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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것의 변용
< 1. 예술 작품과 단순한 실재적 사물들 >
1.70쪽 내가 J에게 그의 새 작품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묻자, 짐작한 대로 그는 다른 어떤 것이나 마찬가지로 ‘무제’가 적당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가끔 예술가가 어떤 제목을 붙였는지 또는 붙이려고 했는지 우리가 모르는 경우처럼, 이 제목은 사실에 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집합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문화 산책 같은 프로그램에서 무제에 대해서 조영남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무제는 정말 많이 쓰이는 것 같기는 하다. 나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데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같아서 좋다. 보는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고의적으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을 딱 무엇이라고 선 긋지 않고 열어두는 느낌이 좋다.
2.71쪽 제목은 이름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그림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소설이나 시에 제목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상 고민하고 어떤 때는 마지막까지 못 정하는 경우도 있다. 제목은 주제, 소재와 같은 이론들 정도로 배우지만 이름 그 이상에 것이 있다는 것은 의미를 더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앞서처럼 무제라고 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차마 정할 수가 없어서,
3.71쪽 그의 제목은 적어도 제목이 붙여진 대상이 해석될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해석을 위한 지침이 된다.
-무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나는 맨 처음 다양한 해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해석될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해석의 지침이라는 부분이 인상 깊다. 결국은 해석된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더 무궁무진한 형태로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생각한다.
4.74쪽 나는 이 유사-산술적인 물음에 대해 비트슈켄타인이 좋아할 만한 답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며, 그것은 내가 쳐들어 올린 팔과 올라간 나의 팔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든 그 결과가 동일하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수업시간 때 비트켄슈타인의 불만에 대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에서 비트켄슈타인은 모호한 입장 같다. 그럼 예술에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내가 그린 그림이나 그려진 그림은 같다라고 한다면 이 사실을 제거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것은 행위자와 그리고 행위자가 그려서 만든 그 작품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5.74쪽 “나의 행위가 곧 사건이다”
-이것은 수업시간 때 배웠던 주관주의와 또 다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주관주의에서는 인간의 감정에 초점을 두었다면 여기서는 나의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행위가 일어남으로써 사건이 생기고 곧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말 아닌가? 그것은 행위자의 의도가 들어있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 미라는 개념과 별도로 예술이라는 개념에서 말하자면 행위자도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기준이다. 그럼 본질적인 미는 무엇일까? 예술 작품에서 미가 필요하긴 한걸까?
6.76쪽 예술 작품을 표현적인 대상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 까닭은 그것이 제작자 측의 느낌이나 감정에 기인한 것이고, 예술 작품이 참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감정에 기인해서 창작을 하고 또 예술 작품이 참으로 표현한다는 말은 예술 작품 그 사물에서도 스스로 표현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예술작품이 표현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갤러리에 있는 변기와 우리 집에 있는 변기가 다르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제작자의 의도가 있을 테니깐, 그로써 예술 작품이 된다고 생각한다.
7.77쪽 구별 짓는 측면들은 내적인 것도 외적인 것도 아닌 것 같기 때문에 예술은 정의될 수 없음이 분명하며, (나중에 주어진 좀 더 숙고된 반응으로서) 정의는 제도적 요소들로부터 어떻게든 조작될 수 있으리라는 비트겐슈타인적인 답변에 공감하기가 쉽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식별 불가능성을 구성하는 어떤 것도 훌륭한 철학적 이론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붉은 사각형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사각형의 외적인 내적인 것 둘 다 예술로서 정의 될 수 없으며 정의는 제도적 요소들로부터 조작 될 수 있다.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붉은 사각형이 어떤 곳에 어떤 식으로 들어가서 해석되고 적용되는 지는 항상 바뀔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식별 불가능 하는 것이 예술 이론, 철학적 이론이 될 수 없다고 하는 부분도 공감된다.
8,77쪽 우리는 식별 불가능성을 구성하는 어떤 것도 훌륭한 예술 이론-또는 그 무엇에 관해서건 훌륭한 철학적 이론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별 불가능성 이라는 것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 예술을 떠나서 철학에서도 훌륭한 이론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식별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식별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생각에는 식별 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그런 인간이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9,84쪽 그를 대상화의 덫에 빠지게 한 시선은 반사하는 표면의 매개를 통해 그에게 되비친, 그 자신의 시선이었던 까닭에,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주인의 종이었고 그리하여 의심할 것도 없이 사르트르가 ‘헛된 정열’이라고 부른 것, 즉 외부와 내부가 하나인 자의식을 가진 사물이 되었던 까닭에 죽었던 것이다.
-1학기 때 프랑스 철학 시간에 배웠던 사르트르가 나와서 반가웠다. 철학적으로 나르키소스에 대해서 나오고 있는데 이 신화에 대한 철학적인 의견을 잘 해석해 놓은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헛된 정열’ 어떤 면에서는 불쌍하기도 하다. 그런데 외부와 내부가 하나가 되면서 죽음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데 신화로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그런 경우들이 있어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10, 86쪽 일상적인 것들의 세계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그 세계를 비로소 인지 가능 하게 만드는 보다 심오한 형상들의 영역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기도 한다.
-책 제목이 일상적인 것의 변용이다. 일상적인 것의 변용이 심오한 형상들의 영역으로 주의를 분산시킨다는 것은 일상적인 것의 변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인 것 같다. 화장실의 변기가 갤러리에 있다면 그것이 주의를 분산시켜서 딴 방향으로 흐르거나 길을 잃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1, 87쪽 회화는 예술과 삶 모두에 관계한다.
-회화 뿐 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그러지 않을까? 작품에 작가를 떠어 놓을 수 없다. 작가는 사람이고 그의 삶, 인생을 무시할 수 없듯이 또 작가의 삶, 인생이 작품에 녹아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텐데, 그 예술과 내 삶의 두 영역의 관계나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2,89쪽 어떤 사물들의 광경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매우 혐오하는 동물들의 형상이건 또는 심지어 시체이건 그것들의 정확한 모방을 보고 즐거움을 얻는다.
-모방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모방을 비판하는 쪽인데 내 개인적인 의견은 모방을 비판하는 쪽이 더 맞다고 생각된다. 모방이 즐거움도 있겠지만 모방이 주는 즐거움에 오류와 위험성도 무시 할 수 없다, 모방의 즐거움에 대한 내용이 더 구체적인 예가 있다면 좋겠다.
13, 91쪽 나는 모방을 실재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남자와 여자를, 또는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구별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실재 자체가 어떤 종류의 판별적인 속성을 갖는지를 확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생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1장에서는 모방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나오고 있다. 답은 없다. 라는 식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런 저자의 생각에 또 다른 쪽으로 생각도 해 보고 되었다. 나는 실재 자체에는 판별적인 속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방한 것을 보고 판별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14, 91쪽 모방에서 얻은 쾌는 사람이 공상에서 얻는 쾌와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데, 공상가에게는 자기가 즐기는 것이 공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의식된다.
-모방이 쾌를 주는 것에 대한 위험 의식이 대두되고 있다. 그 처음에 단계로 공상가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나도 공상이나 망상을 하는 편이라서 공감이 되었다. 근데 위험 한 것은 스스로 알고는 있지만 상상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쾌 또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럼 상상이 망상이 되고 정신착란이나 정신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15, 93쪽 어느 경우이건 예술 애호가는 실재와 현상 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플라톤의 동굴 거주자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실재와 현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한 천재 예술가는 동굴 거주자와 똑같다는 말인가? 근데 거기서 또 엄청난 예술 작품이 나올 수 도 있다. 실재와 현상을 구분하고 또 한 쪽의 편에 서고 규정한 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정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선을 분명히 정해 나눠어 놓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16,94쪽 그 왜곡현상들을 세계에 귀속시킬 경우 그러면 현실세계는 우리들처럼 평범한 신체들을 가진 사람이 상상 할 수 있는 것보다 엄청나게 훨씬 복잡다단하고, 무법칙적인 변성과 변형으로 가득한데, 그 세계에서는 우리가 바라기만 해도 실제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게 될 또 다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꿈에 대해서 나온 부분에 구절이다. 꿈 속 에서 가진 경험들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믿는 것에 오류에서 나오는 걱정이다. 처음에는 복잡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하고 그 과정에서 큰 오류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인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서 모여 사는 이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7,98쪽 그 기획은 합리적 능력과 도덕적 제어력들을 마비시키고, 주체들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려 마침내 절정의 순간 신 자신이 축하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디오니소스 제식들의 주신제 행사를 예를 들어 나온 구절이다.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놓을 때 신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것은 무당굿 같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책에서는 이것도 인간이 신을 모방하고 또 이것이 진짜 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에 대해서 지적되고 있는데 너무 도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음, 어떤 느낌이면 예술심의위원회 같은 느낌이랄까?
18, 100쪽 교회의 벽들은 절반쯤 갤러리 벽이 되고, 건축학적으로 동류의 극장 벽들이 되는데, 니체가 옳다면 그것은 신성한 관구의 경계를 넘어서는 건축학적 변형인 것이다.
-신성한 관구의 경계라는 말에 주목하데 되는데 교회의 벽들이 갤러리 벽이 된다는 것은 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신성한 신의 영역이 아닌가? 철학적 질문들은 고도로 추상화된 일반적인 물음이라고 배웠지만 신에 대해서 만큼은 특수한 물음이라고 하셨다. 신의 개념에서는 그것은 예술과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7번 문구는 교회의 방언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02쪽 무대에서 보이는 것을 일정 거리에 배치하고, 그리하여 정확히 닮은 상대역을 진짜로 오인할 경우 모방이 초래할 수 있는 믿음들의 틀에서 모방적 재현을 제도화된 규약에 의해 제외하는 것이 연극의 기능들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왜 제도화된 규약이 필요한가? 예술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각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예술인가? 아닌가는 보는 사람이 시각에 따라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사람들이 보는 그런 일반적인 견해들을 합쳐놓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책에서 모방에 대해서 제도화된 규약에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해는 되면서도 의문이 생긴다.
20, 102쪽 미학자들은 심적 거리의 개념, 즉 태도의 변화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주목하는 대상 사이의 간격을 형성함으로써, 실제적인 태도로 불리는 것과 대조되는 것을 의미하는 특수한 절연체 같은 개념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의문들에 대해서 미학자들은 이런 개념을 제시 한 것 같다. 나도 이에 대해서 마다고 생각하지만 이걸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책에서 나오는 의문점들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한정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답이 없는 것 같아서 회의론자가 되는 것 같아서 썩 좋지는 않다.
21, 103쪽 탐 스토파드는 만일 당신이 창문 밖에서 불의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본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일은 그 일에 관해 희곡을 쓰는 것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 내가 도덕적이지 않고 나쁜 사람인가? 내가 만약 창문을 보다가 불의한 일을 보게 된다면 제일 먼저 경찰서에 신고를 하겠다. 하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써야 한다면 비극으로 쓰지 않겠다. 희극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희곡으로 쓸 수 있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한계는 그 일에 대한 왜곡이나 변형이 없다면 쓰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22, 105쪽 의심할 것도 없이 모방의 개념은 환영을 창조하는 기획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그리하여 모방적인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염려의 일부는 바로 그러한 기능을 가진 위험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 어려움이 많았는데 처음 부분은 다시 읽고 또 다시 읽고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의 내용의 뒤로 갈수록 조금은 파악이 되는 것 같다. 이 구절을 보더라도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모방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고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플라톤이 염려하는 이야기를 쭉 하고 있다.
23, 108쪽 니체는 에우리피데스가 “이성적이지 않은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다”고 믿었으며, 니체의 추정으로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연유한 합리성의 기획을 에우리피데스는 연극 작품에서 실행했다.
-여러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예술의 정의를 고대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이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다. 이 사람들은 이성적인 것에서 미를 찾고자 한다. 그것은 분명 한계가 있지만 또 무시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순환적인 구조로 예술의 정의가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4,108쪽 그럼으로써 우리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우리가 믿음과 관습에 맞추어 서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듯이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면화된 동기들을 발견함으로써 인식에 이르듯이 적합한 동기들을 그들의 행위에게 배정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공감한 것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찾았다. 내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되고 심하게 공감을 하면서 그 감정을 같이 느끼고 같이 기쁘고 울기도 한다. 이게 개인을 넘어서 영화나 드라마가 사회의 이슈가 되어서 9시 뉴스에도 나오고 붐을 일으키기도 하는 데 그런 것이 이런 설명으로 이해된다고 생각한다.
25, 109쪽 삶과 너무나 닮았으므로 그 내용에 있어서 예술과 삶에서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예술에 포함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왜 굳이 복제해야 하며 또 거기에는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수세기 우에 넬슨 굿먼은 “누가 이 세상과 똑같이 닮은 또 하나의 세계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라고 물으면서, 그 특유의 신랄한 어투로 “빌어먹을 것들은 하나로 충분하다”고 덧붙인다.
-솔직히 쓰자면 사실 속이 시원해지는 말이었다. 복잡하고 정신이 없는데 속이 편해지는 말이다. 누가 필요하고 누가 만들래? 라는 생각이 드니깐, 삶과 예술이 뭔가 차이가 있으니깐, 예술이겠지? 근데 차이가 꼭 필요한가라는 생각도 든다. 누가 인정은 안 해주겠지만 나에게는 인생이 다 예술이라면 오직 나에게만은 예술이 되는 것 아닌가? 소위 말하는 예술은 타인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것들이 아닐까?
26,110쪽 우리가 삶의 모방으로 간주되는 것을 통해 길을 찾는 것은 삶을 준거로 삼기 때문이다.
111쪽 우리가 모방에서 얻는 즐거움은 그것이 모방이고 진짜가 아닌 것을 아는 지식에 달려있다.
110쪽 예술이 실재와 그것을 흉내 내는 복제품 간의 차이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딜레마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들에 대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런 문장을 이해하자면 모방과 실재는 분리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계속 다른 의견들과 여러 생각들이 나오는 것이다. 결국 분리 할 수 없는 것에서 구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내가 더 궁금한 것은 왜 이런 분리를 하려고 하냐는 것이다. 책에서 나오는 경우들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별로 이해가 안 간다. 인간이 그렇게 무지할까?
27, 113쪽 어쨌거나 이 새 이론에 의하면, 정확히 말해서 예술의 본질은 일상생활에서 기능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들을 단순히 확장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예술은 신비스럽게 되고 만다.
-나는 무의미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면 책에서는 신비라는 말을 한다. 처음 신비롭게 된다는 구절을 읽고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 생각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했다. 신비롭다. 신비로운 것에 대한 계속적인 탐구가 마력이 있다는 생각도 했다. 회의론자들은 그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왜 답이 없는 것에 대한 끊임 없는 생각들을 할까? 라는 내 의문에 답이 되었다.
28,113쪽 그동안에 변화된 것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현대의 청중은 원래의 청중이 규약들에 대해 가졌던, 그리고 일반적으로 연극적-또는 예술적-경험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과는 매우 상이한 관계를 재활성화된 규약들에 대해 갖게 되었다.
이것은 사회학적인 측면이 아닐까? 또 사회는 변화고 달라 질텐데. 책에서 나온 코르크 마개에 대한 설명 중에서 놀라고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이 역사가 한번 지나간 후에 발견되는 코르크 마개에 대해서 이것이 고대의 (하지만 지금) 유물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예술품이다. 라고 생각하는 개념에 대해서다. 변하게 되면 정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는 거구나 . 라는 생각을 했다.
29,114쪽 만일 그것이 제도적으로 규정된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 출발한 곳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할 뿐, 경계선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모호한 채로 남겨둔다.
-나의 생각과 가장 맞는 말이다. 이것이 계속 되풀이 되고 명료한 답이 없는 문제로만 해석이 된다. 다른 대안이 필요하거나 아님 단순 예술을 떠나서 더 큰 차원의 철학적인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님 나의 생각을 변호 할 수 있는 더 정확한 근거들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과연 있을까?
30, 120쪽 나는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연찮게 발생한 이 대상에 대해 그것의 식별 불가능한 상대역처럼 우리는 그것이 “ 그 주제에 관한 역사상 가장 심오한 그림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 공허하고 피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던 것이 그런 이유인 것 같다. 심오하다고 생각하지만 공허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입장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을 더 읽어 보고 나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