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로 성경 필사 중인 서정희씨 벌써 다섯 번째다. 구약 열왕기 상권 20장 7절을 써내려가는 손가락엔 굳은살이 단단히 박였다. 굳은살이 보기 흉하지 않으냐는 말에 서정희(마리나, 80, 청주교구 부강본당) 할머니는 "어차피 쓰다보면 또 박일텐데 뭘 빼냐"고 눙친다.
하루 일고여덟 시간 투자
"왜 쓰시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처음엔 멋모르고 썼는데, 기도를 드리며 말씀을 쓰다보니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됐다"고 필사 소감을 전한다.
40년간 한복과 이불, 수의를 바느질하느라 잔뼈가 굵은 할머니가 성경 필사에 폭 빠지게 된 것은 지난 2000년이다. 손에서 바느질 일을 내려놓은 뒤 우연히 여고 동창이자 친정 고모인 서옥례(아폴리나, 81)씨가 성경을 필사하는 걸 보고 도전을 느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기노트를 사서 이듬해 1월부터 '죽을 둥 살 둥'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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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교구 부강본당 서정희 마리나 할머니가 딸 이현주 요세파씨에게 자신이 필사한 성경쓰기노트를 보여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잠 자는 것 외엔 오롯이 필사만 했다. 하루 일고여덟 시간은 족히 투자했다. 처음엔 깨알 같은 글씨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속도가 나지 않아 속도 많이 상했다. 그렇지만 쓰다보니 점차 가슴이 벅차 올랐다.
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도
그런 기쁨 속에서 딱 일주일 모자라는 10개월이 걸려 공동번역성서 구약 2430쪽 1215장, 신약 505쪽 258장을 모두 썼다.
"침대 위에 상 하나 펴놓고 성경을 올려놓은 뒤 말씀을 한 대목 한 대목씩 새기며 옮길 때가 얼마나 행복한지,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써보시지 않은 분들은 모르실 거예요. 또 하느님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늦게나마 성경을 쓸 수 있게 도전과 용기를 주신 신부님과 수녀님들, 신자분들께도 감사를 드리곤 해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느님 말씀과 함께한 세월이 11년이 다 돼간다. 두 번째 필사는 1년, 세 번째는 3년, 네 번째도 1년이 걸렸다. 그 사이 성경도 공동번역성서에서 새 성경으로 바뀌었다. 한때는 퇴행성관절염으로 수술을 받고 치료하느라 필사가 늦어지기도 했다.
네 번째 필사 뒤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도 필사했다. 필사로 받은 청주교구장과 주임 신부 축복장도 네 개나 되고, 성경(Bible)을 뜻하는 두 영문 알파벳 'BL'이 새겨진 필사기념반지도 받았다.
그렇지만 축복장이나 반지보다 더 기쁜 건 말씀의 단맛을 알게됐다는 것이다. 그 열심에 지난 2007년 선종한 남편 이윤우(요셉)씨도 신약을 1년에 걸쳐 모두 썼다. 신ㆍ구약성경을 필사할 때마다 생기는 필사노트 20권은 자녀들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본당 사제 등에게 선물했다.
할머니의 꿈은 오늘도 성경필사다. "죽을 때까지 남은 여생,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경필사와 봉사만 하며 하느님과 함께하고 하느님과 더 가까이 살겠다"고 다짐하는 서 할머니의 얼굴엔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 같은 기쁨이 가득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