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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롤(Tirol)의 한복판에서 - 유럽 대륙횐단기(36)
* 운켄 → Lofer 9.1
* 로퍼 → Kirchdorf 26.5Km
* 키르히돌프 → (Sankt Johann) → Swchwaz 72.3Km
※ 오스트리아 - 20일, 611.0Km ♣ 누계 - 총 104일, 2,812.5Km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
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로마서 8 : 12 -
진짜 산 속을 지나왔다.
운켄을 떠나 인스브루크까지 3박 3일의 기록이다.
이곳 티롤 말고도 국경 넘어 스위스에서도 또 얼마나 많은 험지(險地)와 맞닥뜨릴 지는 몰라도 겹겹이 산속이다.
다행히 본격적인 등산이라기 보다 산허리를 지나온 셈이다.
연암 박지원께서는 《열하일기》에서 '너희가 길을 아는가?' 했다. '길은 언덕과 강의 중간을 지난다.'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리저리 걸어보지만 정말로 진리다.
하지만 높은 산이 이상(理想)이라면 구불구불 강은 현실이다.
그래서 인생길도 터벅터벅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한바탕 노래인 모양이다.
오늘도 서쪽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만약 필자가 청춘 알피니스트라면 이 일대는 알프스의 능선을 따라 트레킹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코리언 유랑객은 그 아래의 골짜기를 따라 가고 있다.
혼자 멀고 먼 길을 떠도는 나그네의 서정(抒情)은 결코 자아 연민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이 거칠은 방랑길은 날마다 빠른 감기도 되감기도 없이 마냥 한결 같을 뿐이다.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지리학은 진실임을 실감한다.
이번 동서횡단은 5,600Km의 장정(長程) 중에 (36)편 오늘이 딱 절반인 걸 봐도 그렇다.
'시작이 반이다' 했으니 절반이라면 어느덧 다 이룬 셈 아닌가.
제 1 일
산 속이라 그런지 일찍 눈이 띄였다.
동쪽으로 난 발코니로 나가다가 탄성을 질렀다. 알프스의 숭엄한 자태가 바로 가슴 앞으로 펼처져 있다. 간밤은 알프스의 품에 안겨 잔 셈이로구나. 동쪽을 바라보는 비주얼은 경이스럽기 만하다. 아침 햇살로 검은 그림자 속에 드리워진 산세의 신비스런 모습이 오히려 외경스럽다. 지금까지는 알프스를 멀찍히 두고 지나왔으나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산의 노래를 부르게 될 모양이다.
숙소는 투숙객이 더러 있었으나 다들 세련되어 보인다. 어제 체크인 때 호감이던 첫인상이 아침에도 그대로다. 마치 속담에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만 보고도 절한다'는 기분이다.
어제 천사님의 인간애로 인연이 된 가스트 하우스와 사람들은, 떠도는 유랑객의 기억에 또 하나의 '강물'이 보태어진 셈이다.
가스트 하우스를 나서니 쭈욱 내리막이다.
다 내려와서 보니 마을 앞에는 개천(Saalach강)이 지나간다.
동네 앞에 찻길은 아마 어제 느즈막이 들어오던 길의 연장이겠으나 쉬운 차도는 마다하고 개천의 다리를 건너 보니 놀랍게도 '산티아고 가는 길' 마크가 보인다. 반가운 김에 노란 화살표를 따라 산길로 올라갔다. 찻길로 간다면 오늘의 목적지까지 쉽게 갈 수 있을 듯하지만 어쩐지 그래보고 싶었다.
초입은 산세가 부드럽고 길도 평이하다. 산속 길가에 웬 나무 벤치가 있다.
휴식 겸 잠시 앉아보니 저 아래로 골짜기는 개천이 지나가고 건너편은 아침 햇살 속에 평화로운 운켄의 정경이 마냥 고요하다. 뷰가 이렇게 뛰어나기에 굳이 이 자리에다 의자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산속 길섶에 이런 벤치란 흔치 않은 일이다. 어제 황혼녘에 감사천만 픽업을 해준 그 천사 아줌마는 저 산비탈에서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어느 집에 살고 있을까?
잠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바로 얼마 전에 재학 중에 입대를 했다는 조카에게 편지를 한 번 써 볼까. 군복무는 무탈 씩씩하게 잘 하고 부디 꿈을 지니라고, 큰아버지도 취학 전 어릴 적 꿈을 찾아 이렇게 걷고 있으니~~
노란 화살표는 산길에 오르락내리락 이어져 있다.
멀고 먼 길에서 표적을 따라가면 결국은 정답이지만 실제는 오히려 혼란스럴 때가 왕왕 있다. 아무래도 그날의 목적지를 카드에 적어서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다. 하지만 여기는 사람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
결국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산속에서 길을 놓친 거다. 유럽은 길 마크를 우리처럼 나무 가지에 리본을 매다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나무 밑동이나 길섶의 바위에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야 물론 주기적으로 관리(AS)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차하던 순간에 그걸 놓친 거다.
오늘처럼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헛탕을 친 경험은 또 있다. 한참 나중에 포르투갈에서 파티마로 들어가던 날과 같다.
소나무에 그려진 푸른 화살표를 따라 가다가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거의 진종일 산속에서 헤맨 날도 있었다.
오늘 여기서도 길을 물어볼 행인 마저 없어서, 한동안 이리저리 산속을 헤매다 보니 가옥 네댓 채가 있는 산동네를 만났다. 그렇게 헤매는 중에 겨우 노란 화살표를 다시 찾으니 길은 차도로 변한다. 어쨋거나 전혀 엉뚱한 산속으로 깊이 빠져들지 않는 것 만해도 천만다행이다.
※ * 노란 화살표(Yellow Arrow).....유럽 전역에 있는 '산티아고 가는 길' 상징 표식(때때로 청색 바탕에 노란 가리비 마크일 때도 있다)
* 푸른 화살표(Blue Arrow).....포르투갈에서 카톨릭의 성지 파티마(Patima)로 가는 길 상징 표식
실은 잘츠부르크 이후부터 농촌 풍경이 변했다.
곳곳마다 경작지에 곡식은 드물고 잡풀이 무성하다. 유럽의 농업은 우리와 달라서 연작(連作)이 아니라 윤작(輪作)이기에 농토를 한두 해씩 묵히는 경우가 흔하다.
동네마다 대형 트랙터가 풀을 베는 모습이다. 한여름에 웃자란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드는 시기인 듯 하다.
평지거나 비탈지거나 간에 풀을 베어 말리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일단 베어 눞힌 목초는 중간에 한두어 번 뒤집어야 좋게 마르는 모양이다. 물론 그 일도 트렉터로 하고 있다. 마을마다 그런 풍경이 한창이다.
뒤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리길래 뒤돌아보니 어마무시한 대형 트랙터가 좁은 길을 가득 메운 채 산처럼 다가오고 있다. 할 수 없이 농토로 들어가 비켜서니 지나가는 트랙터는 높은 운전석에 상의를 거의 벗은 여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먼지까지 뒤집어 쓰고 운전을 한다. 오스트리아의 산골 여인들은 그런 모습으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나중에 스위스의 산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물논에서 쌀농사를 지어 오던 농부의 큰아들은 어릴 때 기억에 알프스의 색다른 농촌이 의외로 신기하다.
농촌 지대를 벗어나니 길은 기다란 내리막으로 바뀐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새 고개를 넘은 거다.
이후에도 비슷한 산길을 지나 또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니 목적지 로퍼(Lofer)가 나왔다.
길지도 않는 일정에 고개를 두 개나 넘나들었다.
산속에 깊이 들어앉은 로퍼는 시가지 모습을 갖춘 중세풍 자그만 마을이다. 웬 산속 마을이 작은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인포가 나오길래 숙소(25€)를 안내 받고 4시쯤 도착했다. 때는 8월 초순 한여름이라 해는 중천이다. 하지만 어쩐지 피곤하다. 어제 운켄으로 접근하면서 지나치게 용을 써서 그런가?
내일은 아무래도 여기서 하루를 쉬었다 가야겠다.
샤워 후에 오늘의 메모를 간단히 마치니 졸음이 쏟아진다.
마침 배낭에 자두와 육포가 남아 있어서 점심 겸 저녁으로 대신하고 늘어지게 자버렸다.
제 2 일
아침에 일어나니 갈등 속에 그만 생각이 바뀐다.
오늘도 어김없이 계속 가야 한다.
머나먼 길에서 특별한 구경 꺼리도 없고 아는 사람마저 없는 마을에서 하루를 쉬어보면 하루라는 시간은 너무나 길다. 숙소의 아침 식당은 등산복 차림의 투숙객이 의외로 많다.
어제 들어오다 보니 로퍼는 제법 거리가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알찬 마을이다. 아마 등산객이 유달리 많이 지나다니는 동네인가 보다.
배낭을 챙기고 오늘 길을 나서는 참인데 웬 투숙객 여인이 다가와서 진심 어린 축복을 해주고 간다.
엇저녁에 안주인이 여러 사람들에게 이스탄불에서 포르투갈까지 간다고 소개를 했던 모양이다.
실은 이곳 로퍼는 애당초 동서횡단 루트의 설계 때부터 구글 지도에서 두 길을 놓고 고민을 했던 마을이다. 알프스의 깊은 계곡에서 양편으로 난 두 갈래 중에 어느 길로 갈까였다. 결국 오른쪽 산비탈을 택했다.
왼쪽 길은 주로 등산로를 타는 길이고 오른쪽은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이다. 물론 두 길은 산을 넘어서 다시 만난다.
숙소에서 나와 잠시 어제 들어왔던 시가지를 지나 다리를 건너니 산비탈 모르막이다. 언덕을 오르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2년 전(2009년)에 '르쀠길'에서 꽁끄(Conques)에서 피작(Figeac)으로 가는 경우와 닮은 거 아닌가.
그때도 꽁끄를 나서자마자 언덕을 올라야 했고, 먼저 데까즈빌르(Decazeville)로 가는 길부터 20 여Km가 고원성 평원을 지났지만 여기는 내내 산복도로를 따라가는 차이다.
언덕에 올라보니 여기저기 과수원 마을이 흩어져 있고 좁은 찻길은 수평으로 이어진다.
저 멀리 건너편은 산비탈에 비스듬한 오르막 도로가 지나가는 모습이 잡힐듯 건너다보인다. 이 일대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산길이 양쪽에서 나란히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알프스의 스펙타클 조망이다.
우리의 산세와는 스케일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서 그림 같은 산맥의 장중한 시학(詩學)이다.
산속에 들어가면 산은 보이질 않는 법이지만 지금 지나가는 오른쪽 산 꼭대기 넘어는 독일 땅이다. 여기는 소위 북알프스의 줄기다. 저 멀리 건너편은 알프스의 신비스런 자태가 마치 지나가는 나그네를 유혹하듯 내려다 보고 있다. 위풍당당 알프스의 그로테스크한 마력(魔力)에 빠져 걷는 길은 한갓 고생이 아니라 오히려 와유강산(臥遊江山) 유람길이다.
흔히 나그네들은 아름다운 길에 방점을 두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까미노의 경우는, '한 번도 못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물론 그 길의 매혹적인 흡인력 때문일 터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뷰 때문이라면 부디 권하고 싶다. 앞으로 여정은 스위스와 프랑스가 더 남았지만 지나온 동유럽을 포함해서 여기도 한 번 도전해보시라!
단언컨대 스페인의 '프랑스길'에서 못다 한 숭엄하고 장쾌한 마초이즘 미학에 빠져 들리라.
대개 여행이라면 무엇보다 특별한 볼거리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에게 왜 아직도 이런 길이 알려지지 않을까?
다만 이 티롤 일대는 한국인 자전거족 자동차족 분들이 더러 지나다닌 걸로 짐작된다.
산복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작은 산촌(山村)이 이곳 저곳 나타나고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언덕에 올라선 지 서너 시간 만에 작은 마을에서, 동네길 바로 아래로 성당이 있다. 잠시 기도를 하고 싶어서 습관처럼 안으로 들어갔더니 산골의 자그만 교회가 놀랍게도 눈부시게 화려하다. 강단에 여러 성물은 모두 번쩍번쩍 금칠로 윤택하다. 이렇게 화려한 교회라면 시초에 얼마나 많은 헌신이 따랐을까? 마을 사람들의 숭고한 신앙심이 실로 경이롭다. 도대체 인근의 경제력은 이다지도 엄숙한 교회가 있을 만한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은데도 그렇다.
전업 과수원촌도 아니고 깊은 산촌(山村)에 삼림이 넉넉치도 않아 보인다. 물론 광산촌일리도 없다.
시골인데도 교회가 이다지도 화려한 경우는 나중에 스위스의 아인찌들렌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거기도 성당 안팎이 온통 금장(金裝)으로 눈비시게 화려했다. 이름난 도시의 두오모(duomo) 대성당이 아니다.
유럽의 시골은 물산이 풍족하지 않아도 교회만은 의외로 화려한 경우가 허다하다. 때때로 봉건 영주나 제후들의 전략적인 선심(善心)도 보태졌겠으나 그 이상으로 마을 주민들의 신앙심 또한 절절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어찌 건물과 성물 등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뿐일까? 유럽인들의 일상은 이렇게 기독교 신앙이 일편단심 뿌리깊다. 물론 그건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온 헤브라이즘(Hebraism)이요 칼뱅주의(Calvinism) 때문이리라.
마치 우리의 일상도 오랜 세월 성리학과 주자학이라는 유교사상의 가치관이 민족문화를 지배해 온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어쩌면 그 이상일른지 모른다.
얼마 후에 산속 길가에 마리아상이 서 있다.
그러니 또 갈림길인 거다.
유럽은 길가에서 마리아상, 예수님상, 십자가를 만났다면 으례히 갈림길이다. 우리네 길섶에 돌무더기와 유사한 기능이다. 다들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석(標識石)인지라 필자는 습관처럼 그 앞에서 길을 묻는 기도를 한다. 그러다가 알게 된 은혜는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따른다는 진실이다.
엘펜돌프(Erpfendorf)란 산골 마을의 아래를 자나니 길은 건조한 골짜기의 밑바닥을 지나간다. 노면이 유달리 부드러운 내리막이라 간만에 신나게 한 번 내달려 본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만에 도착한 오늘의 목적지 키르히돌프(Kirchdorf) 역시 완전 산동네다. 아마 마을의 가장 윗쪽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오늘도 칠십리 깊은 산길을 - 아침에 출발 직후 잠시 언덕을 오른 다음에는 - 내내 급한 오르막도 없이 수평의 산허리를 지나온 셈이다.
동네 공회당 같은 집(25€)에 묵기로 했다.
키르히돌프는 북알프스의 산록에 자리 잡은 윗마을 아랫마을로 길쭉하게 늘어진 마을이다.
지형학에선 이런 모양의 산비탈을 선상지(扇狀地) 혹은 산록완사면(山麓緩斜面)이라 부른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도 이런 마을은 곳곳마다 허다하다. 다만 우리는 경우마다 규모가 왜소할 뿐이다.
키르히돌프는 산골임에도 상당히 도시풍이다.
아마 이 동네의 경제도 어제 로퍼처럼 등산객으로 뒷받침이 큰 모양이다.
숙소 바로 앞에 등산 아웃도어 가게가 있길래 캡을 구하려고 들어갔다.
젊은 여직원은 보아하니 앞서 온 손님과 실무는 끝난 모양인데, 노닥거리는 대화 중에 아무리 기다려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가게에 들어서면서 힐끔 서로 눈길이 마주친 이후로 글쎄 10 여분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다. 이것도 인종차별인가? 도대체 기다리는 손님이 동양인이라 인식을 하고서 저러는가?
기다리다 못해 화딱지가 나기에 그만 나와버렸다.
이 동네의 정식 지명은 Kirchdorf in Tirol이다. 혹시 구글에서 검색을 위해서~~~
실은 린츠 이후부터 모자에 문제가 생겼다. 이스탄불에서 출발 때부터 쓰고 온 캡이 그 동안 땀에 삭아서 챙과 머리 부분이 분리 직전으로 너덜너덜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캡을 위해서 지나는 동네들의 가게마다 찾아보다가 무려 20 여일 만에 그것도 마지못해 절반쯤 마음에 드는 놈으로 낙착했다. 물론 다음 날 인스브루크에서도 캡 선택은 불가능했다.
티롤은 알피니즘의 세계적인 성지답게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등산 아웃도어 가게가 있다. 아마 겨울철 스키 시즌이 대목인 모양이다. 그러나 전문성이 지나쳐 고객의 취향에 알맞는 아이템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의 등산 가게 거리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아웃도어 천국이다.
우리는 고객의 취향에 따른 선택의 폭이 거의 무한대니까. 하지만 모자였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신발이나 배낭이었다면 어쩔 뻔했나?
부디 초장거리 나그네들의 장비란 알고 보면 명품일수록 경제적이다. 수년이 지나도 신품 같은 그 내구성, 그리고 사용할 때 그 때깔 좋음 말이다.
제 3 일
참 희안한 일이다.
오늘 따라 아침에 일찌감치 출발한다. 마치 스페인의 까미노에서 이른 새벽 출발을 닮았다.
산촌이 얼마나 늘어졌는지 경사진 마을을 다 내려와 평지로 나서는데 30분이나 넘게 걸린다. 대형 마트가 나오길래 간식도 챙겼다.
상크트 요한(Sankt. Johann)으로 향하는 넓다란 길은 준고속도로인지 거의 직선으로 뻥~뚫렸다. 간밤에 살짝 내린 비 때문에 하늘은 흐리고 걷기에는 안성맞춤 날씨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초입은 도로변에 넓은 공터가 주차장일까 싶었는데 갈수록 양쪽으로 차단 철망이 계속된다. 빠져 나갈수도 없고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분명히 고속도로는 아닐텐데 지나치는 차량마다 속도가 쌩쌩이다.
결국 또 문제가 생겼다. 도로에 진입 30 여분 만에 경찰차가 쫓아와 불심검문을 한다. 십중팔구 지나가는 운전자가 신고를 했을 터이다.
혹시 성가신 문제가 생길까 아첨 겸 재빠르게 지도를 꺼내 보이면서, 먼 길을 가는 중이라 해도 경찰은 무표정 아무런 반응도 없다. 오~! 오스리아의 멋대가리 경찰들~!! 다만 두 경찰은 서로 한참을 의논하더니 가던 길을 계속 가도 된단다. 눈치에 원래 이 도로에선 보행이 금지지만 너만은 양해해 준다는식이다.
하지만 생경한 이 도로의 내력을 알아보기에는 언어도 그렇고 갈 길 또한 바쁘다.
그러기를 한 시간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에 왔던 길을 한 번 되돌아 봤더니 지나온 뒷쪽으로 저 멀리 산 두 개가 기하학적으로 겹쳤다. 마치 인공의 콩크리트 산처럼 정삼각형의 높고 낮은 산 둘이 앞뒤로 포개져서 우뚝 서 있다. 하도 신기해서 한참을 걷다가 또 뒤를 돌아봐도 두 산의 모양은 그냥 그대로다. 한국에서 예쁘게 솟은 문필봉(文筆峯)은 더러 눈에 띄지만 참으로 픽처레스크한 비주얼이다.
오늘은 어쩐지 컨티션이 바람같다. 만약 동행이 있다면 또 매직워킹(축지법?)하냐 하겠다.
머나먼 길을 걷다 보면 오늘처럼 문득 길이 나를 데리고 가는 날도 있다. 그러기에 상크트 요한(Sankt. Johann)까지 7~8Km를 순식간에 와버렸다.
마을 주민들 말로는 다음 마을 뵈글(Wörgl)까지는 178번 도로를 따라가면 30Km의 거리란다.
초입은 길 이름이 인스브루크 거리(Innsbruck Straße)다. 하지만 여전히 티롤의 깊은 산길이다. 양쪽으로 가까이서 따라오는 산맥 허리에 안개인지 낮은 구름인지 마치 새하얀 벨트를 두른 모습이다. 구름은 산중을 오르락내리락 피어오는듯 사라지고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일대의 해발을 어찌 되는지 진기한 환상이다. 참으로 신비스런 비주얼이다.
그렇게 세 시간쯤을 가다보니 178번 도로의 이름이 어제의 출발지 로퍼 길(Lofer Straße)로 바뀐다. 겐슬라이텐(Gensleiten)이란 마을인데 만약 여기서 173번 도로로 오른쪽으로 돌아올라가면 12Km만에 쿠프스타인(Kufstein)이 나오는 모양이다. 어쨋거나 다음 동네 뵈글(Wörg)l은 짐작에 15Km쯤 남았겠다.
와인잔과 요들송
여기서 이번 이야기가 아무리 길어져도 인근에 있는 쿠프스타인(Kufstein) 마을 소개를 좀 해봐야겠다.
알프스의 요들송(Yodel)과 세계적인 명품 와인잔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래는 수년 전 '카미노 카페'에서 「안드레아님의 모험길을 기리며」란 응원 글에서 거론했던 이야기와 대부분 재론이다.
큰 그림으로 본다면 그 쿠프스타인이란 잘츠버그에서 인스부르크에 들어가기 직전 산속에 있는 마을이다. 거기까지 거리는 오늘 출발 동네도 그렇고 좀 전에 지나온 상크트 요한에서도 각각 30 여Km로 같다.
만약에 오늘 굳이 쿠프스타인을 지나가야 했다면 어제 묵은 동네에서는, 산이 막혀 도저히 불가능하고 여기서도 산 속으로 되돌아 올라가야 한다.
또한 이번 여정에서 쿠프스타인을 자연스럽게 지나가려면 아예 잘츠부르크에서부터 독일로 올라가 다뉴브강을 거슬러 올라와야 했다.
'유리잔 같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정성스레 닦아주고 싶은/유리잔 같은 사람이 있는가// 두손 모아 살픗 잡고/입김 모아 호호 불며/마음 모아 살살 닦아//애정으로/정성으로/반짝이게 해주고 싶은/ 유라잔 같은 사람이 그대 있는가.
인터넷에서 위에 시를 본 적이 있지만 필자의 모자라는 사이버 능력은 정작 시인을 찾아낼 수 없으므로 진정 송구할 따름이다.
술잔은 의외로 음주의 흥분과 낭만에 영향을 준다.
혹시 와인을 좋아하시던가요?
하므로 여러분의 와인 잔은 각각 어떤 모양들일까 궁금하다면 큰 결례가 될까?
특히 와인은 잔 모양에 따라 맛과 향, 균형감(Balance), 끝맛( Finish)이 좌우된다. 와인의 넷 기본 맛으로 쓴맛, 단맛, 신맛, 짠맛이 입안 부위마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를 좌우하는 게 바로 와인 잔이다.
세계적인 명품 와인 잔〈Riedel〉은 오랜 전통으로 일일이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오스트리산 수제품이다. 일단 소믈리에 시리즈는 6가지에 각 84개 잔을 만들어 낸다. 일명 '보헤미안 브르주아'라 불리며 약자로 보보 (BoBo)라 칭한다.
필자가 음주를 한참 즐기던 시절에는 술자리에서 턱도 없이 세상을 제법 아는듯 현학적이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망각의 세계에서 까마득히 묻혀 있었던 온갓 기억이 되살아 나고 통음 속에 왜 그리 나누고싶은 말도 많았던지~~
더 이상은 부담을 느끼는 듯한 동석에게 습관처럼 막무가네로 잔을 들어 권하며 떼를 쓰던 언사가 있었다.
"술잔은 행복을 나르는 배라니까~~!!"
하지만 적당한 주량이란 와인 잔을 기준으로 목사 여섯이서 딱 한 잔씩이라 한다.
차제에 우리 한국도 청년실업에 따른 취업과 스타트업 등 젊은이들의 장래 고민과 관련해 이 리델 회사를 한 번 자세히 소개해보련다.
티롤 산골에 리델은 아주 독특한 회사다.
창립은 1756년으로 현재 250년을 넘어 10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기업이다.
오스트리아 시골 티롤(Tirol) 지방의 인스부르크에서 75Km 거리에 쿠프스타인(Kufstein)에 공장이 있고, 직원은 300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와인 글라스로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독보적인 메이커이다.
리델의 경영철학은 간단하다.
* 단 1원의 빚도 지지마라.
* 마음에 들지 않는 유리잔은 깨버려라.
* 외상으로 물건을 주지마라.
* 고객의 취향을 만들어라.
체코슬로바키아 보헤미아에서 시작한 리델은 히틀러가 2차 대전 중 체코를 점령하자, 유리잔을 만들다가 하루아침에 레이더 스크린을 만들도록 지시를 받았다. 이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나 체코가 공산화 되자, 당시 발터 리델 사장은 소련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그의 아들인 클라우스 리델(Claus Riedel)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 클라우스는 우여곡절 끝에 오스트리아 쿠프스타인에 다시 공장을 세워, 아들 게오르그 리델(10번째 세대)과 함께 리델의 영광을 재현했다.
리델 가문의 9번째 세대인 클라우스 리델은 기능적인 면에만 충실했던 기존의 글래스 업계에 혁신적인 개념을 제시하면서 와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와인 글래스가 주는 즐거움을 극대화 시켰으며, 역사상 최초로, 와인 글래스의 모양이 와인의 맛과 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오르그 리델은 선친이 세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와인 글래스의 모양은 와인의 종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적합한 와인 글래스의 선택은 와인의 맛을 더욱 좋게 만들어준다. 와인의 향과 맛이 주는 느낌 즉, 와인이 주는 메시지는 와인 글래스의 모양에 달려있다. 와인의 느낌을 인간의 오감에 최선을 다해 전달하는 것이 바로 와인 글래스의 의무인 것이다."
어쨋거나 오스트리아의 잘츠버그가 모차르트로 유명하다면 이곳 쿠프스타인은 와인 잔보다 의외로 알프스의 요들송으로 더 유명하다. 단순한 관광객이야 이곳의 아름다운 산장에 관심이 더 많을테지만 요들을 배우는 우리 유학생도 다녀가는 마을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요들송〈쿠프스타인의 노래(Das Kufsteiner Lied)〉가 만들어진 마을이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가' 인근의 동네마다 요들송을 물어보지만 그때마다 주민들은 대개들 뜨악한 표정이다.
이번 길에서 이와 유사한 경험은 또 있었다. 우리는 익히 알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정작 먼 나라 이야기로 취급 받는 경우 말이다.
나중에 프랑스의 GR65('르쀠길')에서 카톨릭의 세계적인 성지 루르드(Lourdes)에 들러보려다 포기한 경우다.
루르드에서 75Km로 가장 근접한 에흐-슈르-라두흐(Aire-sur-l'Adour)의 인포에서 차편을 물어봤으나, 20대와 30대 후반의 두 여직원은 필자의 질문을 받고 커다란 책자를 뒤지다가 어딘가에 전화도 걸어보면서 한참 애를 쓰다가 겨우 돌아온 대답이 그 날은 차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두 직원의 인상적이고 감사한 부분은 진실된 책임감 노력이었다.
다뉴브강의 지리학
이윽고 뵈글(Wörgl)이란 마을에서 인강(Inn)을 만났다.
물론 인스브루크(Innsbruck)를 지나온 강이다. 그래서 인스브루크의 어원은 '인강의 다리(bruck)'란 의미란다.
여기서부터 스와츠(Swchwaz)까지 33Km는 걸어서 가고 또 거기서부터 인스브루크까지 25Km는 기차를 타야겠다. 그렇다면 오늘은 자그마치 73~5Km를 걸은 셈이 된다. 아침에 07시 전에 출발해 15~6 시간 만이다.
컨디션이야 여전히 무아지경 더 걸을 수는 있겠으나 지나치게 늦어버리면 초행의 도시(인스브루크)에서 숙소가 문제다.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니까.....
잘츠부르크 이후 지나온 길과 앞으로 열흘 이상 스위스의 동부까지도 북알프스 또는 바바리안 알프스의 줄기에 해당한다.
※ 북알프스는 독일에서 바바리안 알프스(Bayerishe Alpen)라 부르기도 함.
유럽 대륙을 동~서로 아우르는 두 강은 다뉴브강과 라인강이다. 물론 이들은 한때 고대 로마 제국의 북쪽 국경선이었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중부 유럽은 그 두 강이 각각 시작되는 발원지요 또 서로 나누어지는 분수령 부분이다. 동쪽으로는 다뉴브 강이 2,800Km 거리로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라인강이 1,300Km만큼 흘러서 대서양으로 들어간다.
그 중에 지금은 다뉴브 강의 최상류 지역을 지나가고 있다.
인강은 이곳 뵈글(Wörgl)을 지나 15Km 쯤에서 쿠프스타인을 만난다. 그렇게 내려가는 인강은 다시 100 여Km 만에 독일의 하이밍(Haiming)에 이르면 잘츠부르크에서 내려온 잘짜흐 강과 합류하여, 계속 인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70Km를 더 내려가다가 독일의 파사우(Passau)에서 다뉴브의 본류와 만난다. 그리고 장대한 물줄기를 이루어 린츠 방향으로 흘러 간다. 덧붙이면 지나온 잘츠부르크를 통과하는 잘짜흐 강은 하이밍에서 인강과 합류될 때까지는 55Km의 거리요, 이번 (36)편의 첫날 로퍼의 동네 앞을 지나가던 자알라흐((Saalach)강은 하이밍에서 인강과 잘짜흐 강이 합류되기 직전에 이미 인강에 흡수되어버린다.
어쨋거나 린츠에서 인스브루크까지 근 300Km를 다뉴브강을 북쪽으로 멀찌감치 두고서 걸어온 셈이다. 아울러 다뉴브를 더 넓게 본다면 석 달 전에 불가리아 이후부터 계속 그래 온 셈이다.
티롤의 깊은 산속에 자리잡은 뵈글은 제2차대전 종전 직전 1945년 5월에 동네 성곽의 탈취를 두고 오스트리아의 저항군과 미 육군 사이에서 대규모 전투가 유명했던 고장이란다.
지금(뵈글)부터 스와츠까지는 대부분 인강의 뚝방을 따라가는 길이다.
저물에 가는 인강의 낭만 넘치는 뚝방길을 벗어나 주변의 작은 마을로 빠져 나갔다가 다시 뚝방으로 올라 섰다가를 반복한다. 진행 방향 오른쪽은 북알프스의 우람한 산줄기가 품에 안길듯 따라오고 그 넘어는 독일이다. 왼쪽으로 저 멀리 산맥은 이탈리아와 국경 쪽인 모양이다. 스와츠가 6~7Km 남은 지점에서 한여름의 해는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얼마 후에 스와츠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9시 반이 훌쩍 넘었다.
간만에 인스브루크 행 OBB(오스트리아 국철)를 만나니 꽤 늦은 시간임에도 승객들은 여기저기 등산복 차림이 적지 않다.
마음이 밝으니 몸 또한 거뜬하다.
오늘 걸어낸 키르히돌프~인스브루크는 95Km의 거리다. 재론이지만 그 중에 70 여Km는 걸어서 나머지 25Km는 기차를 이용했다.
부다페스트 이전에 동유럽의 지평선에서는 하루에 45~55Km는 식은 죽먹듯 걸었지만 70Km 이상이면 이번 동서횡단 중에서 단연 기록적이다. 오늘처럼 머나먼 워킹은 하나의 길과 전쟁이다. 전투란 전략과 전술이 좋아야 승리한다. 73Km란 목표가 전략이었다면 오늘처럼 가벼운 발걸음은 전술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도 한갓 기록에 집착하는 야심은 아니었고, 무조건 신명나서 걸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은사(恩賜)였다. 이십 여리를 더 보탠다면 하루에 이백 리 길을 걸은 거다. 그리고 또 그것은 내 영혼을 세탁하는 하루였다.
다만 서쪽으로 가는 노래는 오늘처럼 몸이 호응할 때 목청껏 불러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