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율리아나는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오랫동안 자녀를 기다리던 부모는
감사와 기쁨으로 성당을 지어 봉헌하는데,
그 성당이 지금 그녀의 묘소로 알려진 ‘성모영보성당’이다.
부잣집의 무남독녀(無男獨女)인 성녀는
‘성모의 종 수도회’(1233년에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예루살렘의 초대공동체처럼 한 마음으로 살면서,
성모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던 일곱 성인에 의해 설립됨)
창설자인 일곱 성인들중의 한 분인
알렉시오 팔코니에리와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교회에 매우 헌신적인 분들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어릴 적에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그녀가 16세가 되던 해에
적합한 배필을 맞아들여 가문을 계승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을 물리치고,
‘성모의 종 수도회’의 제3회원이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머니와 집안 사람들도
신심 깊은 그녀의 간청으로
그녀가 기도와 자선을 하면서
봉헌생활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로부터 성녀 율리아나는
근 20년을 한사람의 재속 수도자로서,
베니시오가 인도하는 규율에 따르면서
기도와 자선으로 살아가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뜻을 지닌 동정녀들과 함께
공동체 수도 생활을 시작 하였다.
그녀는 34세가 되던 해에
기도와 자선활동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복장을 하는데,
그 동정녀들은
성모의 종 수도회와 비슷한 복장을 하였으므로,
그때부터 그녀의 수도회는 ‘망또수녀회’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녀의 기도와 자선은 매우 뛰어난 덕행이었는데,
그녀는 수도회의 규율에도 자선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병자방문을 못 갈 때에는
다른 동료 수녀들을 보내어
플로렌스 시내 병원의 환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또한 고행에 있어서도 열심이었는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단식했고
토요일에도 음식을 조금만 먹었다.
아울러 그녀는 기도 생활에도 아주 뛰어난 모범을 보였는데,
수도회칙에 정해진 시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기도들을 바치곤 하였다.
그녀는 단식, 자선, 기도의 엄격한 수도생활을
오랫동안 실천해 온 영향이었는지,
노년에 이르러서는 위염으로 고생을 하면서
영성체를 하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가 토사로 인하여 위중한 상태가 되고
선종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성녀의 간절한 뜻에 따라
사제는 그녀의 가슴에 성체포를 깔고
그 위에 성체를 모셔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가슴 위에 모셔진 성체를 조배하고
영적으로 성체예수님과 일치하면서,
얼굴에 화색을 띠며 고요히 하느님 나라로 떠나갔는데,
71세가 되던 1341년 6월 19일 이었다.
후에 사람들이 그녀의 유해를 씻으려고 했을 때,
그녀의 가슴에는 십자가 문양의 성체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온다.
글... 전주주보 윤 클레멘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