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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도 주님께 드리는 예배자로 나왔습니다. 내일은 저희 어머님 4주년 추모일입니다. 어머님 망월동 영락공원에 안치되어 있지만 천국에서 우리교회와 가족을 지켜보고 계시기에 어머님 때문에 천국을 소망하며 위로 받고 있습니다. 어머님 묘소앞에는 늘 좋아하셨던 성경구절 시편 23편 1절.....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추모기념비가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평생 의지하며 사셨던 어머님이 지금 많이 보고 싶습니다.
시편23편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전투기에 서바이벌 키트 생존 장비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 생존 장비에는 만약 전투기가 적진 한가운데에 추락했을 때에 생존 할 수 있는 물품들인데 지도, 나침반, 비상식량, 권총 등 100여 가지의 물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품 중에 카드 한 장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카드는 신용카드도 아니요 게임카드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시편 23편이 새겨져 있는 성경카드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서바이벌 키트 물품100가지 다 필요하지만 한 차원 높은 영혼의 귀함이 있기에 성경카드가 있는 것 입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은혜 입은 그리스도인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편23편을 읇조리며 위로를 받습니다. 성경학자 아놀드 로드스는 시편 23편을 “지상최대의 시” 라 했고, 스펄젼 목사는 시편23편을 “시편의 진주”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친근한 말씀입니다.
시편23편은 다윗이 모든 것을 이루고 말년 때 자신을 돌아본 시라고 하는데 매 절마다 1인칭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나를 푸른 초장에....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고....나와 함께 하심이라.....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처럼 다윗 자신의 체험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본문 1절은 시편 23편 전체를 이끌어주는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절을 통해 우리가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다윗뿐 아니라 우리 자신은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늘 부르는 하나님은 “내게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오늘 나의 삶에 무엇인가 부족하게 보인다면 노력하지 못해서 환경이 받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불평 불만하며 설익는 판단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나의 진정한 목자로 모셨느냐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로 부른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목자요 자신은 양임을 노래한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양은 철저히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목자가 챙겨 주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지 않고 삽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가 엄마 품에서 조금씩 독립적 모습을 보이면 엄마 손을 뿌리치고 혼자 하려고 합니다. 자존심에는 죄가 숨겨져 있습니다...... 반항하고 저항하고, 능력도 안 되면서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설익은 인간은 각기 제 갈 길로 가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반항기가 일생에 걸쳐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불편해하고 간섭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존심은 한순간에 깨어지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살기에는 인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은 손을 대지도 못합니다. 태어나는 것, 죽는 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시간을 멈춰서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분리한다면 마치 기관차 없는 객차와 같습니다. 객차가 10개 20개 있다고 해도 앞에서 끌어가는 기관차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윗은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노래하고 있기에 그 다음에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책임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일하셨기에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었을까요?
1.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2절.....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양은 정말 약한 존재입니다. 특별히 시력이 아주 약합니다. 3m 이상은 못 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3m 이상을 보지 못하는데 무슨 재주로 푸른 초장을 찾겠습니까? 목자가 인도해주지 않으면 양은 부족함 투성 입니다.
코로나이후 다시 여행업계가 활기를 찾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여행하면 안내자가 있습니다. 특히 해외여행 가는데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 하다가 사고 날 수 있고 고생 만하게됩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 동반하는 역할이 가이드입니다.
양인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 하실 때 내일을 알지 못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죽는 날을 미리 안다면 좋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세상이 온통 무질서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관심이 참 많습니다. 연말에 가장 많이 찾는 것이 토정비결입니다. 인터넷에 점치는 사이트도 성행합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미래를 안다는 것은 초월자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미래를 다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의 인도를 받으면 됩니다.
창세기 12장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내가 지시를 하면 순종하라, 그다음에 내가 인도해주겠다’라는 말입니다. 순종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어떤 안내자입니까? 시편 121: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139: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부흥전도자 디엘무디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섯 살 난 아들이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글쓰는 것이 방해될까 봐! 큰소리로 아들아 왜 들어왔니 묻자 아들은 그냥 아빠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예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아빠 곁에 아무말로 하지 않고 놀고 있었습니다. 무디는 서재에서 조용히 놀고 있는 아들을 밖에 나가라고 말하지를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주님이 내 쫓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우리 예수님은 양인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10장 4절에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양은 머리가 영리한 양아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냥 따라가는 양입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받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내 의지가 아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3절....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 사랑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은 무엇보다 영혼이 귀합니다. 다른 피조물과 똑 같은 흙덩어리 뿐인 인간에게 유독 하나님이 생기를 직접 불어 넣어주셔서 저와 여러분에게 영혼이란 귀한 선물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영혼의 귀함을 알기에 노래하기를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노래했습니다. 소생이란 사역동사입니다. 살게 하다 생명을 주다 회복시키다. 그렇습니다. 내 영혼이 무엇보다 날마다 소생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생은 내가 스스로 땀을 흘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연 내게 그 일이 유익한지, 지배하지는 않을 것인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질문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조금도 생각 하지 않습니다.
눈과 비가 내리는 것, 질병에 걸리는 것, 공부를 잘 하는 것 등은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경험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소생시키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육신의 필요한 것은 민감하지만 영적 필요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혼의 때는 무한대이고 육신의 때는 잠깐임을 깨닫아야 합니다.
성경에 구원을 등한시 여기지 말라고 말씀했는데 그리스도인은 과거, 현재, 미래 지속적으로 구원의 확신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구원파처럼 구원에 대해 과거에 받은 구원만 강조하다보면 현재와 미래에는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가도 중간에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값싼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을 찾아서 실천하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사람입니다.
3. 안위하여 주십니다.
4절....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서부영화를 가끔 봅니다. 주인공이 말을 타고 장총이나 권총을 휴대하고 악한 자들을 소탕하며 정의를 위하여 싸웁니다. 주인공이 정의롭게 총을 사용하는데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끝나지만 주인공이 죽지 않는 것은 총이 자신을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소유한 지팡이와 막대기도 광야에서 성난 이리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사용하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사용 용도에 따라 달랐습니다. 막대기는 사자나 곰 같은 사나운 맹수가 위협을 가할 때 때로는 양이 행실이 나쁠 때 막대기를 던져서 버릇을 고치기도 하고 독초를 먹으려 들거나 다른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경계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팡이는 막대기보다 길고 목자의 키 만큼이나 높고 끝 부분이 우산 손잡이처럼 구부러져 있습니다. 목자는 지팡이로 갓 태어난 새끼 양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 지팡이로 들어 올려 어미 곁으로 옮겨 놓겨놓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는 목자의 체취가 묻어 있어서 양들을 접촉하는 애정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목동으로 자라면서 늘 휴대 했던 막대기로 사자와 싸워 이긴 경험이 있습니다. 그만큼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보호해 주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겁니다.
다윗이 알고 있는 지팡이 이미 믿음의 선조인 모세가 먼저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와 대결하고자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출4: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누굽니까? 강대국 왕입니다. 40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한 왕입니다. 만약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면 당장 죽을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모세 손에 지팡이 하나 들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 하나로 애굽 바로를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지팡이는 지팡이이지만 하나님의 지팡이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노래하며 나를 안위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안위란..... 몸과 마음이 평안함을 뜻합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양을 보호해 주셨듯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신을 보호해주셨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체험했던 환경과 현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그는 사울로부터 얼마나 죽을 고비를 걲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들 압살롬 때문에 생사에 기로에 놓여 왕궁을 빠져나와야 하는 사망의 골짜기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양이 목자의 품에 안겨 평안하듯 하나님 품 안에서 안위함을 체험한 것입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도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 찬송을 우리는 자주 부릅니다. 알고 불러야 더 은혜가 됩니다.
413장 노랫말을 쓴 스패포드(1828~1888) 그는 성공한 법률가로 무디 전도단의 재정후원자요 지역교회 집사로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1873년 가족과 유럽여행을 하려 했으나 일이 생겨 네 딸과 부인을 먼저 승선시켜 보냈습니다. 그러나 애기치않게 범선과 여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구조되고 네 딸이 모두 죽는 큰 슬픔을 겪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아내를 만나러 비극의 사고 해역을 지나면서 쓰라린 고통 속에서 현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지만 절망을 넘어 오히려 주님안에서 평안을 외치며 노랫말 가사를 만든 곡이 413장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 앞에 저와 여러분이 힘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지금은 없다 하여도 언제 우리를 엄습 할지 모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이 나를 안위하여 주십니다.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4.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5절.....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상을 차려 주신다”는 것은 식탁(食卓)을 말하는데 잔치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는 말은 고대 근동 풍습인데, 손님이 집으로 들어올 때 주인이 입구에 서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정중하게 맞아들이는 풍속입니다.
예수님 사역중에 어느날 시몬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가셨을 때입니다. 죄를 지은 한 여인이 황유옥합을 가져와 예수님 발에 자기머리털로 닦고 황유를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행위를 보고 죄인인 여인을 지적하니까 예수님 시몬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 이런 예수님 말씀은 당시 집에 들어온 손님을 극진이 대접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노래한 것은 주인이 손님의 잔에 포도주를 넘치도록 따라준다는 말인데, 아쉬움이 없이 아주 풍성한 접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의 목전에서" 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전 영화를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국의 왕을 포로로 잡아 와서 무릎 꿇리고 있는 상태에서 승전 축하 잔치가 벌어지는 것을 상상해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다윗에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고 광야까지 쫓아온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도 있었는데, 살려 준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굴 속에 숨어 있는데, 하필 사울 왕이 그 굴에 들어와 용변을 보았던 때입니다. 다윗 부하들은 사울 왕을 죽이자고 성화였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음 왕을 죽일 수 없다고 사울 왕의 옷자락만 칼로 베어서 사울 왕이 굴에서 나가자, 뒤에서 사울 왕을 부릅니다.
삼상24: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 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해하지 않겠나이다. …”
그 때 사울 왕이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삼상24:17......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20절....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원수인 사울왕이 다윗을 높이 세워줍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통해 이 말을 들을 때 얼마나 통쾌 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의 원수인 사울 왕이 자기 입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다니요!!~~~~~
이처럼 5절 말씀과 같이.......하나님께서 다윗을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정말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체험적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마지막 6절을 통해 영생의 눈 영혼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래속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고 합니다.
6절....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곧 천국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땅에서 제 아무리 비싼 집에서 살아도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집은 돈으로 사는 집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얻는 집입니다.
다윗의 노래.....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안위하여 주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만나 체험하고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