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례 공간으로서 조선왕조의 존엄한 성소(聖所)였던 사직단은 일제강점기 공원으로 변형되면서 흉흉한 사건의 현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신문 자료를 검색하던 중 발견한 몇몇 사례들입니다.
1. 『경성일보』 - 1927년 5월 17일
「사직단의 목 매달아 죽은 사람(社稷壇の首吊り)」
“15일 오후 7시경 사직공원 경비원 이원승(李源昇)은 원내순시 중, 언덕의 소나무 수풀 속에 높이 7척쯤 되는 나무 가지에 붉은 색 끈으로 목을 매달은 조선인(鮮人) 남자를 발견, 놀란 마음으로 계출(屆出)하여 종로 경찰서에서 출장검사한 결과 이 사람은 주소 미상(現住不詳) 김호천(金好千, 30세)으로 판명되었다. 사체는 망처(亡妻)의 아버지 부내(府內, 경성부를 뜻함) 누하동(樓下洞) 79의 한윤섭(韓允燮)에게 인도되었다. 사인은 불명이나 김은 작년 9년경(1920, 大正 9년으로 추정) 본처의 사별 이후 서대문 밖에서 후처를 맞이하였으나 일정한 직업 없이 항상 후처에게 구박 받았던 것을 볼때 이를 비관하여 액사(縊死)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2. 『중외일보』 - 1928년 3월 22일
「사직단(社稷壇)에 암장(暗葬)」
“20일 오후 5시 20분경 시내 사직단공원 송림 가운데다가 흰 보로 싼 암장한 시체 하나를 발견하고 소관 종로서에서 조사하여 본 결과, 그 시체는 나이 5살 가량 되어보이는 사내아이로서 아무런 상처와 과흔적이 없으며 죽은지는 3, 4일 밖에 경과되지 아니하였으며 모든 점으로 보아 생활난으로 그와 같이 죽은 아이를 암장한 것 같더라.”
3. 『중외일보』 - 1928년 8월 14일
「사직단(社稷壇)에 비장(秘藏)한 장물(臟物)」
“부내 암근정(岩根町) 117번지 김학선(金學善, 25세)은 10일 이후 6시경에 시내 중림동(中林洞) 105번지 금은세공상 강창근(姜昌根)의 집에 침입하여 제품 400여원어치를 절취하여 가지고 봉래정(蓬萊町) 모 음식점에서 술을 먹고 있는 것을 서대문 서원이 탐지하고 일대격투를 연출한 후 체포하였는데 취조한 결과 사실을 자백하였으며 그외 다수한 장품을 시내 사직단공원 송림 사이에 묻어둔 것을 일일이 자백하였더라.”
이상의 사례 이외에도 아동 시체 유기를 비롯해 자살한 시체가 사직단에서 발견된 사례는 1931년, 1932년, 1938년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사직단이 흉흉한 장소로 전락한 것에 대한 분노나 황당함보다 저마다 삶의 어려움에 봉착해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에 대한 가여움, 연민이었습니다. 종국에 그들의 최후를 지켜봤을 망국의 제단(祭壇)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500년 이래 숭앙되며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어루만졌을 사직(社稷)은 정작 자신의 눈 앞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던 그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 하지 않았을까요.
맥락에서 벗어난 감상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직제를 복원하여 제례를 봉행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재차 숙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보본반시라는 거창한 이념 아래 전통을 잇는 의미도 있겠지만, 이 땅에 살아가는 어렵고 고단한 사람들, 그들도 사직의 보우 아래 보살핌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염원하는 것 역시 사직제가 지닐 수 있는 또 하나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첫댓글 전인혁씨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