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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문서와 결재의 수결
▶ 옛 사람들의 문화
1. 찬란한 인쇄문화
직지심경과 팔만대장경이 웅변하듯 우리의 인쇄술은 서양인들조차 탄복한 우수한 문화로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계승되면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특히 조선시대는 문치주의의 기치 아래 경사ㆍ문집ㆍ족보류 등 서책의 출간이 보다 다양화되어 인쇄ㆍ출판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문헌 자료의 특성상 다량의 고문서가 소장된 집에는 그에 상응하는 고서가 소장되어 있기 마련이고, 고판본의 존재 역시도 가문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자료의 수집ㆍ정리에 있어 고문서와 고서를 별개로 여길 수 없고, 연구자의 구미에 맞은 표적조사가 지양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국 문헌 조사는 고문서ㆍ성책본ㆍ고서 분야의 전문가가 공동으로 수행할 때 그 효과가 배가될 수 있고, 무지에 따른 귀중한 문화의 사장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원의 고문서 조사는 전형적인 고문서는 물론 성책본ㆍ고서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고서들도 모두 이렇게 수집ㆍ정리된 자료들이다.
우선『통감속편(通鑑續編)』은 조선초기 인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현재 국보 제283호로 지정되어 있는 귀중본이다. 그리고 만당(晩唐) 시인 26인과 신라 시인 4인의 시 10수씩을 수록하여 간행한『십초시(十抄詩)』역시 조선초기 목판 인쇄술의 우수성을 감상할 수 있는 귀중본이다. 특히 본서에 소개된 본은 현존하는 여러 종의 십초시 중에서도 형태와 내용에 있어 가장 선본으로 꼽히고 있어 고대의 문학과 역사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된다. 『통감속편』과 『십초시』는 15세기 중반 손소ㆍ손중돈을 배출하며 가문의 전성기를 누린 경주손씨 서백당(書百堂) 소장본인데, 위 두 고서 역시 이들 부자에 의해 입수ㆍ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백당에서는 최근 원나라 말기의 법전인『지정조격(至正條格)』이 추가로 발굴되어 인쇄문화 연구의 보고로 인식되고 있다.
진주 단목리 담산종중 소장의『응제시(應製詩)』역시 조선초기 인쇄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이와 동일한 판본이 더러 남아 있고, 그 중에는 보물 1090호로 지정된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응제시는 책장이 결락되거나 보사(補寫)되었고, 또한 책 전반에 걸쳐 부분적으로 마멸 또는 오손되어 정교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임에 반해 담산종중 소장본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낙장과 마손이 없고, 인쇄가 정교하여 책의 품위가 한결 돋보이는 선본이다. 소장처 담산종중은 조선초기 이래로 진주 대곡면 단목리에 세거한 양반가문으로 16세기 중엽부터는 다수의 학자를 배출하며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한 유서 깊은 집안이다. 특히 이 가문은 예로부터 문헌의 보존ㆍ관리가 남달라서 현존하는 문헌만도 응제시를 포함해 고서가 2,000여책, 고문서가 3,000여점에 달한다.
금번에 발굴된 응제시에는 소장자 하택선의 10대조 하응운(1676~1736)의 인장인 <습정재여등인(習靜齋汝登印)>과 증조 하우식(1875~1943)의 인장 <하우식담계(河祐植澹溪印)>이 날인되어 있어 이들 두 사람이 특히 애독했던 수택본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하응운은 재야의 학자로서 문집『습정재집』을 남길 정도로 학식이 깊었고, 또 일가의 문헌 정비에도 열성이 깊어 1700연대 초반경에는 집안에 전해오는 모든 고전적들을 정리하여「장서목록」에 수록해 두었다. 본 응제시에 찍힌 그의 인장은「장서목록」정리시에 날인된 것이다.「장서목록」에 수록된 고서 중에는 응제시 외에도 희귀본들이 많은데, 조선중기의 시인 어득강(魚得江)의 시문집『관포집(灌圃集)』도 그 중 하나이다.
한편 16세기 이후의 조선은 유교문화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종족 의식 또한 보다 강화되면서 족보나 문집의 간행이 활발하게 이루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가 간행된 것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성종 7) 서거정 등이 간행한『안동권씨성화보』이고, 그 다음으로 1565(명종 20)에 간행된『문화유씨족보』와『강릉김씨족보』가 있다. 물론 비록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간행 기록이 전하는 것까지를 포함시킨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아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부 특정 성관에 한해 족보 간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임란 이전에 간행된 족보의 중요한 특징은 내외손에 대한 구분이 없고, 자녀를 출생순에 따라 수록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주자가례에 따른 종법질서가 강조되고, 재산상속에 있어 자녀균분의 관행이 약화되면서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점차 장자나 종손을 중시하는 체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딸이나 사위ㆍ외손의 지위는 약화된 반면 친족 중심의 종족의식은 더욱 강조되면서 족보 간행이 활발해졌던 것이다. 이에 종전까지는 가첩이나 가승을 통해 계보를 기록해 왔던 대부분의 가문에서 체제를 갖춘 족보를 경쟁적으로 간행하게 초간보 간행의 붐(Boom)이 일어나게 되었다. 17세기에 초간보를 간행한 집안은 밀양박씨, 전주이씨, 파평윤씨, 은진송씨, 청주한씨, 광주이씨, 한산이씨, 함양박씨, 의령남씨, 영양남씨, 여산송씨, 진성이씨, 순흥안씨, 경주김씨 등 그 수가 적지 않은데, 이번에 전시한『진양하씨족보』는 1606년 함양ㆍ진주 일대의 하씨들이 중심이 되어 합천의 해인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족보이다.
이 족보는 17세기에 간행된 족보 중에서도 시기적으로 가장 이를 뿐만 아니라 인쇄 상태도 매우 뛰어난 선본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 민간 또는 사찰 출판의 수준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족보의 간행처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장판처로서 고려시대 이래로 승려들을 통해 인쇄 기술이 전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하씨 족보의 간행은 바로 이러한 기술적 집약을 양반ㆍ사족들이 십분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조선시대에 있어 양반 신분을 유지해 나가는 양대 요소는 역시 벼슬과 학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서울ㆍ경기 일원의 양반들이 사환 지향적 속성이 강했다면 3남으로 통칭되는 지방 양반들은 벼슬보다는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었다. 관료에 대한 평가 기준이 공훈이나 청백, 그리고 경세가로서의 면모 등에 있다면 한 개인의 학문적 성취 여부는 문집이나 저술로 얘기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문집은 개인의 학문적 온축은 물론 그 가문의 사회ㆍ학문적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이르면 족보 못지 않게 문집 간행도 활성화 되었다. 그 열기는 현재 전국 각처의 서원이나 재실, 누정, 사찰 등에 보관되어 있는 책판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집의 간행은 워낙 고비용의 문화 사업이라 자손이나 후학의 경제적 준비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당사자의 사후 수백년이 지난 뒤에 간행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일부 문집 중에는 위선 의식이 지나쳐 수준 이하의 간행물도 적지 않지만 조선후기에 들어 문집 간행이 횔성화 되었다는 것은 민간 출판이 그만큼 활발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전시한『관감록(觀感錄)』목판 및 능화판은 임진왜란에서 큰 전공을 세운 박의장(朴毅長)의 실기인『관감록』의 책판과 표지 제작에 쓰인 능화판의 원본이다. 관감록은 속집을 합해 총 180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목판의 양면을 사용함으로써 간행에 소요된 책판은 90재이며, 현재 본원에서 책판의 전량을 위탁 보관 중에 있다. 그리고 책판의 옆면에는 각수의 이름이 새겨진 것도 있어 조선후기 민간출판을 연구하는데 좋은 재료가 될 것로 생각된다.
여기서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책판의 보관과 보존 문제이다. 현재 전국 각처에는 매우 귀중한 책판들이 방치되어 훼손ㆍ마멸되고 있으며, 심지어 도난의 표적이 되어 상품으로 유통되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세계 일류의 인쇄출판문화를 이끌었던 선조의 유산이 온존하게 계승되지 못하고 훼손과 도난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아닐 수 없다. 일부 뜻있는 국학기관에서 이를 수집ㆍ보존하는데 노력을 다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지만 범국가적인 대책이 하루 빨리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 학문과 예술
1) 왕들의 글씨
조선은 왕의 절대권력을 인정하는 왕조국가였다. 따라서 왕은 만기(萬機)를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였고, 국가의 모든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왔다. 동시에 왕은 도적적으로 수양이 되고, 수준 높은 교양과 학식을 지닌 인격자라야 했다. 이것이 조선 사회가 추구했던 바람직한 왕의 모습이었다. 이런 권위와 위상에 걸맞게 왕은 당대 최고의 유수한 사대부 가문과 혈통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온갖 특전을 누리며 생활하였다. 우선 단계별로 설정된 교육과정을 통해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군왕이 지녀야 할 학문과 덕목을 충분히 교육받을 수 있었다. 나아가 궁중에 비치된 각종 희귀한 서적은 물론 글씨ㆍ그림 등의 뛰어난 예술작품을 열람ㆍ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왕과 왕실의 인사들 중에는 서화에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세조ㆍ안평대군ㆍ문종ㆍ성종, 중기에는 선조, 후기에는 숙종ㆍ영조ㆍ정조가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은 송설체의 대가로서 당시의 예단(藝壇)을 주도한 인물이었고,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에 이미 활자의 저본 글씨를 쓰는 등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한호의 석봉체(石峯體)를 익힌 선조는 작품활동이 매우 왕성하여 무수한 작품을 남겼고, 이 글씨들은 후일 아들 의창군(義昌君)과 손자 낭선군(朗善君)에 의해「선조어필」,「열성어필」등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숙종은 조부 효종의 영향을 받아 송설체의 명서가로 이름이 높았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해주오씨 추탄종택(秋灘宗宅)에 숙종어필이 전하고 있다. 어필의 대외 반출을 철저히 제한했던 당시의 관행을 고려할 때 이것은 숙종어필 중 진적ㆍ묵적 형태로 사대부 집안에 전하는 몇 안되는 작품의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한편 영조ㆍ정조는 학문과 예술세계에 있어 군왕의 권위를 크게 격상시킨 왕이었다. 영조는 경연에서 신하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정도로 학문적 자부심이 컸고, 글씨 역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정조는 역대 어떤 군왕보다 호학의 군주로서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天明月主人翁)으로 표현하는 등 정치ㆍ학술ㆍ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신료들을 압도했던 명군이었다. 특히 정조는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현존하는 파초도는 정조의 그림 솜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품이다.
이러한 왕들의 글씨는 왕실의 권위와 우수성을 드러내고, 후왕들을 위한 교본용으로 쓰기 위해 여러 명칭의 어필첩으로 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낭선군이 역대 왕들의 글씨를 모아 간행된『열성어필』이고, 각 왕별 단독 어필첩으로『태조대왕어필』,『선조어필』,『영조어필』,『정조어필』,『헌종어필』등이 있고, 중종연간 신공제가 간행한『해동명적』에도 문종ㆍ성종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 낱장 또는 첩책 형태로 전하는 어필도 적지 않고, 대비ㆍ공주ㆍ왕자 등 왕실 인사의 글씨들도 상당수 남아 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선조어필』,『해동명적』,『열성어필』,「대로사비(大老祠碑)」는 그 중의 일부로서 부족하나마 역대 왕들의 글씨를 감상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중 송시열의 사당인 여주 대로사의 내력을 적은「대로사비」는 용인에 소재한 채제공의 뇌문비(誄文碑)와 더불어 정조의 대표적인 어제ㆍ어필비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사대부가에서 어필첩을 소장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전시된 어필들의 소장처는 우복종택, 서백당, 수당고택, 운문종택 등 영남ㆍ호서의 고가들이다. 우복종택 소장의『선조어필』과『열성어필』은 17세기 초반 영남학파의 대표적 학자이며 인조조에 이조판서를 지낸 정경세 때 입수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서백당 소장의『해동명적』은 중종조에 우참찬을 지낸 손중돈이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운문종택 소장의「대로사비」는 영남내 노론의 명가였던 하씨 가문에서 노론 기호학파의 종사 송시열에 대한 존모심에서 이를 탁본하여 첩으로 꾸민 것으로 생각된다.
2) 학문의 자취와 자경(自警)
조선시대의 선비ㆍ학자들은 지행합일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선현들로부터 본받을 점이 있으면 이를 수용하거나 답습하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관리에 충실하여 일상에서의 말과 행동의 조절을 통해 인격의 완성을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학문활동에 참고가 되는 훌륭한 저술이 있으면 이를 필사하여 애독하였고, 자신의 정신세계나 취향에 부합되는 자료가 있으면 이를 임모해 둠으로써 학문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식산종택 소장의「도서첩(圖書帖)」과「무이도첩(武夷圖帖)」에는 이만부의 학문적 관심과 영역, 그리고 주자학이라는 자신의 학문 원류에 대한 경모와 열정이 느껴지고 있다.
지식의 축적 자체가 학문의 궁극적 목표일 수 없었던 조선시대의 학인들에 있어 학문과 덕성을 겸비는 지난하지만 힘써 추구해야할 과제였다. 수신을 통한 인격과 덕성의 완성을 위해서는 극기가 필요했는데, 극기에 있어 빼놓을 수 어없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이었다. 자신의 언행 및 내면의 경계를 위해 당시 사람들은 장재의 동명(東銘)과 서명(西銘), 정자의 사물잠[시잠(視箴)ㆍ청잠(聽箴)ㆍ언잠(言箴)ㆍ동잠(動箴)],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을 널리 애송하였는데, 이 잠명은 서예 작품의 주된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학인들 중에는 자경을 위해 직접 잠과 명을 짓는 경우도 매우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언적의 원조오잠(元朝五箴)과 안정복의 순암명(順菴銘)을 들 수 있겠다.
한편 자경을 위한 당시인들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풍류 문인들이 거문고에 금명을 새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남명학파의 종사 조식이 패도에 명을 새긴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안동 순흥안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수오재경침(守吾齋警枕)은 천연목으로 이루어진 목침에 명을 새겨 자경의 의지를 다졌는데, 여기서 우리는 선인들이 자기 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 문인들의 아회(雅會)와 전별(餞別)
옛 사람들, 특히 조선의 문인들은 삶의 격조와 운치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격조와 운치는 학문 연찬의 역경과 환로의 다단함으로터 과감히 탈피할 수 있었던 여유의 산물이었고, 동시에 그것은 일상에서의 활력소를 재충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이란『논어』의 한 구절은 당시 사람들이 벗을 사귀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여기에 취향이 같고 의기마저 상통한다면 더없이 좋은 없는 아회의 대상이 되었다. 문인 아회의 기원은 역시 중국이었다. 동진 시대의 명필 왕희지의 그 유명한 난정수회(蘭亭修會)는 그 격조와 풍취가 극진하여 아회의 전범처럼 여겨져 왔고, 사마광의 진솔회(眞率會), 백낙천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 역시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 포석정이 말해주듯 유상곡수로 표현되는 난정수회류의 놀이와 모임은 이미 통일신라 시대에 그 흔적이 보이고 있고, 이런 경향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노인회 또는 기영회의 성격을 지녔던 진솔회ㆍ구로회는 조선시대 기로회의 유행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문인들의 아회가 그림이나 계회도첩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말~조선초기이다. 1476년 이증 등의 우향계(友鄕稧), 중종연간 이굉의 진솔회(眞率會), 낙사회(洛社會)를 비롯한 수많은 아회가 문인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동향간, 친구간, 동갑간, 친족간, 동방간에 정담을 나누고, 시주로써 아취를 즐기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본서에 수록한「난정수회첩」은 비록 중국 문헌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문인들의 아회ㆍ계회의 연원으로 언급되는 난정고사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담겨져 있어 옛 사람들의 놀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한결 효과적이다. 그리고 「섬사편」은 1754~1755년 여주이씨 성호(星湖) 일문의 인사들이 덕산현(지금의 예산) 탁천장(濯泉莊)에서 개최한 시회첩인데, 이 작품은 조선후기 선비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아회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명품이다. 특히 유려한 시문과 글씨, 아회의 장면을 묘사한 정감어린 삽도, 고졸함이 느껴지는인장 등에서 친족간의 정의를 다지고 시주로써 회포를 풀고자 했던 모임의 취지가 짙게 묻어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문인들에는 송별 또는 전별로 불리는 문화가 있었다. 전별은 주로 친구 또는 동료의 외직 부임시, 죄를 입어 유배를 떠날 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나 사명을 받아 중국으로 떠날 때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다.
전별시에는 잔치를 열어 창수화답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선정이나 임무의 완수를 당부하고 격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림을 그려 행사를 기념하기도 했는데, 1508년 이현보(李賢輔)의 전별연을 그린「한강점음도(漢江飮餞圖)」가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그리고 이 때 지으진 시문은 이날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첩이나 축으로 꾸며져 보장(寶藏)되곤 했는데, 현재 유수한 가문에 소장된 별장첩(別章帖), 송별시축(送別詩軸), 연행증언첩(燕行贈言帖)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문인ㆍ관료들의 전별이란 것이 어찌보면 매우 호사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관행으로 볼때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또 시로써 정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지식인들의 아취가 느껴지는 고급 문화라 할 수 있었다.
본서에 수록된「연행증언(燕行贈言)」은 1609년 봄 정경세(1563-1633)가 동지사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떠날 때 지구ㆍ문인들의 송별시를 수록한 시첩이다. 여기에는 이호민(李好閔)ㆍ 심희수(沈喜壽)ㆍ이정구(李廷龜)ㆍ이정겸(李廷馦) 등 당대 일류 문인들의 격조 높은 시가 친필로 씌여져 있고, 사용된 종이 역시 색감이 다채롭고, 다양한 종류의 인장까지도 날인되어 있어 첩의 품위가 한결 돋보이는 명품이다. 이 시첩을 통해 선인들의 전별 문화를 마음껏 느껴보기 바란다. 참고로 1614년 김중청(金仲淸)이 천추사(千秋使) 겸사은사(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로 사행할 때 작성된 송별시첩인「조천별장(朝天別章)」역시도 수록된 인사들의 사회적 지위나 시문의 격조, 장첩의 솜씨 등을 고려할 때 현존하는 여러 연행송별첩 중 단연 주목되는 선본이 아닐까 싶다.
4) 명현들의 글씨
현존하는 고문서, 특히 성책고문서류 중에서 보관ㆍ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하고, 소장자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자료는 역시 서첩ㆍ필첩류일 것이다. 서첩류는 크게 우리나라 명필의 글씨를 모은 것과 비록 명필은 아니지만 학문ㆍ사회적 비중이 높은 인사들의 필적을 모은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작품성에 주안점이 있고, 후자는 이른바 명현에 대한 경모심이 글씨의 수장과 작첩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두가지 요소를 다 갖춘 것은 더욱 애장 가치가 높아져 일가의 진장 문헌으로 세전되면서 전란이나 산업화의 와중에서도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중에는 명필도, 명현도 아니지만 추원의 뜻에서 선대의 유묵ㆍ서간을 모은 이른바 선적류의 서첩은 웬만한 가문이면 하나씩은 지니고 있다.
특히 명필의 글씨 중에는 진적여부가 확실치 않은 작품이 적지 않아 보다 철저한 검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이다. 진적여부를 판명하기 어려운 주된 이유는 모본의 유행에서 기인한다. 옛 사람들은 명필ㆍ명현의 글씨에 대한 소장 욕구는 더없이 높았으나 현실적으로 이를 소장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여건에서 요즈음과 같이 복사ㆍ복제장비가 없었던 당시인들에게 있어 특정인의 글씨를 가질 수 있는 가장 부차적인 방법은 진적을 임모하는 것이었다. 이는 글씨에 대한 애착과 존경심에서 바탕하는 것으로 고의적인 위조와는 근본적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임모 능력이 워낙 뛰어난 나머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진적과 임모본을 명확하게 가릴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필ㆍ명현의 글씨는 예로부터 가치롭게 여겨져 왔고, 그러한 가치 때문에 요사이는 도난ㆍ매매의 표적이 되어 시중의 고서거리에서 상품적으로 유통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본원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수집ㆍ정리한 서첩류는 약 1,000점에 이르고 있으며, 그 중에는 서예사 및 문화사적인 가치가 높은 유일본ㆍ희귀본이 적지 않았다. 본 도록에는 그 중 일부를 선별하여 수록한 것인데, 여기에 포함된 작품들 역시 자료적 가치거 높은 귀중본들이다.
먼저 1525년에 간행된「선우추ㆍ김생법첩」은 중국의 명필로 초서의 대가였던 선우추와 우리나라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합본한 것으로 현존하는 양인의 서첩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 서첩은 중종이 손중돈에게 내린 내사본이라는 점에서 출처도 분명하여 서지학적으로도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흔히「소릉간첩(少陵柬帖)」으로 불리고 있는 이상의(李尙毅)의 간찰첩은 표제와는 달리 서첩의 모두에 축소 모사한 초상화까지 수록되어 있어 서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서첩의 주인공 이상의는 선조~광해군조의 명신으로 시문에 능했고,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여기에 수록된 글씨는 비록 간찰이기는 하지만 이상의의 서예 세계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모두에 수록된 초상화는 아버지 윤두서(尹斗緖)를 이어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던 윤덕희(尹德熙)의 작품이란 점에서 매우 주목되고 있다.
「천금물전(千金勿傳)」은 숙종조의 문신 이하진(李夏鎭)의 서첩으로 10첩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하진은 이상의의 손자로 글씨로 이름이 높았고, 아들 이서(李漵)는 소위 동국진체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는 명필이다. 종전까지 이하진은 명필로만 알려져 있었을 뿐 그의 서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는데, 이번 전시를 계기로 연구가 활성화 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편 진양하씨 담산종중 소장의「남명비첩(南冥碑帖)」은 글씨 자체보다는 역사성이 깊은 작품이다. 이 글씨는 송시열이 찬한 조식의 신도비명을 후학인 전우가 쓴 것을 1920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묵적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남명의 신도비는 정치적 파란에 따라 여러차례 개수(改竪)되는 곡절을 겪다가 최종적으로 송시열이 찬한 비문을 새긴 것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비문을 전우가 친히 서사했고, 전우의 후학들이 이를 다시 간행한 사실에서 당시 남명학파권에서 차지하는 노론 기호학파의 학문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전우는 당시 노론 학계를 대표하던 학자로 필치가 독특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 글씨는 장중함이 엿보이는 그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명현의 글씨와 관련하여 주목할 인물은 이만부(李萬敷)이다. 그는 남인의 명가 연안이씨 출신으로 원래 서울 태생이었으나 17세기 후반 상주로 낙남하여 일생 학문에 전념한 학자였다. 특히 그는 남인의 학문ㆍ정신적 구심점이었던 허목(許穆)의 문인으로 글씨에 있어서도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전서는 상호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만부는 글씨는 물론「누항도(陋巷圖)」를 그릴 정도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는 여러 서체에 두루 능했는데, 전서에 특장이 있었다. 본서에 수록된「식산당전법(息山堂篆法)」과 「고문(古文)」은 그의 대표작으로 조선후기 서예사 연구의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외「창계수묵(滄溪手墨)」,「선적(先蹟)」등 창계가문 소장의 서첩 역시도 서예사적 가치가 돋보이는 명품들로서 관련 연구자의 충실한 검토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3. 선비의 유향 -동춘당 명품특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교적 이념과 가치에 충실하고, 예의염치를 지키며 지행합일을 추구했던 학인이 적지 않았겠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역시 한시대의 귀감이요 본보기가 되는 진정한 선비의 한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런 조심스런 평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았고, 학문은 깊되 출세와 영화를 탐하지 않았던 자족과 겸양, 치우침 없이 인협(寅協)할 수 있었던 온유함과 포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본원에서는 2003년 2월 대전 은진송씨 선비박물관 소장의 고문서를 조사ㆍ정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동춘필적을 접하고 분량의 방대함과 장첩의 섬세함에 있어 일견 일가의 진장문헌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동춘당의 서예에 대해서는 일부 연구가 되기는 했지만 이 많은 자료를 두루 섭렵한 종합적인 연구는 없었고, 일반일들 역시 동춘당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에 본원에서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학술적 고찰을 진전시키고, 일반의 문화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동춘당의 글씨 13점을 엄선하여 선비의 유향이란 기획 코너를 설정한 것이다. 수록된 13점의 글씨 중 우곡잡영(愚谷雜詠) 등 동춘당의 행서ㆍ초서가 수록된「동춘필적」하나만 진주정씨 우복종택 소장본이다. 이 글씨가 우복종택에 소장된 것은 동춘당이 정경세의 사위라는 혼인관계에 따른 것으로 서첩의 주된 내용인 우곡장영 역시도 정경세(鄭經世)의 글이다.
본서에 수록한 13점의 글씨는 서체에 있어서는 해서ㆍ행서ㆍ초서, 내용에 있어서는 간찰ㆍ시고, 자대에 있어서는 대자ㆍ소자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맨 마지막에 수록한 한글서간에서는 한문과는 다른 색다른 감동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 비갈 등 금석문 글씨를 수록하지 못한 것이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수결(手決)
▶ 관직에 있는 신분계층에서만이 쓰는 부호.
‘一心’ 두 글자를 뜻하도록 고안하고 있다. 즉, 수결의 특징은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의 기호를 더하여 자신의 수결로 정하는 것으로, ‘일심’ 2자(字)를 내포한다.
따라서 수결은 곧 사안(事案) 결재에 있어서 오직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아니하는 공심(公心)에 있을 뿐이라는 표현으로 써 왔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일심결(一心決)의 수결제도는 없고 서압만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결은 조선시대에 한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수결의 형태는 ‘일심’을 뜻하고 언뜻 보아도 ‘일심’으로 보게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수결은 직함 밑에 일심결을 사람마다 다르게 두고 있었으며, 후세에 일견하여 그 수결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사서(史書)를 뒤져 그 당시 누가 그 직(職)에 있었는가를 알아보지 않고서는 그 수결의 본인을 알 수 없다.
1759년(영조 35) 한성부(漢城府)의 호적(戶籍)은 모두 직함 밑에 성자(姓字)도 없이 수결을 두고 있다 또 한성부 호적 1789년(정조 13) 분을 보면 당상(堂上)의 수결은 직접 붓으로 두지 아니하고 나무도장으로 수결을 새겨 찍은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전(口傳)되는 수결의 이야기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산적한 시무(時務)를 처리함에 있어 일일이 수결을 두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안한 그의 수결은 다만 ‘一’자로 그 상하에 아무런 가점(加點)이 없었다.
어느 사안의 결재가 논의되었을 때 자신의 수결을 둔 기억이 없어 결재한 바 없다 하였으나 담당관은 오성의 수결이 있는 문건(文件)을 제시하여 이것은 분명 대감의 수결임에 틀림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一’자 수결이 틀림없으나 그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자신이 손수 둔 수결과 대조하라고 하였다.
이들을 비교한 결과 진짜 수결에는 ‘一’자 좌우 양단에 바늘구멍이 뚫려 있었고, 가짜 수결에는 좌우에 구멍이 없어 진가(眞假)가 판명되었다. 산적된 시무의 처결(處決)에 가장 간단한 수결로서는 ‘一’자수결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이항복도 이 사건 이후로는 다른 수결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군왕의 수결로는 고종의 어압(御押 :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이 마패 등에 주조되거나 조칙(詔勅)이나 조약문서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종은 임자년 7월 25일에 탄생하였다. 그리하여 어압(御押 :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은 수결과 함을 겸하였으되 그 탄생 연·월·일이 모두 포함되게 고안하였으니, 곧 여기에는 ‘壬子’·‘七‘·‘卄五’가 다 존재하고 있다.