) 장소로 사용되어 왔고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792년(정조 16)에 재건하여 수차례 중수를 하였고 2008년에 다시 고치고 단청도 하였다.
일설에는 세종의 여덟 왕자들이 어머니 소헌왕후를 위해 각 두 칸씩 지었다고 전하며 누각이름은 하담의 청을 받은 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우리 조선에서 만세토록 끊이지 않고 복을 누리고 있으며 이 누각에 올라 보광산에 있는 소헌왕후의 시조묘를 바라보며 우러러 찬사를 드리게 되기 때문에 찬경(讚慶)이라 하였다'고 하여 ‘찬경루(讚慶樓)’라 지었다. 용전천이 범람하여 시조묘소로 갈수 없을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세종의 세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쓴 ‘松柏岡陵’(송백강릉)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나 화재로 없어지고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홍성민 등이 남긴 시문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태조 4년)~1446년(세종28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는 조선 세종의 왕비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별칭은 공비(恭妃), 경빈(敬嬪), 시호는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이다.
1395년(태조 4년), 문하시중 심덕부의 아들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과 삼한국대부인 안씨(安氏)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고려 말 조부 심덕부와 부친 심온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바지한 공으로 개국공신이 되었고 심온은 세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영의정에 오르며 심씨의 숙부도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혼인한 부마로서 왕실과 그녀의 집안은 사돈 관계였다.
1408년(태종 8년)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군(당시 12살)과 가례를 올려 경숙옹주에 책봉되고 이때 그녀의 나이 14살 이었다.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을 세자는 첫째 양녕대군이었으나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엄격한 궁중 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고 몰래 궐을 나가 기생, 조정 대신의 첩실과 놀아났고 사냥, 풍류의 생활을 즐겨 자주 태종의 화를 불렀다. 그의 무질서한 생활은 태종은 물론 조정 대신들에게도 비난의 대상이 었고 아버지의 엄한 훈계에도 소용이 없었다. 이러한 양녕의 무질서한 행동으로 태종은 자신이 이룩한 왕권을 이어 안정된 정치를 펼치기에는 양녕대군이 부적당하다고 느끼게 되고, 이때만 해도 심씨는 자신이 왕비가 될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녀의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閔氏)의 동생 4형제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기에 왕비가 결코 행복한 자리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418년(태종 18년, 세종 즉위년) 4월 태종의 마음을 읽은 조정 대신들이 현 세자(양녕대군)를 폐하고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이 빼어난 충녕대군이 조선의 성군이 될 거라며 왕에게 주청을 올리고, 같은해 6월 마침내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되며 심씨는 경빈으로 승격된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충녕대군이 조선 제4대 왕으로 즉위하고 심씨가 왕비에 오르자 부친 심온도 영의정에 오른다.
이 무렵 심온은 명나라 사은사로 떠나는데 한양이 떠들썩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고 떠나자 태종은 민무구·민무질 등 그의 처남들에게 했던 것처럼 화살을 중전의 친정으로 겨냥한다. 상왕 태종은 경복궁을 지키는 금위군의 군사를 나누어 상왕의 거처인 수강궁과 경복궁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 심온의 동생 심정이 나라의 군사를 상왕이 독단적으로 처리한다는 불평을 이유로 중전의 숙부 심정을 조사하게 되고 모진 고문 끝에 형 심온이 이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다.(강상인의 옥)
상왕의 뜻(외척 세력 숙청)을 간파한 신하들에 의해 사은사로 갔다가 귀국하던 심온은 압록강에서 압송되어 조사를 받다가 자진 강상인, 심정과의 억울하지만 연관성을 인정하고 다음날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는다. 이때 동생 심정은 모진 고문으로 이미 숨졌고, 부인 안씨는 관가의 노비가 된 상태였다. 이를 모두 지켜본 소헌왕후 심씨(沈氏)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냥 친정이 멸문지화 되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세종 또한 부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라 아무런 힘이 없었다.
심온을 제거한 박은(朴誾) 등 신하들은 훗날 중전이 반드시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 생각하여 상왕에게 중전 심씨(沈氏)의 폐출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부왕 태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유는 심씨(沈氏)가 많은 자손을 생산했고 세종과도 금슬이 좋다는 것이다.
태종은 왕권강화의 대책으로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 제도를 법제화했다. 이로 인해 세종은 심씨와의 사이에 8남 2녀를, 5명의 후궁에게서 10남 2녀를 두었는데 후궁은 반드시 양반 가문에서 간택하도록 되어 있으나 내자시의 여종이었던 신빈 김씨처럼 궁녀 출신도 있었다.
세종이 많은 후궁들을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부인 심씨는 투기하지 않았다. 후덕했던 그녀는 오히려 후궁과 그 소생들을 잘 보살펴서 세종의 치세에 내명부의 여인들은 분란이 없었다. 심씨는 궁중 곳곳에 심복을 두고 후궁들의 동태와 왕자들의 행동을 파악하였는데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유모를 통해 전해 듣고 세종에게 건의하여 다스렸으며 후궁들과 왕자들을 잘 관리하였다.
아버지와 숙부의 비참한 죽음과 관가의 노비가 된 어머니로 인한 슬픔을 가슴에 묻은 채, 한 때 폐비의 위기까지 이르렀던 심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어질고 후덕한 처신 때문이었다. 이러한 어진 성품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세자빈 폐출이 있었고 세 번째 세자빈은 손자(단종)를 생산한 다음날 세상을 떠난다. 넷째 아들 임영대군과 여덟 째 아들 영응대군의 부인도 병 때문에 내쫓아야했다.(이 때는 여자가 병에 걸려도 내쫓기는 원인이 되었다)
생애 후반의 세종과 소헌왕후는 불교에 귀의하여, 자주 불법(佛法)을 행하였다. 1444년(세종 26년)과 1445년(세종 27년), 어머니인 삼한국대부인 안씨와 아들인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을 연이어 잃고 불교에 의지했으며 승려를 모아 기도를 하고 불법을 행하였다. 또한 법당을 방문하고 석탑을 조성하기도 하였는데, 당시의 집현전의 학자들이 반발하였다.
1446년(세종 28년) 3월 10일, 병이 들자 세종은 죄수를 방면하고 산천초목에 기도를 드렸으며 승려들에게 불사를 주문하여 소헌왕후의 병에 감응하게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자 세자는 식사를 거두고 병간호를 하였으나 3월 24일,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저택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소헌(昭憲)이며, 문종 대에 선인제성(宣仁齊聖)의 존호가 올려졌다. 능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英陵)이며, 세종과 합장되었다.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 / 서벽고택, 사남고택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에 있는 ‘청송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靑松 平山申氏 判事公派 宗宅)과 분가 고택(分家古宅)’을, 2014년 6월 19일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제282호로 지정하였다. 문화재구역 안에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宗宅)과 서벽고택(棲碧古宅), 사남고택(泗南古宅)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종택(宗宅)은 고려 개국 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12세손 신현(申賢)이 영해군(寧海君)이 되면서 영해파로 분파했고, 그 후 대동보 규정에 따라 15세를 분파조(分派祖)로 결정함에 따라,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태복판사(太僕判事) 신득청(申得淸)을 분파조로 판사공파가 되었고, 이 집이 파종택이 되었다. 이 종택은 신숭겸(申崇謙)의 27세손 신한태(申漢泰, 1663~1719년)가 1705년경 이곳으로 입향(入鄕)하여 건립하였다.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서벽고택 및 사남고택은 종택을 중심으로 종법적 질서 규범에 따라 서측으로 차례로 자리한 배치유형을 통해 분가할 때 터를 잡는 방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세 가옥의 건축평면 구성은 지역적 특성과 각자 나름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대지의 형상에 따른 건축구조 수법과 지붕구성 방법도 지역의 건축특성을 잘 보여준다.
종택은 사대부가로서 갖추어야 할 건축의 격식을 고루 갖추고, 사랑 공간의 확대 양상인 별채, 영정각, 서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가옥의 건축 평면은 지역적 특성과 각각 나름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또 대지의 형상에 따른 건축구조 수법과 지붕 구성 방법도 지역의 건축특성을 잘 보여준다.
평산 신씨 판사공파의 파종택은 현재 안채, 새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영정각, 서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년에 종택 앞에 있는 새 사랑채를 중수할 때 기록이 나왔는데 1784년경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안채는 이보다 앞서 지었다 하며, 서당과 영정각 건축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솟을대문 문간채는 5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새 사랑채가 보인다. 앞에 작은 밭이 있다. 종택은 지역 사대부 저택의 대표적 주거문화유산으로 물촌(勿村) 신종위(申從胃, 1501∼1583)의 영정, 《사남문집》, 시헌서 등 유물은 조선시대 예학과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서벽고택(棲碧古宅)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이 고택은 동리의 얕은 산을 배경으로 한 동남향의 ㅁ자형 건물로서, 신효승이 소유, 관리한다.
원래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장군의 31세손이며 판사공 휘현(諱賢)의 14세손 신한창(申漢昌)이 분가하면서 지은 5칸 규모의 세간집이었다. 그 뒤 1739년(영조 15)에 증손 신치구(申致龜)가 조선 영조(英祖) 15년에 확장, 증축하고 신한창의 서벽(棲碧)이라는 호를 따서 서벽고택(棲碧古宅)이라 하였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홑처마 정자지붕집이며 대문채와 안채, 동익사, 서익사가 맞붙어 있는데 안채의 2칸은 대청으로 꾸며 놓았다. 丁자형의 배치과 사랑부분의 구성, 창호의 배치법, 수장공간의 활용법 등 경북 북부지방에 남아 있는 'ᄆ'자형 전통가옥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104㎡이며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납도리 3량가이다. 고택은 공간의 활용도와 구성에서 소박한 선비의 단아한 성품이 엿보이는 가옥으로 근래까지 문중의 자손이 기거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1993년 11월 30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사남고택(泗南古宅)
연화봉의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는 'ㅁ'자형 건물로 1700년대에 건립된 전통가옥이다. 丁자형 배치와 사랑 부분의 구성, 창호의 배치법, 수장 공간의 활용법 등 경상북도 북부지방에 남아 있는 ㅁ자형 전통가옥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평산 신씨(平山申氏)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31세손이며, 판사공파(判事公派)의 시조 순(順)의 19세손인 신치학(申致鶴)이다. 신치학은 8형제 중 다섯째였는데, 성인이 되어 분가하면서 이 집을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전란으로 다른 6형제의 집은 다 불탔으나, 장남이 거처하던 서벽고택(棲碧古宅)과 그의 집이었던 사남고택(泗南古宅)은 보존되었다.
사남(泗南)은 신치학(申致鶴)의 손자인 신우호(申遇浩)의 호인데, 마을 앞을 흐르는 사양천(泗陽川)에서 그 호를 따왔다고 한다. 사양천은 지금의 사수천(泗水川)이다. 신치학은 학문 전수에 노력하였으며, 청송 주왕산(周王山) 주방팔경(周房八景)의 내용이 전하는 《사남집(泗南集)》 4권을 남겼다.
진성 이씨(眞城李氏)
청송의 진보(眞寶)는 진성 이씨(眞城李氏)의 본관이다. 진성 이씨는 청송 지역의 호족이며 토성 성씨로 고려시대부터 세거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안동,예안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진성 이씨’를 ‘진보 이씨’라고도 한다. '진성(眞城)'이라는 호칭이 붙게 된 것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6세손 송재(松齋) 이우(李堣)가 중종반정공신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군되면서 그의 부친인 5세 이계양(李繼陽)이 진성군(眞城君)에 추봉되었는데 이때부터 ‘진성 이씨’로 불리어졌다는 게 유력하다.
‘시조(始祖) 이석(李碩)’의 가계는 고려시대 진보현의 아전(衙前)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부(영찬), 조(송주)가 모두 호장(戶長)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대대로 진보고을의 호장직을 세습해온 토호(土豪)였음을 알 수 있다. 여말선초 신진사대부의 대다수가 바로 이 호장층에서 중앙관료로 성장한 가문들인데, 진성 이씨도 호장가에서 발원하여 이석(李碩) 대에 생원시에 합격해 처음으로 가문의 기틀을 닦았다.
이석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충숙왕대에 과거에 급제한 후 1364년(공민왕 13) 봉상대부 지춘주사(奉常大夫知春州事)로 홍건적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에 이르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 공으로 이석(李碩)은 봉익대부 밀직사(奉翊大夫密直司)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자 자수(子脩)계는 고려 말 사족이 되면서 안동으로 이주하여 후에 안동 또는 영주, 예안(禮安)파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석(李碩)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본향지인 진보(眞寶)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 [시조공묘갈명(始祖公墓碣銘)]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59명 배출했고, 특히 7세손 이황이 문묘와 종묘에 동시에 배향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석의 장남 이자수는 만년에 피폐해진 진보를 떠나 안동 주촌(周村)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안동시에서 그의 후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반면, 차남 이자방(李子芳)은 형을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진보에 남았으며, 이자방의 후손들은 후평파로 갈라져서 그대로 진보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 [안동] 진성이씨 주하동 경류정종택 *
이 건물은 진성 이씨(眞城李氏) 안동 풍산 마애리 주하세거(周下世居) ‘경류정 종택’으로 당초 건립 연대(建立年代)는 미상이나 별당(別堂)인 ‘경류정’은 조선(朝鮮) 성종(成宗) 23년(1492)에 이연(李演) 선생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진성 이씨가 안동 풍산 마애(麻厓)에서 안동의 주하, 즉 주촌(周村)으로 옮겨온 것은 이정의 부친인 3세 이운후(李云候)에 의해서였다. 3세 이운후는 진성 이씨 안동(安東) 입향조이자 부친인 2세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따라서 이 건물은 진성 이씨 대종택의 위상을 갖는다. 진성 이씨의 대종가이다.
진성 이씨 온혜종파 4세 이정(李楨)은 이황(李滉)의 증조부로, 세종 때 영변판관(寧邊判官)으로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영변진(寧邊鎭)을 쌓았으며,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이정(李楨)에게는 이우양(李遇陽), 이흥양(李興陽), 이계양(李繼陽) 세 아들이 있다.
*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노송정종택(溫惠派 老松亭宗宅) *
퇴계 이황의 조부, 진성 이씨 온혜종파 5세 이계양(李繼陽)은 선산부사를 지냈는데, 안동 주하동에서 예안(禮安)의 온계리(溫溪里)로 이거하였다. 정부인 영양 김씨(英陽金氏) 사이에 이식(李埴)과 이우(李瑀) 두 아들을 두었다. 장자 이식(李埴)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의성 김씨 부인 소생의 이잠(李潛), 이하(李河), 계실 춘천박씨 부인의 소생 이의(李의), 온계(溫溪) 이해(李瀣), 이징(李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다. 그리고 이식의 차자 호조참판 송재(松齎) 이우(李瑀)에게는 아들 이수령(李壽苓)이 있고, 딸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출가했다.(기호학파의 거유 동춘 송준길은 정경세의 사위이다) —
*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安東眞城李氏溫惠派宗宅)은 본래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60호 ‘퇴계태실(退溪胎室)’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퇴계와 관련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11월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安東眞城李氏溫惠派宗宅)’으로 명칭을 바꾸고 국가민속문화재(제295호)로 승격되었다.
온혜파 종택은 1454년(단종 2) 이황의 조부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이 세운 건물로, 1501년 이황이 이 집 몸채 중앙에 돌출된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태실(退溪胎室)’로 부르게 되었다. 태실은 정면 7간 측면 6간의 홑처마 구조로서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사랑채, 뒤쪽에 정침, 좌우에 양측사를 둔 완전한 □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정침 중앙에 전면 1간, 측면 1간반 정도의 누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태실이 건물의 중앙에 위치한 것이다.
태실 누마루에 ‘是歲淸明日十四代孫家源(시세청명일 14대손 가원)이라 쓴 중수기(重修記)가 있으며, 1930년에 전면 개수하였으나 상류주택의 배치요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중수기의 ’家源‘은 온혜파 후손 연민 이가원 박사를 말한다. 현재 태실 동쪽에는 ’노송정(老松亭)‘과 ’사당(祠堂)‘이 있으며, 맞은편에 대문채인 ’성림문(聖臨門)‘이 있다.
인문학 작가 조용헌 교수는 〈퇴계 선생 胎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략) ‘태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퇴계 선생 태실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노송정(老松亭) 종택(宗宅)이다. 퇴계 조부가 어느 날 봉화 근처의 고갯길에서 허기져 신음하던 어떤 스님을 구해줬는데, 이 스님이 그 보답으로 집터를 잡아 주었다. '여기에다 집터를 잡으면 대현(大賢)이 나온다'는 예언을 하였다. 그때부터 집안에서는 장차 대현이 출생할 가정교육 풍토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종택 안채에는 가로세로 2m 정도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 있다. 퇴계 선생이 태어난 방이다. 이 방은 하도 유명해서 방의 바깥에 '퇴계 선생 태실(退溪先生胎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 유교의 성지순례 코스였던 것이다
태백산에서 내려온 용두산(龍頭山), 용의 왼쪽 발가락 끝 지점에 노송정 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의 안산을 비롯하여 주변 산들은 높지 않다. 기가 센 바위 봉우리도 안 보인다. 약 150m 높이의 야트막한 산세로 둘러싸인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퇴계 선생의 인품이 그리 온화했던 것인가? 퇴계를 낳기 며칠 전에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품격이 높은 아주 고상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 여러 제자를 뒤에 거느리고 이 집에 들어오는 꿈이었다. 퇴계 제자 가운데 학봉 김성일은 이 태몽을 두고 공자님이 오신 것으로 해석하였다. 후일에 제자들이 종택 들어오는 솟을대문 위에는 ‘성림문(聖臨門)’이라는 글씨를 써서 붙여 놓았다. 태교도 그만큼 중요하다.’
온계(溫溪) 이해(李瀣)
* 온계(溫溪) 이해(李瀣)는 6세 이식(李埴)의 4남이며 퇴계의 형이다. 온계는 관직에서 정직과 충성으로 일관해 권신들과 타협하지 않은 곧은 인물이었다. — 인종1년(50세) 대사헌 신분으로 전횡을 일삼던 우의정 이기(李芑)를 논박하여 체직시킨 사건으로 이기의 최대 정적이 되고 말았다. 온계는 이후 그들의 집요한 견제와 회유 협박을 당하며 황해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끝내 충청도 관찰사 재임 중 처리한 일이 빌미가 되어 무고를 당했고 혹독한 형을 받은 뒤 갑산(甲山)으로 유배 도중에 찌는 더위 속에서 장독이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장소는 양주의 객점. 향년 55세였다. 후일 대산 이상정은 그를 ‘강대하고 우뚝하며 남들은 쉽사리 하기 어려운 절조를 지켰던 분(剛大俊偉非常之人)’이라고 평하였다. 온계는 사후 효종 때 유림들의 발의로 고향 안동 도산면 온혜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1667)에 아버지 이식, 숙부 이우와 함께 배향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종택 )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부친 이식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前妻)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의 생애에서,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학문 수학기이며,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를 벼슬에 나아간 임관기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556), 《자성록》(自省錄,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 조선시대 퇴계 이황은 유교 국가의 도통(道通)을 잇는 대유(大儒)로서, 문묘에 국불천위(國不遷位)로 모셔지고, 왕통(王通)을 상징하는 종묘에 각 왕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정치가인 배향공신으로도 모셔짐으로써 그를 위시하여 나라를 대표하는 국반(國班)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시대 이 인신(人臣)으로서의 최고 영예를 안은 사람들을 배출한 국반 가문은 단 여섯 가문뿐인데, 우리나라 성리학 중 가장 먼저 본격적인 저술을 남기고 주리론 및 영남학파 그리고 영남 남인의 선구자로 추앙된 ‘회재 이언적의 여강 이씨’, 주기론 및 기호학파의 태두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율곡 이이의 덕수 이씨’, 노론의 연총으로서 '송자'로 칭송되던 ‘우암 송시열의 은진 송씨’, 기호학파의 종장이었던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의 광산 김씨’, 소론의 당수 격이었던 ‘현석 박세채의 반남 박씨’, 그리고 영남학파의 종장이자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 이황의 진성 이씨’였던 것이다.
*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서원] ☞ 안동 예안 도산서원(陶山書院),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산 고산서원(孤山書院), 상주 도남서원(陶南書院),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신령 백학서원(白鶴書院), 봉화 문암서원(文巖書院), 풍기 욱양서원(郁陽書院), 예천 정산서원(鼎山書院), 용궁 삼강서원(三江書院), 사전 구계서원(龜溪書院), 의령 덕곡서원(德谷書院), 진보 봉람서원(鳳覽書院), 영양 영산서원(英山書院), 청송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
안동시가 전국에서 시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독립운동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것에도 진성 이씨가 기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안동에 있는 대부분의 문중들이 유독 독립 운동을 많이 해서 멸절하거나 가문 전체가 와해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세(勢)가 약해진 게 사실이었고, 그 중 진성 이씨는 몇 개의 문중 세파가 사라질 정도였다. 결국 진성 이씨 종가가 일제에 의해 불타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독립 운동을 해서 일제 헌병이 불을 냈다고 한다.[5] 또 퇴계종택도 방화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29년에 13대 종손 이충호(李忠鎬)가 전국 유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청송부사 정붕(鄭鵬) 이야기 — “백재고잠(柏在高岑)”
정붕(鄭鵬, 1467~1512)은 성종 16년(1485)은 본관이 해주이고 자가 운정(雲程)이고 호는 신당(新堂)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23년(149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평·정언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그 후 정승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여전히 간신배들이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청송부사로 제수되었는데, 청송부사로 있을 때 넓은 도량과 청렴한 성품으로 청백리로 널리 이름을 남겼고 선정을 베풀어 존경을 받았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성희안(成希顔)은 청백리 정붕(鄭鵬, 1467~1512)의 오랜 벗이었다. 정붕은 성희안의 천거로 청송부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성희안은 정붕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부탁을 했다. “그대 고을은 잣과 꿀이 특산물이라니 나를 위해 그것을 좀 보내주면 어떤가?” 성희안이 오랜 벗이면서 어쩌면 자신에게 벼슬을 하게 해준 은인이기에 이런 부탁쯤은 쉽게 들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정붕은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자신의 외종사촌 유자광(柳子光)에게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을 정도로 벼슬을 마다했을 뿐 아니라 세상에 나아감을 분명히 했던 꼿꼿한 선비였다. 그런 그에게는 성희안이 가까운 벗이면서 벼슬도 하게 해준 사람이었지만 그런 부탁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백성 집 벌통 안에 있으니 부사된 내 재주로는 잣과 꿀을 구할 수 없네.(柏在高山絶頂上 蜜在民間蜂筒中 爲太守者 何而得之)”라고 정중히 거절했다는 이야기다.
성희안은 친밀한 마음에 안부 겸해 보낸 편지에서 허물없이 부탁했던 것인데 무색하게도 이런 답장을 받았다. 하지만 성희안은 화내지 않고 깨끗하게 사과했다. 그의 대쪽 같은 성정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정붕은 뒤탈 없이 3년간 청송 부사로 재임하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정붕(鄭鵬)은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金宏弼)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이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안상도(案上圖)를 지어 자경(自警)하였으며,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계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 …♣ [계속] ☞ 안동 반변천 수계-청송(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