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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태산(佛台山·710m)은 장성군과 담양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모산(母山)은 인근의 담양 병풍산(屛風山·822.2m)이다.
병풍산에서 서진하는 능선은 한재(대치)에서 잠시 가라앉은 다음 다시 고도를 높여 병장산(685m, 병봉산, 지도에는 병풍산)을 들어올린다.
이 능선은 병장산에서 남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가다가 다시 불태산을 빚은 다음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주시 광산구까지 이어지다가 여맥을 황룡강과
영산강에다 모두 가라앉힌다.
이 지맥을 산꾼들은 병풍지맥이라고 부른다.
병풍지맥은 호남정맥상의 도장봉과 추월산 밀재사이 440봉에서 갈라져서 도마산~용구산~병풍산(826 m.)~불태산~이척산성~판사등산~어등산을 거쳐
영산강과 황룡강의 합수점 까지 이어지는도상거리 약 53.6 km. 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웃한 병풍산은 광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산이지만 불태산은 산 자락에 훈련소가 자리해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여 있어 소외되어 왔다.
그러다가 출입금지 지역이 조금씩 완화되면서 산꾼들이 찾기 시작하고 있다.
산행은 주로 한재(또는 대산농원)에서 시작해 서쪽 병장산을 지나 주능선∼정상∼602.4m봉에 이른 다음, 진원리로 내려오는 종주코스가 많이 이용되고 있다.
대산농원 갈림길의 안부인 잘록이 서동치는 장성 서동마을과 담양 간의 고갯길이다.
고갯길에는 물이 마르지 않는 샘터가 아직 있어 이 고갯길이 장성으로 이어지는 지름길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샘터에서 동쪽으로는 병풍산 만남재(일명 마흔고개)와 일맥상통되고 있다.
불태산 주변에는 송강 정철과 석탄 이기남이 강학했던 정이암터를 비롯한 상청사, 하청사, 인월사 등 80여 개 절터와 유서 깊은 문화유적들이 많다.
또 병장산과 불태산 서쪽 자락이 포근히 감싸는 유탕리 서동은 김해김씨가 500년 전에 형성한 마을로 원래 운동(雲洞)이었으나 서골과 상동으로 분리됐다가
해방 후 서동(西洞)으로 개명됐다.
한국전쟁 때는 70세대가 모두 전소되는 수난을 당했었다.
장성군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에는 병장산은 병봉산, 불태산은 불대산(佛大山)으로 나와 있다.
또 지형도에는 병장산이 병풍산으로 표기돼 있어 일제강점기에 잘못 올려진 듯하다.
불태산은 80여 개 불심이 가득했던 사찰에서 연유한 듯하나, 오늘날 그 많은 사찰의 흔적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오늘 필자는 ‘광산김씨 발상지 평장동(光山金氏 發祥地 平章洞)’을 우선 답사하기로 하였다.
말로만 들어왔던 '평장동 광산김씨 유허지(遺虛址)'는 시조 '신라왕자공 김흥광(金興光)'이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둔세우거(遁世寓居)한 곳.
후손 중에서 평장사(平章事)가 많이 나와 세상 사람들이 '평장동'이라 부르는 곳이다.
참고로 필자는 광산 김씨(光山 金氏)의 39대 후손이다.
지난 날 대산농원에서 진원마을<☞ http://blog.daum.net/bok-hyun/137>로 하산한 바가 있어 이번에는 '광산 김씨 발상지'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산길은 '한재골'에서 불태봉 동릉을 따라 길을 찾기로 하였다.
GPX
9.4km의 거리를 5시간 30분 동안 후미팀을 만나 보조 맞추며 걸었다.
고도표
참고 개념도
병풍지맥
북광주 IC에서 내려 A팀 들머리인 한재로 올라가면서 대아저수지 아래 평장사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에서 내리자 대아제 위로 불태산의 위용이 다가온다.
사진의 날짜와 시간이 에러가 났다. 정확한 기록은 2017. 04.12 11:30으로 사진의 시간에 2시간 10분을 보태면 된다.
안내판을 따라...
대아제를 좌로 에두르며 불태산 자락으로 접근한다.
광산김씨 정유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김흥광은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나,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어 선계는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시대 정황과 헌강왕은 셋째 아들이 없는 것, 다른 기록에서 신무왕의 셋째아들을 김흥광으로 기술한 것을 미루어 따져볼 때,
신무왕의 셋째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왕자로써 고려로 통일의 대세가 기울자 신라의 비운을 알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달리 손자 김길은 고려에 귀의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고려 태조 왕건은 김길의 조부인 김흥광을 광산부원군에 봉하였다.
이후 조부의 작호이자 세거지인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으며, 후손들 중 평장사(정2품)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을
평장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은 지금까지도 남아 평장리로 불리고 있다.
대아제를 우측으로 바라보며 화사한 복사꽃을 카메라에 담는다.
'광산김씨발상지 평장동' 입석 뒤로 '평장사가 보인다.
입석 아래 종훈(宗訓)엔 '숭조돈목(崇祖敦睦), 가전충효(家傳忠孝), 예본덕행(禮本德行)이라 새겨져 있다.
모향비(慕鄕碑) 너머로...
불태산 자락에 아늑하게 평장사가 자리하고 있어...
살짝 당겨 보았다.
예조판서휘승로유허입구비'
홍살문 우측으로...
비석들을 모아 놓았다.
홍전문을 통과한다. 홍전문(紅箭門)은 홍살문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은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정면 입로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으로 두 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죽 박는 것이 특징이다.
2005년 유물전시관과 동시에 세운 건물로 광산김씨 시조공의 신주를 봉안한 신성한 지역임을 의미하는 유교적 시설물이다.
따라서 이곳을 찾은 방문객 모두는 경건한 마음과 정숙한 행동이 현대 문화인의 예절이라 하겠다.
광일문(光一門)은 평장동 취사당 정문이며 평장사 외문이다.
광일문은 솟을 삼문의 형식으로 2개의 계단을 오르면 다듬돌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원주가 놓이게 된다.
이 문은 3문으로 되어 있는데, 취사당으로 들고, 날 때에는 우입좌출 또는 동입서출 즉, 입구에서 볼 때에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하며, 가운데 신문으로 일반인들이 출입하지를 못한다. 평장사 내삼문 출입도 이와 같이 한다.
1985년 당시 도유사 관순의 헌성금에 의하여 건립하였다.
사적비(事跡碑).
홍살문을 지나...
좌로 역사관을 지나지만 바쁜 마음으로 역사관을 들어갈 念을 하지 못한다.
취사당(聚斯堂)은 양육인재를 위한 강학의 도장으로 광산김씨 종중의 종사를 논의하는 화합의 장소이다.
취사(聚斯)라 함은 모든 후손은 이리로 모이라는 뜻이다.
취사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 전 후퇴의 건물로 장대석 기단위에 디딤돌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이익공 형식의 겹처마 건물로써
팔작지붕의 유교 전통 서원 강당 형식의 건물이다.
1984년 도유사 관순, 중수위원장 용순, 집행위원장 희수가 평장동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대우그룹 김우중의 헌성에 의하여 취사당을 옛모습 그대로
이축하여 지금의 수존재로 보존하고 현재의 취사당을 중건하였다.
수존재(修存齋)는 종직자들과 참제자들이 숙박과 식당으로 겸용하는 시설물이다.
수존재는 본래 취사당 건물이었으나, 1984년 현 취사당 중건시 원형대로 이축하여 수존재라 편액하고 순택이 기문을 지었다.
이 수존재는 전면 5칸, 측면 2칸, 전 후퇴로 석축 계단을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가구 형식은 굴도리 형식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다.
'신라왕자 광산김씨 유허비'의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석은 좌대와 비신,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1737년 김진동 등이 주도하여 문중사람들의 참여하여 2년 뒤인 1739년에 세웠다. <지방기념물 제200호>
높이 249cm의 비 전면에는 「신라왕자유허비(新羅王子遺墟碑)」라 하였고, 앞면 오른쪽에 「유허비명(遺墟碑銘)」이란 제하의 119자의 내용이 쓰여 있으며,
왼쪽에 비를 세우는 일에 참여한 4명의 이름과 관직 등 26자가 각인되어 있다.
뒷면에 김진상(金鎭商)이 쓴 「유허비음기」라는 제목하에 180자의 내용과 23자의 세운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후면의 음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주고을 서북 30리에 불대산을 짊어지고 서석산을 마주 보고 이른바 평장동이 있으니 곧 예전의 서일동이요 우리시조 신라왕자 김공의 유허이다.
왕자의 휘는 흥광이니 신라말에 종국이 장차 난리가 있을 중 짐작하고 이곳에 은거하였으니 김씨의 적을 광산으로 함이 이때부터이다.
아들 식으로부터 계속하여 여덟 명의 평장사가 나왔으니 마을 이름을 평장동이라 하였다.
고려를 지나 조선조에 들어와서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이름난 상신과 큰 선비가 계속하여 서로 이으니 이는 진실로 왕자공의 감추어진 빛과 기른 덕이
후손을 덮어 줌이요, 또한 산천의 영수한 정기가 도와줌이다.
아! 애처롭게도 왕자공의 묘소가 없어질까 두려워 종인들과 모의하고 돌을 깎아 기록한다.'
내삼문(內三門)인 모선문(慕先門).
내삼문은 광산김씨 시조 할아버지의 신주를 모신 신전 출입문이다.
26개의 통석계단을 오르면 다듬돌 초석위에 원주가 세워진 솟을 삼문과 3문 형태의 유교 전통 양식으로 2002년 평장사와 함께 지은 건물이다.
<광산김씨의 성을 가진 모든자 할아버지 신전앞에 머리 숙이라, 그리고 감사하라, 성도 이름도, 가지고 있는 모든것 할아버지 음덕에 기인함이다.>
머리숙여 배알한 후...
내삼문에서 아래를 돌아보며 유허비명을 되새겨 본다.
- - -전 략- - -
맑은 향기와 유구한 자취가 보이는 듯 감돌고, 불대산(佛臺山)을 배경으로 서석산(瑞石山) 바라보니 영험(靈驗)한 산 정기(精氣)와 지운(地運)이
응기(應起)하여 보호(保護)한다..
백천만년의 역사속에 길이 전하리라. <1739년 김회풍>
서석산은 광주 무등산을 일컬으니 앞으로는 무등산이요, 뒤로는 불태산이로다.
자세히보면 무등산의 희미한 윤곽이 잡힌다.
평장사에서 내려서면서 역사관 앞 우물을 살핀다.
우물 정(井) 모양의 돌을 얹어 놓은 우물은 오랜 역사를 말함일 것.
경모재에서 '광산 김씨 대종중' 김수남 종무원장님이 일가(一家)임을 확인하고 필자에게 앉을 것을 권유한다.
시간이 급박한 필자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선 채로 하직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홍살문을 나와 평장사 우측으로 돌아가니...
갈림길에 '광산김씨 문정공 5부자 제단' 안내석이 있다.
광산김씨는 크게 5대파(大派)로 나누어지는데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직장공파이다.
'문정공 오부자 제단' 안내판을 따르다 금세 'ㅏ'자갈림길을 만나 우측으로 꺾어 오른다.
이 임도는 산허리를 구비도는 비포장 임도로서 잔디가 깔려 걷기가 아주 좋은 길.
농원 시설물이 나타나...
살펴 보았더니 다육식물을 심어놓은 곳이다.
다육식물원과 갤러리 카페.
우로 한재골 계곡을 끼고 따라 들어가니...
개인사유지임을 알리고...
소유자 허락없이 작물채취를 금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무덤이 있는 곳에서 좌측 산길로 붙기로 하였다.
편백나무가 식재된 산자락엔...
피톤치드가 무성할 것 같아.
이 길은 작은 계곡에 떨어지므로 계곡 직전에서 좌측 편백숲을 따라 지능선으로 치고 오르기로 하였다.
능선은 두루뭉실하여 주의를 기울여 길냄새를 맡아가야만 한다.
묵었지만 제법 반듯한 길을 만나지만 금세 또 사라져 버리는 등로에 아기 진달래.
전망바위를 만나 숨고르며 뒤를 돌아다 보니 산하는 온통 희뿌연 가운데서도 무등산인 듯 도드라진 윤곽도 드러난다.
'광산김씨 유허비'에서도 말한 서석산(무등산)이 맞을진저.
헥헥 숨가쁜 중에서도 우측으로 낯익은 인상착의의 쪼뼛한 봉우리는 지난 병풍산 산행 때에 익히 보았던 삼인봉이 맞을 터.
그리고 필자가 걸어온 능선.
가파른 능선 오름길에서 길은 워낙 묵고 낙엽이 깔려 한 발자국 내딛으면 두 발자국 미끄러지니 체력소모는 배가 된다.
이 콘크리트 말뚝은 뭐꼬? 말뚝이 위에 방향을 이쪽저쪽 살피니 '육'자가 선명히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육군 훈련장의 경계 에리어 표시인가?
길은 묵고 가파르며 험하지만 능선내내 반겨주는 아기 진달래는 크나큰 위안이 된다.
큰 바위를 만나 우로 에두르며...
병풍산(용구산)과 삼인산을 조망한다.
좌측으로 삼인산과 능선 아래론 대아저수지가 보이고, 그 우측에 평장사가 소나무에 가려졌다.
다시금 전망바위를 만나 희끄므레한 무등산을 더듬어 본다.
가파른 능선 위로 불태봉 암봉을 올려다 보니...
직등은 아무래도 용이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집터인지 암자터인지 제법 너른 공터를 만나 밥 보따리를 풀었다. 거기다 모과주 한 잔.
우람한 바위를 정면으로 맞닥뜨렸지만 직등하기로 하였다.
그러고나자 하늘이 뻥 뚫리면서 마른 억세가 하늘거리는 주능에 올라서게 된다.
주능 암봉(722m)에서 돌아본 화살표가 필자가 올라온 길. 마주 보이는 곳에 불태봉이 솟아 있다.
암봉에서 바라본 좌측 삼인산과 필자가 출발한 대아저수지. 그리고 그 우측에 '광산김씨 발상지 평장동'.
병풍산(용구산)을 돌아보니 도로 중간에 한재가 병풍지맥을 잇고 있다.
불태봉에선 정상석 앞이 낭떠러지라 사진촬영을 할 땐 조심을 해야된다.
뒷쪽으로 뾰족한 삼인산.
진행할 주능선을 바라 보지만 길은 낭떠러지로 끊기고, 따라서 좌 또는 우로 우회를 해야만 한다.
종이 방향표식기에는 좌측 암봉 방향은 A코스. 우측으로는 B코스가 깔려 있지만...
두 길은 아래에서 만나게 된다. * 불태봉에서 서동마을 탈출로는 없다.
능선 좌측 아래로는 진원저수지가 보이고...
능선 우측 아래 계곡으로는 서동마을이 잡목사이로 보여 ...
살짝 당겨보니 우리 버스가 보이지만 우측으로 탈출로는 전무하니 어쩔 수 없다.
그 새 광주시가지가 바라 보이는 푸른 창공에 하얀 실 줄.
어릴 적 B-29의 선명한 자태를 떠올린다.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4월 위기설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
북한의 태양절 전후의 심상치 않은 기류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한반도에 이동 배치되고 있다.
헬기장이다. 지난 산행 땐 헬기장에서 진원제로 하산한 바가 있다.
헬기장에서 돌아본 지나온 길과 병풍산.
헬기장의 이정표.
헬기장에서 진원저수지로 내려가는 철계단.
지형도에 불태산(635.9m)이라 명기되었지만 아무런 표식없는 봉우리를 내려와 돌아본다.
그리곤 서동마을 갈림길인 581m봉.
이정표에 약사암 방향을 다른다.
나무에 걸린 581m봉 표지판.
581봉에서 서동마을 가는 길은 고도가 완만한 육산길.
전주 이씨 묘지를 지나고...
(비석.)
다시 통정대부와 숙부인 무덤을 지나면서...
석물들을 살펴본다. 무인석도...
문인석도 모두 칼을 차고 있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조선 후기 통정대부란 벼슬은 매관매직이 아주 심하여 재정이 빈약한 왕실에서 직접 관여했다고도 하던데...
능선에서 약사암 방향 좌측으로 능선을 벗어난다. 능선을 따라가도 유탕사방댐 방향.
산사면을 비스듬히 에돌아...
유탕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벌목이 이루어졌다.
벌목은 다른 수종의 나무를 심기위한 것이었지만 아름드리 소나무까지 눕혀 놓은 건 좀 거시기하다.
벌목지대로 잘린 나무가 엉켜있어 산길을 갈팡질팡 무작정 내려섰으니, 에고~ 뒤로 미끄러져 흙탕 엉덩이는 물론 가랭이가 다 찢어졌다. ㅎㅎ<아주머니의 푸념>
임도인 듯 급 개설된 길에도 막대기를 꽂아 아주 어린 묘목을 심어 놓았다.
나무 막대기는 심을 나무의 간격을 미리 정해 놓은 것.
서동마을에 우리 버스가 보인다.
마을버스 종점이기도 한 주차장에...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고...
'유탕리 마애불'이라는 문화유적지가 안내되어 있으며...
서동마을 이름유래도 적혀있다.
용추와 열녀비도 안내되어 있다.
버스가 대있는 회차지점은 서동마을 종점이기도하여 벤치가 준비돼 있기도 하다.
계속 불편한 '족저근막염'은 '진해 군항제' 행사 관계로 잠시도 쉬지 못하여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다음날 찾아간 병원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와 약을 처방 받았더니 다소 완화되었다.
말로만 듣던 평장동을 찾아 광김(光金)의 후손으로서 시조 할아버지께 배알을 하였으니 올해는 만사형통 좋은 일만 生氣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문중 글귀이지만 되새겨볼 만하여 다시금 되새김하며 올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앞으로 쳐다보면 맨 뒤에 서 있고,
뒤를 돌아다보면 맨 앞에 서 있다.
-광산문화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