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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유월절 어린 양(정바울)
나균용 목사님
고린도전서 5:7절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려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또 친히 한 어린 양이 되셔서 자기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내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모세 시대 출애굽 당시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바로가 보내주지 않자 무시무시한 재앙이 내리는데 열 번째 재앙이 애굽의 장자가 다 죽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하나도 죽지 않았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렇게 희생하셨다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 집 가운데서도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발라라 하는 명령을 내렸을 때 불순종하고 비웃는 사람이 있었다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의 장자도 쳐서 죽었을 것이다. 반대로 애굽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했더라면 장자가 죽는 재앙이 비껴갔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제일 첫째로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의 피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늘 기억하고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놓았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보혈을 우리의 마음의 인방과 설주에 발라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거룩한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십자가 위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발라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에 이 보혈을 바릅니다. 옛날 유월절에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이 험하고 악한 애굽과 같은 이 죄악이 들끓는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이 가득한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이 간절한 기도를 가지고 우리 마음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를 때 악한 원수가 감히 손대지 못한다. 그래서 이 절기 이름을 유월절이라고 한다.
둘째로 이 어린 양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다. 이때 양의 고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식구가 너무 많으면 식구가 적은 집으로 몇 명을 보내서라도 양의 고기를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그다음에는 제자들에게 이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을 먹어라 말씀하시고 다음에는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 하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마시라고 하셨다. 성만찬은 하나의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나를 살려내는 그리스도의 살이요, 그리스도의 피라는 의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감사하면서 먹고 마셔야 한다. 그럴 때 그 보혈의 역사가 내 속에 참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아름다운 일을 바르게 잘 해나가야 한다.
그다음에 이것과 함께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된다. 무교병은 누룩 없는 빵이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상징한다. 고린도전서 5장 8절에 보면 이 누룩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곧 죄를 상징한다. 부패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유월절 때에는 양식을 먹어도 누룩이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 됨을 의미한다. 죄악을 전부 없애야 된다. 유월절이 되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 집에서는 이 누룩에 관계되는 걸 다 치웠다. 그렇게 하고 유월절을 맞이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유월절을 맞이할 때 우리 마음에서, 또는 우리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에게서 모든 죄라고 생각되는 거는 멀리 치워버리고 우리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받아서 순수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교병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하나는 쓴 나물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쓰디 쓴 것이라고 하는 거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거고, 이 세상에서 너무 달콤한 것만 찾지 말고 쓴 것도 달게 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의 쓴 고난을 달게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이 죄악이 많고 험악한 세상에서 주님을 잘 따라가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헛된 영광만 바라고 살며, 편안한 것만 바라고 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고 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38. 이삭 대신 죽은 어린 양
나균용 목사님
이삭 대신 죽었다 하는 말은 창세기 22장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산까지 사흘길을 걸어갔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올려놓은 후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하는 그 찰나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급하게 부르시면서 네 독자 네 아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수풀에 걸려있는 어린 양을 발견하고 이삭 대신에 이 어린 양을 하나님 앞에 바쳐 번제물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네 독자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한번 나타나고,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다시 두 번째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나타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자로서 두 번 나타나시는데 이 두 번이 다 예수님의 상징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둘째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이삭이 대신 어린양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삭을 대신한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이삭같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릴 때 드디어 예수님이 내 대신 생명을 바쳐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어린 양은 언제 발견되느냐?
이삭 대신에 죽은 어린 양은 그냥 우연히 발견되는 어린 양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내 아들 이삭을 믿음으로 드릴 때 그때 드디어 내 눈이 열려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 양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왔다. 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예비하셨다 하는 말씀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고린도전서 2장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첫째 날은 빛을 만드시고, 둘째 날은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어 하늘 아래 하늘과 위의 하늘을 만드시고 셋째 날은 수목을 만드시고 넷째 날은 하늘의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다섯째 날은 바다의 생물들을 만드셨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땅에 모든 짐승을 만드시고 산천 초목을 나오게 하셔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맨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 나의 일생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삭 대신에 죽은 이 어린 양이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정말 주님의 은혜 안에서 더욱 새로워져야 한다.
유월절 어린 양은 그의 피가 가장 중요하다. 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죽음의 사자가 들어오는 재앙을 막았다. 이렇게 죽은 어린 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어린 양의 피를 우리 마음에 다시 바르고 장차 이 땅에 무섭고 엄청난 재앙이 쏟아질 때 이 대환난에서 우리가 건짐을 받고, 오히려 이 대환난 속에 뛰어 들어가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저들을 건져내어 구원시키는 큰 역사를 감당해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로 다시 나타나셔서 큰 복을 쏟아 주셨는데 이렇게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에게는 우리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복을 내려주신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드린 사람들에게 주시는 엄청난 복이다.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라고 말씀하시고, 또 18절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네 씨를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씨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사람의 몸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또 다른 씨가 되게 하셔서 천하만민에게 복음 전하는 거룩한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데도 씨가 되고 복을 전하는 데에도 씨가 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씨가 되어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천국을 건설해 나가는 거룩한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39. 모세의 지팡이
나균용 목사님
[출4:1-5]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성경에는 여러 지팡이가 등장한다. 첫째 모세의 지팡이, 둘째 아론의 지팡이, 또 다윗의 지팡이 등이다.
모세의 지팡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애굽 땅으로 가서 내 백성들을 인도하라고 하시자 모세가 자꾸 핑계를 대면서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이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시고 다시 줍자 또 지팡이로 돌리신다. 그러면 모세의 지팡이는 무슨 일을 했는가? 모세가 이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어서 오히려 모세를 물으려고 달려드는 그런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으니까 다시 막대기 지팡이가 되었더라. 그러면서 오늘 5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왜 이런 표적을 행하느냐? 네가 백성들 앞에 가서 보여줘라 백성들 앞에 가서 보여주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 그 말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그 말이다. 또 모세를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내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이 지팡이를 보여주시고 뱀이 되게 하는 표적을 보여주시면서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제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도 보여주고 또 바로 앞에 가서도 행한다. 그래서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내리는 가운데 모세가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재앙을 내리는 게 4번 나타난다. 첫째, 나일강을 가서 쳤더니, 강물이 피로 변한다. 그다음에 셋째, 재앙인데 티끌을 치니까 이가 돼서 나타났다. 일곱째 우박이 쏟아지는 재앙이고, 여덟째 재앙은 바람이 불면서 메뚜기 재앙이 나오고, 그리고 이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치니까 생수가 터져 나오는 놀라운 일을 계속한다. 그래서 모세는 항상 이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또 신기한 일은 모세가 자기 지팡이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론이 자기 지팡이를 던졌더니 그 지팡이가 뱀이 되고 다시 꼬리를 잡자 지팡이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부어주셔가지고, 이런 기적을 행하도록 역사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론에게는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간다. 그래서 십계명을 쓴 돌판,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 이렇게 세 가지 보물이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가게 되더라.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팡이를 다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팡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지팡이가 있으면 사자나 곰 같은 맹수가 오더라도 쳐서 이길 수 있는 것이고, 없는 사람은 맹수가 달려들면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도망가야 되고 그러다가 잡혀 먹히기도 하고 양 떼는 다 흩어져 버리게 된다. 삯꾼 목자란 누구냐? 눈에 보이는 지팡이는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영적인 지팡이를 가지고 있지 않는 목자를 말한다.
이런 지팡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이 나의 육신 뿐만 아니라 마음에 평안을 주고 행복을 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인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령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고 행복을 주시는 분인데 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가 지팡이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게 된다. 그러면 그렇게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짓지 말고, 정말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때 마음에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면서 주님과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하는 이 기쁨이 충만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거룩한 일을 이루어 두시려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참 목자가 되시는 걸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이 침이 “내가 너희의 선한 목자다” 말씀하시고 내가 너희의 지팡이가 되고 막대기가 돼 말씀하시고, 또 다시 이분이 떠나시면서는 새롭게 성령을 우리에게 소개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그분이 너희의 지팡이가 되고 너희의 막대기가 되어서 너희에게 참 위로를 주실 것이고. 세상을 이겨나가게 하실 것이고.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게 될 것이다. 이 엄청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주님의 음성을 이 메시지를 받아서 우리 마음 판에 새기고 정말 이렇게 바르게 살아가야 되는데, 그때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너는 나의 지팡이다.” 그거죠.
그런데 이 지팡이가 어떤 말씀하고 연결되어 있느냐?
창세기 49장 10절에 보면 유다를 축복을 하는데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런 말씀을 한다. 우리 개역성경에 홀이라고 했는데 사전에 찾아보면 홀이더라고 한다. 홀이라는 것은 옛날 대신들이 왕 앞에 나갈 때 들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 박물관에 가서 보니까 마이크만한 작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개역성경에서 홀이라고 하는 것은 대신들이 가지고 왕 앞에 가는 것을 말하고 규라고 하는 것은 왕이 가진 것인데 일종의 통치봉이라고 번역을 해야 맞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아닌, 통치봉이라고 해야 한다, 군대에 가면 군대 지휘관들이 사용하는 지휘봉이라는 것이 있다. 중대장도 그런 지휘봉이 있는데 계급이 높아질수록 더 멋진 것을 갖고 사단장이되면 더 멋진 지휘봉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슨 막대기로 쓰는 것도 아니고 권위의 상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지팡이를 주신다. 하나의 통치봉을 주신다. 이것을 딱 들고만 있어도 사자나 곰이나 이런 짐승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고 아랫사람이 함부로 기어오르지 못한다. 이런 권위의 봉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팡이라는 것이 그런 깊은 뜻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거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이 놀라운 봉, 이 지팡이를 다 받아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힘 있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게 되기를 축원한다.
40.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
나균용 목사님
[요 1:33-34]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해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비교해보면,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 땅에 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리의 본체이신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신 분이시다. 소리는 환경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지만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소리는 한번 외치고 나면 사라져 버린다. 그렇지만 말씀은 영원히 그대로 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권위와 지금 시대를 비교해보자.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자 사람들이 그 음성을 듣고 양심의 찔림을 받아 그 앞에 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지금 목회자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 사람들이 회개를 하는가?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말씀의 권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경우,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를 통해 5천 명을 먹이기도 하시고, 말씀 한마디에 바다가 잔잔해지고, 귀신이 쫓겨나며,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 예수님의 말씀은 양심을 팍팍 찔러주는 그런 설교를 하셨다. 그래서 백성들이 들을 때에는 시원하고 그게 좋았는데, 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들을 찌르자 심히 분노하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의 설교도 이러한가? 혹시 사람이 듣기 좋은 소리를 전한다 거나 인기를 위해 전하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엄청난 능력이 있어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더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기적도 행하며 역사를 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들지만 동시에 그 두 증인들은 다 순교를 당한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능력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권능을 받으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을 하셨다. 오늘날 이 땅 끝이 어딘가? 땅이 시작했던 곳이 바로 땅 끝이 되지 않겠는가. 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로 그 다음에 바다를 건너 로마로 가고, 남쪽으로는 애굽, 동쪽으로는 중동 지방으로 다 퍼져가 구라파 대륙으로 올라가고 독일과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오고 미국에서는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와서 일본, 중국, 한국까지 왔다. 아직 건너가야 될 험한 산이 가로놓여 있는데, 하나가 중국 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의 산이고, 또 하나는 중동에 이슬람권이라고 하는 큰 장벽이다. 이런 곳에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과연 누가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마지막 때 사명자들이 깨닫고 감당해 나가야 될 책임인 것이다. 이러한 때 더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받아 힘있게 전파하고 외쳐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셨는데 세례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죄를 씻는 것이다.
둘째는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보면 물은 곧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 세례가 뭐냐? 너희 육체에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개혁성경에 되어 있고, 개정판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세례는 선한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나 영어로 보면 그 뜻은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영적인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의 죽었던 양심이 살아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양심이 살아나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따라서 세례를 받으면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란 선한 양심을 살려내는 방법이다.
셋째로 로마서 6장 4절 말씀에 보면 세례라고 하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 물속에 잠기는 것이다. 육체가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물속에 장사 지내는 것을 상징하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으므로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 세례란 교단별로 설명이 다 다른데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인데,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 하셨다. 바울도 에베소에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이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한다. 그들이 받은 세례는 요한의 세례 뿐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은사가 필수적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도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하셨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초대 교회는 모이면 성령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였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아름다운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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