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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손 창 섭
도대체 자기가 이렇게까지 오금을 못 펴고 쩔쩔매는 것은 모두가 활자에 없는 결혼의 소치라고 병준(炳俊)은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와서 병준(炳俊)은 애꾸눈 반장의 말을 들은 것을 몹시 후회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사나 생활이 전적으로 무시당하고, 단지 장인과 여편네와 의붓자식인 대갈장군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기계가 되고 만 것은 아무래도 결혼의 탓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십 년간의 독신을 청산하게 된 것은 불과 반년 전의 일이었다. 지금 들어 있는 방을 얻어가지고 이사를 오자부터, 반장으로 있는 장인 영감이 거의 저녁마다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유독 병준(炳俊)이만을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열 가구나 되는 반원(班員)네 집을 매일 한 차례씩은 거르지 않고 방문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과의 하나였다. 그러기 각 반원의 가정 내막에 그는 놀랍도록 정통했다. 마치 자기네 집안일처럼 홱 꿰고 들었다. 심지어는 이집 저집의 비밀까지도 캐내어 뿌리며 다녔다. 그러한 그는 스스로 명반장으로 자처했고, 동회에서도 그렇게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반면 반내에서들은 그를 송충이처럼 꺼려했다. 그 명반장은 명준(炳俊)이가 이사 온 날부터 으레 저녁마다 들르는 것이었다. 반장은 병준(炳俊)이가 미처 대답하기 바쁠 정도로 여러 가지를 한꺼변에 질문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등이 곱사등이처럼 굽었냐는 것이 첫 질문이었다. 그리고는 어째서 부인이나 딴 가족이 없느냐, 총각이냐, 홀아비냐, 고향은 어디고 나이는 몇 살이냐, 학교는 어디까지 다넜느냐, 직장은 어디며 한 달에 수입은 얼마나 되느냐, 부모는 언제 돌아가셨느냐, 형제는 몇이나 되누냐, 술을 좋아하느냐, 담배는 하루에 몇 갑 피우느냐, 그런 걸 취조하듯이 수첩을 꺼내 하나하나 적어가며 연달아 묻는 것이다. 병준(炳俊)은 정말 취조 받는 범인처럼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대답이 자꾸만 헷갈리고 음성이 떨렸던 것이다. 이렇게 남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반장에게 병준(炳俊)은 첫날부터 완전히 지배당하고 만 것이다. 일가붙이 하나 없이 고독하게 떠돌아다니는 병준(炳俊)의 신세를 필요 이상 걱정해준 반장은, 열흘쯤 지나서 느닷없이 결혼을 하라고 권했다. 병준(炳俊)은 결혼이라는 말에 대답 대신 한숨을 토했다. 평생 자기에게는 결혼이 실현될 수 없다고 단념해왔기 때문이다. 면상이 이 꼴로 마구 생겨 먹은데다가, 뽄없이¹ 등까지 굽었고, 지위도 돈도 없는 자기에게 시집올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설혹 어떤 여자가 오산하고 자기와 결혼한다 해도, 병준(嫡俊)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제태로 처자를 다스릴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반장이 마땅한 신붓감이 있다고 강권해도 병준(炳俊)은 꿈같은 얘기로만 흘려버리고 만 것이다. 반장의 말에 의하면 여자는 서른두 살 먹은 과부로 드물게 보는 미인이라는 것이다. 그 미인이라는 말에 병준(炳俊)은 더욱 불가능한 절벽을 느끼며 역시 한숨을 끄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처럼 못나고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올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반장은 더 신이 나서 그 점은 절대로 염려 말라는 것이다. 여자는 이 근방에 살기 때문에 병준(炳俊)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미리 의향을 듣고 온 터라, 병준(炳俊)이만 승낙하면 이건 완전히 성사된 혼담이라는 것이다. 병준(炳俊)은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준(炳俊)은 이내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암만해도 가정을 꾸려나갈 자신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뜻을 반장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이란 어떻게든 다 먹고 살게 마련이라고 하고, 그런 걸 생각하다가는 평생 장가를 못 들어보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장 여자를 데리고 올 터이니, 맘에 들걸랑 눈 꾹 감고 해버리라고 이르고 나서 반장은 일어서 나갔다. 그런 지 십 분도 채 못 되어서 그는 정말 여자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다. 반장 말대로 여자는 보통 이상의 미모였다. 여자는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이 반장을 따라 들어와 병준(炳俊)의 맞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약간 고개를 숙이며,
“조순실(曺順實) 이 라고 해요.”
하고, 인사를 하고 나서 다정스레 웃어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인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고 병준(炳俊)은 각오했다. 금시 여자가 자기 어깨 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병준(炳俊)은 별안간 자기 인생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일방 나이 보람도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둘이서 잘 의논해서 좋도록 결정지으라고 하고 반장은 이내 돌아가 버렸다. 그렇지만 여자는 아무리 밤이 깊어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날 밤부터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애꾸눈 반장이 자기의 장인이라는 사실은 이튿날 아침에야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순실(順實)의 세번째 남편이라는 것도 그때야 깨달았다. 순실(順實)은 그날 친정에 가서 조그만 고리짝과 이불 보퉁이를 날라오는 동시에 두어 살짜리 계집애를 업고 온 것이다. 옥례(玉禮)라는 이름인데, 그애 아버지는 술김에 살인을 하고 복역중, 바로 석 달 전에 급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게 순실(順實)의 두번째 남편이었다. 그리고 첫번 남편은 6·25 당시 행방불명 이 되었다는 것이다. 옥례(玉禮)는 복실복실 꽤 귀엽게 생긴 어린애였다. 병준(炳俊)은 물론 반갑지는 않았지만, 이왕 할 수 없으니 내 자식같이 길러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뒤 사흘이 지나서였다. 해질녘에 돌아와보니 육칠 세 먹었을 낯선 사내애가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애의 머리는 보통보다 확실히 배는 더 컸다. 반면에 목은 유난히 가늘었다. 머리가 지나지게 커서 목이 가늘어 보이는지도 몰랐다. 병준(炳俊)은 그 엄청나게 큰 머리에 적잖은 불안을 느끼며, 너 누구냐?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갑자기 입을 비죽거리다가, 어매야 하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부엌에서 순실(順實)이가 쫓아 들어왔다. 첫번째 남편의 씨라는 것을 설명하고 나서, 달영(達永)아, 이 어른이 너의 새아버지다, 자 인사를 해야지, 하고 순실(順實)은 달영(達永)의 커다란 머리를 한 손으로 숙이려고 했다. 그러자 달영(達永)은 머리를 흔들어 순실(順實)의 손을 뿌리치고, 경계하는 눈으로 병준(炳俊)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병준(炳俊)은 대번에 입맛을 잃고 말았다. 저녁밥도 두어 술 뜨다 말고 밀어놓은 것이다. 그는 되레 자기가 붙들려온 사람같이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 터무니없이 큰 대가리를 무슨 맹수처럼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병준(炳俊)은 마침내 죄나 저지른 것처럼, 이 애를 우리가 아주 데리고 살아야 하느냐고 아내에게 조심히 물었다. 그 말에 순실(順實)은 새침해지며, 자기 새끼를 자기가 데리고 살지 않고 어쩌느냐고 했다. 병준(炳俊)은 다소 주저하다가 애써 큰맘 먹고, 얘가 왜 내 자식이냐고 물었다. 순실(順實)의 얼굴이 담박 노기로 붉어졌다. 눈썹이 곤두섰다. 순실 (順實)은 가쁜 숨소리를 내며 당신은 내 남편이요, 나는 당신의 아내가 아니냐, 그러니, 결국 당신의 자식은 내 자식이요, 따라서 내 자식은 당신의 자식이 아니겠느냐, 만일 당신에게 전실 자식이 있다면, 나는 당신처럼 냉정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내가 낳은 자식보다 도리어! 더 소중하게 키우겠노라는 것이다. 그 말이 과연 옳다고 병준(炳俊)은 시인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왜 그런지, 자기만이 부당하게 손해를 보는 것처럼만 병준(炳俊)에게는 의식 되는 것 이었다.
병준(炳俊)은 지금도 발갛게 불이 비치는 자기 집을 향해, 언덕 길을 더듬어 내려오며, 자꾸만 자기만이 억울하게 괄시를 받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었다. 나는 괄시를 받기 위해 사는 것일까. 도랑을 건너며 생각한다. 말하자면 월급 문제만 해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요구이전만, 병준(炳俊)은 벼르고 벼르던 끝에야 두 달이나 밀린 월급을 사장에게 채근해보느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비굴하리만큼 공손한 태도로 말을 꺼내는 것이다. 그렇건만 사장은 대뜸 낯을 찡그리며, 도리어 제 편에서 화를 내는 것이다. 어디 내거! 돈이 있나, 돈이 있구두 월급을 안 주느냐 말야, 수금이 통 안 되는 줄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사장은 그러고 나서 양복 주머니를 일일이 털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러고 주지 않는 월급을 병준(炳俊)은 받아오는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몹시 까다로운 장인 영감과, 패뜩거리기² 잘하는 여편네가 잔뜩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장인이나 여편네가 아무리 굴욕적인 언사로 공격을 퍼부어도, 병준(炳俊)은 일언반구 대답할 자격이 없었다. 가장으로서의 생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죽은 사람처럼 가만하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나간 십오일 수금날은 비상한 위기였다. 그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장인은 이름도 모를 하얀 정제(錠劑) 열 개를 내놓으며 어서 먹고 죽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오는 이십일 수금 때는 기어이 한 달 치라도 받아오고야 말겠노라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음독을 모면했던 것이다. 그 이십일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사장은 전보다는 좀 부드러운 태도로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했다. 요즈음 빚 단련에 자기의 체중이 갑자기 일 관 이상이나 줄었다고 하며, 현재 사 자체가 현상 유지를 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판이니, 며칠만 더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월급 수금에서는 우선적으로 급료부터 해결해주겠노라고 했다. 병준(炳俊)은 다시 더 할 말이 없었다. 내일부터라도 그만두라고 하지 않는 것만이 그저 다행할 뿐이었다. 월말에나 꼭 좀 돈을 쓰게 해주십사고 허리를 굽혀 보이는 병준(炳俊)은 사무실을 나왔던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월급도 제대로 못 치르는 사 자체가 정말 오래지 않아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겹쳐서, 중병 환자처럼 자꾸만 꺼져 들어가는 몸을 병준(炳俊)은 간신히 지탱하고 결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는 형무소로 끌려가는 죄수나 다름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의 발길은 집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무거워만 지는 것이다. 자기 집 문밖에까지 와서 병준(炳俊)은 십 분 이상이나 멍청하니 서 있었다. 좀처럼 방 안에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늦가을의 어슬막³ 바람은 제법 몸에 스몄다. 방에서는 장인과 아내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몇 마디 마치 꿈속에서처럼 흘러나왔다. 병준(炳俊)은 마침내 결심했다. 죽어도 좋다고 비장한 각오를 하고, 쓰러지듯 그는 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에 들어선 것이다. 병준(炳俊)은 장인과 아내의 시선을 피해가며 한구석에 앉았다. 저녁상을 차리러 나가려는 아내더러 그는 이유도 없이 저녁을 어디서 얻어먹고 왔노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별안간 공복감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당연히 월급 말이 나왔다. 두 달 치를 다 받아왔느냐고 아내가 먼저 물었다. 병준(炳俊)은 인제는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는 수밖에 없다고 각오한 것이다. 그는 아내의 말에는 대답을 않고, 장인 쪽을 향해서 떨리는 소리로, 그 하얀 약을 이리 주시우, 했다. 장인은 경멸을 품은 눈초리로 병준(炳俊)을 힐끔 보고 나서, 암 그래야지, 당연히 죽어야지, 하고, 자기의 조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가 옆에서 가만 하고 있지 않았다. 당신은 죽어버리면 고만이지만, 나는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하느냐고 앙탈이었다. 처자를 이렇게 궁지에 빠뜨려놓고 죽는 당신은 결코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과연 지당한 말이라고 병준(炳俊)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죽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새 장인의 손으로 하얀 정제 열 개가 병준(炳俊)의 앞에 놓여 있었다. 장인은 친절하게도 물그릇까지 옮겨놓아 주었다. 병준(炳俊)은 우선 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 그 약은 불면증이 있는 자기가 복용하는 수면제인데 열 개만 먹으면 자는 듯이 죽어버릴 것이라고, 장인은 설명까지 들려주는 것이었다. 병준(炳俊)은 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한 손에 약을 집어 들었다. 왜 그런지 이마에 땀이 내돋았다. 한 손으로 땀을 씻었다. 다자꾸4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빈 그릇을 말없이 아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 다음 장인에게 이 약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장인은 약맛을 설명 하려 하지는 않았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장인은 병준(炳俊)의 손에서 정제 열 개를 도로 집어간 것이다. 그리고 내일 일랑 셋이서 출근하자고 했다. 병준(炳俊)이가 영문을 몰라 멍하고 있으려니까 자기와 순실(順實)이가 따라가, 사장인가 한 자를 만나가지고 주먹다짐을 해서라도 월급을 받아내고야 말겠노라는 것이었다. 병준(炳俊)에게는 그와 같은 조처가 결코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호송 당하는 범인처럼 장인과 여편네에게 끌려 출근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병준(炳俊)은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장인 앞에 음독자살을 자원해 나선 것이다. 장인은 수면제를 도로 싸서 간직하고 완강히 병준(炳俊)의 청을 거부하였다. 인제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게 되었다고 그는 비탄하는 것이다. 내일을 생각하니 병준(炳俊)은 오금이 저렸다. 장인과 여편네는 사장을 만나면 대뜸 멱살을 잡고 발악할지 모른다. 그리 되면 월급은 고사하고 사장은 자기를 즉석에서 해직시키고 말 것이다. 이슥해서 장인이 돌아가고 나서도 병준(炳俊)은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병준(炳俊)은 장인과 아내에게 인솔되어 집을 나섰다. 샘물에 모여 섰던 근처 여인 중에서, 이렇게 일찍 어디들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순실(順實)은 흥분한 어조로 그 뻔뻔스런 사장이란 자를 만나러 가노라 했다. 그러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라, 여러 달 월급이 밀렸다더니 그것 받아내러 가는군, 하고, 풀이 죽은 병준(炳俊)을 바라보는 것이다. 병준(炳俊)은 마치 공판정으로 끌려 나가는 죄수모양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갔다. 그는 앞산 언덕길을 간신히 추어 올라가며, 다리가 휘청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그는 마침내 마루턱 가까이 가서 땅바닥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을 굶은 탓이라고 병준(炳俊)은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자기의 꾀병이라고도 해석해보는 것이다. 병준(炳俊)은 맨땅에 누운 채로, 사장이 이번 월말 수금을 해서는 월급부터 주겠다고 했다는 말을 신음 소리처럼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월말까지 한 번 더 속아보기로 하자고 투덜거리며, 할 수, 없다는 듯이, 장인과 아내는 그대로 병준(炳俊)을 부축해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다음날 그는 출근하는 길로, 사장에게, 월말에는 틀림없이 월급을 청산해달라고 애걸하듯 몇 번이나 당부해두었다. 만일 이번 월말에도 월급을 못 타게 되딛, 수면제를 먹지 않더라도 자기는 죽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 되면 꼭 석 달 월급이 깔리는 셈이니 먹고 살 수가 없지 않느냐. 독신 시절에 장만했던 오버, 시계, 우산, 심지어는 겨울 내의까지 팔이먹은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밖에 병준(炳俊)의 두뇌로는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빚투성이였다. 장인네를 위시해서, 이웃집 치고, 쌀 됫박이나 돈 몇백 환 정도 취해오지 않은 집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순실(順實)의 비위 좋은 외교의 결과였고, 역시 그 덕에 석 달 동안이나 굶지 않고 살아온 것에는 틀림없었다. 여자 이상으로 깐깐한 장인 영감은 으레 저녁마다 들러서 순실 (順實)에게 당일의 수지(收支) 면을 캐묻는 것이다. 그러면 순실(順實)은 누구네 집에서 쌀 몇 되, 누구네 집에서 현금 얼마 하고, 꾸어온 것부터 밝히고 나서, 무어 얼마, 무어 얼마, 소비액을 낱낱이 외워 바치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반드시, 떡이니, 엿이니, 우동이니, 감이니 하는 세목이 끼어 있는 것이다. 조끼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 하나하나 기장해 나가던 장인 영감은, 오늘두 또 처먹었어? 하고 하나밖에 없는 눈을 부릅떠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는 육십이 다 된 오늘날까지, 하루 세 때의 끼니 외에는 군것질이라고 해본 예가 없노라고 하며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면 순실(順實)은 멋쩍게 씩 웃어 보이고, 먹구 싶은 것두 못 먹구 뭣 하러 살아, 세상 재미란 먹는 재미지 뭐유, 난 아버지처럼 살래문 당장 자살해버리구 말겠소, 하고 말대답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간섭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한 달이 못 가서 굶어 죽고 말리라고 하며, 장인은 남은 돈을 달래가지고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장인은 절대로 병준(炳俊) 이나 순실 (順實)에게 현금을 소지하지 못하게 했다. 있는 대로 자기에게 맡겼다가 필요한 때만 타 쓰라는 것이다. 그러기 병준(炳俊)의 월급날은 미리부터 딱 와서 지키고 앉았다가 자기 손으로 받아 넣는 것이다. 순실(順實)은 군것질 할 돈이 없으면 꿀 수 있는 대로 누구에게든 꾸어 쓰고, 또한 일방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외상을 맡아 먹는 것이었다. 그러한 순실(順實)이와는 정반대로 병준(炳俊)은 결혼 이래 제 손으로 돈을 써본 일이란 거의 없었다. 월급이 제대로 나오던 때에는 장인 감독 하에 극도로 절약해서 생활하고 그래도 몇천 환씩이 남았다. 그러나 장인은 병준(炳俊)에게 이발값이나 목욕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목욕일랑 집에서 물을 데워 하라고 했고, 머리는 서투른 솜씨로 장인이 손수 깎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담뱃값도 현금으로 주는 일이 없이 저녁마다 공작 다섯 개비를 다음날 몫으로 뽑아놓고 가는 것이었다. 병준(炳俊)에게는 그것이 제일 골치였다. 하루에 한 갑도 모자라던 그가 다섯 개비로는 어림도 없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꽁초만 눈에 띄면 부리나케 주워 모으는 병준(炳俊)은 도대체 자기가 왜 살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장인과 여편네와 사장을 위해서만 자기는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먼저 결혼이라는 것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병준(炳俊)은 참말 어떠한 의미에서도 결혼의 보람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며칠 밤을 두고두고 벼르다가 아내의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 갔다가는 무안만 당하고 밀려나오는 병준(炳俊)이었다. 사십이 넘은 양반이 왜 이리 채신머리없이 굴우, 순실(順實)은 그러면서 사뭇 성가시럽다는 듯이 발길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 아침이면 병준(炳俊)은 창피해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럭한 병준(炳俊)도 어쩌다 한 번은 아내를 은근히 탄했다. 그처럼 부부 생활을 싫어하면서 왜 세 번씩아나 결혼을 하였느냐고 따지듯 물어본 것이다. 순실(順實)의 대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첫째는 과부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고, 둘째는 용돈을 좀 맘놓고 풍청풍청 써보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난 병준(炳俊)은 공연히 제 쪽에서 낯을 붉혔다. 정말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커다란 과오같이만 해석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인간 행세에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그는, 누구 앞에서나 실없이 불안하고 비굴할밖에 없었다. 병준(炳俊)은 사람 앞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개 같은 짐승을 대해서도 그는 기가 죽었다. 더구나 통장네 개란 놈은 유독 병준(炳俊) 이만 보면 한사코 짖어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집을 나가거나, 돌아올 때, 통장네 개를 만날까 봐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병준(炳俊)이가 요즘 와서는 일층 심하게 공포를 느끼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붓자식인 대갈장군 때문이다. 근처 애들이 대갈장군 대갈장군 하고 부르는 달영 (達永)이놈은, 한밤중에 자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달빛에 문창이 훤한 날 밤 같은 때, 병준(炳俊)은 소변을 보러 일어나다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그 무지하게 큰 머리를 우뚝 들고 방 한가운데, 달영(達永)이가 버티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게 달영(達永)인 줄 얼른 깨닫고도 병준(炳俊)은 왜 그런지 자꾸만 속이 떨리는 것이었다. 세상 일이란 모두가 자기에게 박해를 가하기 위해서만 꾸며진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무사히 살아 나간다는 일이 애당초 무리한 짓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참말이지 병준(炳俊)은 요즘 와서 가끔 죽고 싶어지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인제는 도무지 죽을 자신마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병준(炳俊)은 자기의 심신이 나날이 피로해가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피로가 심해갈수록 발목에 연추⁵라도 매단 듯이 전신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마침내 죽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월말이 되자 병준(炳俊)의 중압감은 더해지는 것이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오늘은 과연 밀린 월급이 해결날 것인지를 생각할 때 병준(炳俊)은 식체⁶에 걸린 사람처럼 흉부에 압박감까지를 느끼는 것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사장은 통 월급 얘기를 비치지 않았다. 병준(炳俊)은 사장의 눈치만을 살피며 앉아 있었다. 그러자 책상을 대강 정돈하고 난 사장은 병준(炳俊)을 향해,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 보게, 하고, 일어서 나가려고 한다. 병준(炳俊)은 그제야 당황히 사장 앞을 막아서듯 하며, 오늘이 월말인데요, 저 수금날인데요, 하고 거북한 듯이 한 손으로 머리를 굵적거렸다. 사장은 아, 참 월급 말이지, 하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우리 나가서 얘기하세, 그러고는 사무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사장은 병준(炳俊)을 어느 중국 음식집으로 안내해갔다. 우선 술과 안주를 청해놓고 사장은 손수 병준(炳俊)의 잔에다 술을 부었다. 그리고 사의 형편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출판계 전체가 파멸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상, 군소 출판소로서는 도저히 유지해나갈 수 없는 위기에 있다는 것과, 그러니 자기만은 단 하나밖에 없는 사원인 병준(炳俊)을 위해서만이라도 끝까지 문을 닫지 않고 버텨나가겠다는 것과, 그러노라면 한고비를 넘기고 차츰 펴나갈 수 있을 것이니, 얼마 동안만 더 참아달라는 말이었다. 월급을 지불 못 하는 자기 심정이 오죽 하겠느냐고 하며, 돈만 들어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월급부터 청산해 주겠노라는 것이었다. 병준(炳俊)은 그만 가슴이 뭉클하도록 감격했다. 그렇게 곤경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만두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나가겠다는 사장의 말에 병준(炳俊)은 흥분한 것이다. 차차 돌기 시작하는 술기운 탓도 있었지만 병준(炳俊)은 마치 답사라도 하듯이, 자기가 월급을 독촉하는 것은, 장인과 여편네가 하두 시끄럽게 구니 할 수 없어 말씀드리는 것이지 결코 자기의 본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나서, 지기 걱정은 말고 어디까지나 사의 재기 발전을 위해서만 노심해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기도 끝까지 사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것이다. 주식(酒食)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 헤어질 무렵에도, 병준(炳悛)은 몇 번이나 사장의 손을 무의미하게 힘껏 쥐어보고 또 쥐어보고 하는 것이었다. 밖에는 썰렁하게 가을비가 뿌리고 있었다. 그는 비를 맞으며 돌아오는 길에서도 사장의 말을 생각하고 감격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츰 주기가 사라지고 집이 가까워오자, 병준(炳俊)은 자기가 대단한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아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했다. 오늘은 도저히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 집의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서서 그는 한 동안 화석처럼 움직일 줄을 모르는 것이다. 비에 젖은 옷을 통해
서 전신에 스미는 냉기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참 뒤에 병준(炳俊)은 자기 집 방문 앞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는 자신의 초라한 꼴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문밖 담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방 안에서는 간혹 장인과 여편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꿈속에서처럼 새어나왔다. 병준(炳俊)은 장인이라도 어서 돌아가 주기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장인손 쉽사리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
늦도록 기다리다가 화가 치민 장인은 그대로 여기서 자고 갈지도 모른다.
병준(炳俊)은 인제 정말 할 수 없다고 각오하였다. 그는 발소리가 안 나게 집 뒤로 돌아가 처마 밑에서 벽에 기대어 밤을 새우기로 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몸이 얼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다리가 몽둥이처럼 뻣뻣해오는 것이다. 그는 양복저고리를 벗어서 머리에 뒤집어쓰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기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병준(炳俊)은 잠깐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ㄹᅟᅥᆫ 무의미한 천착을 그는 오래 계속할 기력이 없었다.
이튿날 새벽에 누구보다도 먼저 통장네 개가 그를 발견하고 짖어댔다. 처마 밑에 쓰러져서 가늘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병준(炳俊)을 장인과 아내가 부축해서 방 안에 들어다 뉘었다.
그는 제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이틀을 정신없이 고열 속에서 신음했다. 그래도 장인은 의사를 청해다 보였다. 급성 폐렴이라는 진단 밑에 의사는 주사를 놓아주고 돌아갔다. 열이 약간 내리고 정신이 들자, 그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전연 머리를 내놓지 않았다. 아내와 장인의 얼굴이 그는 무서웠던 것이다. 자꾸만 석 달 치나 밀린 월급이 생각났다. 이 방에 이렇게 태평스레 누워 있을
체신이 못 된다고 병준(炳俊)은 초조한 것 이었다. 자기가 방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튼 자기는 아내를 앞에 놓고 어엿이 방 안에 누워서 죽을 수 없는 인간인 것만 같았다.
병준(炳俊)은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기회에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다. 머리가 휘휘 내두르고 발이 휘청거렸다. 그렇지만 간신히 밖으로 걸어 나갈 수가 있었다.
병준(炳俊)은 뒷산으로 올라갔다. 조그마한 산 후면(後面)은 바로 공동묘지였다.
그는 몇 걸음 못 가서 쉬고 쉬고 하면서도 기를 쓰고 올라갔다. 나중에는 벌벌 기다시피 해서 공동묘지 한 귀퉁이에 다다르자, 병준(炳俊)은 정신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만엔가 그가 정신을 돌렸을 때는 눈앞에 한없이 넓은 검은 장막이 둘려 있었고, 그 장막에는 별 같은 것이 무수히 아로새겨 있었다. 병준(炳俊)은 벌써 자기가 죽어서 딴 세상에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얼핏 병준(炳俊)은 죽을 때 아내나 장인이나 그밖에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린 월급을 받아다 주지 못하고 온 것은 벗을 수 없는 대죄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멀리서 불시에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병준(炳俊)에게는 그게 통장네 개가 아닌가 싶었다. 그놈의 개가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하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순간 그는 자기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장막인 줄 알았던 것은 밤하늘이었다. 별이 보였다. 저 별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중에도 자기가 이렇게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장소에 와서 죽는 것은 다 행한 일이라고 만족하기도 했다.
다음날 오후 그 공동묘지에 장사 지내러 왔던 한 패가 병준(炳俊)을 발견했다.
병준(炳俊)은 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몇 시간 뒤 병준(炳俊)은 자기 집에 옮겨져 왔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병준(炳俊)은 정신을 돌이켰다. 그때 병준(炳俊)은 아내를 보며 자꾸만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 죽겠노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 병준(炳俊)육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단 한 가지 마지막 소원마저 묵살당한 채, 아내와, 의붓자식과, 장인 영감을 비롯하여 이웃 사람 두서넛이 구경하는 가운데서, 병준(炳俊)은 모든 것을 단념한 듯이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끝-
2016년 5월 13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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