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산외면 다죽리 다원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햇빛이 무량하게 푸지다. 겨울산에 오르던 기억이 난다. 잠시도 몸을 서있지 못하게 하는 세찬 바람에 쫓겨 산모롱이를 돌면 신기하게 바람소리 그치고 몸을 녹여주는 양지배기가 나오는데 다원마을이 그런 곳이다. 따스한 안방 같은 마을이다.
꾀꼬리봉을 중심으로 평전산과 다원동산이 좌청룡우백호로 마을과 넓은 들을 감싼다. 흙과 돌로 잘 쌓은 담장과 높은 대문으로 된 고택들이 어깨를 대고 모여있다. 옆집보다 사람 머리 하나는 되게 더 높이 담장을 쌓은 집도 있다. 누가 집안을 들여다보는 게 아주 싫었나 보다. 일직 손씨 집성촌인 이 마을의 중심에는 혜산서원이 있다 서원 안에 이 곳을 살다간 여러 선대 사람들이 돌보아 키웠다는 오래된 차나무 세 그루가 있다고 하여 찾은 길이다.
다른 나무들 잎 떨구는 계절
첫 눈 내린 뒤에도 서리 맞으며
빽빽한 푸른 잎 사이 꽃 피워
혜산서원은 조선 세종때 대학자 격재 손조서 등 일직 손씨 5현을 모신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기 위해 담장으로 여러 구획을 나누었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려니 담장 밖으로 몸을 쑥 내밀고 있는 풍채 좋은 노송들이 먼저 눈을 끈다. 차나무는 혜산서원 편액이 놓인 강당 앞마당에 한 그루, 서원 입구 신도비 옆에 한 그루, 다원서당 연못 옆에 한 그루가 비슷한 크기로 자라고 있다. 그저 덤덤하게 서있다. 오랜 세월에 허리가 휜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작은 잎들만 빼곡하여 표정도 밋밋하다. 좀 심심한 것이 차 맛과 닮았겠다.
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혜산서원의 차나무는 격재의 아버지 손관이 안동 일직에서 외가인 밀양 산외로 들어올 때 가져와 심은 나무라고 해서 나이를 600년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령에 대해 다른 말들도 있다. 차나무는 10미터를 넘게 크는 대엽종도 있는데 혜산서원의 차나무는 키가 작은 소엽종으로 3미터 정도 된다. 600년이라는 가늠하기 어려운 세월에 비해 나무의 크기가 작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정확한 수령보다 더 중한 것은 연년세세 차나무를 돌보며 물길처럼 이어진 사람의 정신일 것이다. 후손들은 어른들로부터 이 나무가 시조할아버지가 즐겨 키우던 나무라는 것과 안동의 타양서원에서 밀양으로 온 선조들이 이 곳에 옮겨심은 것이며 선조를 모시듯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 마음을 생각하며 나무 안을 들여다 보면 첫눈이 내리고 난 뒤인데도 나무에는 빽빽한 푸른 잎들 사이로 하얀 꽃들이 피어나 있다. 동백꽃처럼 노란 꽃술위로 벌들이 반기며 날아다닌다.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구는 계절에 서리를 맞고 꽃을 피우는 나무이기에 그 잎을 달여 마시고 당나라 문사 노동은 '일곱 사발 차를 마시니 두 겨드랑이에 삽상하게 청풍이 인다'고 노래했는가.
조선 후기 초의와 혜장선사,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허소치 등 많은 문사들이 현실생활에서는 추운 겨울과 같은 불우한 시절을 차와 함께 했다. 낮은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정신을 맑히고 수많은 저술과 위대한 사상을 남길 수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신라 선덕여왕때부터 시작된 우리 차문화는 이후 불교를 통해 이어졌다.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는데 주로 승려나 귀족들 사이에서 애용되고 백성들은 차를 재배하여 나라에 바치느라고 고생이 심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출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차나무를 일부러 죽이기도 하여 차나무가 점점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키가 큰 모과나무 아래로 잘 익은 모과들이 떨어져 땅을 노랗게 물들이고 집 안에는 감을 깎아 곶감을 너는 할머니들이 마당 안에 빨간색 앉은걸음을 줄 세우는데 그래도 마을은 조용하다. 혜산서원에서 나와 왼쪽 길로 가면 세 사람의 병마절도사가 나왔다는 손병사 고택이 나온다. 그 사랑채 앞, 빈 마당을 채운 향나무 고목도 수백년은 되어 보인다. 이 영남 상류층 고택의 후원은 뒷동산만큼 넓다. 한참을 이리저리 걸을 만 하다. 아침마다 뜰에 떨어진 나뭇잎을 단정히 쓸어내던 사람도 마침내 감당할 수 없어 우두커니 서있는, 마침 때는 가을의 붉은 막바지다.
후원 곳곳에는 돌로 된 탁자가 놓여있다. 변화하며 생성하는 자연의 표정 속에서 차를 마시며 시를 썼을 '사람'이 보인다.
오래된 차나무를 보고 돌아오니 차시가 읽고 싶어진다. 선인들의 담박한 차시를 꺼내 읽는 깊은 밤, 머리 위로 달빛이 내려다보는 듯 하고 옆에서 '소나무에 부는 바람소리거나 회나무에 치는 빗소리'같은 찻물 끓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