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엘 3;1-18,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2023. 4. 30.
먼저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나라 바벨론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를 늘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그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이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다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합니다. 단3;1-3,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만든 큰 신상을 만들고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낙성식을 거행하는데 높이가 60큐빗(30m) 이나 되는 큰 신상인데 꿈속에서 보았던 종류가 각기 다른 금속들로 이루어진 신상입니다.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고 가슴과 팔은 은으로 되어 있고 배와 넓적다리는 구리로 되어있고 정강이는 철로 되어 있고 발은 철과 진흙이 섞여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의 제국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새로운 제국은 대를 이어가며 바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것을 하나님께서 왕에게 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큰 금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바벨론 나라는 영원하고 다른 나라가 침략할 수 없게끔 두라 평지와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세워놓고 낙성식을 거행했는데 자신이 정복한 모든 나라의 만조백관들을 향하여 금 신상 앞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명령을 거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또 다시 신앙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의 여러 도를 다스리고 위대한 삶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왕의 신상에 절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고개 숙이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큰 잘못인가? 풀무 불에 들어가 죽는 것 보다 낫지 않은가? 하지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왜요? 믿음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를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고발합니다. 왕이여 저들은 유다에서 끌려온 종들인데 왕께서 바벨론의 도를 다스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후히 대접하고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은혜도 모르고 왕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도 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니엘과 세친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로 던져지고 죽을지라도 배반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 아니 하시고 건져주지 않을지라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정금 같은 믿음이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생활 속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와 승리하고 어떤 자리와 권위가 주어질 때에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과 신앙 때문에 느브갓네살 왕이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믿음에 대한 말을 당당하게 하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3:2-3,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 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게 할 것이라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않게 하시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게 하리라. 여러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힘들고 어려운 때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승리하고 잘 되어 가는데 뜻하지 않은 일과 문제가 일어 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의지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께서 명령하시는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것이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까요?
1.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지킨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신앙입니다. 다니엘(벨드사살)의 세 친구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는 풀무 불과 용광로와 불가마에 던져지는 시험을 당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자기의 신상을 세워놓고 그 신상에 모두 절하라고 공지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흔들림이 없었고 왕과 타협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고, 회유와 위협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세 친구가 불의 고통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고통 가운데 최고의 고통은 몸이 불탈 때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다치면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뼈까지 다치면 그 고통은 더 가중이 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불이랍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건져 내실 것이라고 믿었고 장담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왕의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믿음이었기에 그런 깊은 신앙을 가졌을까요? 타협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16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 말은 그 어떤 논쟁이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각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하나님 앞에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대가 어떤 가치관의 시대입니까?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적 신앙을 버리고 상황에 따라 타협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무엇입니까? 타협이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의 심지가 견고해야 합니다.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시키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지조가 있었습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진다고 해도, 평일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이라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절개가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안돼! 라는 신앙입니다.
또 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시인하는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했습니다. 17절,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불 속에 던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말씀에 서 있는 것을 기뻐하시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귀에 들리는 음성이 없고, 말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시121편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말과 행동이 일치했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일으켜 세워주실 것을 믿고, 회복시켜주심을 믿을 때에 시험은 물러갑니다. 그런데 믿음의 비밀은 그들의 이름에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강제로 개명이 되었습니다. 강제 개명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 의미가 있어요. 바벨론 왕이 그 이름의 뜻으로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 모두 정 반대의 바벨론 식 이름을 주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 식 이름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이름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이름의 의미가 어떤 신앙의 고백을 하게 합니까?
1-1. 다니엘의 첫째 친구인 사드락의 본명은 하나냐 입니다. 하나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은혜로우시다는 믿음으로 살았고 은혜로운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에게 사드락으로 살게 했습니다. 사드락이 무슨 뜻입니까? 메소포타미아의 달 신인 아쿠의 명령입니다. 그 이름대로 살았다면 큰일 날 이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하나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신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깊어지려면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주어진 것과 그 자리도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바벨론 왕이 하사해서 여러 도를 다스리지만 세상으로 살지 않았고, 사람의 생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인 것과 세상은 명령처럼 더 강하게 우리를 세상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은혜만이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고, 깊은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초대교인들 보세요. 불같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니까? 모두 주님의 사람과 믿음의 알곡이 되잖아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예수 때문에 목숨 바치고 서로 사랑하고 섬겨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자리와 주신 복 때문에 시험이 되십니까? 힘들고 어려운 것 때문에 흔들리십니까? 은혜 받고, 은혜로 살고, 하나냐로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모든 분들이 이런 은혜로, 하나냐로 살아가면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결국에는 이겨내게 하시고 주어진 자리와 권리를 상실할 기회 속에서도 승리가 이어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두 번째 친구는 메삭인데 이 이름도 아쿠 같은 이가 누구인가? 라는 뜻입니다. 아쿠신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삭 역시 풀무 불에 죽으면 죽었지 메삭의 이름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본 이름 미사엘입니다. 미사엘은 하나님 같은 분이 누구인가? 라는 뜻입니다. 천군 천사 장 미가엘과 같은 뜻의 이름입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누가 무엇이라해도 하나님 제일주의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입니다. 잠8:17,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시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 도다. 주를 간절히 찾는 사람이 주를 만나고 주를 경외하는 사람을 주의 천사가 둘러 진치고 건져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를 풀무 불 속에서도 특별은총으로 지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과 세상적인 것의 결론은 이런 경험이 되지 않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제일주의, 미사엘로 살면 그 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총으로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1-3. 다니엘의 세 번째 친구 아벳느고입니다. 아벳느고의 본 이름은 아사랴입니다.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느브갓네살은 그와는 반대로 바벨론의 신 느고의 종이라는 뜻의 아벳느고로 불렀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이 느고의 종이 되겠습니까? 아사랴는 항상 진리를 묵상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았고, 지금 주어진 자리도 여호와께서 도우셨습니다. 여러분, 초대 교부 중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 순교자 폴리캅(Polycarp)이 있습니다. 폴리갑은 주후 156년경 혹독한 핍박의 시기에 폴리갑의 시종의 배반으로 붙잡혀 투옥을 당합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종의 사악한 마음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시종을 용서하며 짐승들의 사나운 입술과 화형대의 뜨거운 불길이 그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폴리갑은 예수를 저주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그들의 회유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평생 그분의 종이었고 한 번도 나를 해롭게 하신 적이 없는 나의 주인이며 구세주인 예수님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소! 한 시간의 화염보다 영원한 불 못이 더 무섭다고 말하며 장렬하게 순교를 했습니다. 안디옥의 순교역사에 따르면 폴리캅은 재판 전날에 이미 세 번이나 화형 당하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아벳느고, 아사랴도 일평생 하나님이 도우셨는데 느고의 종으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는 뜻 입니다. 과거 완료형으로 더욱 과거를 강조한 것인데, 이미 도우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는 이름이 아사랴 입니다. 그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도우셨습니다. 과거 완료로 도우셨던 주님께서는 과거도 오늘도 내일과 미래와 인생 끝 날까지 도우시는 그 이름으로 그 이름값을 하시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신앙은 단계가 있습니다. 갑자기 깊은 믿음의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믿음은 깊어집니다. 깊이에 따라 물에 붙여지는 접두사가 다릅니다. 개울물과 강물과 바닷물은 깊이가 다르듯이 믿음의 깊이도 차이가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믿음과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믿음과 생각과 행동이 이 단계마다 대응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대응하는 행동에 따라 결과도 다 다르게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뜨거움과 바람과 비와 태양 앞에서도 결국은 알곡입니까? 아니면 깊이가 다른 쭉정이 입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시인하고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믿음을 가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믿음입니까? 풀무 불같은 시험을 다 이기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입니까? 그러면 이 믿음의 단계가 무엇일까요?
2-1. 그리하시면 의 믿음입니다. 이 것은 조건입니다. 만일 이렇게 해 주시면 이렇게 하겠다는 조건을 붙이는 믿음입니다. 이 것 또한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인데 야곱과 같은 믿음입니다. 창 28장에 야곱은 형을 피하여 외갓집으로 도망하다가 광야에서 길을 잃고 저녁에 잠을 잡니다. 자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꿈에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내리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꿈을 꿉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럽고 아름답고 좋은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잠에서 깨어 베개 하던 돌로 기둥을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기도하면서 이런 약속을 합니다. 창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비전이고 은혜입니다만 무엇 무엇을 해주시면 이라는 조건입니다. 누가 이럴까요? 깊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조건을 내세우며 기도합니다. 조건에 맞으면 감사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겠다는 말입니다. 심할 경우 하나님을 떠납니다. 신앙의 깊이가 개울물처럼 얕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20년 만에 세 떼를 이루고 12남 1녀의 복을 주셨습니다. 삼촌 라반에게서도 구원해 줍니다. 형 에서에게서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인간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말로는 그럴 듯하게 합니다. 짐승들도 힘들고 가족들도 피곤하니 형인, 에서의 뒤를 따라 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벧엘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도 어기고 지켜 준다는 형의 호의를 호의로 받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가축을 이끌고 세겜으로 갑니다. 그래서 귀한 외동딸이 고통을 당하고 자녀들이 살인 사건에 개입합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까? 무서워서 그 때에 엘 벧엘을 찾습니다. 그리하시면은 이런 신앙인데 세상적인 것들이 믿음의 현장에서 중간 중간에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조건이 아니라, 그리하시면이 아니라, 주신 비전과 이루어진 열매 앞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시고 전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그리하실 줄로의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꼭 그렇게 될 것처럼, 추호도 의심치 않는 신앙입니다. 수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 요단강을 향해 걸어 들어갔습니다. 사막에서만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수영을 할까요?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 중에도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되지요? 사방팔방 바다입니다. 그런데도 물에 못 들어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한 백성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대로 들어가면 모두 익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말씀하셨으니까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뛰어들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에 가까운 큰 믿음입니다. 그리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보라. 오늘 날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이 것이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게 합니다. 얼마나 큰 은혜이고 기적이었으면 기념비를 세울까요? 그런데 그보다 더 깊은 믿음이 있습니다.
2-3.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과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록 그렇게 되지 않을 지라도 끝 까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믿음과 신앙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기를 바라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고 감람나무에 거대한 소출이 있고 밭에 풍성한 열매가 있고, 우리에 수많은 양이 있고, 외양간에 소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 것도 넘쳐나기를 간구하고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와 소출이 없고 양이 없고 소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것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이 진실한 믿음에 하나님은 더욱 놀라운 축복을 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이 역전이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렇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교만하고 권위를 세우는데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어 모든 관리들에게 그 앞에 나와 절하라 명했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 앞 절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양심으로 어떻게 우상 앞에 몸을 굽힐 수 있습니까? 왕의 은덕을 입은 그들이었지만 인정으로 신앙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이여 하나님께서 능히 풀무 불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풀무 불에 타서 죽을 지라도 왕의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평소보다 7배나 강한 풀무에 이들을 던졌는데 풀무 불이 얼마나 뜨거웠든지 던진 사람들이 모두 타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서 저들을 털끝 하나 타지 않게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것을 모든 사람이 다 보았습니다. 고발을 했던 사람들이 다 보았습니다. 모든 관리들이보고 백성들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이 사실을 목도하고 태도를 바꾸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들을 구원할 다른 신이 하나님 외에 없다고 전국에 조서를 내려 선포하고, 그 세 사람을 더욱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것이 최종 믿음의 승리입니다.
2-4. 그러면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신앙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일과 상황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과 믿음입니다. 세 친구의 믿음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 18절,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설령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서 건져 내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섬기고 금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진정한 신앙과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 백성이 된 것만 으로도 이미 큰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단3:25절에 네 사람이 불 가운데 있는데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더라. 여기 신들의 아들 같은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그 자리에 그들과 함께하시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본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회개하며,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절기 때마다 모일 때마다 이 상황을 기억하면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묵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큰 권능으로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율법을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복을 주셨다는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끊임없이 묵상하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다시 사시고, 우리를 하늘 영광의 사람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승천하셨음을 날마다 노래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복음 위에 바로 세워지고 주신 영광과 권세를 생각하면서 믿고 전진해야 합니다. 이 것이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과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말씀을 하신대로 믿고 나아갈 때에 따르는 표적이 있습니다.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신앙과 믿음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 하시면의 조건적인 믿음도 은혜입니다. 야곱이 한 떼, 두 떼, 12떼를 이루는 놀라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리 하실 줄로 믿는 믿음이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는 주신 은혜와 결과위에 더 크고 더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무너지지 않고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나쁜 기회가 쉽게 정리되고 지속적인 승리를 가져옵니다. 이런 놀라운 복을 받고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