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이다. 여기 쓰인 '멘'은 주로 '데,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의 '에메스')는 '무'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 따라서 본문에 쓰인 '원하는 바', '구하는 바'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는 공적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타낸다.
[롬 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는 (1) 문제의 종결, 종료 혹은 (2) 목적, 의도, 목표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